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루쉰의 환등기 사건: 문학 글쓰기와 시각성

ycsj 2022. 7. 23. 15:54

레이 초우는 원시적 열정1부 서두에서 한 남성 작가의 시각적 조우라는 개인 경험에 대한 기록을 꼼꼼히 독해하면서 제3세계 중국에서 새로운 문학 담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검토한다. 그녀는 먼저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기원과 베냐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등의 논의를 통해, 새롭게 출현한 서유럽의 모더니티가 시각성(visuality)에 기초하고 있고 영화 예술의 효과를 주먹질’, ‘충격이라고 묘사했음을 떠올린다. 잔니 바티모(Vattimo, Gianni)는 이를 방향감 상실(disorientation)이라 분석했다. 방향감 상실과 관련된 바티모의 진단은 심층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초우는 제3세계 지식인 루쉰의 경우가 그들과 달랐음에 주목한다. 물론 압도적 전달력으로 관객을 무력화하는 영화 매체의 구속(media bound) 앞에서 문자 매체에 익숙한 지식인이 방향감을 상실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슬라이드라는 매체에 의해 전달되는 구경거리(spectacle)의 힘을 경험한 일에 관한 루쉰의 설(루쉰, 2010: 23) 대한 기존의 해석은 처형당한 희생자나 수동적인 관찰자의 냉담함과 무기력함과 의식 계몽의 길로 접어든 작가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초우는 기존 해석의 일면성을 지적하면서, 시각성과 권력의 관계 나아가 포스트식민 제3세계에서 비판적이자 새로운 영화 매체의 역할(Chow, 1995: 6)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이른바 환등기 사건을 통해 루쉰 또한 방향감 상실을 경험했겠지만, 그것은 주로 영상 매체에 의한 확장과 증폭에 의한 것이었다. “루쉰의 반응은 시각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지표”(초우, 2004: 23)로 독해할 수 있다는 것이 초우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초우는 루쉰이 영상 매체를 보고 충격을 받았음에도 왜 영상 매체가 아니라 문자 매체를 통해 인민을 계몽하고자 했을까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녀가 찾은 대답은 이러하다. 루쉰의 개인적 경험을 위대한 작가가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에 관한 서사로 만든 것은 낮아진 문학의 위상을 높이고 문학의 특권을 유지하고픈 192030년대 작가들의 소망의 표현이었을 것인데, 이런 관습은 루쉰의 시각적 조우를 무시한 것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 관습에 균열을 낸다. 루쉰은 왜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를 본 경험을 예로 들었을까? 영화관객으로서 루쉰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보고’ ‘발견한것은 처형의 잔혹함이나 구경꾼들의 표면상의 냉혹함만은 아니다, 영화라는 미디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잔혹하고 날것 그대로의 힘이다”(초우, 2004: 26. 강조는 원문). ‘날것 그대로의 힘은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의 투명성이고 처형이라는 폭력성 나아가 영화 매체와 처형의 폭력성의 친연성을 나타내는 파시즘을 가리키며, 스크린 위 방관자들의 반응도 파시즘의 일부임을 가리킨다. 초우는 루쉰이 받은 충격에 이처럼 처형과 매체 그리고 관객들의 반응까지 아우르는 파시즘이 포함되었다고 해석한다.

초우는 시각적 조우를 환기함으로써 문학 전향을 언급한 루쉰이 받았을 법한 두 가지 충격을 읽어낸다. 그것은 중국인이 구경거리에 불과하다는 국민의식과 문학의 전통적 역할을 영화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예감이다. 초우는 이를 억압된 양가성(suppressed ambivalence)’이라 명명한다. 그것은 근대에 있어서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몸짓 자체가 문학적 글쓰기의 자기완결성이나 유효성을 부정하고 있다라는 맥락에서, “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표상이 역사적 변화 속에 각인양가성이다(초우, 31). 한편으로는 초국적 제국주의 시대에 중국이 겪는 고난을 통해 중국인임’(being Chinese)에 눈을 뜬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글쓰기를 통해 문화를 지배해온 지식인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문학의 탈중심화에 대한 위기의식이다.

