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홍콩영화를 운위할 때 웡카와이(1958년생)와 프룻 찬(1959년생)은 좋은 대비가 되고 있다. 하나는 ‘뿌리없음(rootlessness)’으로 다른 하나는 ‘풀뿌리 성격(grassrootness, 草根性)’으로 홍콩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연배가 비슷하고 데뷔작 <몽콕 카르멘(旺角卡門)>(1988)과 <마지막 혈투(大閙廣昌隆)>(1993)가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공통점 외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성명작 <아페이 정전>과 <메이드 인 홍콩(香港製造)>의 출시는 7년의 차이가 있다. 웡카와이는 홍콩 영화산업의 장점을 한껏 활용하고 일급 배우들을 캐스팅하면서 각 배우의 또 다른 개성을 발굴해내는 반면, 프룻 찬은 저예산과 연기 경험이 없는 신인배우 캐스팅의 독립영화식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중국 영화사가 루사오양은 홍콩영화의 특징으로 ‘다원성’, ‘풀뿌리 성격’, ‘상업성’, ‘유행성’을 언급하면서 그중 ‘풀뿌리 성격’의 대표로 앤 후이와 프룻 찬을 들었다. 특히 프룻 찬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의 영화의 시점(視點)은 <메이드 인 홍콩>부터 <홍콩의 할리우드(香港有個荷里活)>까지 줄곧 홍콩의 평민 백성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는 엄숙하고 냉정한 서사와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비판 정신으로 집요하게 홍콩 보통 사람의 전기를 쓰고 그들의 심성(心聲)을 전달하고 있다”(陸紹陽, 2004: 177). 또한 쓰뤄(司若, 2004)는 프룻 찬의 영화를 “현대 도시 제2의 역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사실 프룻 찬은 주류 홍콩영화에서 벗어난 채 홍콩 사회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는 감독이다. “홍콩 독립영화 역사의 전설을 창조”한 바 있는 <메이드 인 홍콩>(1997)을 찍으면서부터 그는 화려한 국제도시로서의 홍콩보다는 뒷골목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생활하는 ‘문제 청소년’, ‘주변인’, ‘하위 타자(subaltern)’ 군상에 착안해 리얼리즘 풍격으로 파편화된 영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1980년대 이래 홍콩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반환 문제를 담아내고 있다.
프룻 찬의 초기작으로, 공공옥촌에서 성장한 ‘문제 청소년’ 이야기를 다룬 <메이드 인 홍콩>(1997), 영국 군대에 복무하다가 부대 해산으로 강제 퇴역한 중국인 군인들의 출로 문제를 다룬 <불꽃이 유난히 많았던 작년(去年煙花特別多)>(1998), 몽콕(旺角) 뒷골목에 사는 9살 청자이(祥仔)와 불법체류 소녀 아펀(阿芬)이 목도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담은 <리틀 청(細路祥)>(1999)이 있는데, 이들은 각각 청소년, 중년,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아 1997년 회귀를 전후한 시점의 홍콩의 뒷골목 풍경을 그려냄으로써 ‘97 삼부작’ 또는 ‘과도기 삼부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기녀 삼부작’의 두 작품 <두리안 두리안(榴蓮飄飄 Durian Durian)>(2000)과 <홍콩의 할리우드(香港有個荷里活 Hollywood Hong Kong)>(2002)에서는 홍콩과 중국을 직접 연결하는 매개로 기녀 샤오옌(小燕)과 둥둥(東東 또는 紅紅)을 등장시키고 있다. 하나는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오고 다른 하나는 상하이에서 왔다. 똑같은 기녀라도 두 사람은 다르다. 샤오옌은 단순히 몸을 팔아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둥둥(훙훙)은 홍콩 남성들을 등을 쳐서 번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려고 한다. 샤오옌은 돈을 벌기 위해 하루에 수십 명의 손님을 받기도 하지만(마지막 날의 38명은 최근 반년간의 신기록이라 했다) 둥둥은 자유롭게 놀러 다니면서 대상을 물색해서 관계를 맺고 미성년자와 매춘을 했다고 공갈 협박을 해서 금품을 갈취한다. 그중 하나는 거절했다가 손을 잘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97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리틀 청>을 중심으로 홍콩 뒷골목의 에스노그라피적 재현의 각도에서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리틀 청>은 감독의 어릴 적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청자이가 보고 듣고 살아가는 몽콕 뒷골목의 이야기다. 영화는 1996년 겨울부터 1997년 봄까지 영국이 아직 홍콩을 통치하고 있을 때를 배경으로 삼았다. 첫 장면은 TV에서 방영하는 광둥어 오페라(粵劇)와 함께 청자이의 독백으로 시작하고 있다. 9살의 청자이는 스스로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음을 선언한다. 그동안 관찰의 결과 아빠의 식당, 필리핀 가정부의 일, 엄마의 마작, 브라더 청의 노래 등 어른들의 활동 목적이 모두 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청자이는 돈이 사람들 마음속에서 꿈이자 이상이고 심지어 미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동네 사람들이 열심히 돈벌이하는 것을 탓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도 예외가 아님을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청자이는 몽콕 뒷골목의 ‘내부 관찰자’인 셈이다.
