분류 전체보기 485

『사조영웅전』 꼼꼼하게 읽기

첫째, ‘역사의 허구화’와 ‘허구의 역사화’. 대부분 구체적인 역사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진융 무협소설의 커다란 특징이고, 왕조 교체기라는 과도기를 선택한 것은 작가의 탁월한 식견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조영웅전』을 통해 송과 금의 남북 대치, 사막에서 성장해가는 몽골 부족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융은 역사를 형해화한 모습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와 결합해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몽골 사막의 역사 영웅 칭기즈 칸의 인간적인 삶의 면모에 대한 묘사가 그것이다. 역사를 허구(fiction)와 결합한 것이다. 그에 그치지 않고 ‘화산논검 등의 허구적 이야기는 소설 전체를 규정하는 배경이 됨으로써 독자들이 ‘사실’로 느끼게 만들고 있다. 둘째, ‘화산..

‘20세기 중국문학’의 ‘조용한 혁명’과 홍콩문학

우리가 ‘중국 근현대문학’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1950년대 중엽, 그리고 대륙에서는 사회주의 개조 및 건설의 메아리가 ‘반우파(反右派) 투쟁’으로 변질하고 있을 무렵, 홍콩에서는 ‘20세기 중국문학’의 ‘조용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중국의 연구자들조차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독자를 확보한 이 문학혁명은 통속문학에 대해 편견이 있던 학자와 교수들을 강박(强迫)하여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진융의 무협소설이었다. 식민지 홍콩에서 싹을 틔워 분단의 땅 타이완을 휩쓴 진융의 무협소설은 1980년대에는 역으로 대륙에 상륙했다. 중국 대륙에 불어 닥친 ‘진융 열풍’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중국인이 거의 없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이제 진융의 무협..

두터운 문화 텍스트를 읽는 즐거움과 쓰는 괴로움

진융(金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진융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다. 고통의 첫 번째 이유는 강호에 와호장룡(臥虎藏龍)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만난 대부분의 중국인 가운데 진융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나아가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진융을 화제에 올리면 최소한 한두 시간은 열띤 대화를 하기 마련이었다. 한국의 대표적 진융 사이트인 을 보면 그와 유사한 느낌이 든다. 그곳을 서핑하다 보면 상당한 공력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처럼 수많은 고수가 운집해있는 강호에 뭔가 새로운 것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진융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저 내가 여러 차례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과 틈틈이 떠올랐던 생각을 밝히..

[정글만리]의 중국 인식과 문제점

1) ?정글만리?라는 화두 대량의 중국 소설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작가 가오싱젠(高行建)과 모옌(莫言)의 작품을 비롯해 한국 독자에게 가장 환영받는다는 ?허삼관/쉬싼관 매혈기?의 위화(余華), 그리고 영화 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쑤퉁(蘇童), 베이징의 왕숴(王朔)와 톄닝(鐵凝) 그리고 류전윈(劉震雲)과 옌롄커(閻連科) 등의 대표작들이 출간되었고, 상하이의 왕안이(王安憶)와 쑨간루(孫甘露), 산둥(山東)의 장웨이(張煒) 등도 소개되고 있는 중이다. 그 가운데 후난(湖南) 출신 작가 한사오궁(韓少功)의 ‘심근(尋根) 선언’(1984)에서 비롯된 ‘심근문학’도 주목을 요한다. 이들은 개혁개방시기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전통으로부터 정체성과 뿌리 찾기를 시도했는데, ?폐도?의 자핑와(賈平凹), ?백..

보여짐(to-be-looked-at-ness)과 바라봄의 정치학

레이 초우는 불균형하고 불평등한 포스트식민 상황에 개입하는 첫걸음을 ‘보여짐의 중요성(the primacy of to-be-looked-at-ness)’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그녀는 전통적으로 민족지가 객관성을 표방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주관적 기원을 가진 일종의 표상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동안 민족지의 관찰 대상이었던 사람들이 포스트식민 시대에 자신의 문화를 민족지적으로 기술하는 과업을 적극적으로 떠맡을 때 ‘민족지의 주관적 기원’은 새로운 민족지로 나아가는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민족지의 주관적 기원’에 관한 초우의 논의는, 인류학/민족지학이 문학이라는 아비와 사회과학이라는 어미 사이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아비의 혈통은 부인하고 어미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고백하며 ‘민족지의 문학적 ..

