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십년>: 홍콩의 중국화에 대한 성찰

ycsj 2023. 10. 21. 09:22

반환 이후 홍콩의 영화 텍스트에서 홍콩의 공간 및 역사에 대한 영화 기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영화적 기억은 홍콩의 정체성과 어떠한 연관을 가지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반환 이후 홍콩 정체성 연구에 유용하다. 한때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명성을 누렸던 홍콩영화는 반환 후 2003CEPA(Clsoer Economic Partnership Arrangement) 협정을 통해 중국 시장에 진출했지만, 이는 거꾸로 홍콩의 중국화를 촉진해 중국-홍콩 시장의 단일화를 초래했다. 이런 흐름에 반발해 일부 홍콩 출신 감독들은 홍콩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영국의 식민지 기간 홍콩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형성된 홍콩의 도시 풍경과 홍콩의 주변부에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을 주목”(김정구, 2020: 214)한다. 조니 토(杜琪峰)<참새>(Sparrow, 2008)2007년 스타 페리의 철거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성완(Sheung Wang, 上環)의 풍경 기억을 보여주었고, 아이비 호(岸西)<크로싱 헤네시>(月滿軒尼詩, 2009)는 홍콩의 오랜 역사를 지닌 완차이(灣仔)의 공간 기억을, 알렉스 로(羅啓銳)<세월신투>(歲月新偸, 2010)는 아이의 눈을 통해 백혈병에 걸린 형을 병든 식민지 홍콩으로 은유함으로써 영국 식민 시기의 기억을 표상했다. 제시 창(曾翠珊)<거대한 푸른 연못>(大藍湖, 2011)은 신계(新界) 지역을 배경으로 역사 속에서 치환된 기억과 모호한 노스탤지어를, 안슨 막(麥海珊)의 다큐멘터리 <부유하는 도시의 모퉁이에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지>(在浮城的角落唱首歌, 2012)는 홍콩의 독립 예술계 탄생 지역인 관탕(觀塘)에 대한 기억 및 1989년 천안문 사건의 충격과 당시 홍콩 노동자 거주지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홍콩 출신 감독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흐름 속에서 2015년 독립 영화 <십년>이 탄생했다. <십년>영화가 제작된 2015년으로부터 10년 뒤인 2025년을 배경으로 삼아 홍콩의 중국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그려낸 단편 에피소드 5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이다, 5편의 표제와 감독은 다음과 같다. 1<엑스트라/ 부과>(Extra, 浮瓜: 郭臻 감독 1985년생), 2<종말의 계절/ 겨울 매미>(End of Season, 冬蟬: 黃飛鵬 감독 1991년생), 3<방언>(Dialect, 方言: 歐文傑 감독 1981년생), 4<분신자살>(Self-Immolator, 自焚者: 周冠威 감독 1979년생), 5<본토 달걀>(Local Egg, 本地蛋: 伍嘉良 감독 1981년생). <엑스트라/ 부과>는 언론과 정치 활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안전법의 도입을 위한 정치적 음모를 담았고, <종말의 계절/ 겨울 매미>는 사라져가는 홍콩의 모든 것을 표본으로 만드는 남녀를 다루었으며, <방언>은 푸퉁화(普通話) 사용이 의무화된 가운데 광둥화(廣東話)밖에 모르는 택시 운전사가 겪는 곤경을 그렸고, <분신자살>은 홍콩인으로 살기 위해 분신을 선택하는 이야기이며, <본토 달걀>은 중국식 교육을 받은 자녀들이 관리들이 준 위법 목록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해 사진을 찍어 고발하는 이야기를 통해 검열의 폐해를 무거운 분위기 속에 코믹하게 그렸다. 초등학생으로 구성된 소년군의 모습은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중고등학생이 주축이었던 문화대혁명 시절의 홍위병을 연상하게 한다.

안영은은 <십년>의 주된 정조를 공포로 읽어내면서, <십년>이 홍색 체제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 낸 암울한 예언서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녀는 알랭 바디우(Badiou, Alain)가 언급한 국가의 통제에 억압된 존재어떤 가능성의 창조라는 맥락에서 <십년>을 하나의 사건으로 취급한다. 그녀가 보기에 <십년><환구시보(環球時報)>에 의해 사상 바이러스로 규정됨에도 불구하고 2016년 홍콩 금상장(金像獎) 영화제 대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거두게 됨으로써 사건화하게 된다(안영은, 2017: 141). <십년>2014년 우산운동 및 2016년 어묵운동과 함께 자신들의 불안에 맞선 실질적 행동에 돌입하게 되는”(안영은, 136) 사건이라는 것이다. 5편의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다시피, 홍콩인들의 불안과 공포의 근저에는 홍색 체제에 국한되지 않는 중국화(Sinicization)’ 또는 재중국화(re-Sinicization)’의 문제가 놓여있다.

홍콩인은 영국에 할양된 후 일본의 점령 기간을 포함해 153년의 식민통치를 받아왔고, 1997년 반환 후 20여 년의 일국양제를 겪었다. 153년은 거의 다섯 세대가 살아온 시간이다. 다섯 세대에 걸쳐 형성된 홍콩 의식을 20년 만중국화하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적임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 홍콩의 현실이다. 국가보안법이 홍콩의 질서를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 공작을 감행하는 당국의 극권(極權) 통치로 홍콩인들은 일상생활의 소통 도구인 언어부터 식품인 달걀까지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에 대한 반항은 검열과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입도 뻥긋할 수 없고, 부당한 강압에 저항하면 억류와 폭행을 당하게 된 상황에서, 자유와 민주를 지향하는 홍콩인이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분신자살이다. 또한 점차 중국화되어가는 홍콩에서 불도저에 밀려 사라지는 것들을 채집해 표본으로 남기기도 한다. 국가의 억압 장치에 무기력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저항 방식은 비폭력 저항이다. ‘표본 채집분신자살이라는 최후의 방식을 선택하면서도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용기를 가지고 존엄을 지키는 행위이다. 재개발로 철거되기 직전 삶의 터전을 상실한 두 남녀의 선택은 사라져가는 홍콩적인 표본을 채집하는 것이었고 심지어 자신도 표본으로 남기고자 한다. 문화대혁명도 버텨냈고 64도 겪었지만 2025년의 홍콩 상황을 지켜낼 수 없는 한 노파의 선택은 분신자살이었다. <십년>에서 표상된 2025년의 홍콩은 어떤 희망도 찾기 어려운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