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리안의 『색, 계』

ycsj 2020. 9. 19. 21:11

 

베네치아 영화제 수상작 『색, 계』

 

2012년 김기덕의 『피에타』에게 황금사자상을 안겨줬던 베네치아 영화제는 중국 영화와 인연이 남다릅니다. 1989년 허우샤오셴(侯孝賢)의 『비정성시』를 필두로, 장이머우(張藝謀)가 1992년 『추쥐의 재판/귀주 이야기』, 1999년 『책상 서랍 속의 동화』로 황금사자상을 두 차례 수상한 바 있지요. 그리고 2005년 리안(李安)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2006년 자장커(賈樟柯)의 『스틸 라이프』가, 2007년 다시 리안의 『색, 계』가 연속 황금사자상을 석권했습니다. 3연속 수상은 당시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중국인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안겨주었으니, 문화 올림픽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한껏 높이려 벼르고 있던 중국에게 문화대국의 명예를 안겨준 셈이었습니다. 리안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요. 국경을 뛰어넘어 화인(華人)이라는 명명으로 그를 중국의 품으로 안을 수 있었습니다.

2007년 가을과 겨울 사이 홍콩과 타이완 그리고 대륙에서 리안의 『색, 계』는 대대적으로 환영을 받았고, 상하이에서는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이 기립 박수와 함께 “리안 만세, 만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리안 신화, 리안 기적, 세계적으로 공인된 감독,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중국계 감독 등의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게, 그는 상업과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쥐고 대륙·홍콩·타이완을 넘나들고, 중국어세계와 영어세계를 횡단함으로써 ‘화인의 빛(華人之光)’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리안의 『색, 계』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모던 상하이’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모던 상하이의 부침

 

마르크스가 부도덕한 전쟁이라 평했던 아편전쟁이 1840년에 일어났고 패전한 중국은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南京)조약을 체결한 다음해인 1843년 상하이는 개항을 맞이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습니다. 개항 이전부터 상하이는 인근 도시의 기능을 흡수하고 있었고, 그보다 훨씬 이전인 1685년 청 강희제가 개방했던 네 곳의 항구 가운데 하나인 강해관(江海關)이 상하이 인근인 송강(松江)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불을 지피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명나라 정화(鄭和)의 대항해(1434)도 이곳에서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상하이의 지정학적 가치는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왔었고 1843년의 개항을 계기로 집약적인 발전을 합니다. 상하이는 개항 이전부터 난징(南京), 양저우(揚州), 닝보(寧波), 항저우(杭州), 쑤저우(蘇州) 등 인근 도시들의 기능을 서서히 수렴하면서 1930년대에 국제적인 도시 ‘대(大)상하이’가 되었고 1950년대 이후 공화국의 장자(長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중서 교역의 관점에서 아편전쟁 이전의 광둥(廣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840년 이전 광저우(廣州)는 국가의 공인을 받은 특허상인인 ‘13공행(公行)’을 대표로 하는 광둥무역체계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는 서유럽 중상주의와 중국 중화주의의 동상이몽의 결과물로서, 광저우 13공행은 서양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정부를 대신해 외교업무도 관장했습니다. 아편전쟁 이전 광둥의 월해관(粵海關)은 중서 해상 교통의 중요한 교차로이자 나라의 재화와 부가 모이는 곳으로, 아편전쟁 이전 중국 대륙의 유일한 개방 항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7-18세기 대외무역을 총괄했던 13공행은 아편전쟁 이후 배상금 부담과 5구통상으로 인한 독점적 지위를 상실했습니다. 13공행은 상업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행상들도 파산하거나 외국 상인들에게 매판으로 고용되는 등 저마다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요. 일부 영리하고 모험심 강한 상인들은 새로운 개항 항구인 상하이로 가서 떠오르는 부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광둥 상인들은 난징조약 직후 개항된 상하이에 가장 먼저 왔습니다. 그 뒤를 이어 오랜 도시 경영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인근의 닝보(寧波)인들이 몰려왔습니다. 전자가 상하이의 대외무역을 주도했다면 후자는 금융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모던 상하이는 광둥 무역과 닝보 금융의 경험을 받아들인 기초 위에 ‘몸소 서양을 시험(以身試西)’해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창안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이들 상하이 금융인들은 마오쩌둥(毛澤東)뿐만 아니라 장제스(蔣介石)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홍콩을 선택했는데, 이들은 서유럽식 금융업과 상업 실무를 습득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서양의 규칙에 따라 국제적인 금융게임에 참가해 홍콩 발전을 기틀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금융업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형성된 전 세계 화교들의 국경 없는 네트워크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80년대 개혁개방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중서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 측 창구는 1840년 이전의 광저우, 1843년 개항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전까지의 상하이, 1950년대 이후의 홍콩,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의 광저우와 선전(深圳), 1990년대 이후 상하이가 중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크게 보면 주장(珠江) 삼각주와 창장(長江) 삼각주 사이를 오간 셈이지요. 중국 근현대 장기 지속(longue durée)의 관점에서 볼 때, 상하이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의 대외 창구 노릇을 했습니다. 외국인 조계와 국내외 이주를 통해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모던 상하이는 1930-40년대에 세계적인 국제도시의 명망을 뽐내다가, 1949년 공산화된 이후 그 영광을 홍콩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식민지였으면서도 20세기 자본주의 정점의 하나를 구축했던 홍콩의 발전은 상하이의 후견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1930년대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파리’ 또는 ‘모험가들의 낙원’으로 일컬어졌던 상하이가 왕년의 영광 회복을 선언하고 나선 것은 1990년대 들어와서지요. 푸둥(浦東) 지구 개발로 뒤늦게 개혁개방을 실시한 상하이는 10여년 만에 중국 최고 수준의 발전을 이루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상하이가 중국 근현대사의 진행과정을 압축적으로 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던 상하이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근현대 중국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색, 계』는 탕웨이(湯唯)의 데뷔작이지요. 탕웨이는 최근 『만추』 김태용 감독과의 결혼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 쉬안화(許鞍華) 감독의 『황금시대』에서 열연함으로써 전 세계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도 공식 초청되었던 『황금시대』는 2014년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다큐멘터리 기법을 활용해 천재 작가 샤오훙(蕭紅)의 삶의 궤적을 절제 있게 그렸습니다. 혁명으로 몸살을 앓던 1930-40년대 대륙에서 자유로운 글쓰기를 추구했던 샤오훙은 우리에게는 『생사의 장』과 『후란강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녀는 당시 중국인의 삶의 굴곡을 담담한 어조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루쉰의 초청으로 상하이로 와서 보낸 시간은 고난으로 얼룩졌던 그녀의 삶에 훈훈한 온기를 더해준 바 있습니다. 배우 탕웨이는 바로 1940년대 최고 작가로 꼽히는 장아이링(張愛玲) 후기작의 여주인공 왕자즈(王佳芝)를 연기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 천재 작가 샤오훙을 연기한 것이지요.

