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홍콩의 문화정체성

ycsj 2023. 10. 6. 09:18

1997년 반환 이전 ‘홍콩인’들은 식민지 주민으로서의 치욕감보다는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중국인이라 하기에는 너무 오랜 기간 본국과 격리되었다. 그렇다고 식민종주국인 영국의 국민으로 편입될 수도 없었다. 반환 이전 홍콩인들은 넓은 의미의 중국에 대해서는 ‘동일성을 인식’하지만, 당시 대륙 정권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다. 특히 ‘문화대혁명’ 이후 일부 급진 좌파를 제외하고 대륙에 대해 홍콩인은 공포감과 함께 ‘우월한 문명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우월한 문명 의식’은 두 가지로 구성된다. 하나는 영국 식민통치의 잔재 가운데 민주주의 제도와 자유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대륙에서 손상되었지만 홍콩에는 남아있던 중국 전통문화다. 사실 홍콩의 발전은 그것이 대륙으로 들어가는 편리한 문호라는 사실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 개조 이후 홍콩은 ‘죽의 장막’의 틈새에 설치한 통풍구, 다시 말해 신생 사회주의 체제를 보호하기 위해 모두 닫아걸고 오직 하나만 열어둔 창구였다. 아편전쟁 패배 이후 영국에 할양되어 150년 넘게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홍콩은 대륙과의 연계 속에서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인민공화국 경제 회복에 도움을 주었다. 베이징 쯔진청(紫禁城)에 앉은 통치자의 눈에는 하잘것없는 작은 돌섬에 불과하지만, 해양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아시아 각 지역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연결하는, 일종의 ‘네트워크 도시’(하마시타, 1997)라고 할 수 있다.

 

1997년 7월 1일 반환 이후 23년만인 2020년 7월 1일 국가보안법이 공표됨으로써 항인치항(港人治港)과 일국양제(一國兩制)가 막을 내렸다. 반환 이전 홍콩은 식민지임에도 불구하고 ‘동방의 진주’ 또는 ‘여의주’라고 불리면서 20세기 자본주의 발전의 정점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여러 연구자는 홍콩인들의 주변성과 식민성을 지적하면서 ‘주변의 주변’(李歐梵, 2002), ‘몇 가지 다른 식민주의의 중첩’(也斯, 1995), 서유럽과 중국의 ‘이중적 타자’(임춘성, 2004)라고 명명했다. 특히 레이 초우는 홍콩이 영국과 중국이라는 ‘식민자들 사이(Between Colonizers)’(Chow, 1992)에 놓였음을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대부분 문화정체성(cultural identity)과 관련된 것인데, 반환 이후 초점은 내셔널 정체성(national identity) 또는 에스닉 정체성(ethnic identity)으로 옮겨졌다.

홍콩인이란 누구인가? 우선 아래 장면을 보도록 하자.

 

1996년 12월 31일 홍콩 클럽의 송년회장, 신년을 알리는 카운트 다운이 끝나면서 사람들이 서로 포옹하고 환호하는 가운데 한 청년이 권총을 들고 단상에 올라와 이렇게 말한다. “내 행동은 1997년 이후 홍콩에서의 개인적 문화적 자유의 상실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리고 총을 입에 물고 자살한다.

 

