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20세기 중국문학’의 ‘조용한 혁명’과 홍콩문학

ycsj 2022. 8. 29. 22:38

우리가 ‘중국 근현대문학’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1950년대 중엽, 그리고 대륙에서는 사회주의 개조 및 건설의 메아리가 ‘반우파(反右派) 투쟁’으로 변질하고 있을 무렵, 홍콩에서는 ‘20세기 중국문학’의 ‘조용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중국의 연구자들조차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독자를 확보한 이 문학혁명은 통속문학에 대해 편견이 있던 학자와 교수들을 강박(强迫)하여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진융의 무협소설이었다. 식민지 홍콩에서 싹을 틔워 분단의 땅 타이완을 휩쓴 진융의 무협소설은 1980년대에는 역으로 대륙에 상륙했다. 중국 대륙에 불어 닥친 ‘진융 열풍’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중국인이 거의 없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이제 진융의 무협소설은 ‘중국인다움(Chinese-ness)’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진융은 1955년 첫 작품 『서검은구록』을 발표하면서 무협소설 애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듬해 『사조영웅전』의 발표는 그의 작가적 명성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55년부터 약 16년간 진융은 ‘12편의 장편과 3편의 중편’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중복(重復)’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작품도 중복하지 않았다.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대협(大俠)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명성을 누리던 1974년 그는 돌연 봉필(封筆)을 선언하여 세간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진융은 일반인의 고정관념을 깨고 10여 년의 공력을 기울여 신문 연재 시 미비했던 점들을 수정했다. 1994년 그의 작품집 36권이 베이징 싼롄(三聯)서점에서 출간되었고, 같은 해 진융은 베이징대학에서 명예교수직을 받았으며, 아울러 ‘20세기 중국소설 대가’ 서열에서 루쉰(魯迅)과 선충원(沈從文) 등에 이어 4위에 자리매김하기도 했고, 이듬해에는 베이징대학 중문학부 대학원에 ‘진융 소설 연구’라는 과목이 개설되기도 했다.

그의 무협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 구체적인 역사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실제의 역사 사건을 강호(江湖)라는 가상의 세계와 결합해 그 속에서 생활하고 성장하는 핍진(逼眞)한 형상들을 그려냈다. 우리에게 ‘영웅문 3부작’으로 알려진 ‘사조삼부곡’의 주인공, 곽정(郭靖)과 황용(黃蓉), 양과(楊過)와 소용녀(小龍女), 장무기(張無忌)와 조민(趙敏) 등은 송(宋)-원(元) 교체기로부터 원(元)-명(明) 과도기라는 역사 배경과, 동사(東邪)-서독(西毒)-남제(南帝)-북개(北丐)-중신통(中神通)이라는 무림의 대종사(大宗師)가 좌지우지하는 강호의 환경 속에서 우리에게 살아 숨 쉬는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역사―강호―인성’의 삼중구조는 진융 소설의 특징적인 측면이다. 이 외에도 여러 작품이 명(明)-청(淸) 교체기를 배경으로 삼아 활발한 시대 분위기를 작품의 배경으로 삼고 있음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작품에서 묘사되는 강호와 협객(俠客)들이 ‘근현대적인(modern) 정보’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대 중국인의 옷을 입고 과거의 시공간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사유 방식과 행동양식은 근현대인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우환(憂患) 의식을 발견할 수 있고 20세기 인류 문명이 지닌 비관주의와 회의 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특히 주인공들이 대부분 고아로 설정된 점은 위의 특징들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읽을 수 있다. 아울러 진융 소설은 중국의 한자 문학이 창조해낸 예술적 상상력이 극치에 이르렀음을 상징하고 있다. 국내 번역본이 이 부분을 얼마나 구현해낼 수 있는지가 일반 독자들이 진융을 제대로 이해하는 관건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진융의 작품이 가지는 문학사적 의미는 통속문학과 엄숙문학 사이의 경계와 영역을 허물어버림으로써 무협소설을 순수예술의 전당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아울러 5․4 신문학에 억압되었던 ‘본토문학’의 전통을 부활(復活, revival)시킨 점도 함께 꼽아야 할 것이다. 1990년대에 이름있는 학자들이 진융에 관한 글들을 속속 발표했고 전문 연구서가 출판되기도 했다. 국제 규모의 ‘진융(金庸) 학술토론회’도 개최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쉐(金學)’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다. ‘진융 현상’은 신시기(新時期) 전기에 있었던 ‘왕숴(王朔) 현상’이나 ‘『폐도(廢都)』 현상’과는 그 맥을 달리하는 문화사적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1956년 신문 연재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지속해서 독자층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단순한 저널리즘적 흥미 유발에 그치지 않고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우리는 진융의 작품을 재미있는 무협소설로만 볼 것이 아니라 중국의 전통문화와 근현대인의 인성과 심리가 내재된 문화 텍스트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중국 문학의 전통 형식을 보유하면서도 근현대적인 내용을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중국 본토문학’의 집대성자다. 그러므로 진융 소설은 타이완과 홍콩 그리고 대륙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독자를 보유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