장아이링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리안의 『색, 계』는 ‘두터운 텍스트(thick text)’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의미구조를 가진 텍스트라는 의미입니다. 『색, 계』의 두터움은 서사구조와 1940년대 중국의 정치 상황, 작가의 신변 이야기와 상하이 노스탤지어 등에서 비롯합니다.

먼저 서사구조를 보면, 『색, 계』는 최소한 세 개의 이야기 층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깥에서부터 보면, 리안의 영화 『색, 계』, 장아이링의 소설 「색, 계」, 그리고 일명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이라 불렸던 딩모춘(丁黙村)-정핑루(鄭苹如) 사건이 그것이지요. 심층에 있는 오리지널 이야기는 미인계 간첩 이야기로, 이는 장제스(蔣介石) 정부와 왕징웨이(汪精衛) 정부에 관계된 국민당 내부 모순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원래 난징에 근거지를 두었던 장제스 정부는 일본 침략을 피해 충칭(重慶)으로 물러났고, 당시 중국 측 대화 상대를 찾던 일본은, 1927년 장제스의 4․12쿠데타에 의해 국민당에서 축출된 우파 왕징웨이를 찾아냈고, 그를 수반으로 삼은 괴뢰정권을 수립합니다. 딩모춘은 바로 이 왕징웨이 정부의 정보 총책이었고, 실제 사건에서는 살해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많은 한국 관객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공산당과 국민당의 다툼이 아니라 국민당 우파와 좌파 사이의 정보전이었습니다.

