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다이진화의 5세대 감독론

ycsj 2022. 11. 25. 10:08

세계 영화계에 중국영화의 출현을 알린 5세대는 ‘1982년 중국영화사에 나타난 최초의 청년촬영제작팀과 1983년 말과 1984년에 조용히 작품을 발표하여 흥미와 경이를 불러일으킨 청년창작집단’을 가리킨다. 다이진화는 ‘중국 뉴시네마’라고도 불리는 5세대 영화를 1983년부터 1987년으로 한정(다이진화, 2009b: 119)하면서, 천카이거(陳凱歌)의 <황토지>를 대표작으로 들고 장이머우(張藝謀)의 <붉은 수수밭>을 유럽 영화계에서 중국영화의 등장을 확실하게 알린 작품으로 꼽았다. 그리고 베를린영화제의 명명으로 중국 5세대 영화의 국내외적 지위가 확립된 동시에 5세대 영화가 지녔던 ‘영화언어 혁명’과 문화비판/자기반성의 특정 역할이 종결되고 변경되었다(戴錦華, 2006: 115)고 평가한다. 이들은 영화사적 의미에서도 중요하지만, 문화대혁명이라는 ‘문화적 재앙의 유복자’로서 끊임없이 1980년대의 역사․문화적 ‘성찰’ 운동에 참여했고 포스트사회주의 중국문화에 대한 영화의 전면적 개입을 통해 역사와 담론의 주체가 되었다. 그 핵심에 장이머우와 천카이거가 자리한다. 다이진화는 중국 영화감독 세대론이 ‘역산(逆算)의 방식’으로 명명되었음도 밝히고 있다. 1983년에 천카이거나 장이머우 등이 등장하자 ‘갑자기’ 5세대라는 표현이 나타났고, 그로 인해 1979년 전후 나타난 감독들은 ‘역산법’에 의해 4세대가 되었고, 세진(謝晉) 등 사회주의 중국영화의 주력들은 역산으로 3세대라고 불렸다는 것이다(다이진화, 2009a: 61).

장이머우는 중국영화계의 ‘복장(福將)’(다이진화, 2007: 289)임에 틀림없다. 그는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영화계와 문화계의 흐름을 잘 타왔다. 초기의 자유로운 실험, 국내외적으로 적절한 시점에서의 국제영화제 수상, 국가권력의 주선율(主旋律)과 시장화의 이중압박에서 국외 자본의 투자유치, 중국식 블록버스터 제작, 2008년 베이징올림픽 총감독 등의 도정은 그를 단순한 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이진화의 장이머우론의 핵심은 이렇다. 장이머우는 중국 ‘포스트식민 문화의 잔혹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인지했고 세계무대로 나가기 위해서는 ‘동방적 경관(Oriental spectacle)’이 필요함을 인식하여 ‘이중적 정체성(dual identity)’ 전략을 활용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중적 정체성을 활용해 동양과 서양, 본토와 세계를 교묘하게 봉합했다. 그러나 다이진화가 보기에 장이머우의 성공이 가져온 결과는 세계로 향하는 창이라기보다는 그 시야를 가리는 거울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대국으로 굴기(崛起)하는 중국이 아니라 서양이라는 타자에 의해 구성된 동방의 이미지였고, 서양 남성 관객이 요구하는 욕망의 시선에 영합한 동방의 여인이었다. 그것은 결코 중국의 본토문화일 수 없는, 상상되고 발명된 중국의 이미지이다(다이진화, 2007: 291).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럽 오리엔탈리즘’과 비유럽 지역의 ‘셀프 오리엔탈라이제이션(self-orientalization)’의 공모 관계다. 장이머우는 누구보다도 ‘전략으로서의 셀프 오리엔탈라이제이션’ 운용에 뛰어났다. 그것은 정치 검열이 존재하고 자율적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제3세계에서 재능과 야망을 품은 감독이 선택하게 마련인 생존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장이머우는 “이국화와 자연화라는 모순적인 동시에 보완적인 특성의 더욱 미묘한 계략”을 잘 활용한 셈이다. ‘이국화와 자연화의 전략’은 리처드 자크몽(Jacquemond, Richard)이 이집트의 노벨상 수상 작가 나기브 마푸즈(Mahfūz, Nagīb)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마푸즈가 서유럽의 정전(canon)에 순응하는 유럽적 가치를 추구하고 이집트 사회의 파노라마적인 비전에 대한 유럽의 기대를 만족시킴으로써 성공했다고 분석하며 내린 결론이다. ‘이국화와 자연화의 전략’은 다이진화가 ‘내재적 유배(internal exile)’라고 비판한 ‘셀프 오리엔탈라이제이션’ 전략의 다른 표현이지만, 중국 정부와 관객은 ‘이국화와 자연화의 전략’을 활용해 세계무대에서 중국인의 긍지를 심어준 장이머우의 선택에 환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계 미국 지식인들은 “동양적인 이국취미를 서양 관객에게 파는 것”이라 하며 장이머우의 영화에 분노하기도 한다. 

