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초우는 불균형하고 불평등한 포스트식민 상황에 개입하는 첫걸음을 ‘보여짐의 중요성(the primacy of to-be-looked-at-ness)’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그녀는 전통적으로 민족지가 객관성을 표방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주관적 기원을 가진 일종의 표상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동안 민족지의 관찰 대상이었던 사람들이 포스트식민 시대에 자신의 문화를 민족지적으로 기술하는 과업을 적극적으로 떠맡을 때 ‘민족지의 주관적 기원’은 새로운 민족지로 나아가는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민족지의 주관적 기원’에 관한 초우의 논의는, 인류학/민족지학이 문학이라는 아비와 사회과학이라는 어미 사이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아비의 혈통은 부인하고 어미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고백하며 ‘민족지의 문학적 성격’을 강조하는 클리퍼드 기어츠(Geertz, Clifford)의 논의(기어츠, 2014)와 닮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초우는 ‘민족지의 주관적 기원’을 또 하나의 핵심어인 ‘시각성(visuality)’과 연계시켜 다음과 같이 논술한다.
예전에 민족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의 ‘주관적 기원’은 시각적으로 어떻게 전달되는가? 민족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의 ‘주관적 기원’은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서라기보다는 ‘보여지는 것’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은 아닐까? ‘보여지는 것’은, 예전에는 민족지의 대상이 되었던 문화의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정의하는 시각성(visuality), 지금은 민족지의 대상이 되었던 문화가 자기를 표상하는 경우의 주요한 측면이 되는 시각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은 아닐까?(초우, 2004: 269~70)
여기에서 초우는 관점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서유럽 관찰자의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제3세계 관찰 대상인 ‘보여지는(to-be-looked-at)’ 대상이 스스로 표상하는 시각성을 가지라고 요구하고 있다. 초우는 프레드릭 제임슨(Jameson, Fredric)의 시각이미지와 로라 멀비(Mulvey, Laura)의 ‘시각적 즐거움(visual pleasure)’에 기대어 자신의 시각성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한때 ‘내셔널 우언(national allegory)’론으로 제3세계문학을 보는 새로운 시각으로 주목받았지만, ‘제3세계의 보편성이라는 숲을 보되 각 지역의 특수성이라는 나무를 보지 않으려 한다’라는 비판에 부딪히기도 했던 프레드릭 제임슨은 ‘시각이미지가 적나라하고 포르노그래피적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시각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포르노그래피의 성질을 지닌다. 시각적인 것은 결국 넋을 잃고 정신없이 매료되게 만든다. … 포르노 영화는 이렇게 영화 일반에 잠재되어 있는데, 마치 알몸을 보듯이 세계를 응시하라고 요구한다”(제임슨, 2003: 13). 제임슨은 이상의 명제에 기초해 “시선의 지배와 시각적 대상의 풍부함 사이에서 권력과 욕망에 대한 모든 싸움이 일어나게 마련”(제임슨, 14)이라고 하면서 시각의 폭력성과 권력을 간취(看取)해냈다. 레이 초우 또한 ‘시각의 폭력성’과 ‘시각적 권력’을 담론한다. “본다고 하는 행위는 벌거벗은 육체에 대한 투사(projection)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본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말해서 폭력의 일차적 동인(agency)이다. 그것은 수동적 희생자의 위치에 놓인 타자를 시각적으로 관통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스스로를 타자 속에다 드러내는 공격적인 광경이다. 그것은 공격당한 자의 장소이다. 더욱이 이미지는 공격에 의해 파괴되고 노출된 뒤에 남겨진 것이다”(초우, 2005: 52). 우리가 무심결에 지나친 수많은 보고 보여지는 행위 가운데에는 이처럼 적나라하고 포르노그래피적인 투사, 그리고 폭력과 권력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을 의식하고는 “뭘 봐?”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보는 사람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시각적 폭력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정당한 반응은 자칫 시비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초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각적 이미지가 “암묵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저항전략들이 협상되는 장소”(초우, 2005: 53)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미지가 저항전략들이 협상되는 장소’라는 말은, 대중문화가 지배문화와 저항문화가 투쟁하는 장소라는 안토니오 그람시(Gramsci, Antonio)의 성찰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초우는 지배문화에 의해 오염되고 왜곡된 이미지에 대항해 비판적 담론이 제시하는 대안적인 풍경 가운데 하나가 억압된 희생자로서의 타자의 ‘주체성’을 탐구하는 것이라 분석한다. 하지만 지배문화의 오염된 이미지에 억압된 타자의 주체성을 탐구하는 것은 “심층과 감춰진 진실과 내면적 목소리를 중시하는 정치로써 이미지의 권력관계, 즉 표층에서 행해지는 정치적 행위에 대항”(초우, 2005: 53)하려는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효과’가 이미지를 통해서 발휘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비판적 담론은 ‘이미지의 힘’을 간과하고 방치함으로써 지배문화에 그것을 넘기고 말았다. 그러므로 초우는 지배문화가 장악하고 있는 시각 권력과 이미지의 힘을 활용할 수 있는 전술 창안에 몰두한다. 앞당겨 말하면 초우가 창안한 전술은 ‘자기 민족지(auto-ethnography)’이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 살펴보자.
