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에스닉 변동과 내부 식민지

ycsj 2023. 11. 27. 10:16

중국과 같이 다() 에스닉으로 구성된 국가에서 중앙정부는 자신의 정치경제 구조를 주변부로 확산하고자 한다. 모던 이래 산업화라는 구조적 분화의 장기적 결과로 주변부의 에스닉 변동(ethnic change)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는 것을 사회변동의 확산 모델(diffusion model)’이라 하는데, 중심부의 주류 에스닉이 자신의 정치경제 구조를 주변부 에스닉에 강제적으로 확산하는 것은 단기간에 효과를 얻기 어렵고 때로는 주변부 소수 에스닉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확산 모델로는 사회변동 특히 에스닉 변동을 설명하기 어렵다. 마이클 헥터(Hechter, Michael)는 에스닉 변동을 설명하기 위해 내부 식민 모델을 제시한다. 내부 식민지의 문제는 그 연원이 오래되었다. 마이클 헥터에 따르면, ‘내부 식민지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레닌(Lenin, V. I.)이었고, 안토니오 그람시(Gramsci, Antonio)도 그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라틴아메리카 사회학자들이 이 개념을 사용해 그들 사회의 아메리카 원주민 지역을 설명했다. 헥터는 기존의 사회 변화 모델, 이를테면 산업화 이전과 산업화,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구조적 차별화, 네이션-스테이트(nation-state)의 형성 등이 해명하지 못하는 심각한 사회 변화를 해명하는 데 유용한 모델로 내부 식민지모델을 제시했다(Hechter, 1975). 기존의 식민지 개념이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 단계라는 서양의 제국주의가 비산업화되고 저발전된 비서양 사회를 무력으로 정복한 결과물이라면, 내부 식민지는 해외 식민지 발생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를테면 UK(United Kingdom)의 산업 및 상업 중심지에는 잉글랜드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 진영이 존재하는데, 전자는 자신이 지배 네이션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며 후자를 자신의 생활 수준을 낮추는 경쟁자로 보면서 혐오한다. 이는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가난한 백인들의 태도와 유사하다. 이처럼 내부 식민지 문제는 에스닉(ethnic) 문제와 긴밀하게 결합해 있다.

헥터는 에스닉 변동(ethnic change)’이라는 개념으로 국가 발전의 중요한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에스닉 변동이란 두 집단 체계에서 문화적으로 종속된 집단이 자신의 에스닉 정체성을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집단의 정체성과 일치하도록 재정의하려는 의지”(Hechter, 1975: 341)를 의미한다. 그는 기존의 사회변동의 확산 모델(diffusion model)’이 구조적 분화(산업화)의 장기적 결과로 주변부의 에스닉 변동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하는 것에 반해, ‘문화적 노동 분업(cultural division of labor)’이 제도화되면 주변부 에스닉 정체성이 분화 이후에도 지속될 것임을 시사하는 국가 발전의 내부 식민 모델(internal colonial model)을 제시한다. 헥터는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사회에서 국가 발전을 촉진하는 조건의 유형 가운데 에스닉에 초점을 맞춰 잉글랜드인과 켈트족을 각각 중심부(core) 에스닉과 주변부(periphery) 에스닉으로 설정해 다변량 통계 분석(multivariate statistical analysis)’ 방법으로 연구함으로써, 국제사회학회(International Sociological Association)내부 식민주의20세기 최고 저서의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헥터의 연구에서 알 수 있다시피, 내부 식민주의라고 불리는 불균등한 발전 패턴이 최초의 산업 사회에서 발전했고, 그것이 실제로 산업 사회에서 국가 발전의 형태일 수 있다(Hechter, 350). 그리고 내부 식민주의는 제3세계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모두 알다시피, 인민공화국은 56개 에스닉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한족(Han ethnic)의 비중은 압도적으로 커서,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현재 인민공화국의 측면에서 보면, 지난 3천 년의 역사는 한족의 형성과 확산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황하 유역에 기원을 둔 한족이 지속해서 주변부 소수 에스닉을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문화정치적으로는 한족이 90%가 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한족과 소수 에스닉이 계속 혼합하는 과정, 한족화(sinicization)의 과정이었다. 소수 에스닉을 중화제국으로 통합하는 흐름은 청조(淸朝)에 두드러졌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청조의 강역을 계승했다. 청의 통합 흐름을 대륙 식민주의’(continental colonialism)‘라고 한다. 이 과정을 스수메이(史書美)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대담한 팽창주의 정책으로 청나라의 대륙 식민주의는 한족 땅의 두 배가 넘는 영토를 획득했으며, 그리고 그토록 엄청나게 확대된 영토의 경계는 외몽골을 제외하고 중화인민공화국(1949년 건국)에 의해 합병되었다. 중화민국 대륙 통치시기(19111949) 동안 티베트와 신장은 단지 상징적으로만 중국과 연결되어 있던 것처럼 보였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은 그들을 다시 식민화하면서 직접적인 중국의 통치 아래에 두었다(스수메이, 2020: 451).