다이진화는 장이머우를 특화해 성별 분석을 진행한다. 다이진화는 오리엔탈리즘과 포스트냉전 시기의 냉전 논리가 교묘하게 얽힌 상황에서 서양 세계의 이중적 기대 시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타인의 ‘안목’을 내면화해 자아의 서술구조를 타인의 이야기로 삼는 것이 모종의 문화 상징 질서 속의 ‘여성’ 역할을 의미한다면, 포스트냉전의 냉전 논리 속에서 ‘중국 영화예술가’의 명명을 획득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영웅/남성 주체의 역사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戴錦華, 2006b: 118∼119).

 

이는 또한 중국문화와 유럽문화의 황당하면서도 유일한 대화 형식이기도 한데, 중국 감독 가운데 장이머우가 유럽인들의 기대를 충족시킴으로써 국제적인 감독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다. 물론 국제영화제와 중국 정부의 암묵적 공모―중국 체제를 비판한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중국 내에서는 상영이 금지됨으로써 당사자가 더 커다란 영향을 가지게 되는 공모―도 한몫을 했다. 장이머우는 첫 영화 <붉은 수수밭>에서부터 서양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한 ‘중국 여성’을 보여줌으로써 국제영화제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의 지위를 차지한다. 영화에서 “여성 형상은 카메라와 남성 등장인물이 하나가 된 욕망의 시야 속에서 ‘정확’하게 드러났고, 반역자는 여성을 성공적으로 점유하고 아버지가 된 것으로 ‘합법적인’ 주체의 지위를 획득했거나 ‘추인’받았다”(戴錦華, 2006b: 115). 다이진화는 장이머우가 국제영화제 원정을 염두에 두고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하면서 “구상 속의 타자/서양 관중의 시야를 만족시키기 위해 남성 주체/내셔널 영웅의 신화는 근현대 사회와 근현대 생활과는 상대적인 타자성(otherness)을 부여”(戴錦華, 116)했다고 평가했다.

장이머우는 서양이 중국영화에 기대하는 시야를 인지하고 셀프 오리엔탈라이제이션 전략을 활용해 서양 세계가 보고 싶어 하는 장면들을 연출해낸다. 다이진화는 이를 ‘철로 된 방 속의 여성’으로 유비(類比)한다. 루쉰의 ‘철로 된 방 속의 외침’을 모방한 ‘철로 된 방 속의 여성’은 “구금되고 욕망이 억압된 여성의 이야기로, 1980년대 역사문화 성찰 운동의 특정한 비판적 글쓰기의 하나다”(戴錦華, 120). <쥐더우(菊豆)>와 <홍등>의 ‘철로 된 방 속의 여성’은 “중국 사회문화 내부에서는 유사 서사로 6·4 폭력에 의해 중단된 역사 성찰과 정치 비판을 계속 이어받게 한 동시에, 장이머우에게 정치적으로 항의하고 반역하는 문화영웅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사와 문물 공간, 간혹 조작된 중국문화 의례가 욕망 시야와 결합한 동방의 아름다움은 서양의 기대 시야 속에서 정의성과 타자성이 충분한 볼거리가 되었다”(戴錦華, 120∼121). 특히 <홍등>은 동양의 ‘할렘’을 보여주면서 정작 지배자인 남성을 정면으로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카메라의 시각 주체 지위를 관객, 특히 서양 관객에게 넘겨줌으로써 감독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처럼 장이머우는 중국과 서양, 여성과 남성을 교묘하게 접합시켜 서양 남성에게 ‘보여지는’ 중국 여성을 형상화함으로써 국제영화제의 찬사를 받는다. 그리고 그 찬사를 등에 업고 국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진다. 