진융의 작품은 대륙과 홍콩, 타이완 그리고 여러 지역의 화인(華人)들을 통합(integration)하는 기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1955년 신문에 연재되면서부터 수많은 중국인이 그의 작품을 애독했고, 작품들이 끊임없이 연속극과 영화로 재생산되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진융을 매개로 하여 다시 통합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현상들은 ‘국민문학(national literature)으로서의 진융 소설’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진융 문학의 탄생지인 홍콩과 관련해 진융의 작품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에게 홍콩문학은 생소하다. 더구나 1997년 중국으로 반환/회귀한 홍콩이기에 지금은 그 의미가 반감될 수 있다. 그러나 홍콩문학은, 독립 개념으로든 중국문학의 하위개념으로든, 분명 존재했고 지금도 그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홍콩문학에 대한 이슈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작품이 ‘홍콩의’ 문학인가 ‘홍콩에서의’ 문학인가 하는 공간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홍콩 본토의식’ 유무이다. 본토의식은 홍콩문학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전자의 이슈에 대해 렁핑콴(梁秉鈞. 필명 也斯)은 화자와 관점에 주의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누가 어떤 위치에서 이야기하는가’가 중요한 셈이다. 렁핑콴은 기존의 두 가지 서사―‘국제도시 서사’와 ‘중화 국민 서사’―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홍콩에 관한 모든 서사는 홍콩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이 곳의 우리의 생각”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也斯, 1995: 11). 중국 편입 이후 재국민화(re-nationalization)가 진행된 지 20년이 넘는 시점에 렁핑콴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화하고 있지만, 진융 문학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진융의 텍스트는 홍콩 컨텍스트와 과연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진융은 1955년부터 약 16년간 ‘홍콩에서’ ‘12편의 장편과 3편의 중편’을 발표했다. 그러나 진융 문학은 홍콩에서 창작되고 발표되었음에도 홍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의 텍스트들은 내용이나 배경에서 홍콩을 다루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앞의 논의에 따르면, 진융 작품은 ‘홍콩의’ 문학이 아니라, ‘홍콩에서의’ 문학인 셈이다. 그러나 반드시 지적해야 할 점은, 진융 소설이 ‘홍콩에서의’ 문학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중국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이른바 ‘대중문화’를 자본주의의 퇴폐적 산물로 규정하고 모두 금지함으로 인해 영화와 무협소설로 대표되던 대중문화는 타이완과 홍콩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개혁개방 이전까지 타이완과 홍콩의 대중문화가 중국을 대표하게 되었다. 특히 대륙과 교류가 없었던 한국에서는 홍콩영화가 중국영화로 수용되었다. 홍콩문화는 영화와 문학에서 대중성이라는 특성을 아우르면서 독특한 풍격(風格)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동아시아의 현대문화는 홍콩영화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으며, ‘홍콩문학’이라는 말이 이미 20년 전에 등장한 것처럼, 새로운 동아시아의 도시문학이 이곳에서 탄생했다”(후지이, 2002: 7~8)라는 후지이 쇼조(藤井省三)의 말처럼, 홍콩문화는 영화와 문학에서 대중성이라는 특성을 아우르면서 독특한 풍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독특한 풍격은 “본지 작가와 외래 작가의 병존, ‘통속문학’(주로 대중적 취미를 근거로 함)과 ‘엄숙문학’(내용의 심화와 기교의 創新을 추구)의 병존, 좌파 작가와 우파 작가의 병존, 컬럼의 잡문(雜文)을 주요 장르로 함”(黃維樑, 1997: 548)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진융의 무협소설은 홍콩문학의 독특한 풍격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통속문학과 엄숙문학의 병존’은 최근 진융의 무협소설을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아속공상(雅俗共賞)’의 경지를 일컫는 말인데, 이는 홍콩의 개방적이고 혼종적(hybrid)적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크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