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대를 비판하며 등장한 젊은 신생대 감독들은 ‘6세대’라고 불리는데, 이들이 국제영화제를 겨냥해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선배인 장이머우 등에서 배운 것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한국 관객에게 이들의 초기 작품―장위안(張元)의 <베이징 녀석들(北京雜種)>과 자장커(賈樟柯)의 <샤오우(小武)> 등―은 일부 평론가와 소수의 마니아 그룹을 통해 수용되었다.
6세대의 특징으로 도시영화와 독립 제작을 꼽을 수 있다. 전자가 영화의 제재 또는 배경이라면 후자는 제작 방식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도시영화는 예술, 정치, 자본, 주변성의 네 가지 요소들이 국내외의 ‘시장’을 중심으로 협상과 타협을 진행하면서 예술영화, 주선율영화, 오락영화, 독립영화의 지형도를 형성하고 있다(Zhang, 2002: 71~73). 5세대의 명성을 국내외에 날리게 했던 작품들은 대부분 농촌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던 것에 반해 이른바 “도시 환경, 현대적 감수성, 자아도취적 경향, 기획적 이야기, 다큐멘터리 효과, 우연한 상황, 개인주의적 지각, 불안정한 분위기”(Zhang, 2007: 53) 등의 특징을 가지는 ‘6세대’ 감독들은 ‘도시 리얼리즘’에 관심이 있다. 장전(Zhen Zhang)은 ‘도시세대(urban generation)’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2001년 봄 한 영화 프로그램에서 상영된, 도시화의 경험에 초점을 맞춘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한 젊은 영화제작자들을 가리키는 ‘도시세대’는 5세대 감독들의 국제적 명성과 억압된 1989년 민주운동이라는 이중 그늘에서 출현했다. 이 용어는 또한 국가 또는 상업적 주류(국내와 초국적)에 의한 ‘탈영토화’와, 그것을 소외시키거나 주변화하는 똑같은 힘에 의한 부단한 ‘재영토화’ 사이의 역동적 긴장에 사로잡힌 영화 실천을 지칭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도시영화는 21세기 광범한 스케일의 중국의 도시화 및 지구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사실 20세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중국 도시는 일반적 의미에서 도시화라는 면모에 부합되지 않았다. 중국에서의 도시화는 전쟁과 혁명, 자연재해와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 방해받았다. 개혁개방에 힘입어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포스트사회주의 프로그램들이 도시에 가시적 충격을 주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도시에는 활기 넘치는 소비자문화와 대량문화가 뿌리내리기 시작함으로써 본격적인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도시화’의 현장에서 그것을 재현하고 있는 ‘도시영화’는 최근 중국을 이해하는 적절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임춘성, 2017: 234).
1990년대 이후 중국 도시영화 지형도에서 주목할 부분은 독립영화라 할 수 있다. 이는 초기 6세대 감독의 중요한 표지로, 장위안(張元)의 <엄마(媽媽)>(1990)를 효시로 한다. 실험적 영화제작자들(장위안, 장밍, 러우예, 자장커, 왕취안안, 그리고 우원광 및 장웨와 같은 다큐멘터리 감독)과 약간 상업적인 감독들(예를 들어 장양과 스룬주)이 이 범주에 속한다. 독립영화 제작자들은 미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사회적․직업적 정체성의 측면에서 국가에 의해 훈련되고 고용된 앞선 세대와 달랐다. 독립영화 제작자들에게 1993년 7명의 영화제작자들에 대한 금지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조치는 일련의 ‘심화’ 개혁 또는 더욱 철저한 시장화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사회주의 영화 시스템은 이른바 자본주의화 과정을 향한 복잡한 탈바꿈을 시작하면서 한편으로는 지하영화에 제한을 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업적이고 무해한 장르에게 ‘새해 경축 코미디(賀歲片)’와 같은 특혜를 주었다. 아울러 상영 분야를 자극하고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오기 위해 국내외 제작영화에 적용되는 분장제(分掌制)가 시행되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젊은 독립 영화제작자들은 스튜디오와 시장경제의 변화 때문에 만들어진 틈새 공간을 탐험하면서 1994년부터 1996년까지의 가장 어려운 시절에 도전적인 영화들을 발표하였다. 장위안의 <광장>과 <동궁서궁>, 왕샤오솨이의 <한랭>과 <짐꾼과 아가씨>, 관후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러우예의 <주말의 연인>, 허젠쥔의 <우편배달부>, 닝잉의 <민경 이야기>, 장밍의 <우산의 비구름> 등이 그것이다. 이 영화들은 엄격한 검열 또는 이익에 쫓긴 배급자와 상영자의 무관심으로 인해 중국 관객들에게 접근이 금지되었음에도, 대부분은 다양한 국제영화제에서 비평적 찬사와 상을 받았다.
