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초우(Chow, Rey. 周蕾)는 ‘중국적임(Chineseness)’을 이론적 문제로 다루기에 앞서 ‘중국적(Chinese)’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는다. 초우는 자크 데리다(Derrida, Jacques)의 ‘대리보충(supplément)’ 개념을 가져와 중국의 사례에서 ‘에스닉 대리보충(ethnic supplement)’의 문제의식이 두드러짐을 지적해낸다. 데리다 자신도 ‘위험천만’하다고 판단한 대리보충은 두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하나는 과잉 또는 잉여다. “보충은 첨가이고 잉여이고 또 다른 충만함을 풍부하게 하는 충만함이고 현전의 과잉(comble)이다. 그것은 현전을 겸하는 동시에 현전을 축적한다. 이런 식으로 예술, 테크네(techné), 이미지, 대리 표현, 계약 등은 자연을 보충하고 이러한 일체의 겸직 기능으로부터 풍부해진다. 이런 유의 대리 보충성(supplémentarité)은 일체의 개념적 대립을 일정한 방식으로 규정한다”(데리다, 2010, 361. 강조는 저자). 다른 하나는 부족함 또는 결여다. “그러나 대리 보충은 부족함을 보충할 뿐이다.(le supplément supplée) 그것은 다른 무엇을 대체하기 위해서만 첨가될 뿐이다. 그것은 개입하거나 다른 어떤 자리를 대신하여(à-la-place-de) 슬며시 끼어든다. 즉 그것이 무엇인가를 메운다는 것은 어떤 빈 곳을 메운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무언가를 대리 표현하고 이미지를 만든다면 그것은 그에 앞서 존재하는 현전의 결함 때문이다. 부족함을 메우고 보좌하는 이 대리 보충은 보조자(adjoint)이며, 어떤 것을 대신하는(tient-lieu) 하위심급이다”(데리다, 362. 강조는 저자). 이 두 가지는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대리 보충(supplément)은 보완(complémen)과 달리 일종의 ‘외부적 첨가’이다”(데리다, 362. 강조는 저자).
초우에 따르면, 사회주의, 모더니제이션, 내셔널리즘과 같은 국제 관행뿐만 아니라 모더니티, 모더니즘, 페미니즘, 영화 이론, 문화연구 등과 같은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쟁점들’에 ‘중국적’이라는 단어로 대리보충을 하면 원래의 의미가 변형된다. 그 변형은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담론이 학계 사이에서 인기를 얻으면 중국 관련 주제를 연구하는 학계는 조만간 ‘중국적’ 반응을 만들어낸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런 ‘중국적’ 반응은 한편으로는 당면한 이론적 문제의 일반화로 인해 주목받을 기회를 활용하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 특유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에 의해 그 방향을 바꾸게 한다”(Chow, 2013: 62). ‘이론적 일반화’가 ‘중국 관련 주제’의 ‘부족함 또는 결여를 보충’할 때 ‘전환적 창조’의 가능성이 있지만, ‘중국적’ 특성의 과잉으로 방향을 바꾸면 ‘새로운 유형의 담론’에서 ‘일탈’하며, 제3세계주의로 귀결되곤 한다.
