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영화’와 ‘영화 상하이’
중국영화는 오랜 제왕의 도시 베이징에서 탄생했지만 조계 도시 상하이를 자신의 성장지로 선택했습니다. 중국영화사에서 ‘상하이영화’의 비중은 상당히 큽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까지 중국영화사는 상하이영화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양자는 ‘원주가 비슷한 동심원’이었던 셈입니다. 근현대도시, 이민도시, 국제도시, 상공업도시, 소비도시 등은 영화산업 발전의 요건을 설명해주는 표현입니다.
영화가 상하이로 인해 입지를 확보하고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면, 상하이는 영화로 인해 근현대화를 가속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상하이 영화산업은 상하이뿐만 아니라 중국 근현대화의 핵심이었습니다. 특히 영화의 유통과 소비는 상하이 경제와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중국 근현대문학의 비조 루쉰(魯迅)도 상하이 거주 시절 택시를 대절해서 할리우드 영화를 감상했다는 일화는 당시 상하이 시민들이 영화를 얼마나 즐겼는지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영화 도시 상하이는 다시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곤 했습니다. 상하이영화가 주로 상하이에서 제작된 영화를 가리킨다면 이른바 ‘영화 상하이’는 ‘영화 속의 상하이’이고 ‘상하이를 재현한 영화’입니다. ‘영화 상하이’는 영화를 통해 상하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영화와 도시의 유기적 결합,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상호작용에 대한 관심입니다. 영화 인생 대부분을 상하이에 몰두하고 있는 펑샤오롄(彭小蓮. 1953년생) 감독의 작품은 ‘영화 상하이’를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텍스트입니다.
‘상하이 삼부작’
펑샤오롄은 후난(湖南) 차링(茶陵)인으로, 천카이거․장이머우와 함께 1982년 베이징필름아카데미 감독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상하이영화제작소에 입사했습니다. 주요 작품으로, 고등학생들의 건강하고 활발하며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단결의 모습을 보여준 <나와 동학들(我和我的同學們)>(1986), 미국 시민권을 가진 중국인 기자 궈사오바이(郭紹白)의 회상으로 진행되는 1948-1949년 배경의 <상하이 기사(上海紀事)>(1998)가 있고, 1990년대를 배경으로 삼아 모녀 삼대의 이혼과 주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상하이 여성들(假裝沒感覺)>(2001), 화원양방(花園洋房)을 배경으로 캉(康)씨 부인과 그 자녀들의 고난과 대단원을 그린 <아름다운 상하이(美麗上海)>(2005), 그리고 1940년대 말 상하이 영화 <까마귀와 참새> 제작 과정과 상하이 영화인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상하이 룸바(上海倫巴)>(2006) 등이 있습니다. 특히 뒤의 세 작품은 상하이의 전형적인 주거공간인 스쿠먼(石庫門), 화원양방 그리고 서민아파트를 배경으로 삼아 상하이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고, 이를 ‘상하이 삼부작’이라 합니다.
그녀는 지속적으로 상하이에서 활동하면서 상하이와 상하이인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으면서도 ‘상하이 노스탤지어’와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상하이 노스탤지어’에서 지우고 있는 역사들과 상하이 또는 상하이인에 대한 기억 또는 망각의 일단을 복원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펑샤오롄의 영화를 보노라면 같은 세대의 대표주자인 장이머우․천카이거와 달리 화려하지 않습니다. 필모그라피에서 알 수 있다시피, 졸업 후 바로 ‘상하이영화제작소’로 배치되어 상하이를 집중적으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화려하지 않은 영상은 다중(多衆)의 시선을 잡기에는 어렵겠지만, ‘보통 상하이 도시인의 일상생활’을 자연스럽게 묘사하기에는 적합합니다. 특히 그동안 어둠 속에 묻힌 기억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들이대는 것은 그 기억을 억압했던 메커니즘을 반복하는 우를 범하기 마련입니다. 그다지 밝지 않은 빛이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시좌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화려하지 않은 영상은 장점이 될 수 있겠지요. 노스탤지어 붐이라는 촛불로 인해 더욱 어두워진 다른 역사들과 기억들을 밝혀주되 노스탤지어를 어둠에 묻어버리지 않을 정도의 빛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노스탤지어와 문화적 기억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상하이 기사>
‘상하이 삼부곡’을 보기 전 ‘상하이 해방 50주년을 기념하며’라는 헌사를 달고 있는 <상하이 기사>를 먼저 보도록 하지요. 이 영화는 동창으로 보이는 세 남녀의 삶을 통해 해방 직전 상하이와 상하이인이 처한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쑨원(孫文)의 사진을 걸어두고 부정부패를 행하는 국민정부의 고급관리, 이를 전복하려는 공산당과 지하운동원, 그리고 그 양자를 공정하게 보도하려는 자유주의자의 모습이 그것이지요. 역사 기억과 결부시켜 주목할 부분은 공산군의 상하이 입성 장면입니다. 궈사오바이가 새벽안개 속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공산군의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과 점령군이 분명함에도 고급장교가 음식점에 가서 쌀로 음식 값을 지불하는 장면 등은 해방과 해방군의 대의가 ‘숭고한 것’이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상하이 기사>에서 펑샤오롄은 공산군의 상하이 입성 전후 장면들을 재현함으로써 상하이 역사의 숭고했던 순간들을 환기시킵니다. 개혁개방 이후 사회주의 혁명의 숭고함이 부정되거나 문화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그 초심(初心)을 회복하자는 것이겠지요. 쑨원의 지고지순했던 대의명분과 1940년대 말 부패 현실의 극명한 대조, 1949년 해방의 숭고함과 1990년대 사회 상황의 괴리, 두 개의 근현대 국민국가의 초기 구상과 이후 진행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펑샤오롄은 1949년 해방 전후의 숭고했던 역사를 되살리고자 합니다.