 

스수메이가 대륙 식민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산물인 티베트와 신장, 남몽골, 만저우 등은 현 중국의 내부에 존재하며 이는 마이클 헥터의 내부 식민지와 유사하다. 한족 중심의 중국 중앙정부는 내부 식민지의 소수 에스닉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인민공화국에 들어서 통합 노력은 강화되었다. 통합의 궁극은 중화 네이션이다. 조경란은 국민화 이데올로기와 중화 네이션 담론의 변천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중화민족 개념을 국민화이데올로기로 보고 100년 동안의 국민화기획에 구체적으로 민족, 중화민족, 중화민족다원일체구조론을 통해 (‘보편적타자인) 소수민족을 어떻게 통제하고 관리하려 했는가”(조경란, 2006: 68)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녀의 기본 관점은, 네이션 창출이 상당 부분 허구적이며 기실 국내적 헤게모니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에티엔느 발리바르(Balibar, Etienne)의 지적을 귀담아들어야 하며 중국도 여기서 비켜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 말 네이션 담론이 생성될 당시 중국 내부의 타지이며 또 다른 의미의 식민지라고도 할 수 있는 소수 에스닉에게 근대는 한족에게 동화 또는 식민지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근대중국은 조공국과 소수 에스닉의 희생 위에서 발전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조경란, 7374). 쑨원(孫文)5족공화론도 소수 에스닉과의 통합을 위해 나온 평등 구상이었지만, 신해혁명 후 정치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전 네이션의 통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의 수뇌부는 중화제국의 틀을 국민국가의 틀로 수렴해 가야 하는 것에 상응하여 중화제국이라는 의식형태를 국민화에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조경란, 7576).

흔히들 중국은 소수 에스닉 우대 정책을 편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자치지역에서 소수 에스닉 언어를 허용하고 1가구 1자녀만 허용하는 계획생육(計劃生育)’ 정책 시행 기간에도 소수 에스닉에게는 두 자녀를 용인하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대정책은 표층일 뿐이고 그 심층에는 통합정책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임춘성, 2018: 177). 박병광은 에스닉 동화와 융화의 각도에서 중국 소수 에스닉 정책을 고찰했다. 그는 중국의 에스닉 정책을 평등의 원칙, 구역자치의 원칙, 분리불가(分離不可)의 원칙, 통일전선의 원칙으로 요약했다. 그는 정책 변화과정을 온건적 융화정책 시기(19491957), 급진적 동화정책 시기(19581976) 그리고 융화로 복귀한 개혁개방 시기로 나누고, 단계별 정책 목표로, 초기의 영토적 통합’, 2단계의 정치적사상적 통합’, 개혁개방 시기의 경제적 통합으로 설득력 있게 분석했다(박병광, 2000: 442443). 다른 글에서 박병광은 한족 지구와 소수 에스닉 지구 간 경제 편차에 초점을 맞추어 에스닉 변수를 도입해 지역격차 문제를 분석했다. 그에 의하면, 소수 에스닉 지구의 낙후와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향후 소수 에스닉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체제이완 조짐에 대처하는 가장 직접적인 봉합책일 뿐 아니라 중국 개혁정책의 성패를 좌우할 가장 구체적인 관건이라 할 수 있다(박병광, 2002: 203). 그럼에도, 중국 정부는 내륙의 소수 에스닉 지구에서 산출되는 원자재를 싼 가격에 수매하여 제조업 중심의 동부 연해 지역으로 재배치했으며 한족이 집중 거주하는 동부 지역은 부가가치가 높은 소비재상품을 생산하여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준 토이펠 드레이어(Dreyer, June Teufel)는 이러한 경제 관계를 내부 식민지(internal colony)’라 했다. 여기에 비판적 문화연구의 입장에서 추정해 보면, 중국 당국(黨國)의 정책 목표는 문화적 통합이라 할 수 있다. 베이징올림픽을 통해 그 정점을 드러내고 시진핑 신시대 들어 중국특색사회주의의 길’, ‘중화 네이션의 위대한 부흥’, ‘중국식 현대화등으로 표현된 문화적 통합정책은, 개혁개방 이후 축적된 경제적 발전과 당의 전면적 영도라는 정치적 통합에 기초해 당치(黨治)를 강화하고 국내외의 국민을 문화적으로 통합시키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천 년이 넘는 중국의 경사자집(經史子集) 텍스트를 무시하고 근현대 180여 년의 정치경제문화에 집중하는 것으로는 비판적 중국연구의 과제를 충분히 해결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붙잡고 각개격파식으로 씨름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아울러 근현대 이후 지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유럽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유럽중심주의는 중국연구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에 깊숙이 침투되어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수많은 담론에서 유럽중심주의가 특권적으로 강조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서양의 많은 사상과 담론의 합리적 핵심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제와는 별도로, 비서양 사회에서 유럽이나 서양의 사상과 담론이 보편적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수용해온 것이다.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외래문화의 비판적 수용이라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시공간적 과제는 전통문화와 외래문화에 대한 가치판단, 창조와 비판이라는 방식의 다양성으로 인해 다각도의(multiangulated) 다중규정(overdetermination)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now and here)에 적실(適實)한 해결책도 시간의 고험(考險)을 견뎌내지 못하기도 했고, 급박한 현실에서 당장은 요원해 보이는 해결책을 포기했을 때 뒤따라온 후과(後果)로 앞서 거둔 성과까지 말아먹은 사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 다른 시행착오를 경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