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오리엔탈리즘 우울증’과 ‘제3세계주의적 환상’

ycsj 2022. 7. 17. 07:59

홍콩 출신의 미국인을 자처하는 레이 초우(Chow, Rey. 周蕾)현대(contemporary) 문화연구에서 개입의 전술을 다룬 자신의 책(Chow, 1993; 초우, 2005), 하버드대학이라는 상징자본을 등에 업은 미국인 중국학자(American sinologist)가 제3세계에 속하는 중국 출신 시인의 시집을 혹평한 것을 문제 삼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버드대학 교수 스티븐 오언(Owen, Stephen)은 베이다오(北島)의 시안락한 에스니시티’(cozy ethnicity)를 추구하여 서양 독자의 입맛에 영합하는 3세계시인의 작품이라고 공격하면서, 비서양 시인이 쓴 시 가운데 다수는 더는 진정한 내셔널 정체성을 갖지 못할뿐더러 너무 쉽게 번역될 수 있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현대 중국의 작가들이 자국의 국민적 문화유산을 희생시키면서 피해자로서의 경험을 상품화하는 번역을 하고 있다면서 베이다오의 시를 비판한 스티브 오언은 제3세계 출신의 베이다오가 서양에 스스로를 내다 판다고 비난했는데, 이는 베이다오가 “‘자기 이익(self-interest)때문에 초국가적 문화의 상업화 경향에 굴복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레이 초우는 오언의 베이다오 비판이 미국의 여러 학자가 1980년대의 자유화된 중국에 대해 표명한 경멸감을 대표하는 것이라 하면서, 오언이 “‘자기 이익이라는 가혹한 판단기준을 스스로에게는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확실한 권력의 형태를 이룬다라고 예리하게 지적한다(초우, 2005: 1516). 한 걸음 더 나아가 초우는 오언의 베이다오 비판이 동아시아 연구 분야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영속화(perpetuation of Orientalism)라는 사실을 간파(看破)해낸다. 오언의 베이다오 비판과 초우의 오언 비판은 30여 년 전에 진행된 것이지만, 이 글에서 관심을 가지는 지점은 바로 에드워드 사이드(Said, Edward)에 의해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지속되는 것으로 보이는 오리엔탈리즘적 비평’, 즉 오리엔탈리즘으로 비서양문화를 논단하는 비평의 존재와 그 대처 방안이다.

초우는 오언의 베이다오 비판에 내재한 문화정치학을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비판과 지그문트 프로이트(Freud, Sigmund)의 우울증 분석을 결합해, ‘오리엔탈리즘 우울증(Orientalist melancholia. Chow, 1993: 4)이라 명명했다. 이에 대해 초우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중국학자 오언은 중국을 사랑하는데, 중국문화의 살아 있는 구성원인 베이다오의 존재는 중국학자 오언에게 자신의 상실감을 외재화하여 비난을 퍼부을 수 있는 대상을 제공한다. 프로이트가 자기 자신을 향한 비난이라고 본 우울증 증상은 이제 타자에게서 구체적인 비난의 대상을 발견한다. 바꿔 말하면, 미국 학계에서 오언은 중국을 전유해왔는데, 베이다오의 출현으로 오언의 미국 내 지위가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이 불안의 근원은 오언이 통찰하고자 노력해왔던 과거의 중국이 소멸하고 있으며, 또 중국학자 자신이 버려지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중국과 함께 등장한 베이다오와 같은 3세계작가가 이제는 피억압자가 아니라 억압자로 등장하여, ‘1세계중국연구자인 오언으로부터 애정의 대상을 박탈하는 공세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1980년대 이후 자유화된 중국, 바꿔 말하면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을 경멸하는 미국인 중국학자에게 내재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들은 비서양문화의 전문가들(specialists of these non-Western cultures)이 수행하는 작업을 경시하고 무시한다”(Chow, 3). 그러나 비서양문화, 즉 제3세계에 관한 지식은 주로 비서양문화의 전문가들에 의해 생산된다. 이 지점에서 분기(分岐)가 생긴다. 미국인 중국학자의 오리엔탈리즘과 비서양문화의 중국학자들의 내셔널리즘이라는 갈림길이다. 초우는 내셔널리즘과 같은 특수주의는 결코 보편주의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 될 수 없다. 그 역()도 성립할 수 없다. 양자는 공범자이기 때문라는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의 성찰을 인용하면서, “오리엔탈리즘과 내셔널리즘 또는 토착주의(nativism) 같은 특수주의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이며, 한쪽의 비판은 다른 쪽의 비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Chow, 5)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미국인 중국학자의 연구와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중국학자들의 연구가 모두 일면적이고 양자는 중국이라는 현실을 호도하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