장아이링은 당시 왕징웨이 정부의 고위직을 맡고 있던 남편 후란청(胡蘭成)을 통해 이 사건을 전해 들었고, 후란청과 헤어져 홍콩을 통해 미국으로 가서, 후란청이 일본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소설로 발표했습니다. 그녀는 「색, 계」에서 이(易) 선생과 왕자즈의 이야기를 모던한 ‘재자(才子)+가인(佳人)’의 수준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 ‘재자+가인’ 모델에는 남편인 후란청에 대한 장아이링의 정서가 녹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리안의 『색, 계』는 장아이링의 「색, 계」를 토대로 삼아 많은 공백을 메우고 있습니다. 주인공 이 선생(易黙成)의 이름에는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의 주인공 딩‘모’춘과 장아이링의 남편 후란‘청’의 이름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이모청은 오랫동안 아무도 믿는 친구가 없었던 외로운 인물로, 그는 어두운 곳이 싫어 영화관에도 가지 않고 손님이 적다는 이유로 맛이 없는 식당을 골라 다니는 인물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어내는 인물이고 동창을 처단한 후 애인과 밀애를 즐기는 그런 인물입니다. 또한 리안은 여주인공 왕자즈에게 홍콩대학 생활을 가미해 홍콩대학 유학 경험이 있던 장아이링의 그림자를 투영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영화로 개편된 『색, 계』는 장아이링의 원작보다 훨씬 정채롭습니다. 특히 클립형 체위 등 베드신은 대륙의 노출 수위를 넘나들었고, 국민당 내부의 모순도 그동안 다루기 어려웠는데, 그런 금구(禁區)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관객들에게 ‘금지된 것을 돌파하는 즐거움’도 선사했습니다.

똑같은 베네치아영화제 금사자상 수상작임에도, 『스틸 라이프』는 일부 지식인에게 호평을 받았지만 중화권 관객의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색, 계』와 비슷한 수준의 노출(noodle hair)과 금구(천안문 사건)를 다뤘음에도, 러우예(婁燁)의 『여름 궁전(頤和園)』은 당국으로부터 5년간 영화제작 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중국 대중은 『색, 계』에 환호하고, 왜 중국 당국은 『색, 계』에 관대할까요? 과연 『색, 계』의 감동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우선 ‘사랑의 진정성(authenticity)’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선생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 왕자즈는 마지막 순간에 이 선생에게 ‘빨리 도망치세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할 때 후과(後果)를 인지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대가로 그녀는 채석장에서 동창 5명과 함께 총살당합니다. “여성의 마음에 이르는 길은 음도(陰道)를 통한다”는 장아이링의 언급을 남성이 체득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왕자즈가 다이아반지와 육체적 쾌락으로 표현된 이 선생의 사랑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에 비해 『스틸 라이프』에서 돈을 주고 데려왔던 부인이 딸을 데리고 돌아간 지 10여 년 만에 모녀를 찾아 나선 한싼밍(韓三明)의 이야기는 진정성 면에서 왕자즈의 그것을 압도합니다. 한싼밍의 이야기는 감동적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매력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섹슈얼리티의 부재를 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리안의 『색, 계』는 섹슈얼리티로 넘쳐납니다. 전통적인 ‘재자+가인’ 서사모델을 모던한 수준으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베드신 연출은 포르노 뺨치지요. 그러나 『색, 계』의 섹슈얼리티는 인위적이고 깔끔하며 특이한 체위와 미장센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리안은 한 인터뷰에서 베드신 촬영 작업에서 자신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합니다. 배우와 카메라 감독은 그냥 연기하고 찍기만 하면 되지만, 자신은 이렇게 연기하고 저렇게 찍으라고 지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는 거지요.

‘색, 계 현상’은 상하이 노스탤지어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국제적 공인 등이 중층적으로 교직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국제적 공인의 배후에는 미국의 권위가 존재하고, 미국의 권위에 의해 인정받은 감독에게 환호하는 것은 현 중국의 미국 숭배와 미국 상상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문화민족주의 기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색, 계』의 문화적 두터움

 

『색, 계』의 배경에 1940년대 초 상하이가 놓여 있어 영화의 ‘문화적 두터움(cultural thickness)’을 더해줍니다. 『색, 계』에 재현된 1942년의 상하이는 상당히 다채롭습니다. 특히 국제화 수준이 남다릅니다. 행인은 말할 것도 없고 커피숍과 보석점 등의 직원부터 교통경찰, 레스토랑의 피아니스트 등에 이르기까지 외국인의 모습을 심상(尋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도 수시로 외국인 점원에게 영어로 의사소통합니다. 심지어 배급으로 연명하는 줄 선 외국인들과 가창(街娼)으로 보이는 거리의 외국 여성까지도 눈에 띕니다.