‘에스닉 대리보충’은 여러 역사적 요인이 다중규정된(overdetermined)된 결과인데 그중 결정적인 요인은 서양 문화의 스며드는 헤게모니(pervasive hegemony of Western culture)와 그에 대한 ‘피해자의 논리(logic of the wound)’다. 영토주의와 군사력으로 무장한 서양 자본주의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지리상의 발견에 힘입어 비서양 국가를 침략함으로써 세계체계의 헤게모니를 확립했다(아리기, 2008). 그 결과 서양의 문물이 보편적 기준이 되고 비서양 사회의 문물은 보편적 기준에 의해 재해석되고 그 기준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특수한 예외적 사례로 치부되곤 한다. 이와 관련해 초우는 학술 연구의 사례를 들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전자(서양 문화-인용자)는 지적 또는 이론적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후자(비서양 문화-인용자)는 지적 또는 이론적 문제를 다룰 때도 지정학적 리얼리즘으로 그러한 문제를 특성화하고 내셔널 위치나 에스닉 위치 또는 문화적 위치를 통해 지적 및 이론적 내용을 안정화하고 고정할 것이 의무적으로 요구된다”(Chow, 63). 이를테면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 입문』은 기본적으로 영국문학에 관한 이론서인데도 한국 문학도의 필독서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반면 한국문학이나 중국문학 관련 도서는 반드시 서양 문학이론의 기본 내용을 숙지한 기초 위에 ‘한국(적)’ 또는 ‘중국(적)’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야 한다. 그런데도 서양문학 전공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국문학도나 중국문학도‘만’ 읽는다. 이것이 ‘서양의 패권적 관행(hegemonic Western practices)’이다. 이런 관행은 학문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만연하다. ‘우리는 이를 서양중심주의 또는 유럽중심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에스닉 대리보충’의 과잉은 서양의 패권적 관행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발이 지나치면 목욕물을 버리다 아기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하기에 십상이다. 우리는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과정에서 ‘반제’의 과제가 과잉되어 ‘반서양’으로 확대된 사례를 보아 알고 있다. ‘에스닉 대리보충’도 ‘이론적 일반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된다. 초우는 “중국의 모든 것은 다소 나은 것으로 환상된다. 존재 기간이 더 길고, 더 지성적이며, 더 과학적이고, 더 가치 있고, 궁극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Chow, 65)는 수준으로 표현된다고 지적한다. 초우가 ‘에스닉 대리보충’이라 명명한 ‘중국적’이라는 단어의 이면에는 근현대 역사 과정에서의 ‘피해자의 논리’가 놓여있고, 이 ‘피해자의 논리’는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대응을 정당화하면서 문화적 본질주의(cultural essentialism), 즉 중국중심주의(Sinocentrism)로 전환되었다. 그러므로 근현대 이후 만연한 서양의 패권적 관행에 대항해 제기된 ‘중국적’이라는 에스닉 대리보충은 드물게 ‘전환적 창조’를 이룬 경우를 제외하곤 ‘문화적 차이’를 주장하는 중국중심주의에 함닉(陷溺)되고 말았다.
중국이 서양과 달리 ‘문화적 차이’를 가진다는 주장의 핵심에 ‘중국적임’이 놓여있지만, 이 주장의 인식론적 허점은 “중국이 동질적으로 통일적이고 하나의 음성으로 말한다는 주장”(Chow, 66)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런 인식론적 허점은 중국의 소수 에스닉에 대한 연구, 티베트의 해방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 신장 및 네이멍구의 간헐적인 시위, 정치 및 국가 자치에 대한 타이완의 반복적 주장, 반환 후 홍콩의 민주 정부와 법치를 위한 공동의 노력 등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아울러 중국 본토에 구속되는 단일론으로서의 ‘중국적임’의 개념은 데이비드 옌호 우(David Yen-ho Wu), 이안 앙(Ien Ang), 앨런 춘(Allen Chun) 등 중국 디아스포라 문제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에 의해 심문되고 비판되었다.
초우에 따르면, 시간이 흐르면서 한학(Sinology)은 완고한 엘리트주의적 관행으로 굳어졌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가정이 전제된다.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의도된 표현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바로 그 개념인 중국적임이 본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고 따라서 역사를 넘어선다”(Chow, 73)라는 가정이 그것이다. 이렇게 중국적임은 서양과는 다른 문화적 차이를 주장하기 위해 제기되었지만, 그 문화적 차이는 다름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국적임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중국적, 중국적임, 그리고 이를 이론화하는 한학/중국학은 학문적 연구 대상에서 일탈해 중국을 찬양하는 레토릭으로 타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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