다이진화는 ‘6세대’라는 명명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한다. 6세대는 선배 세대와 달리, “비교적 명확한 창작 집단이나 미학적 기치, 작품의 서열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문화적 갈망과 문화적 결핍이 만든 복잡한 문화 현실의 산물이었다. 다이진화는 6세대가 “서로 연관되고 중복되며 때론 전혀 상관없기도 한 세 종류의 영상 현상, 예술적 실천과 관계있다”(다이진화, 2007: 453)라고 진단한다. 1990년대에 출현하여 관변의 제작시스템과 영화 검열제도 외곽에서 개인 자금이나 구미의 문화 기금으로 영화 제작 자본을 마련한 독립 제작자들, 1989년과 1991년에 베이징영화대학을 졸업한 촉망받는 젊은 감독들, ‘위안밍위안 화가마을’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베이징 유랑 예술가 집단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그들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톈안먼 민주운동이 좌절된 폐허에서 새로운 출로를 모색했던 ‘신(新)다큐멘터리 운동’의 주역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극영화 부분에서 주목할 그룹은 5세대에 이어 베이징영화대학을 졸업한 후 체제 외곽에서 활동한 독립 제작자들이다. 이들은 체제 밖에서 활동했기에, 대부분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독립제작 방식으로 다큐멘터리 촬영 기법을 자신의 영화를 제작했다. 장위안(張元)의 <베이징 녀석들(北京雜種)>, 왕샤오솨이(王小帥)의 <샤오둥과 샤오춘의 나날들(冬春的日子)>, 후쉐양(胡雪楊)의 <남겨진 여인(留守女士)>, 러우예(婁燁)의 <주말 연인(週末情人)> 등이 초기 대표작이다. 다이진화는 독립제작자와 베이징예술대학 졸업생을 연계시킨 배후에 포스트냉전시대 서양문화 수요의 투사와 외래자의 시선이 허구화시킨 매듭이 존재하고, 그와 동시에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 ‘허구’를 참조해서 만들어진 피드백 반응과 오로지 순항만을 생각하는 본토문화의 낙관적 돛이 존재함을 날카롭게 지적했다(戴錦華, 2006a: 353~354).
다이진화는 6세대를 ‘안개 속 풍경(霧中風景)’으로 묘사한다. 그녀에 따르면 “6세대는 갖가지 명명과 갖가지 담론, 갖가지 문화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욕망으로 얽히고 은폐된 문화적 현실”(戴錦華, 2006a: 352)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중국 언더그라운드 영화, 중국의 다른 정견을 가진 자들의 영화, 독립영화인, 독립 창작 운동, 신영상 운동, 신도시영화 등의 명명도 존재했다. 이들은 ‘1989년의 거대한 동요’, 즉 톈안먼 민주운동의 좌절로 인해 1980년대의 낙관주의와 이상주의의 연이은 봉우리로부터 계곡 바닥으로 떨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겪었다(戴錦華, 359). 게다가 상업화의 조류를 타고 흥성한 대중문화와 TV 방송의 확장은 6세대에게 커다란 시련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출발부터 ‘영화계 밖으로 내던져지는 운명’에 놓인 6세대는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베이징 유랑 예술가 집단에 들어가거나 TV드라마, 광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거나 여기저기 제작팀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영화에 대한 몽상에 집착했고 아울러 형언하기 어려운 초조감 속에서 영화계 주변인의 신분으로 베이징을 유랑했다(戴錦華, 360). 이런 상황에서 6세대 영화인들이 선택한 것은 독립 제작이었다. 영화 제작권(廠標)도 구하지 못하고 시나리오 심사도 통과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영 기업으로부터 제작비를 빌려 영화를 찍고 나서 심의를 받았다. 실경 촬영 방식과 아마추어 배우 기용을 특징으로 하는 이 길은 장위안의 <엄마>가 개척했고 이후 많은 6세대 영화인들이 나아간 길이다. 장위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접 영화를 들고 프랑스 낭트에서 열린 ‘3대륙영화제’에 참가해 비평가상과 대중상을 수상한 것을 필두로 20여 개의 국제영화제에 출품함으로써 세계로 나아갔다. 이 또한 6세대 감독들의 또 다른 ‘계시록’이 되었다.