아래에서는 텍스트를 시간적으로 재배열하여 <상하이 룸바>를 대상으로 1940년대의 역사와 기억을, <아름다운 상하이>를 대상으로 문혁 트라우마를, 그리고 <상하이 여성들>을 대상으로 1990년대 상하이 여성의 이혼과 주거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상하이 룸바>: 1940년대 상하이 영화계의 재현
<상하이 룸바>는 시간적으로 1940년대 말을 배경으로 삼아 1949년 쿤룬영화사(昆侖影業公司)가 제작한 정쥔리(鄭君里) 감독의 <까마귀와 참새> 등의 영화제작과정을 재현합니다. 아울러 여성의 사회노동 문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국민당 정권의 어지러운 통치 시대였던 1947년 성탄절에 시작됩니다. <상하이 룸바>는 일견 ‘상하이 노스탤지어’에 호응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몇 차례 등장하는 ‘댄스 홀’의 풍경이 그러하고 신여성의 ‘모던 치파오’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올드 상하이영화의 포스터와 자오단(趙丹)․황쭝잉(黃宗英)과 같은 영화배우에 대한 오마주로도 읽을 수 있지요.
<까마귀와 참새>의 주인공 자오단은 펑샤오롄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오단의 영화에 대한 진지함과 몰입은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지요. 그러나 감독은 단순한 노스탤지어에 그치지 않고, 영화제작 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지가지 난관과 에피소드를 놓치지 않습니다. 아촨의 가정생활, 완위의 결혼, 감독과 제작진들의 애환, 국민당의 검열, 아르바이트 대학생의 고발 등이 무리 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서, 1940년대 후반 영화인들의 생존 현장에 대한 기억을 우리 앞에 소환합니다.
신여성과 인형의 집
‘신여성’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사회노동 참여는 해방 이전에는 쉽지 않았지요. <상하이 룸바>의 주인공 완위도 처음에는 인형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열정과 과거의 연극 경험 그리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의 연기에 자극을 받아 영화배우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 험난한 길을 가는 과정에는 각종 난관이 놓여 있고 완위는 결국 그 난관을 헤쳐 나갑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여성이 그 난관을 뚫고 나갔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영화 속의 한 아주머니가 하는 말, “다른 사람이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울어야 하는” 배우보다는 부잣집 마나님이 되는 것이 낫다는 평이 보다 광범한 지지를 받았을 것이니까요.
<아름다운 상하이>: 문혁 트라우마(trauma)의 환기
펑샤오롄의 역사와 기억 복원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그중에서도 문화대혁명입니다. 화원양방을 배경으로 상하이의 몰락한 부르주아 가정의 생활을 묘사한 <아름다운 상하이>는 어머니가 위독하자 흩어져 살던 자식들이 옛집에 모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도 잠시, 어머니 봉양과 부동산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는 과거 기억과 중첩되며 첨예한 모순을 형성합니다. 현실 문제는 첫째 아들에게는 상하이 호구 문제와 연결되어 있고, 둘째 딸에게는 그 동안의 봉사에 대한 경제적 보상의 차원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아들과 넷째 딸은 걸핏하면 충돌합니다. 세 살 터울인 아룽(阿榮)과 샤오메이(小妹)는 초등학교 시절 문혁을 겪습니다(우리에게 <천녀유혼>으로 잘 알려진 왕쭈셴(王祖賢)이 샤오메이 역을 열연). 그들에게 문혁은 아버지에 대한 평가로 다가옵니다. 대부르주아지 출신으로 사회주의 중국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을 아버지는 결국 문혁 때 타살되고 맙니다.