초우는 ‘시각적 즐거움’의 젠더 불평등에 대한 로라 멀비의 논의를 인류학적 상황에서 보충해 ‘시각은 민족지적 불평등의 기원도 잉태하고 있다’라는 성찰을 추가함으로써, 보여지고 있다는 상태는 비서양문화가 서양문화에 보여지는 방식에 편입되는 것만이 아니라, 보여지고 있다는 상태가 비서양문화 스스로 자기를 표상하고 민족지화하는 적극적인 방식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보여지는 객체’는 이제 바라보고 있는 ‘보는 주체’를 쳐다보고 있다”(초우, 2004: 271). 호미 바바의 용어로 바꾸면 ‘응시(gaze)’다.
초우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원시적 열정』에서 ‘중국영화’를 ‘민족지’(ethnography)이자 여러 미디어 사이의, 문화 사이의, 그리고 여러 학문 영역 사이의 ‘전사(轉寫. transcription)’로서 이론화하고 있는 만큼, 그녀는 ‘지적인 학문 영역’의 산물인 민족지의 탈(脫)전문화를 주창하고, 그에 따라 방대한 문화적 정보를 대중적으로 번역할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여기에서 ‘전사’는 1970년대 ‘뉴 저먼 시네마’ 연구에서 토마스 엘제서(Elsaesser, Thomas)가 독일영화를 ‘방대한 전사과정’의 결과물로 결론지은 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초우는 중국영화도 ‘거대한 전사과정’이라고 응용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초우는 중국의 근현대가 영화에 의해서 전사되는 콘텐츠를 문화번역으로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민족지는 불평등한 ‘문화번역’이었다. 서유럽 관찰자가 비서유럽 관찰대상을 주관적으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보는 것은 권력의 한 형식이며 보여지는 것은 권력 없음의 한 형식이라고 하는 그런 시각성에 관한 사고방식은 … ‘반(反)오리엔탈리즘 비평의 기초’가 되고 있다”(초우, 2004: 32. 강조-원문). 그러나 반오리엔탈리즘 비평은 유럽의 지배적이고 착취적인 응시로 정의되는 패권을 응시하다가 유럽에 관한 지식을 증대시킨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의도와는 달리 오리엔탈리즘에 공헌했다. 그런 시각성을 매개로, 그녀가 제기하는 대안은 그동안 ‘보여지는 대상’이었던 토착민이 ‘보는 주체’로 새로 탄생하는 것이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논하려는 것은, 영화는 일종의 포스트모던적인 자기-서술(self-writing) 혹은 자기 민족지(auto-ethnography)이면서 또한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의 문화 간 번역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초우, 11~12). 이런 우회로를 경과해서 초우는 제3세계의 포스트식민 정치 상황에서 시각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문화사의 시각에서 볼 때 중국 근현대문학은 그 시작부터 영화의 시각성에 빚지고 있었고 루쉰과 그의 후계자들이 문학 특권의 전통적인 관습을 유지하고자 분투했지만, 문학 매체가 점차 영상 매체에 자리를 내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영화사에서 1930년대 상하이 영화가 첫 번째 정점이었다면 1980년대 5세대 영화는 두 번째 고조이자 ‘열광적 황금기’(류원빙, 2015)이다. 초우는 근현대 중국에서 문학이 수행한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고 문학의 특권적 지위가 관습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근현대문학 글쓰기의 기원에서 ‘시각성’의 중요성을 환기한다. 초우는 중국 문화사에서 글쓰기가 주류였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른바 ‘환등기 사건’에서 루쉰 또한 혁신적 매체인 영상의 충격을 받고 국민의식을 계몽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지만, 그가 선택한 매체는 혁신적 영화가 아니라 전통적 문학이었다.