루쉰의 환등기 사건: 문학 글쓰기와 시각성

레이 초우는 『원시적 열정』 1부 서두에서 한 남성 작가의 시각적 조우라는 개인 경험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독해하면서 제3세계 중국에서 새로운 문학 담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검토한다. 그녀는 먼저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기원」과 베냐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등의 논의를 통해, 새롭게 출현한 서유럽의 모더니티가 시각성(visuality)에 기초하고 있고 영화 예술의 효과를 ‘주먹질’, ‘충격’이라고 묘사했음을 떠올린다. 잔니 바티모(Vattimo, Gianni)는 이를 ‘방향감 상실(disorientation)’이라 분석했다. ‘방향감 상실’과 관련된 바티모의 진단은 심층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초우는 제3세계 지식인 루쉰의 경우가 그들과 달랐음에 주목한다. 물론 ‘압도적 전달력’으로 관객을 무..

새로운 인류학과 문화 간 번역

에스니시티(ethnicity) 문제를 재조정했다(restructure)라는 평가(Jameson, Fredric)를 받는 레이 초우(Chow, Rey. 周蕾)는 그동안 인류학 등의 학문 분야에서 횡행했던 불평등과 불균형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로 『원시적 열정』의 제3부를 시작한다. 그녀는 인류학적 파악 없이는 비서양을 쓰고/생각하고/말할 수 없는 상황(Chakrabarty, Dipesh), 인류학은 모던 서양의 ‘타자의 문화’에 대한 독백(McGrans, Bernard), 일방통행하는 민족지(Clifford, James) 등의 비판을 인용한 후, ‘새로운 인류학’은 서양의 타자의 눈에 비친, 서양의 타자의 수공품에 반영된 서양 그 자체에 관한 인류학이라는 타우시그(Taussig, Michel)의 말로..

상하이의 문화연구--6권의 책

나는 지금까지 상하이 연구와 관련된 책 여섯 권의 출간에 관여했다. 상하이대학 당대중국문화연구센터(이하 센터)의 왕샤오밍과 공동으로 편집한 『21세기 중국의 문화지도―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문화연구』(2009)를 필두로, 『상하이영화와 상하이인의 정체성』(2010)과 『20세기 상하이영화: 역사와 해제』(2010), 『상하이학파 문화연구: 비판과 개입』(2014)과 『가까이 살피고 멀리 바라보기: 왕샤오밍 문화연구』(2014), 그리고 『韓國漢學中的上海文學硏究』(2021)가 그 목록이다. 첫 번째 책은 ‘문화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2000년부터 진융의 무협 소설, 홍콩인의 정체성 등의 연구를 진행하던 상황에서 비슷한 경로를 통해 ‘문화연구로 전환’한 왕샤오밍을 만나 가는 과정에서, 2005년 여름 중국..

‘오리엔탈리즘 우울증’과 ‘제3세계주의적 환상’

홍콩 출신의 미국인을 자처하는 레이 초우(Chow, Rey. 周蕾)는 ‘현대(contemporary) 문화연구에서 개입의 전술’을 다룬 자신의 책(Chow, 1993; 초우, 2005)을, 하버드대학이라는 상징자본을 등에 업은 미국인 중국학자(American sinologist)가 제3세계에 속하는 중국 출신 시인의 시집을 혹평한 것을 문제 삼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버드대학 교수 스티븐 오언(Owen, Stephen)은 베이다오(北島)의 시가 ‘안락한 에스니시티’(cozy ethnicity)를 추구하여 서양 독자의 입맛에 영합하는 ‘제3세계’ 시인의 작품이라고 공격하면서, 비서양 시인이 쓴 시 가운데 다수는 더는 진정한 내셔널 정체성을 갖지 못할뿐더러 “너무 쉽게 번역될 수 있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