레이 초우의 논술로부터 우리는 비판적 중국연구가 직면한 두 가지 과제를 추출할 수 있다. 하나는 중국의 외부, 즉 서양과 미국의 중국학자들에게 공통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내부, 즉 토착적 중국학자들이 공유하는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이다. 이에 대해 초우는 다음과 같이 논술한다.

 

중국 및 동아시아 연구에 필요한 비판적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것은 문화제국주의의 유산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그 맥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 가치생산의 문제를 명확하게 밝히는 일이다. 나르시시즘적 가치생산과 문화제국주의 중에 하나만 밝혀서는 진정한 개입이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동아시아 연구에서 앞으로 수행해야 할 작업은 무엇이 진정으로동아시아의 역사적 쟁점인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오리엔탈리즘 비판을 비껴가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그 진정성의 신화를 상호 강화적인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역사 안에 자리매김하고 우리는 따져야 한다(초우, 2005: 25).

 

중국 외부로는 문화제국주의의 유산인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고, 중국 내부로는 나르시시즘적 가치생산인 내셔널리즘을 극복하는 것, 바꿔 말하면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문제점을 파악해 문화제국주의의 맥락 안에서 나르시시즘적 가치생산의 문제를 규명하는 이중 과제야말로 비판적 중국연구와 비판적 동아시아 연구를 위해 필요불가결한 일이다.

사회주의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중국인은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스티브 오언의 사례가 오리엔탈리즘에 연관된 것이라면, ‘마오주의(Maoism)’3세계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신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서양에서는 마오쩌둥의 혁명에 대한 환상이 널리 퍼졌다. 아리프 딜릭(Dirlik, Arif)은 서양의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마오쩌둥에 대한 해석을 3세계주의적 환상마오쩌둥은 서양에서 배신당한 마르크스주의의 약속을 이행한 중국판 마르크스의 화신이라는 환상이라는 용어로 요약한다. 하지만 환상은 오래가지 않는 법. 마오주의가 제3세계주의적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과도한 찬양은 경멸로 바뀌었다. 과도한 찬양이 경멸로 급변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지나간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문화비평가다. 그는 자본주의 미국에 살면서 자본주의를 싫어한다. 자신이 그 시스템 속에서 생활하고 연구를 수행함에도 그의 지향은 자본주의와 반대되는 사회질서다. 초우는 이런 비평가를 마오주의자로 명명했다. 그는 도덕적 엄정함을 통해 권력을 획득해가는 지식인”(초우, 28)으로, “마오주의자의 전략은 주로 자신의 수사를 가능케 해주는 물질적 힘을 수사적으로 거부”(초우, 27)한다. 그러므로 그는 사회주의 중국을 동경하며 찬미하지만,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이른바 서벌턴의 신성화(sanctifying the subaltern)”(초우, 26).