<영웅(英雄)>(2002)은 국내외적으로 명망을 구축한 ‘문화영웅’ 장이머우가 마음먹고 만든 영화다. 그동안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 또는 ‘내재적 유배’ 등의 비판을 받아온 장이머우는 기존의 ‘셀프 오리엔탈라이제이션’ 전략을 대폭 수정해서 이제는 자국의 관중을 겨냥한다. 가장 중국적인 무협 요소와 가장 지구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결합해 ‘중국 블록버스터’ 즉 ‘다폔(大片) 시대’를 연 것이다. <영웅>은 중국과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고 한국에서도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탈각된 채 멋있는 중국영화로 소비되었으며 후속작 <연인(十面埋伏)>과 <황후화(滿城盡帶黃金甲)>도 환영받았다(임춘성, 2017: 312). 이상의 과정을 거친 장이머우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다시는 새로움을 보여줄 수 없는 화석이 되었다는 의미에서다. 올림픽 개막식 총감독, ‘인상 시리즈(印象系列)’ 프로듀서로서 대중의 인기를 누릴 수는 있겠지만, 초창기의 문제의식을 지속 발전시켜 ‘말년의 양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천카이거는 중국영화의 또 다른 거울이다. 그가 초기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대범함과 명석함(다이진화, 2007: 317)은 <아이들의 왕(孩子王)>이 1987년 칸영화제에서 고배를 든 후 사라졌고, 천신만고 끝에 1992년 <패왕별희>로 칸영화제를 석권했지만, 그것은 추락으로 얻은 구원이자 굴복과 맞바꾼 면류관(다이진화, 330)이었다. 천카이거가 고심해서 재현한 중국 본토문화는 포스트식민 문화라는 문맥 안에 내면화(internalization)된 서양문화의 시점(視點)과 절묘하게 결합함으로써 소실되어버렸다. <황토지>에서 함께 출발한 장이머우와 천카이거가, 이후 각자의 경로를 거쳐 지구화의 지표인 ‘블록버스터’로 나아간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역사와 문화의 ‘큰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성실하거나 그다지 성실하지 않은 역사의 아들”이었고 “정복된 정복자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다이진화는 1987년 <붉은 수수밭>과 <아이들의 왕>이 유럽의 A급 영화제에 화려하게 입성했지만 전혀 다른 ‘대우’를 받은 상황을 “중국 내 사회, 정치, 시장의 곤경을 돌파하려는 영화인이 반드시 참조하고 독해해야 하는 ‘계시록’”(戴錦華, 2006b: 117)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영화가 ‘세계로 나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충분한 타자성과 신기함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요구한 영화는 향토 중국의 기이한 경관을 가진 중국의 본토성을 충분히 갖추어야 하지만, 그 논리와 정체성은 본토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되고, 유럽과 미국 문화의 결점을 보완해주는 것이다(戴錦華, 117). 다이진화는 이 ‘계시록’에서 제3세계 지식인과 예술가의 문화적 ‘숙명’을 읽어낸다. 제3세계 감독이 ‘세계로 나가는’ 좁은 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하려면 서양 예술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심사 및 선택의 기준을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제에서 수상하기 위해 그들은 반드시 서양 영화제 심사위원들의 기준과 척도, 동양에 대한 서양의 문화적 기대 시야, 서양인의 마음속 동양 경관을 동일시해야 한다. 다이진화가 보기에 “이러한 동일시는 동시에 새로운 내부 유배의 과정”(戴錦華, 118)이었다. 그것은 타자의 눈을 통해 자신의 문화 기억을 관조 대상으로 추방하고 그 구조를 타인의 담론과 표상의 아름다움 속에 동결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예를 얻게 되지만, 그 영예는 자아 표현을 타인의 이야기로 삼아 얻은 영예다. 이처럼 세계영화계에 중국영화의 존재를 알린 5세대의 대표 감독 장이머우와 천카이거는, 경로는 달랐지만, ‘셀프 오리엔탈라이제이션’이라는 ‘내부 유배’ 또는 ‘이국화와 자연화의 전략’을 통해 개인의 명망을 한껏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