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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왕안이의 <푸핑> (4): 쑤저우허와 쑨다량

ycsj 2015. 4. 1. 22:03

 

 

왕안이의 <푸핑> (4): 쑤저우허와 쑨다량

 

1930년대 쑤베이인의 붕호구(棚戶區)는 외국조계를 둘러싸면서 형성되어 거의 완벽한 원을 형성할 정도로 넓은 공간에 많은 인구가 집중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19495월 상하이가 해방되었을 때 200호 이상의 판자촌은 322곳이나 있었는데, 그 가운데 2천호 이상이 4, 1천호 이상이 39, 5백호 이상이 36 , 300호 이상 159, 200호 이상이 93곳이었다. 그 면적은 3227천 평방미터였고, 거주민이 115만 명에 달했다. 한때 상하이시 중심을 포위하듯 형성되었던 판자촌은 해방 이후 지속적인 도시계획에 따라 대규모 판자촌은 사라졌지만, 21세기 들어서도 옛 성곽 주변, 쑤저우허와 황푸장 양안과 철로 인근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쑨다량(孫達亮)은 열두 살에 고향을 떠나 큰아버지를 따라 뱃일을 했다.” 중간에 큰아버지의 배려로 9개월간 공부한 것을 제외하고는 30년 가까이 쑤저우허에서 생활한 셈이었다. 그가 쑤저우허에 온 것은 상하이가 점령당했던 이듬해였다.” 그때는 상하이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고 쑤저우는 곳곳마다 일본인 천지였다.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이 이별과 변고의 슬픔을 한 켠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쑨다량은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일을 도맡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가 일본 사람에게 징발되는 등 고난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는 버텨나갔다. 쑨다량은 이처럼 쑤저우허에서 뱃일을 하면서 일본군 점령시기를 보냈고 이후 국민당 통치시기를 거쳐 신중국의 인민이 되었다. 이 과정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삶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버텨나갔다.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가 다시 조금씩 조금씩 호전되었다. 일본인들이 떠난 뒤, 국민당도 떠났다. 쑤저우허에 점차 평화가 찾아왔고, 분뇨 부두는 국유로 귀속되었다. 크고 작은 똥두목들도 더 이상 큰소리를 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여전히 노동을 하고 밥을 먹었지만, 그래도 이 두 가지는 항상 보장되었다. 1950, 쑨다량은 스물두 살의 나이에 아내를 맞아들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는 쑨다량에게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1956년 합작사가 세워진 후 그는 쓰레기 운반조에 배치되었다.” 그는 부인과 함께 강 언덕 위의 집을 삶의 목표로 삼고, 친척들을 돌보고 1960년의 기근을 극복하면서 1963년 드디어 강 언덕에 22평방미터짜리 허름한 단칸집을 사들였다.”

사실 푸핑 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 외숙이 상하이에서 와 장례를 치렀다. 푸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3년이나 되었기에 푸핑이 갈 곳은 두 군데밖에 없었다. 한 곳은 외숙 집이고, 다른 한 곳은 작은아버지 집이었다. 그런데 당시 외숙이 상하이에 호적을 올리는 문제가 쉽지 않다는 핑계로 책임을 회피한 바람에, 푸핑은 작은아버지 집으로 오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외숙은 책임을 떠맡을까 봐 아예 왕래도 끊고 편지조차 없었다. 사실 푸핑도 외숙을 잊은 지 오래였다.

푸핑은 재회 후 외숙에 대해 상당히 멀고 낯선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랫동안 더부살이의 고단함에 대해 외숙에게 서운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찍 부모를 여읜 푸핑은 작은아버지 네를 따라 살았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혼사처럼 중요한 일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마음만 졸일 따름이었다. 푸핑은 자기의 혼사 이야기가 나오면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좋다 궂다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이처럼 종신대사인 결혼에서조차도 자기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던 푸핑은 그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외숙과 외숙모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내구(內疚)가 있었기에 푸핑은 쑤저우허 판자촌의 외숙 집 다락방이 편하지 않다.

달리 갈 곳이 없기에 부득불 그곳에 머물던 그녀는 우연찮게 외숙을 따라 메이자차오를 방문하게 되면서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이후 그곳을 드나들다가 예전에 극장에서 만났던 모자를 재회하게 된다.

 

메이자차오와 모자

 

푸핑이 모자를 만난 내력은 이러했다. 외숙모의 안배에 의해 푸핑은 광밍 등과 연극 공연을 보러갔는데, 자리다툼에 휘말린 광밍이 극장 밖으로 쫓겨나고 망연자실 서있던 푸핑을 잡아끈 사람이 노부인이었다. “노부인은 몹시 여위었지만, 얼굴빛은 맑고 담백해 보였다. 노부인은 옆자리 아들에게 안쪽으로 당겨 앉으라 하고서 억지로 푸핑을 자리에 앉혔다. 아들 역시 마른 편에 안경을 쓴 젊은이였다.” 그러나 그뿐 그들의 만남은 이후 지속되지 못했는데, 푸핑이 메이자차오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푸핑은 그들을 찾으러 메이자차오를 돌아다녔을 수도 있다.

모자의 내력 또한 간단치 않다. 장쑤 류허(六合)에서 온 모자는 중국은행말단 직원이었던 가장이 장티푸스로 세상을 뜨자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가장의 고향인 류허에 가서 기탁해보지만 여의치 않게 되자 엄마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굳은 결심을 하고 상하이로 되돌아와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그녀는 남편의 옛 동료가 구해준 메이자차오 곁채 한 칸에서 머물면서, “적당하고도 안정적인 일자리는 아예 꿈꾸지도못하고, “고생해본 솜씨를 쌓아야 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아들을 학교에 보냈다. 아들은 엄마의 보살핌 아래 성적도 괜찮아 해마다 표창을 받았다.” 고등학교 진학은 하지 못하고 지역에서 일을 배정해준다 했지만 대공업지구에서 장애인에게 적합한 수공업 공장은 아주 드물었다.” 아들은 몹시 고달프게 자랐지만 고통 속에서 조금이나마 느꼈던 따스함은 그에게 깊고도 풍성한 인상을 남겼다.” 모자 둘은 이렇게 조심스러웠으며, 남들에게 받아들여진 신세임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아는 밝음(自知之明)’을 가지고 눈치껏 분별 있게 굴어온 것이다. 화자는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약자의 자존자애(自尊自愛)란 자신의 처지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법이다.”

그는 기계 종류를 좋아해서 작은 수리공이 되어 있었다. 장애인 생활 보조를 받으면서 종이상자 공장 일을 하게 된 모자는 우연히 양저우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이들과 가까워진 푸핑은 마음이 아주 느긋했다. 이들 모자 모두 성품이 아주 안온한 데다, 이 두 사람의 처지가 자기보다 나을 게 없지만 그래도 살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서히 함께 밥을 먹는 식구(食口)가 되었다.

 

출처 :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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