초우는 마오주의자를 오리엔탈리스트의 특별한 형제라고 부른다. 양자는 현재 중국을 직시하지 못하고 왜곡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위대한 오리엔탈리스트는 살아 있는 3세계토착민이 자신의 애정의 대상인 고대의 비서양 문명을 잃어버린 데 대해 비난하는 반면, 마오주의자는 동일한 토착민이 자신의 이상을 체현하고 이행해준 데 대해 찬양한다”(초우, 29). 이처럼 제3세계의 동일한 현실에 대해 오리엔탈리스트는 비난을, 마오주의자는 찬양을 표시하지만, 둘은 자신의 주관적 욕망으로 현실을 가늠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심지어 그들은 변화하는 현실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의 기대를 접지 않는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마오주의자에게 본토의 중국인은 그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인간형에 대한 청교도적 대안이자 꿈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마오주의자는 자신이 신성화한 그 중국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미국학계의 문화연구에서 마오주의자는 단숨에 재생되고 있다.” “마오주의자는 바로 그 경멸받는타자를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전화하며, 몇몇 경우에는 자신과 동일시한다. 감탄과 도덕주의의 혼재 속에서 마오주의자는 때때로 비서양문화의 모든 구성원을 일반화된 서벌턴으로 변모시키며, 이번에는 이것을 사용하여 같은 방식으로 일반화된 서양을 질타한다”(초우, 2930). 이렇게 마오주의자는 일반화(generalization)’자기 서벌턴화(self-subalternization)’를 통해 권력과 권위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진정한 피억압자의 항의와 정당한 요구의 말까지도 박탈해버린다는 의미에서 표상으로서의 폭력(violence as representation)’이다.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대신해서 말할 때마다 그녀에게 우리 자신의 (은연중에 남성적인) 질서 감각을 새겨 넣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마오주의자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말하기를 정당화하지만 그것은 표상으로서의 폭력이다. 마오주의자는 인민을 대신해서 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인민을 침묵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자기 생각을 각인해 따르게 한다. 마오주의자는 인민에게 결여된 것을 채워준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동양을 경력 쌓기의 도구로 삼으면서 생기는 폭력성은 외면하고 있다.” 초우의 목표는 바로 이 다중결정 순환의 생산성에 개입(to intervene in the productivity of this overdetermined circuit)”(Chow, 15)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초우는 장기적인 헤게모니 투쟁, 특히 지적인 권력을 통해 형성된 헤게모니 투쟁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 대신 그녀는 기생적 개입(parasitical intervention)’을 제안한다. 우선 푸코의 “‘지식’, ‘진실’, ‘의식’, ‘담론의 영역에서 [지식인을] 권력의 대상이자 도구로 전환하는 권력 형태에 대한 지식인의 저항에 관한 논단에 기대어, 지식인에게 헤게모니를 획득하려 하지 말고 그것에 대항하라고 말한다. ‘뿌리 깊은 다수의 정치적 반동 세력에 의해 계속해서 강화되는 오래된 이데올로기가 주도하는 현실에서 비판적 지식인이 취할 수 있는 전략(strategy)과 전술(tactics)은 제한되어 있다. ‘지배 헤게모니를 획득하려 하지 말고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 전략이라면, “지배적 문화와 사귀고 그 속에서 살아가(초우, 46)는 것은 초우가 권하는 전술이. 이는 일종의 장계취계(將計就計) 전술로, ‘기생적 개입의 핵심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초우는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의 헤게모니 투쟁을 전제하면서도 거대한 지배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를 다투다 자랑스럽게 나아가 부서지지 말고’, 자신의 진지를 확보할 것을 권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장 지배적 문화를 전복할 주체적 역량도 부족하고 객관적 정세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전술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그녀는 영토적 정당성도 문화적 중심성도 주장할 수 없는 홍콩에 사는 사람이 자신의 문화정체성과 교섭하기 위해 스스로가 수행해야 할 기회주의적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다. 홍콩에서 태어나 자라고 미국 대학의 교수로 살아가는 초우는 중국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의 중국학자로부터 중국인다움을 요구받는 과정에서 디아스포라 글쓰기(writing diaspora)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디아스포라 글쓰기의 부분 목표는 중국과 홍콩 그리고 기타 등지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운동을 계속 지지하면서까지 중국인다움과 같은 자신의 에스니시티에 대한 굴복을 궁극적인 기의로 간주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 것이다.”(Chow, 25). 한편으로는 스스로 끊는다고 해서 끊어지지 않는 중국인다움에 굴복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저항하는 글쓰기, 바꿔 말하면 두 가지 중심주의중국 중심주의와 서유럽 중심주의의 영속화에 저항하는 글쓰기가 초우의 디아스포라 글쓰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