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반환 이전의 홍콩 서사

ycsj 2023. 10. 6. 09:21

흔히들 홍콩의 경제 발전을 거론할 때 ‘결핍과 보상의 이원 대립’을 들곤 한다. 즉 정치적 자립의 결핍에 대한 보상심리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고 그 결과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정치 지도자를 선택할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옷은 선택할 수 있다”(Abbas, 1997). 악바르 압바스(Abbas, Akbar)의 언급은 홍콩의 ‘경제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한 경멸감이 묻어있다. 이런 맥락에서는 홍콩의 경제적 성취가 뛰어날수록 그것은 자신의 경제 외적 결핍과 타락의 증거로 간주될 뿐이었다. 이에 대해 레이 초우(Rey Chow, 周蕾)는 ‘정치적 자결권이 없는 홍콩의 물질주의는 보상적 성격이고, 정치적 자결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물질주의는 자연스러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결핍과 보상’의 논리를 비판했다(Chow, 2013b: 208). 나아가 초우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홍콩의 식민성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아이우(艾蕪)와 원이둬(聞一多) 등의 대륙 남성 작가들은 “식민지로서의 홍콩의 위상에 초점을 맞춘다”(Chow, 2013b: 209). 그러므로 이들은 홍콩이 구원이 필요하고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초우는 경제주의와 식민성,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인 보상 논리와 구원 동기를 홍콩의 기원으로 인정한다. 심지어 홍콩 수필가 하공(哈公)은 두 남자―영국과 중국―가 홍콩을 집단 성폭행하는 텍스트에서, 식민지 개척자와 구원자 사이에 적대보다는 공모와 협력이 존재했음을 폭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 아이우와 원이둬의 반제(反帝) 주장은 정치적으로 옳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중화인민공화국의 반제국주의 주장은 중국 제국주의를 은폐(to mask)하는 주요 방법이 되었다. 중국 제국주의는 티베트 나아가 홍콩과 같은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고 눈에 띄게 나타났다. ‘서양’ 제국주의자들에게 손가락질함으로써 중국은 인민과 식민지화된 영토에 대한 폭력을 감추고 있다”(Chow, 210). 초우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익숙한 해석인 홍콩의 보상 논리와 구원 동기를 반복하지 않고 홍콩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방법이 있을까? 홍콩에 대한 경멸적인 결핍감이나 구세주의 필요성을 탓하지 않고 어떻게 홍콩의 독특함과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의 궁극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현대 도시문화의 개념화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는 도시로서의 홍콩에 관한 것은 무엇인가?”(Chow, 210) 영국 식민주의를 철저하게 청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구세주와 소유자를 가장하는 중국 내셔널리즘의 신화를 불식해야 하는 것이 바로 현대 도시문화의 개념화에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는 홍콩이 해결해야 할 두 가지 전제인 셈이다. 반환 이후 홍콩에 결핍된 것은 정치적 자결권뿐만 아니라 토지와 공간, 미래 해방 등의 전망이다.

