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홍콩영화와 1997년

ycsj 2023. 10. 6. 09:30

장이머우(張藝謀)와 허우샤오셴(侯孝賢)이 알려지기 훨씬 전, 우리는 홍콩영화를 중국영화 전부로 알았고 홍콩영화는 한국인의 주요한 오락거리의 하나였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1968년)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가 발표된 후 첫 휴일이었던 ‘제헌절’, 입시에서 해방된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친구들과 <삼인의 협객(邊城三俠)>(1966)을 감상한 것이 필자 기억 속의 첫 번째 홍콩영화였다. 이후 지미 웡(Jimmy Wong: 王羽)은 ‘외팔이 시리즈’와 함께 나에게 친숙한 외국 배우가 되었고 1970년대의 브루스 리(Bruce Lee: 李小龍)가 그 뒤를 이었으며 그 후 재키 찬(Jackie Chan: 成龍)이 나왔다. 여기에 창처(Chang, Cheh: 張徹)―킹 후(King Hu: 胡金銓)―추이 학(Tsui, Hark: 徐克)의 무협영화, 그리고 진융(金庸)―량위성(梁羽生)―구룽(古龍) 등 ‘무협소설의 영화화’를 더하면 홍콩의 궁푸(gongfu, 工夫) 및 무협영화의 주요 흐름이 요약되는 셈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오락으로 다가왔던 홍콩영화는 그 밖에도 SFX 영화, 코미디영화, 멜로드라마, 괴기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우리를 사로잡았고, 한때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영화산업을 일구어낸 바 있다. 이에 대해 중국 영화사가 루사오양(陸紹陽)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홍콩은 아시아의 주요한 영화기지로 지금까지 8천여 편의 영화를 촬영했다. 홍콩영화의 수출은 아시아에서 독점적이고 … 동남아 시장만 하더라도 1995년도 수익은 1억 3천만 달러에 이르렀다.”(陸紹陽, 2004: 175) 흔히 홍콩을 ‘문화의 사막’이라고 일컬을 때의 ‘문화’는 영화문화를 가리킨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홍콩에서 영화는 100주년이 넘었고, 1930년대부터 상하이의 영향을 받아 활발하게 발달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상하이 영화인들의 남하로 홍콩은 중국영화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홍콩영화는 ‘문화의 사막’이라는 정의에 포함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규모 면에서 단지 할리우드에만 첫 번째 자리를 양보할 뿐인 홍콩영화의 주류는 오락영화였다. 오락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를 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덕분이다. 대중문화를 “지배이데올로기를 쉽게 재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의 제조기”(스토리, 2000: 13)로 보는 구조주의의 평가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상상적 자아도피”라고 파악하는 리처드 말트비(Maltby, Richard)는 대중문화를 “집단적 소망과 욕망을 위장된 형태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대중문화의 공과(功過)를 이렇게 정리한다. “대중문화의 죄가 우리의 꿈을 빼앗아서 그것을 다시 포장하여 우리에게 되판 것이라면, 대중문화의 공로는 그것이 없었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더 많고 다양한 꿈들을 가져다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홍콩영화가 홍콩인의 고상하고 우아한 꿈을 빼앗았는지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지만, 홍콩영화야말로 홍콩인에게 ‘많고 다양한 꿈들을 가져다준’ 대중문화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오락영화 위주의 홍콩영화는 1970년대 말 60명이 넘는 신인 감독이 데뷔하면서 뉴웨이브(New Wave) 영화를 통해 작가영화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더니, 1990년대에는 뉴웨이브 2세대 감독이랄 수 있는 웡카와이(Wong, Kar-wai: 王家衛) 붐이 <2046>(2004)까지 이어지는 한편, 1990년대 말에는 프룻 찬(Fruit Chan; 陳果)의 ‘97 삼부곡’과 ‘기녀 삼부곡’ 등 홍콩 에스노그라피 텍스트가 뒤를 잇고 있다.