6세대는 5세대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 도시 배경과 농촌 배경의 대비가 대표적이다. 다이진화는 5세대가 ‘아들 세대의 예술’을 표방했음에도 “부권(父權)을 깊이 내재화한 심리적 문화적 현실”을 그림으로써 전 세대로부터 탈주하고자 했지만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에 반해, 6세대의 영화는 새로운 세대의 문화적 선언이자 예술적 선언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저능아이자 언어장애를 겪는 남자아이를 통해 새로운 세대의 문화적 우언을 보여준 장위안의 <엄마>에서, 아들의 저능과 우둔함은 아버지와 부권에 대한 거부로, 전 오이디푸스 단계에 대한 집요함으로 이해할 수 있고 언어장애는 상징계라는 아버지의 이름과 언어 및 문화에 대한 배척으로 이해할 수 있다(戴錦華, 361). 토니 레인즈(Rayns, Tony)도 “<엄마>가 6세대 감독의 토대가 될 작품”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장위안은 중국 로큰롤의 개척자 추이젠(崔建)과 합작해 <베이징 녀석들>(1993)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로커 추이젠, 소녀 마오마오, 작가 다칭의 베이징 생활의 애환을 그려냈다. 추이젠은 연습장을 찾아 헤매고 마오마오는 남자친구와 출산 문제로 다툰다. 이 영화 역시 체제와 타협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독립 제작 방식으로 찍었다. 장위안은 또다시 영화를 들고 수많은 국제영화제를 돌아다녔다.
독립 제작과 국제영화제 순례를 특징으로 하는 장위안의 선구적 노력과 왕샤오솨이, 허젠쥔, 우디 등의 후속 노력 덕분에 “독립 제작이 중국영화의 잠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戴錦華, 363) 그 뒤를 이어 후쉐양(胡雪楊)의 <동년왕사(童年往事)>, 러우예의 <주말 연인>과 <위험에 빠진 소녀>, 관후의 <헝클어진 머리> 등이 등장했다. 이들의 “독립 제작 영화는 장이머우의 ‘철방’/낡은 집에서 목 졸려 죽은 여인의 욕망 이야기와 근현대 중국사의 장면에 출연한 운명 비극(톈좡좡田壯壯의 <푸른 연>, 천카이거의 <패왕별희>, 장이머우의 <인생活着>)의 뒤를 이어 서양이 중국영화에 주목한 세 번째 인지 방식이자 판별 방식이었다”(戴錦華, 369). 유럽 영화제와 미국 영화인들은 중국 6세대 감독의 작품에 ‘선의’와 ‘관용’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다이진화는 이 ‘선의’와 ‘관용’의 ‘일면성’과 ‘타자화’를 문제 삼는다. 사실 ‘일면성’ 문제는 서양의 ‘언더그라운드 영화’라는 명명에서부터 드러난다. 서양 영화인들은 6세대 영화의 예술적․문화적 성취는 도외시하고 그 정치적 의의를 크게 강조했다. 더 중요한 것은 ‘타자화’다.
장이머우와 장이머우식 영화가 서양인의 오랜 오리엔탈리즘의 거울 이미지를 제공하고 풍부하게 만들었듯이, 6세대가 서양에서 입상한 것은 다시 한번 ‘타자’가 되어서 서양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1990년대 중국 문화 경관에 대한 기대를 완성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거울 이미지가 되어 서양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중국의 민주와 진보, 반항과 시민사회, 그리고 주변인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들은 6세대가 직접적으로 표현한 중국의 문화 현실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6세대 영화인의 문화적 바람도 무시했다(戴錦華, 370. 다이진화, 2007, 475~476 번역 참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이진화는 장이머우 방식을 세계와 소통하는 문이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평가했지만, “새로운 영화인들의 독립 제작이 서양 영화계와 각축을 벌일 수 있는 첩경”(戴錦華, 371)이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서양 영화제와 중국 정부의 암묵적 공모다. 다시 말해, 서양 영화제에서 중국 체제를 비판했다는 점이 어필해서 입상한 작품에 중국 당국이 상영금지령을 내림으로써 서양 영화제의 일면적 평가를 정당화해준 것이다. 6세대 본인들은 그럴 의도가 없었더라도 국제영화제와 중국 당국의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인 공모로 인해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국제영화제의 일면적 평가에 즉자적으로 대응해오던 중국 당국이 대응 방식을 바꾼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중국 당국은 ‘언더’에서 활동하는 젊은 감독들을 체제 안으로 포섭하기 위해 1998년 ‘젊은 감독 희망 프로젝트’(靑年導演希望工程)를 출범시킨다. 베이징 스튜디오와 상하이 스튜디오가 중심이 되어 6세대 감독들과 새로운 신인들을 지원했다. 아울러 새로운 종류의 유연한 ‘독립영화’가 정책 변화와 기관 제한의 새로운 물결이라는 맥락 속에서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90년대 중반의 정책 개혁 와중에서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전환을 시도했다. 장원(姜文)의 <햇빛 찬란한 날들>, 장양(张扬)의 <사랑의 마라탕>, 스룬주(施润玖)의 <아름다운 신세계>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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