위의 장면은 웨인 왕(Wang, Wayne) 감독의 <차이니즈 박스 Chinese Box>(1997)의 시작 장면이다. 자살한 사람은 학생운동가 윌리엄 웡으로, 자살 직전 자신의 행동은 배후세력이 없는 온전한 개인적 결정임을 밝혔다. 윌리엄 웡의 자살은 인민공화국으로의 반환을 앞두고 ‘공산 독재’에 말살될 홍콩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한 자유주의자의 절규라 할 수 있다. 홍콩의 반환을 대형 백화점의 경영진이 바뀌는 정도로 간주하던 홍콩 주재 기자 존 스펜서(Jeremy Irons분)는 윌리엄 웡의 자살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홍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반환 직전인 1997년 상반기의 홍콩 풍경을 디지털카메라에 담기 시작하면서, 특이한 홍콩 여성 진을 발견하고 그녀를 심층 인터뷰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홍콩인’ 윌리엄 웡이 1997년 반환 이전의 홍콩의 특징을 ‘자유’라는 말로 인식하고 자신을 홍콩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설정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보면 반환 이후 2003년부터 시작된 홍콩인의 시위는 윌리엄 웡의 절규에 대한 ‘뒤늦은 호응’이라 할 수 있겠다. 과연 영국의 식민통치를 ‘자유’와 연계하는 윌리엄 웡의 역사의식은 무엇일까? 154년의 영국 식민통치 시기에 그럴듯한 항영(抗英) 독립운동 한번 없다가, ‘영국이 양도(handover)’해서 ‘조국으로 회귀’한 지 10년이 되는 시점부터 조국 정부를 대변하는 행정장관에 항의하는 홍콩인의 문화정체성은 무엇일까? 그들은 반환 이전의 식민지 홍콩을 진정 자유로웠다고 여기는 윌리엄 웡의 항의에 동의하는 것일까? 그들은 과연 인민공화국을 조국으로 여기기는 하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윌리엄 웡과 같은 ‘홍콩인’ 또는 ‘홍콩 화인(香港華人)’이라는 개념이 대략 1970년대에 형성된 것으로 본다. 왕겅우(王賡武)에 따르면, ‘홍콩 화인’은 외래 이민의 안주와 토착 주민의 대외 개방에 기초하여 새로운 사회의식이 형성된 것과 맞물려 있다. 그것은 영국과 중국의 주류 의식과는 다른 ‘홍콩 의식’이다(王賡武, 1997: 2). 왕겅우의 ‘연해 화인(沿海華人)’ 개념에서 발전한 ‘홍콩 화인’은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보다 ‘우월하고 문명적’인 홍콩문화를 자각했다.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면서 영국의 식민통치가 시행되던 시기 홍콩 거주민들의 국적 의식은 영국인, 중국인, 홍콩인으로 다양했다. 홍콩 거주민 가운데 자신을 홍콩인(Hong Konger)이라 생각했던 사람의 비율은 1984년 반환 결정 이후 약 30%였는데, 반환 이후에는 1997년 60%, 2016년 70%에 이르렀다(Hung, 2018).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1997년 42%에서 2020년에는 80%로 증가했다(Lee, 2022). 1997년 이후의 선택지에서 영국인이 빠졌고, 반환 이후 대륙에서 온 신이민들이 대부분 중국인을 자처하는 것을 고려하면, 홍콩인으로 자리매김한 거주민의 숫자가 반환 이후 급격히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홍콩인의 정체성을 반환 전후 시점과 그 이후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앞당겨 말하면 반환 전후 시점에는 홍콩인 정체성이 수동적으로 드러난 반면, 21세기 들어서는 적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중국의 항인치항과 일국양제 정책의 적실성 여부와 관련이 있다.

 

* 1997년 7월 1일 홍콩에서 일어난 사건을 영국은 양도(handover) 또는 반환(return의 타동사 용법)이라 하고, 중국은 회귀(回歸), 즉 홍콩이 모국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반환이라는 표현은 홍콩인을 수동적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고, 회귀라는 표현은 능동적 주체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회귀를 결정한 것이 홍콩인이 아니란 점에서 명실상부한 주체라 할 수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해, 이 글에서는 반환이라는 표기를 사용한다.

 

** 홍콩인의 우월한 문명의식 또는 ‘반(反)중국 로컬리즘’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예로 2012년 2월 1일 Apple Daily에 게재된 메뚜기 반대 광고를 들 수 있다. 그 표제는 <홍콩인은 충분히 참았어!(香港人, 忍夠了!)>였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열거되었다. “너희들이 독이 든 분유로 고통당하기 때문에 분유 사재기를 용인했어./ 너희들에게 자유가 없기 때문에 당신들이 홍콩으로 자유롭게 올 수 있도록 초대했어./ 너희들의 교육이 낙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교육 자원을 당신들과 나누었어./ 너희들이 정자체를 모르니 아래쪽에 병신체를 써넣어줬어./ 홍콩에 오면 현지 문화를 존중해주시길 바라. 이러다가 홍콩은 거덜난다니까.” 사우트먼․옌하이룽(2021), 98쪽 참조. 이 광고에 들어간 “10만 홍콩 달러는 1주일 동안 대중적 모금으로 마련된 것”이라 한다. 같은 글, 103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