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웡카와이 영화와 홍콩인의 정체성

ycsj 2023. 10. 6. 09:35

웡카와이의 영화는 대부분 196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기본 아우라(aura)는 1990년대에 속한다. 흔들리는 렌즈, 파편적 서사, 꼴라쥬, 반쯤은 즉흥적인 창작방식, 주크박스 음악의 대량 사용, 자폐적 독백 등에서 관중들은 어렵지 않게 1990년대와 대응시킬 수 있다(朗天, 潘國靈·李照興編, 2004: 5~6). 특히 <아페이 정전(阿飛正傳)>의 쉬자이(旭仔)는 1960년대 홍콩의 젊은이를 묘사하면서도 그것이 1960년대에 한정되지 않는 문화적 코드(반항 등)로 자리 잡았고 이후 웡카와이 영화의 원형이 되었다. <충칭의 삼림>의 주인공들과 <동사와 서독>의 동사와 서독은 각각 최근과 고대의 쉬자이로 볼 수 있다. 특히 동사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느낌을 알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후기 영화 <2046>은 <아페이 정전>의 속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물론 <花樣年華>의 속편이라 할 수도 있다).

웡카와이 영화의 특징의 하나는 회귀를 앞둔 홍콩인들의 불안한 심리에 초점을 맞추어 ‘홍콩인다움(HongKonger-ness)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점이다. <충칭의 삼림>에서는 두 쌍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매개로 하여, 영국 황실의 제복을 벗어 던짐으로써 식민통치의 종결을 선언하였고, 시한이 된 통조림을 통해 잉글랜드에 의해 가공된 홍콩의 조차기간이 끝났음(금발여인이 배신자 서양 남성을 처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타락한 천사>에서는 파트너 교환의 문제를 통해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중국으로 반환되는 과정의 어려움을 예견하기도 하였다. 이 두 편은 자매편이라 할 수 있는데, 그 흔적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두 편에 등장하는 가네시로 다케시(Kaneshiro Takeshi, 金城武)는 양쪽에서 모두 허즈우(何志武)이고 번호도 223호이다. 다만 <충칭의 삼림>에서는 실연한 경찰로 등장하지만 <타락한 천사>에서는 농인 탈옥수로 분장하고 있다. 그리고 비슷한 분위기의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다. 그리고 후기 영화 <2046>에서는 회귀 후 50년이 지난 시점인 2046년이란 시간과 ‘오리엔트 호텔’ 2046호실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동안 몇 차례의 단기 여행을 통한 ‘관찰’에 의하면 이른바 ‘홍콩인’은 홍콩인과 이야기할 때 대부분 광둥어(廣東語, Cantonese)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푸퉁화(普通話, Mandarin)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영어와 푸퉁화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지식인들도, 외국인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조차 자기네들끼리는 광둥어로 한다. 언어가 ‘내셔널 정체성’(national identity)의 일부분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홍콩인에게는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언어만으로 홍콩인의 정체성을 운위할 수는 없지만, 광둥어 사용은 홍콩인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체성을 의식하는 홍콩인들은 대부분 이름을 광둥어 발음으로 표기한다. 일찌감치 국제도시의 명성을 날린 홍콩이기에 영어식 이름을 가진 사람도 많지만 그들도 성만큼은 광둥어로 표기한다(앞에 언급한 윌리엄 웡을 보라).

<충칭의 삼림> 첫 번째 이야기 후반부에서 허즈우가 카페에서 금발여인에게 다가가 건네는 첫 마디는 “파인애플을 좋아하세요?”였다. 그런데 그는 우선 광둥어로 묻고는 금발여인이 아무 반응이 없자 “오, 본지인이 아니군”(“She must be foreign”)이라 독백하고는 일어, 영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궈위(國語, 타이완의 표준어)로 묻는다. 여기에서 본지인이란 물론 홍콩인을 가리킨다. 그는 다섯 살에 타이완에서 왔는데도 스스로를 본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광둥어 구사 능력은 본지인 판명 여부의 시금석인 셈이다.

홍콩을 바라볼 때 빠뜨릴 수 없는 분야가 소비다. 그런데 고든 매츄(Mathews, Gorden)는 홍콩에서의 소비를 문화적 정체성과 연결해 ‘문화 슈퍼마켓(cultural supermarket)’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소비를 경제적인 행위로만 국한하지 않고 문화적인 일이기도 하다고 하면서, 소비는 상품을 교환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의미이자 기호이기도 하다고 해석한다. “홍콩에서는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려 없이 소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것이다. 이는 “특정한 문화와 네이션에 속한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전 지구적 문화 슈퍼마켓에서의 소비자가 되는 것”(Mathews, 2001: 287)과 관계가 있다. 우리는 일반 슈퍼마켓에서 상품을 소비하듯이, 문화 슈퍼마켓에서 정보와 아이디어를 소비한다. 그런데 문화 슈퍼마켓에서의 소비는 일반 슈퍼마켓에서의 소비의 기초가 된다.

<타락한 천사>의 허즈우는 밤마다 다른 사람의 가게를 무단으로 빌려 밑천 안 드는 장사를 하는데, 우연히 전화 거는 여자를 만나 자신이 가게가 되어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녀는 필요한 ‘위안’이라는 정서를 소비(구매)하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난다. 마치 슈퍼마켓에서 필요한 물건을 소비(구매)하고 떠나듯이. <충칭의 삼림>에서 경찰 223호에게는 파인애플 통조림이 사랑이고 경찰 663호에게 사랑은 주방장 샐러드로 다가온다. 이들에게 사랑은 마치 슈퍼마켓에서 구매할 수 있는 상품과도 같다.

<충칭의 삼림>에서는 또한 반복적으로 ‘선택’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오늘 그녀는 파인애플을 좋아하지만 내일은 다른 것을 좋아할 수 있다.”(금발여인) “오늘 그녀는 나를 좋아하지만 내일은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다.”(경찰 223호) “오늘 그녀는 주방장 샐러드를 좋아하지만 내일은 다른 것을 좋아할 수 있다.”(경찰 663호) 경찰 663호의 여자친구가 떠난 이유는 다양성(diversity)에서 연유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상반되게 진행되었다. 홍콩인에게 ‘항인치항(港人治港)’은 허울 좋은 명목일 뿐 그들에게는 자율적 선택의 자유가 없다.

웡카와이는 ‘다양한 선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꼴라쥬’ 기법을 사용하여 첫 번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이미 두 번째 이야기의 조각을 삽입시켰다. 영화에서 “첫 번째 경찰과 두 번째 경찰, 이 스튜어디스와 저 스튜어디스, 이 금발여인과 저 금발여인은 모두 호환될 수 있다”(也斯. 潘國靈·李照興編, 2004: 20). 이는 한편으로는 포스트모던한 텍스트를 연상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이 중국으로 치환되어도 별 차이가 없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홍콩인다움을 광둥어의 사용, 문화적 슈퍼마켓,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선택권을 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는 홍콩과 홍콩인의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