문혁은 아룽과 샤오메이에게 ‘아버지 비판’이라는 시험문제를 강요했습니다. 얼굴에 침 뱉는 것을 견디지 못한 샤오메이는 선생님이 강요한 ‘정답’을 쓰고 집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아룽은 굳건하게 욕설과 매질을 견뎌냈지요. 어머니는 이런 아룽을 편애합니다. 아룽의 ‘마작 탐닉’과 샤오메이의 유학은 문혁 원체험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룽의 직업은 변호사이지만 놀기 좋아합니다. 이는 마치 왕숴(王朔) 소설―『사회주의적 범죄는 즐겁다』, 『노는 것처럼 신나는 것도 없다』 등―의 주인공들처럼 현실 도피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아이다움’과 나이어림으로 인해 시련을 견뎌내지 못한 샤오메이는 결국 상하이를 떠나 미국으로 갔고, 그런 원체험과 도피는 아룽에 대한 질시로 표현됩니다. 이런 과거로 인해 둘은 오랜만에 만난 첫 장면부터 충돌하고 사사건건 반대편에 섭니다. 마치 상대방이 문혁 시기 원체험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심지어 상대방의 말투를 ‘문혁식 어투’와 ‘미국식 어투’라 부르며 비판합니다.
기억의 환기
망각하고 싶은 원체험에 대한 샤오메이의 트라우마는 어머니에 의해 소환됩니다. 문혁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남편을 빼앗아 간 조반파가 문혁이 끝날 무렵 남편의 유품을 보내면서 샤오메이의 비판 편지도 함께 보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그 편지를 막내딸의 손인형 및 아버지가 따준 단풍잎과 함께 보관했다가 죽기 직전 막내딸에게 건네주면서 “역사는 잊힐 수 없지만 원한은 용서받을 수 있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역사가 후대에 온전하게 계승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은 중요하지만, 자신의 편지가 아버지를 죽음에 몰아넣었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샤오메이의 트라우마는 전범재판의 피고처럼 냉정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사실 샤오메이에게 이 기억은 망각하고 싶은 것이이지요. 영원히 불 밝히지 않고 어둠의 구석에 묻어놓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말을 꺼내자 그녀의 기억은 바로 그날의 기억을 환기합니다. “1969년 막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고 여덟 살 생일을 갓 쇠었을 때였어요.” 여덟 살 때의 일을 이렇게 분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말이지요. 어머니의 기억은 그 내용을 보충합니다. “네 편지를 받은 다음날, 조반(造反)파는 아침에 아버지를 끌고 갔고 밤 11시쯤 나를 오라 해서 갔더니 아버지가 비온 땅에 누워 있었다.”
펑샤오롄은 이렇게 아픈 기억을 어렵게 재현합니다. 그의 미덕은 아픈 기억을 들춰내면서도 어머니의 아름다운 추억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점이지요. 베이베이(貝貝)의 증조부가 외국에서 사온 물건들을 바라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은 단순한 노스탤지어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회중시계를 첫째에게 주고 모형 유성기를 증손녀에게 건네는 모습에 이르러서는 마치 후대에 역사를 전달하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역사 기억은 이렇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상하이 여성들>
여성의 이혼과 주거 문제
펑샤오롄의 카메라는 잊히기 쉬운 일상생활을 놓치지 않고 있는 점에서 아리프 딜릭(Arif Dirlik)의 ‘역사들’의 일부를 재현합니다. 이는 서유럽의 국민-국가(nation-state)의 역사만을 중시하던 것으로부터 서유럽 이외 지역의 기타 역사, 즉 하위계급의 역사, 백인이 아닌 소수 에스닉의 역사, 그리고 남성의 역사(his story)만이 아닌 여성의 역사(her story)도 포함하는 ‘역사들(histories)’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꿔 말해, 주류 역사가 아닌 소수자의 역사‘들’인 셈입니다.
1990년대 상하이 여성의 이혼과 주거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상하이 여성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속되는 아빠의 외도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아샤(阿霞)의 엄마는 결국 이혼을 요구하고, 모녀는 집을 나옵니다. 아샤와 엄마가 갈 곳은 외갓집밖에 없습니다. 아샤는 비좁은 팅쯔젠(亭子間) 생활에도 즐거워하지만, 모녀는 외삼촌의 결혼 때문에 생각지 못한 불편함을 만납니다. 외할머니의 제안으로 엄마는 아들이 딸린 라오리(老李)와 재혼하지만 생활비 등의 문제로 또 짐을 싸서 나옵니다. 다시 찾아간 외갓집은 상황이 더 좋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샤를 위해 아샤의 아빠와 재결합까지 고려하지만 아샤의 반대로 그 생각을 접고, 대신 아샤 아빠와 협상해서 집값을 받아내 모녀의 새로운 안식처를 마련하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노라면, 1949년 이후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에서 ‘하늘의 절반’의 위치를 확보했던 중국 여성의 지위가 여전히 불안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빠의 외도에 대한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갈라선 엄마의 지위는 또 다른 사람의 인형이 될 수밖에 없는 점에서 1920년대 루쉰이 우려했던 ‘집을 나간 노라’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환기합니다.