마치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소설을 읽는 것처럼 수많은 논자의 주장을 섭렵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저서에서 초우는 시각성, 섹슈얼리티, 민족지 등의 주제 의식으로 5세대 영화를 고찰한다. 그런데 5세대 영화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 그녀가 서두에 루쉰의 문학 글쓰기의 기원에 대해 장황하게 분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중국 근현대문학은 그 시작부터 영화의 시각성에 빚지고 있었고 루쉰과 그의 후계자들이 문학 특권의 전통적인 관습을 유지하고자 분투했지만, 문학 매체가 점차 영상 매체에 자리를 내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중국영화사에서 1930년대 상하이 영화가 첫 번째 정점이었다면 1980년대 5세대 영화는 두 번째 고조이자 열광적 황금기’(류원빙, 2015)이다. 초우는 근현대 중국에서 문학이 수행한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고 문학의 특권적 지위가 관습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5세대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근현대문학 글쓰기의 기원에서 시각성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우는 문화횡단적(transcultural) 교류라는 문제의식으로 중국영화를 대상으로 민족지 이론을 문화번역이론으로 보완”(임춘성, 2017: 123)고자 한다. 이는 그동안 인류학 등의 학문 분야에서 횡행했던 불평등과 불균형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에 기인한다. 불평등과 불균형은 과거 수 세기에 걸친 서양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의해 생겨난 인류학적 상황의 교착(膠着)’(초우, 2004: 265)으로 외연 되었다. 초우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이 교착상태에 개입하기 위해 중국영화를 대상으로 민족지(ethnography)’ 이론을 문화번역이론과 연관 지어 재정의하려는 것이다. 초우는 또한 중국의 근현대가 영화에 의해서 전사되는 것을 문화번역으로 다루어 왔다”(초우, 2004: 272273)라고 본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민족지는 불평등한 문화번역이었다. 서유럽 관찰자가 비서유럽 관찰 대상을 주관적으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보는 것은 권력의 한 형식이며 보여지는 것은 권력 없음의 한 형식이라고 하는 그런 시각성에 관한 사고방식은 ()오리엔탈리즘 비평의 기초가 되고 있다”(초우, 2004: 32. 강조-원문). 그러나 반오리엔탈리즘 비평은 유럽의 지배적이고 착취적인 응시로 정의되는 패권을 응시하다가 유럽에 관한 지식을 증대시킨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의도와는 달리 오리엔탈리즘에 공헌했다. 그러므로 에드워드 사이드로 시작된 반오리엔탈리즘 비평은 의도와는 달리 큰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우가 제기하는 대안은 그동안 보여지는대상이었던 토착민이 보는 주체로 새로 탄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녀가 궁극적으로 논하려는 것은, 영화는 일종의 포스트모던적인 자기-서술(selfwriting) 혹은 자기민족지(auto-ethnography)이면서 또한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의 문화 간 번역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초우, 1112) 이런 우회로를 경과해서 초우는 제3세계의 포스트식민 정치 상황에서 시각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누가 보고 누가 보여지는가?

둘째, 초우는 중국 문화사에서 글쓰기가 주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루쉰 또한 혁신적 매체인 영상의 충격을 받고 국민의식을 계몽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지만, 그가 선택한 매체는 혁신적 영화가 아니라 전통적 문학이었다. 초우는 이를 문학으로 도피라 하면서 시각이미지가 가하는 위협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을 것”(초우, 27)이라 추정한다. 초우의 추정에 동의한다면 목각 판화에 대한 관심과 타잔 영화 애호는 이때의 영상 충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루쉰의 반응은 시각적인 것을 거부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각이 주는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문학으로 회귀”(초우, 29)한 것이다. 이는 표층적으로 의학에서 문학으로의 전향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전통으로의 재전향이다. “그것은 문자문화로서의 문화를 재확인하는 것이며 문자문화란 쓰기와 읽기 중심의 문화이고 영화와 의학을 포함하는 테크놀로지의 대극에 위치한 문화인 것이다”(초우, 34). 문학으로의 도피 또는 전통으로의 회귀와 관련해 나병철은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시각적 폭력 앞에서 피식민자의 문학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었을까. 루쉰의 문학의 결심이 서재로의 도피가 아니라 인격적 폭력에 대한 복수를 수행한 비밀은 무엇인가. 피식민자가 표상체계의 철망에 갇혔다면 어떻게 31운동이 가능했으며 카프(KAPF) 같은 저항문학을 생성할 수 있었는”(나병철, 2020: 31). 그리고 그 대답을 탈식민적 저항의 비밀인 양가성’(호미 바바)권력의 시선에 대한 타자의 응시’(자크 라캉)에서 찾는다. 그는 시각적 충격에 대항하는 저항의 가능성을 탐색하며 응시를 표현하는 은유의 형식을 제시함으로써 영상 매체와 변별되는 문학 매체의 의미를 부여한다(나병철, 35). 영상 매체의 시각적 폭력에 대한 대응에 대해 초우의 해석과 나병철의 해석 두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새로운 매체인 시각이미지의 충격을 갈무리하면서 문학으로 도피 또는 전통으로 회귀한 것이고, 후자는 시각적 충격에 대항하는 저항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