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두터운 문화 텍스트를 읽는 즐거움과 쓰는 괴로움

ycsj 2022. 8. 29. 22:37

진융(金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진융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다. 고통의 첫 번째 이유는 강호에 와호장룡(臥虎藏龍)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만난 대부분의 중국인 가운데 진융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나아가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진융을 화제에 올리면 최소한 한두 시간은 열띤 대화를 하기 마련이었다. 한국의 대표적 진융 사이트인 <곽정과 양과>을 보면 그와 유사한 느낌이 든다. 그곳을 서핑하다 보면 상당한 공력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처럼 수많은 고수가 운집해있는 강호에 뭔가 새로운 것을 제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진융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저 내가 여러 차례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과 틈틈이 떠올랐던 생각을 밝히고 그것들이 과연 가능한 ‘초식’인지에 대해 강호의 고수들의 의견을 듣고자 함이다.

고통스러움의 또 한 가지 이유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분석하고 편집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진융 연구에 발을 들여놓기 전 내 침대 머리에는 항상 『金庸作品集』 가운데 한 권이 놓여있었다. 자기 전 1시간 정도 진융의 작품을 음미하는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때로 보던 책을 누군가 치워버리기도 하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다음 권을 집어들 수 있었다. 이야기 줄거리를 파악한 상황에서 다음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조급할 필요도 없었고 어떤 장을 넘겨도 읽는 재미의 차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절묘한 표현과 플롯을 접할 때의 즐거움은 횟수를 더해도 그 묘미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진융 연구를 시작하면서 그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시간에 쫓겨 과제를 완수해야 하는 대상을 잠자리에까지 가지고 갈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진융을 심층적으로 연구하려다 오히려 즐거움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진융 작품만큼 재미있게 그리고 꼼꼼하게 읽은 텍스트가 많지 않다. 때로는 주인공의 성장 과정에, 때로는 지고지순한 사랑에, 때로는 문화화된 무협에, 그리고 절묘한 중국어 표현에 매료되곤 했다. 매번 읽을 때마다 재미를 느끼는 지점이 다르다는 것은 텍스트의 층위가 두텁다(thick)는 것이다. 진융의 작품은 ‘문화적 두터움(cultural thickness)’을 가진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이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의미구조로 되어있다는 의미다.

‘두터움’은 기어츠(Geertz, Clifford)의 맥락에서 힌트를 받은 개념이다. 기어츠는 『문화의 해석』에서 인류학의 민족지(ethnography) 작업의 방법론으로 ‘중층 기술 또는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을 제시했다. 이것은 기어츠가 길버트 라일(Ryle, Gilbert)에게서 빌어온 개념이다. 라일은 눈의 경련과 윙크에 대한 ‘현상적’ 관찰은 동일한 해석에 이를 수 있지만(현상 기술 thin description), 그 현상의 이면에 위계적으로 연결된 여러 층위의 의미구조가 존재하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파악하려 할 때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을 한다고 했다. 기어츠는 이 개념을 민족지 작업에 적용했다. 인류학자가 현지조사에서 당면하게 되는 상황이란 “여러 겹의 복합적인 의미구조이며, 이 개개의 의미구조들은 서로 중복되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다”(기어츠, 1996: 20). 그러므로 인류학자는 그 상황을 사후에 설명하기 위해 조사 당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다양한 조사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의미구조를 가진 텍스트를 ‘두터운 텍스트(thick text)’로 상정하고, 그런 텍스트가 가지는 문화적 함의를 ‘문화적 두터움(cultural thickness)’으로 표기했다. 진융의 작품은 ‘문화적 두터움을 가진 텍스트’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