한국의 아시아영화 전문가 김지석은 홍콩영화의 강점으로 세 가지를 꼽고 있다. 첫째 중국문화와 서양문화의 공존에서 비롯된 합리성과 다양성, 둘째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펼쳐진 화교 관객층, 셋째 그 어떤 아시아 국가보다도 뛰어난 제작의 효율성(김지석, 2000: 62)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동남아 화인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요인 외에도 3천만에 가까운 인구가 홍콩영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97년 홍콩 반환이라는 각도에서 홍콩영화를 고찰할 때 김지석·강인형(1995)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香港電影 1997년―홍콩영화의 이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1997년 반환의 관점에서 홍콩영화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1970년 이후의 홍콩영화는 대부분 홍콩인의 정체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인내와 금욕주의, 철저한 자기 수련으로 대표되는 이상적인 중국인상”(김지석·강인형, 1995: 37)을 만들어낸 브루스 리의 영화가 홍콩영화의 지구화(globalization) 방향을 대표하고 있다면, 젊은 층들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문화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광둥어영화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김지석·강인형, 38)한 것은 ‘지역화(localization)’와 관련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1984년 덩샤오핑(鄧小平)과 마가렛 대처의 회담으로 1997년 반환을 구체적으로 의식하게 된 1980년대에, 새로 등장한 뉴웨이브 감독들의 알레고리 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밖의 홍콩영화도 ‘반환’과 연계시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중국과 타이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홍콩 고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을 포함하는 ‘홍콩영화의 현대화’ 방향과도 관련이 있었다.

홍콩 뉴웨이브의 선두주자인 앤 후이(Ann Hui: 許鞍華)는 ‘베트남 삼부작’의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내객(來客)>(1978), <우비엣 이야기(The Story of Woo Viet, 胡越的故事)>(1981), <투분노해(投奔怒海)>(1982)가 그것이다. 이 작품들은 1975년 베트남이 패망한 뒤 베트남을 탈출한 화교들의 비극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앤 후이 영화의 강점은 베트남을 진지하게 영상에 담으면서 이를 1997년 홍콩에 대한 알레고리로 연결하고 있는 점일 것이다.

한편 코미디영화 중 1980년대 최고 히트작이자 역대 최고 흥행작의 하나이기도 한 <최가박당(最佳拍檔: 최고의 파트너)>시리즈(1편 1982, 2편 1983, 3편 1984)는 1980년대의 홍콩인들의 사회적 심리변화를 적절히 반영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1989년에 내놓은 <신최가박당>은 1997년을 의식하고 중국에 아부하다가 오히려 홍콩인들의 자존심을 자극하여 관객의 외면을 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홍콩인의 위기의식이 더욱 고조된 셈이다. 또한 홍콩영화의 특수성이 잘 발휘된 괴기영화도 홍콩인들의 위기의식과 불안한 심리상태나 정서를 은연중에 반영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홍콩인들은 중국인들을 자신과 유사한 친숙한 이웃으로 느끼면서도 때로는 마치 귀신을 대하듯 낯선 감정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모순적이며 변화무쌍한 홍콩인들의 대중국관을 반영한 셈이다(김지석·강인형, 45, 47).

우리에게 홍콩 영웅영화의 원조로 알려진 <영웅본색(英雄本色)> 시리즈는 전통적인 무협-궁푸영화 주인공 캐릭터의 현대화로 볼 수 있다. 존 우(John Woo, 吳宇森)가 감독한 1편과 2편은 “특수효과나 스턴트 효과의 극대화를 통한 폭력의 지나친 미학화, 극단적으로 감상적인 스토리, 무용 동작 같은 총격전, 양식화된 명예 지상주의, 무협영화에서 보편적인 명예․배신의 테마 등은 관객들의 정서를 충분히 자극 … 지하세계의 의리와 명예를 강조 … 향상된 여성의 지위에 대한 반작용 … 영국 총독부의 레임덕 현상의 반영”(김지석·강인형, 50) 등의 평가를 받기도 한다. 특히 <영웅본색Ⅰ>이 개봉된 1986년은 홍콩인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된 시기이기도 하다. 홍콩인들은 ‘폭력의 낭만적 표현’에 열광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의리와 폭력의 미묘한 결합에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이다. 특히 주인공 초우윤팟(Chow Yun-Fat, 周潤發)은 물질주의에 함몰되었다가 자기 운명에 도전하는 ‘낭만적 영웅’으로 출현하여 불안한 홍콩인들에게 있어 순간적이나마 대리만족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의 이미지는 과거 검술영화의 주인공의 친숙한 이미지에 오늘날 홍콩인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교묘히 결합했기 때문에 대중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김지석, 1996: 192~193).