여성 삼대
이 영화는 삼대에 걸친 모녀의 이야기로, 영화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Shanghai Women(상하이여성들)’이라는 평범한 영어 제목과 ‘假裝沒感覺’라는 중국어 제목의 조합이 주는 미묘함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등학생의 글짓기 입상 작품에 근거해 각색한 이 영화는 여고생의 정감과 생활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집을 찾는 과정에서 돌아갈 곳이 없고 안전감이 없는 엄마와 딸의 모습에서 현대인이 생활 속에서 직면하고 있는 곤혹과 거북함을 발견합니다. 아빠의 외도가 발단이 된 이야기는 아샤의 조숙한 성장을 요구하게 되고 엄마는 아샤에게 안정된 집을 주기 위해 계속 자신의 욕망을 억압합니다. ‘마치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자신과 맞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여 형식적인 가정을 유지하려 하고, 심지어 아샤의 아빠와 재결합도 고려합니다. 그러나 딸은 마지막에 용기 있게 ‘집’에 대한 세속적인 인식을 전복하고 엄마와 둘만의 ‘집’을 마련해 새로운 생활을 도모합니다.
태연한 상하이 여성
감독의 의도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딸(아샤)의 눈에 비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중국어 제목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요. 전형적인 상하이 여성인 엄마가 아빠와 헤어진 후 친정으로 돌아가지만, 외할머니의 의도적인 냉대에 직면하고는 아샤를 위해 안정적인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짐짓 ‘태연한 척’ 라오리와 결혼도 해보고 아샤 아빠와의 재결합도 생각해본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주어를 아샤로 보는 것이지요. 엄마가 아빠와 헤어지고 새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모습을 짐짓 ‘태연한 척’ 바라봅니다. 다만 두 사람의 ‘태연한 척’은 소통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일기 사건’으로 불거진 모녀의 갈등은 외할머니에 의해 소통이 되고 아샤는 엄마의 ‘태연한 척’의 ‘쉽지 않음’을 이해하게 되고, 엄마에게 더 이상 ‘태연한 척’ 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지요. 주어를 외할머니로 가정해보는 것입니다. 상하이 신구문화 융합의 산물로 보이는 외할머니는 딸과 외손녀의 두 번의 ‘돌아옴’에 대해 냉정하고 쌀쌀맞은 ‘못된’ 노파의 모습을 ‘오불관언’의 담배연기 속에 뿜어내고 있습니다. 세밀하게 보면 엄마의 두 차례의 ‘돌아옴’에 대한 외할머니의 대응은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돌아옴에 대해서는 책망이 주입니다. 아무런 사후 대책 없이 무작정 집을 나와 친정으로 돌아온 딸, 고등학생 딸이 있으면서도 그보다 더 철없어 보이는 딸에 대해 느끼는 우려로 외할머니는 담배를 피워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이 집은 아들에게 돌아갈 것이기에 마음을 독하게 먹고 딸을 몰아칩니다. 그 결과가 라오리와의 재혼입니다. 두 번째 돌아옴에 대한 반응은 조금 미묘합니다. 반복되는 딸의 돌아옴에 대한 확실한 대책 마련과 며느리에 대한 대처 방안이 함께 강구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딸에게 아샤 아빠와의 재결합을 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샤에게 엄마의 ‘쉽지 않음’을 이해시킵니다. 상하이 여성의 또 다른 특색인 정명(精明)함과 강인함은 엄마보다는 외할머니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개인의 불행을 함께 공감하고 동일시하는 것은 정서적 위로가 되겠지만, 위기의식을 조장하는 측면도 있으니까요. 딸의 불행을 ‘태연한 척’ 바라보며 그녀를 대신해 출로를 모색하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결국 엄마의 조우를 ‘태연한 척’ 바라보며 그녀를 위해 새로운 출로를 마련해주는 외할머니와, 자신의 현실을 고려해 마지못해 재혼하고 또 아샤의 아빠와 재결합하려는 엄마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아샤로 인해 모녀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새로운 삶을 도모하게 됩니다.
다양한 ‘역사들’과 소통
‘상하이 삼부작’은 상하이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주거 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하고 있는데, 그녀의 텍스트에서 상하이 노스탤지어나 거대 서사에 의해 억압되거나 숨겨진 역사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1940년대 후반의 영화인이 생존했던 현실 기억을 우리 앞에 소환하는가 하면, 관방의 주류서사에 억압된 개인의 트라우마, ‘해방’과 ‘개혁·개방’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사회 메커니즘에서 여성의 이혼과 주거 문제 등은 여전히 해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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