그러나 꼼꼼하게 보면 『색, 계』에서 보여주는 상하이 모습은 1990년대에 크게 유행한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큰 길의 모습은 난징루(南京路)에 국한되어 있고 주인공의 패션은 대형 화보 잡지 『양우(良友)』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모던 치파오(旗袍) 여성과 서양식 정장 남성의 조합은 모던한 ‘재자+가인’의 패턴을 창출했습니다. 수십 곳의 치수를 재야하는 모던 치파오는, ‘순수하고 소박한 올드 상하이’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억압으로 변모해 그 속의 사람들이 숨쉬기 어렵게 만듭니다. 리안이 구성한 상하이는 영화의 주요한 공간인 침실과 마찬가지로 ‘상상된 공간(imagined place)’입니다.

 

 

상상된 노스탤지어

 

여기에서 우리는 ‘상상된 노스탤지어(imagined nostalgia)’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하이 노스탤지어는 1990년대 이래 중국 전역을 풍미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현상 가운데 하나지요. 1930-40년대 국제적 수준에 올랐던 중국의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중국 30년 동안 ‘숨은 구조(hidden structure)’로 억압되었다가 개혁개방 시기에 들어 부활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상하이 노스탤지어 붐’은 그 부활의 한 형태입니다. 그것은 사회주의 이전의 상하이, 특히 1930-40년대 상하이, 즉 ‘올드 상하이’를 주요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노스탤지어는 상하이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시민의 소비욕망을 겨냥하는 지구적 자본주의가 지닌 상업전략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역사와 기억을 소비 상품으로 유통시킵니다. 그래서 수많은 중국인들은 부자의 꿈을 안은 채 공부를 하고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하며 살아갑니다. 이는 또한 사회주의 이전의 자본주의 착취에 대한 ‘기억이 배제된 노스탤지어’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상하이 노스탤지어 현상은 탈역사적이고 탈영토적입니다.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빛과 그림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스탤지어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소수자(minority) 또는 타자화(othernization)에 대한 ‘역사들’과 ‘또 다른 기억’입니다. 그것은 노스탤지어의 주체들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들이고 ‘망각하고 싶은 기억’이지요.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의 구호에 가려진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실험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동방의 파리’라는 기표에 가려진 소외된 계층의 존재는 후자의 주요한 측면입니다. 조계와 이민의 도시 상하이에서, 외국인은 중국인을 타자화시켰고 똑같은 이민이면서 먼저 온 사람은 후에 온 사람을 주변화시켰으며 중상층은 하층을 소외시켰고 자유연애와 모던 신여성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여전히 여성을 억압했습니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후 시장은 혁명을 포섭했고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통합했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설사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이외의 역사,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역사는 아름답고 순수한 기억일까요? 이런 문제설정(problematic)은 ‘순수 과거’의 밖에 존재하는 ‘현실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을 요구합니다. 그 작업은 때로는 기억을 위한 투쟁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기억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거대서사에 대한 미시서사의 탐구, 정치사에 대한 생활사의 복원, 전통과 근현대의 중층성에 대한 고찰, 근현대성의 양면성에 대한 성찰, 포스트식민주의적 접근 등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외국인 조계와 이주를 통해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모던 상하이는 1930-40년대 이미 세계적인 국제도시의 이름을 날렸습니다. 1843년 개항 이래 상하이에는 세계 각지에서 오는 이민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지요. 나라 안팎에서 전쟁의 포화가 그치지 않는 가운데, 상하이는 정치적 이민의 ‘세외도원(世外桃園)’이 되었던 것입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이 발발하자, 수만 명의 러시아 귀족과 부르주아들이 상하이로 이민했고,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히틀러가 유대인을 박해하자 상하이는 유대인들의 피풍항이 되어, 유럽을 탈출한 1만 8,000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대거 상하이로 이주해 들어왔습니다. 당시 상하이 외국인 이민자의 수는 10만 명에 달했습니다. 상하이는 ‘전 세계 모험가들의 낙원’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49년 이후 그 영광을 홍콩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식민지였으면서도 20세기 자본주의 정점의 하나를 구축했던 홍콩의 발전은 상하이의 후견 아래 이루어졌던 셈이지요. 1930년대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파리’ 또는 ‘모험가들의 낙원’으로 일컬어졌던 상하이가 왕년의 영광 회복을 선언하고 나선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습니다. 푸둥(浦東) 지구 개발로 뒤늦게 개혁개방을 실시한 상하이는 10여년 만에 중국 최고 수준의 발전을 이루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열린 2010년 세계박람회는 21세기 초강대국으로 비상하고픈 중국의 염원을 상하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투사한 것입니다. 동방명주와 와이탄(外灘) 야경 그리고 신톈디(新天地) 등으로 대표되는 상하이의 경관을 보면서 그 이면에 가려있는 농민공과 실직 노동자 등 하층 인민들의 모습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