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제3세계 특수주의와 마오이즘

ycsj 2023. 11. 27. 10:14

<'중국중심주의'와 '대한족주의' 비판>에 이어서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서양 보편주의의 산물인 오리엔탈리즘과 제3세계 특수주의의 관계다. 레이 초우는 “오리엔탈리즘과 내셔널리즘 또는 토착주의(nativism) 같은 특수주의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이며, 한쪽의 비판은 다른 쪽의 비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Chow, 1993: 5)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미국인 중국학자의 연구와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중국학자들의 연구가 모두 일면적이고 양자 모두 중국이라는 현실을 호도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

동아시아는 유럽 모던을 꾸준히 학습해왔다는 점에서 유럽 학습의 우등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등생 내에서도 계서(階序. hierachy)는 있지만,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 비하면 우등생임이 틀림없다. ‘유럽의 모더니제이션’이 지구화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근현대화’는 외부에 의해 강제된 측면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의 모더니제이션을 자기화·내면화하는 과정을 겪기도 했다. ‘반제 구망’이라는 구호는 전자에 대응한 것이고, ‘반봉건 계몽’이라는 구호는 후자의 측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아울러 그 과정은 국정(國情)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한국과 중국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근현대화’와 ‘식민지 근현대화’를 공통분모로 하되, 1945년 이후 분기되어, 한국은 자본주의 근현대화가, 중국은 사회주의 근현대화가 ‘역사적으로’ 조합되고 변이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동아시아 근현대가 유럽 모던을 열심히 학습해 나름의 성과를 거둘 즈음, 유럽은 기존의 ‘모던’을 비판․해체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동아시아의 아포리아’가 출현한다. 동아시아가 유럽의 모던을 따라잡기 위해 한 세기 이상 분투했는데 유럽은 동아시아가 추구해온 그것을 다시 해체하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우리는 마오쩌둥의 ‘반제반봉건 혁명론’을 유럽의 모던을 따라잡으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반제반봉건 혁명론’은 한 세기를 풍미했던, 중국에 국한되지 않았던 ‘제3세계 혁명론’으로 주목받았다. 마오쩌둥의 ‘반제반봉건 혁명론’은 중국의 근현대적 과제가 서양을 학습(반봉건)하는 동시에 서양을 배척(반제)해야 하는 이중적 투쟁임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역사적․사상적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중국의 근현대가 태평천국운동, 변법유신, 신해혁명을 거쳐 신민주주의 혁명에 이르러서야 ‘부정의 부정’의 역사 발전과정을 완성했다는 평가(리쩌허우, 2005a: 753)는 타당성을 가진다. 중국 근현대 과제의 이중성에 대한 마오쩌둥의 인식이 전제되었기에, 리쩌허우의 ‘계몽과 구망의 이중 변주’라는 개괄이 나올 수 있었다. 또한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한 형태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신중국 성립 이후 마오쩌둥의 혁명주의 노선을 ‘모더니티에 반(反)하는 근현대화 이데올로기’로,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을 ‘모더니티를 추구하는 근현대화 이데올로기’로 개괄한 왕후이의 논단(汪暉, 1998)도 마오쩌둥의 이론에 빚지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 계승에 관한 태도로서의 반봉건은 그 방법론에서 외래 수용에 의존했고, 외래 수용에 관한 태도로서의 반제의 길은 ‘중국화’로 회귀했다. 다시 말해, 마오쩌둥 이래 중국 근현대의 이중적 과제의 해결책에서는 끊임없이 전통과 외래에 대한 태도의 문제가 착종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제시한 이중 과제의 궁극적 해결책은 ‘중국화로의 환원’이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마오쩌둥은 이론 차원에서는 이중 과제를 설정했으면서도 실천 과정에서는 하나를 결락하거나 유보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에 대해 이전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논술했다: 내가 보기에 마오쩌둥은 ‘중국의 장기 근현대’ 과정에서 최소한 세 가지 ‘이형동질’(異形同質, allomorphism)의 오류를 범했다. 첫째, ‘반봉건과 반제의 이중 과제’를 설정하고도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반봉건을 유보하고 반제를 주요 과제로 선택함으로써 ‘반제가 반봉건을 압도’한 상황을 연출했다. 둘째, 1942년 「옌안(延安) 문예좌담회에서의 연설」에서 ‘보급(普及)과 제고(提高)의 쌍방향적 관계’를 훌륭하게 개괄해놓고도 실행 과정에서는 ‘제고를 유보한 보급’의 수준에 머물렀다. 셋째, 마오쩌둥은 근현대화의 목표와 사회주의적 열망이라는 이중 과제 가운데, 부지불식간에 사회주의 목표를 공업화에 종속시키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사상가로서의 마오쩌둥이 통치자로서의 마오쩌둥에게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사상가로서의 마오쩌둥은 ‘반제와 반봉건’, ‘보급과 제고’, ‘근현대화와 사회주의 목표’라는 이중 과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지만, 현실 정치를 지도하는 마오쩌둥은 이중 과제를 추진할 역량이 부족했다. 이에 대해서는 첸리췬도 “사상의 실현은 곧 사상 자체와 사상가의 훼멸(毁滅)”(전리군 2012-상, 23)이라 평가함으로써, 마오쩌둥이 사상과 행동의 일체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실천을 중시하다가 철저한 비타협의 초월적인 사상을 훼멸시켰다고 했다. 통치자로서의 마오쩌둥은 중국 현실에서 가능한 과제를 추진하다 보니, ‘반봉건을 유보한 반제’와 ‘제고를 유보한 보급’에 역점을 둘 수밖에 없었으며, 표층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열망을 내세웠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공업화에 종속시키고 말았다. 바꿔 말하면,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미명 아래 복잡한 모순을 단순한 과제로 바꿨다. 이는 가치 지향으로서의 모더니티/근현대성이 역사 과정으로서의 모더니제이션/근현대화에 매몰된 것과 유사하다.(임춘성, 2021b: 221~222) 사상가/이론가로서의 마오쩌둥은 근현대 중국의 이중 과제(반제와 반봉건), 사회주의 중국의 이중 과제(근현대화의 목표와 사회주의적 열망), 새로운 인민문학의 이중 과제(보급과 제고)를 훌륭하게 추출했지만, 혁명가/통치자로서의 마오쩌둥은 이중 과제에서 우선순위를 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선택은 상호 대립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인 이중 과제 가운데 하나를 주요 과제로 삼았으며 그 결과 제3세계 특수주의의 편향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는 ‘마오쩌둥의 3대 이형동질의 오류’이고, 그것은 중국의 제3세계 특수주의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