앞당겨 말하면 아홉 살의 청자이가 영화에서 1년 가까이 관찰한 결과는 자신이 터득했다고 생각한 세상 이치에서 벗어나는 것들이었다. 할머니의 죽음이 그랬고 필리핀 가정부와의 이별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동업자 관계가 끝난 아펀과의 헤어짐도 가슴 아픈 상처로 남게 된다. 자신도 우연히 할머니에게서 들은 형 이야기로 인해 돈벌이보다는 ‘형 찾기’에 몰두한다.
그런데도 청자이가 터득한 세상 이치는 상당 부분 유효하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1996년 이곳 사람들은 매우 조급했고 걸핏하면 돈 때문에 다퉜다. 데이비드와 케니 형제도 재산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그 형제는 이전에 이웃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의가 좋았었지만 지금은 모친이 공동명의로 구매한 건물 때문에 다투고 있다. 결국 비열한 형 데이비드가 건물을 차지하고 고상한 동생 케니는 부인과 외국으로 떠난다.
청자이는 학교에 다니면서 아버지 식당의 배달을 맡아 해서 거리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 우선 학교에서는 반환 준비 장면이 두 번 나온다. 푸퉁화 학습과 오성홍기 게양 시범이 그것이다. <첨밀밀(甛蜜蜜)>에서는 홍콩에 온 대륙인이 열심히 광둥어를 배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반해, 반환을 앞둔 시점을 다루고 있는 <리틀 청>에서는 초등학교에서 푸퉁화를 학습하며 오성홍기를 게양하고 국기에 경례를 가르치고 있다. 그 외에도 장례식장, 마작 도박장, 이발소, 체육관, 유곽 등이 등장한다. 아울러 너저분한 거리와 뒷골목은 일상적인 삶의 현장이다.
홍콩 회귀가 임박하면서 청자이는 친구이자 동업자인 아펀과 커우룬(Kouloon, 九龍)에 놀러 갔다가 언쟁을 하게 된다. 아펀은 말한다. “장(江) 주석이 홍콩은 우리 것이라 했어!” 이에 대해 청자이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너희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야!”라고. 다행히 이들의 언쟁이 다툼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청자이에게 홍콩은 중국 대륙과 하나일 수 없는 독립 공간이다. 그리고 청자이 아버지가 청자이를 으르면서 하는 말은 “먹을 것도 없는 대륙에 보내버린다”였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청자이는 점차 명랑함을 상실해간다. 할머니의 죽음, 필리핀 가정부의 떠남, 아펀과의 헤어짐 등에다가 아버지의 억압이 강도를 더해간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메이드 인 홍콩>의 주인공 3명의 모습을 슬쩍 비춰줌으로써 청자이의 미래가 중차오(中秋)일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중차오는 공공옥촌과 뒷골목에서 성장한 주변부 청소년들의 하나로, 영화는 그들의 “갇혀 있는 듯한 몸부림을 반영”(列孚, 2002: 43)하고 있다. 청자이가 자신의 문제로 고민하자 아펀이 관찰자의 역할을 이어받는다. 그녀는 지금 뒷골목에 살지만 홍콩에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불법체류자다. 그녀의 눈에 청자이가 속한 세계는 동경의 대상이다. 그곳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경찰에 붙잡히고 만다.