이와 달리 1편과 2편의 제작에 참여한 추이 학(Tsui Hark, 徐克)이 감독한 제3편은 ‘석양의 노래(夕陽之歌)’라는 부제를 달면서 1974년의 사이공을 배경으로 삼아 표면적으로는 공산화 직후 사이공을 배경으로 삼은 액션 멜로드라마이지만, 심층적으로는 다가오는 홍콩 반환이라는 주제를 중첩하고 있다. 독일의 중국학자 슈테판 크라머(Kramer, Stefan)는 추이 학에 대해 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동남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영화관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비평가와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은 바 있는 추이 학의 영화는 “암시와 상징 속에서 민감하게 전달되는 은유적 표현이 돋보이며 인간의 생명력을 강조하는 스피디한 카메라워크와 편집이 아주 탁월하다”라는 평가를 받는 ‘고품격 오락영화’가 주종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의 새로운 미학은 다양한 스타일을 혼합했을 뿐만 아니라 스피디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기교적인 최고의 영상을 선사했다. 그리고 홍콩의 현실과 전통적 영웅 이야기, 사실적인 액션 스릴러와 다채로운 안무의 무대극을 두루 섭렵함으로써 대중영화와 예술영화 사이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파괴했다”(크라머, 2000: 329~330). <영웅본색 Ⅲ>에서도 기존의 오락영화에 홍콩 사회와 연관된 주제를 결합했다.

한편 홍콩영화를 보다 보면 국제도시의 명성에 걸맞게 외국인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동남아인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의 화난(華南) 경제권과 동남아를 중개해온 홍콩의 역사적 역할(하마시타, 1997)로 인해 동남아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홍콩영화에는 동남아 이야기가 적지 않게 서사되고 있다. 물론 홍콩영화의 동남아 서사는 동남아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즉 동남아에 거주하는 화인과 홍콩에 이주한 동남아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 2004년 개봉된 유하 감독의『말죽거리 잔혹사』는 <이소룡세대에게 바친다>는 감독의 의도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영화는 브루스 리에서 시작해 재키 찬으로 끝나는데, 영화 속 주인공 세대가 받은 홍콩영화의 세례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 ‘쇼 브라더스(邵氏兄弟)’는 1961년 기준으로 10개의 스튜디오, 16개의 야외세트, 3개의 더빙스튜디오, 현상소, 기숙사를 보유했고 전속 연기자가 1,500여 명, 전속스탭이 2,000여 명에 달하는 등 전무후무한 영화왕국을 이루었다. 60년대에 쇼 브라더스가 제작한 연간 편수는 40여 편에 달했고, 보유극장도 홍콩을 비롯해서 타이완, 동남아, 캐나다, 미국에 이르기까지 143개나 달했다. 그런가 하면 TV 시대를 맞아 TV B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여 제1의 대주주가 되기도 했다(김지석·강인형 1995, 33~34).

*** 1970년대 말 홍콩 뉴웨이브 영화의 배경에는 량수이(梁淑怡)라는 탁월한 기획․제작자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는 ‘후이브라더스쇼’와 ‘73시리즈’, ‘수퍼스타’ 시리즈, TV영화(연출자의 재량권을 최대한 존중) 등을 통해, 앤 후이(許鞍華), 임 호(嚴浩), 추이 학(徐克) 등의 감독을 배양했고 그들 중 상당수가 영화계로 입문했다.(김지석·강인형 1995, 42) 1970년대 말 동아시아에서 홍콩 뉴웨이브 영화의 영향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타이완의 ‘신랑차오(新浪潮)’의 대표인 허우샤오셴(侯孝賢)과 에드워드 양(楊德昌) 등과 그리고 중국 대륙의 5세대 감독들이 홍콩 뉴 웨이브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증거를 말할 수는 없지만, 시간적으로 그리고 테크닉의 측면에서 차감했을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