궁극적으로 초우가 강조하려는 것은 ‘원시적인 것’(the primitive)으로서의 여성이다. 사실 초우의 ‘원시적 열정’에서 ‘원시적인 것’은 모호하다. 초우는 “서양 모더니즘이라는 형식의 발명이 비서양의 땅과 사람들을 계속해서 원시화한다는 것(primitivization)과 표리일체를 이룬다”(초우, 41~42. 강조-원문)라는 점에 착안해, 제임스 조이스, D. H. 로렌스, 헨리 밀러 같은 ‘고고한’ 모더니스트 ‘반란자들’의 유명한 작품들이 “서양의 의미체계가 타자를 원시화함으로써 스스로를 근대화되고 고도로 테크놀로지화된 위치에 올려놓는 과정의 일부”(초우, 42)가 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제3세계’에도 유사한 원시화의 움직임이 있음을 지적해낸다. 그것은 중국 내에서 “원시적인 것―서벌턴(subaltern), 여성, 아동 등―을 포착함으로써 확실하게 중국 근대문학은 ‘근대적’인 것이 되었다”(초우, 43). 원시적인 것은 제1세계와 제3세계를 막론하고 ‘매혹의 원천’인 셈이다. 그 가운데에서 ‘여성’은 그 외설스러움으로 인해 가장 주목을 받았다. 원시적인 것은 소수적인 것, 주변적인 것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초우의 원시적 열정은 소수/주변적인 것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1세계 주체와 제3세계 대상의 위치를 전복해보면, 소수/주변적인 것은 다수/중심적인 것을 장시간 바라보며 자기화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한류(K-pop)는 대중문화의 중심부인 미국과 미국 대중문화의 변전소 역할을 한 일본을 장시간 모방하는 과정에서, 한국적 타자를 스스로 원시화함으로써 한국적 ‘원시성을 지닌 매혹’을 ‘근현대화되고 고도로 테크놀로지화된 위치’에 올려놓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우에 따르면, ‘원시적 열정’(primitive passions)은 일종의 ‘감정 구조’이기도 하다. 그것은 “문화적 위기의 순간에 출현한 동시진행적이고 동시대적인 표상구조”(초우, 73. 강조-원문)다. ‘원시적 열정’은 ‘문학언어로부터의 해방과 문학 대중화를 동시에 의미하는 민주화의 과정에 의해 구조화된다. 이는 ‘중국영화’를 ‘민족지’(ethnography)이자 여러 미디어 사이의, 문화 사이의, 그리고 여러 학문 영역 사이의 ‘전사(轉寫)’로서 이론화하면서 ‘지적인 학문 영역’의 산물인 민족지의 탈(脫)전문화를 주창하고, 그에 따라 방대한 문화적 정보를 ‘대중적’으로 번역할 필요성을 피력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초우의 결론은 이렇다. “원시적 열정의 다양한 요소가 일체화되어 근현대 중국문화의 탁월한 원시적 존재인 여성을 표상하고 있다”(초우, 46). 그녀는 “영화―특히 ‘제3세계’에서 만들어졌거나 ‘제3세계’에 관한 영화―에는 학문 영역으로서의 인류학과 민족지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관찰자와 피관찰자, 분석과 현상, 주요한 내러티브와 원주민 정보제공자, 즉 ‘제1세계’와 ‘제3세계’라는 전통적 분류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초우, 54. 강조-원문)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여성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시각 테크놀로지로 원시적인 것의 획기적인 매혹을 접합하고 있는 ‘5세대 감독의 영화’에 주목하게 된다. 앞당겨 말하면, 천카이거가 ‘제1세계’와 ‘제3세계’라는 ‘전통적 분류를 변화시키는 힘’을 보여주었다면, 장이머우는 시각 테크놀로지와 원시적인 것의 매혹의 접합을 통해 적극적으로 섹슈얼리티를 ‘표층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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