아펀의 가족은 구성원과 배역 그대로 <두리안 두리안>에도 출연하고 있다. 영화 내적 시간은 3개월짜리 관광비자가 유효한 것으로 보아 <리틀 청>보다 약간 앞서 있다. 아펀은 <두리안 두리안>에서는 주인공 샤오옌(小燕)을 관찰한다. 샤오옌은 고향 헤이룽장(黑龍江)성으로부터 돈을 벌기 위해 홍콩에 왔다. 그녀는 밑천이 들지 않는 장사인 기녀 노릇을 한다. 시간과 돈을 절약하기 위해 대부분의 식사를 도시락으로 때우는 샤오옌은 관광비자의 시한 때문에 하루에 수십 명의 손님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업을 하려고 한다. 홍콩의 북진을 연상시키는 구상이다. 두리안은 과일의 왕으로 불린다. 껍질 벗기기가 어렵고 냄새도 고약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견디고 참맛을 느끼는 순간에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과일이다. 고난의 하층 타자에게 감독이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국제도시 홍콩에는 수많은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동남아인이 주류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홍콩영화에서 동남아인은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지만 상당히 많은 영화에서 ‘슬쩍슬쩍’ 등장하고 있다. 그에 반해 프룻 찬은 <리틀 청>에서 주인공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필리핀 여성을 비교적 따듯한 시선으로 약간의 편폭을 할애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필리핀 가정부는 연로한 할머니의 보모로 고용됐지만, 초등학생 청자이를 보살피고 식당 일까지도 돕는다. 불평도 제기하고 특근 수당을 달라고 주장하지만 할머니와 청자이를 정성스럽게 돌본다. 이로 인해 청자이에게 그에 부응하는 대접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감독은 필리핀 남편의 외도로 인해 그녀가 고민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홍콩에서 필리핀 가정부의 존재는 ‘가정부로서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다양한 규율과 통제, 직업의 인종화, 필리핀인 커뮤니티를 통한 자기통제와 탈 섹슈얼리티(de-sexualization)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필리핀 가정부는 홍콩인의 가정이라는 친밀한 공간에 있지만 없는 존재처럼 행동해야 하고, 노동을 통해 가정의 재생산―궁극적으로는 홍콩사회의 재생산―과정에 참여하지만 가정과 사회라는 공간에서 소외된 사람이다. 이들의 사적/사회적 정체성은 필리핀에 있는 가족, 필리핀이라는 상상적 모국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회복되고 유지된다”(윤형숙, 2005: 141). 그러나 어릴 때 ‘식모 언니’의 기억이 있는 필자로서는 생활에서의 유대가 빚어내는 현상을 이 영화에서 볼 수 있었다. 이는 청자이의 가정이 중하층에 속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청자이에게 필리핀 가정부는 엄마와 아빠보다 가까운, 그래서 힘든 일이 있을 때 달려가 품에 안기기도 하고 그녀가 떠날 때 이별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힘든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홍콩의 할리우드>는 우언과 상징이 가득한 작품이다. 성완(上環) 할리우드(荷里活)가에 세워진 주상복합 건물 할리우드 플라자와 판자촌 다칸춘(大磡村)을 대비시키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엽기적 상상력의 동원이다. 제작진 소개를 돼지고기에 찍는 도장으로 대신하는 것도 그렇고 손목을 잘랐다가 붙이는 것도 그렇다. 웡츠컹(黃志强)은 둥둥에게 걸려 손목을 잘린다. 그는 잘린 손목을 주워 중국의 전통 의술로 붙이지만 같은 날 잘린 다른 사람의 손을 잘못 붙여서 왼손이 두 개가 된다. 영화 말미에는 오른손이 둘인 사람이 등장한다. 굳이 ‘홍콩 반환’과 관련지어 해석해보면, 잘려 나간 것은 홍콩이었고 그것을 중국이 붙여보려 하지만 기형적인 형태가 되고 만다.
프룻 찬의 엽기적 상상력은 <리틀 청>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청자이에게 음료를 배달시키고 돈을 지급하지 않는 데이비드에게 ‘오줌으로 만든 차’로 복수하고, 음료를 가로채는 데이비드에게 기녀 누나는 ‘생리대 티백’으로 골탕을 먹이고 있다. 아펀은 훗날 데이비드의 당뇨병이 ‘오줌 차’ 때문이라고 자책하기도 한다. 또한 <인육 만두>에서는 불로장생용 건강식과 미용식으로 ‘부화 직전의 알’과 ‘태아 만두’가 등장하기도 한다. 엽기적 상상력은 그가 더럽고 붐비고 어둡고 타락한 홍콩의 뒷골목과 문제 청소년, 불법체류자, 기녀, 외국인 등의 하위주체 홍콩인을 다루면서 자연스레 체득한 극복과 해학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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