레이 초우는 다른 글에서 홍콩과 같은 ‘서양의 타자’를 보는 새로운 관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시적인 것’은 우리 세계의 폭력인 ‘오리지널’에 빛을 비추는 ‘우화’이다. 그리고 ‘원시적인 것’은 서양 혹은 동양이라는 ‘오리지널’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포스트콜로니얼 세계에서 생존을 향해 나아가는 통로를 표시한다”(초우, 2004: 299). 여기에서 ‘오리지널’은 우리 세계의 폭력이고 주요하게는 서양 제국주의와 중국의 전통을 가리킨다. 초우는 ‘원시적 존재’의 예로 ‘문화 사이의 통로에 마네킹처럼 서 있는 근현대 중국영화의 여성들’을 들고는, 우리가 종착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원시적인 존재의 우화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을 통과해야 한다면서, 그 종착점이 동양 전통의 허물어진 기반과 서양 형이상학의 약화된 토대라는 종착점이라고 주장한다(초우, 298). 비서양의 전통을 단순한 ‘타자’가 아니라 ‘원시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이 서양 제국주의 또는 중국 전통이라는 ‘오리지널’의 토대를 전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우의 논리를 홍콩 서사와 결합해보면, 서양의 시선으로 홍콩을 이야기하거나 서양의 시선을 내면화(internalization)한 중국의 시선으로 홍콩을 이야기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중국 전통의 시선으로 회귀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물론 그런다고 외부의 시선을 거부하는 홍콩만의 시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홍콩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레이 초우의 말로 바꾸면, 홍콩의 포스트식민 상황을 인지하고 “홍콩 식민지의 바로 그 근원을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재창조하는”(Chow, 211) 홍콩인의 ‘자기 글쓰기(self-writing)’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초우는 그 사례로 렁핑콴(梁秉鈞)의 시(詩)와 로다위(羅大佑)의 대중음악을 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웡카와이(王家衛)의 <동사와 서독>에서 서독과 동사는 홍콩과 영국으로 유비(類比) 시킬 수 있다. 서독 구양봉의 귀향과 패업의 완성을 통해, 홍콩이 중국의 품으로 돌아가 다른 지역을 압도하며 홍콩식 발전 모델의 패업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읽어내는 독법은 홍콩이라는 ‘원시적인 것’이 중국이라는 ‘오리지널’을 전복할 수 있게 한다. 아울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행위를 망각하고 자신의 상처만을 기억하는 동사 황약사를, 150년간의 식민통치에 대해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훌훌 떠나면서 홍콩섬과 커우룬(九龍)반도의 소유권을 반환할 수밖에 없었던 상처만을 기억하는 영국으로 보는 것은 서양이라는 ‘오리지널’의 토대를 약화한다는 점에서 결코 지나친 상상이 아닐 것이다. 특히 서독 구양봉에 대한 위의 해석이 타당성을 가진다면 홍콩의 중국 반환은 식민지 또는 탈식민지로서가 아니라 지구적 도시(global city)로서 중국의 기타 도시에 모범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고, 홍콩 연구는 도시문화 연구의 주요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사실 1997년 중국 반환을 전후하여 홍콩은 전 세계 동아시아 전문가들에게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첨단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던 홍콩이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체제를 견지하려는 중국으로 편입되면서, 다양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동이 예견되었고, 그에 대한 적응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 구조는 홍콩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지구적 연구과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위치에서 어떤 시선으로 접근하는가이다. 렁핑콴은 ‘홍콩 이야기’를 고찰할 때 화자와 관점에 주의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也斯, 1995: 4). 렁핑콴은 기존의 ‘홍콩 이야기’의 대표적인 예로 ‘국제도시 서사’와 ‘네이션 서사’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전자의 예로 리콴유(Lee Kwan Yew. 李光耀)를, 후자의 예로 원이둬 등의 대륙 문인들을 들고 있다. 1997년 이전의 시점(時點)에서 전자가 현상 유지를 강조한다면 후자는 중국으로의 이상적인 반환을 권유하고 있다(也斯, 6). 그러나 렁핑콴은 이 두 가지 서사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홍콩에 관한 모든 서사는 홍콩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이곳의 우리 생각”(也斯, 11)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보편성과 심층적 사고를 배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장정아도 ‘국제도시 서사’에 비판적이다. 그녀는 150년의 식민통치로 홍콩인이 ‘국제대도시’ 담론을 스스로 수용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아무것도 없던 어촌에서 국제대도시로 성장한 홍콩의 기적은 영국의 식민 통치 덕분에 가능했다”라는 ‘국제대도시 담론’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고 중국에 대한 우월감을 강화하며 홍콩의 정체성 형성에 핵심 역할을 했다.” 이는 반환 이후 중국이 홍콩인에게 약속한 “경제적 자유와 번영이 유지되는 경제도시”와 상통한다. 장정아는 “슬픈 아이러니는, 150여 년 홍콩인들이 만들어온 삶의 방식을 경마와 주식과 오락으로 환원시킨 이 담론을 그들 스스로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데 있었다”라고 평가한다(장정아, 2017: 113~114). 그러나 홍콩인들이 국제 대도시 담론을 수용한 심층 기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홍콩이 반환되기 6~7년 전, 홍콩 반환을 한 식민자가 다른 식민자에게 양도(handover)하는 것으로 통찰한 레이 초우는 ‘포스트식민’의 관점에서 홍콩의 ‘식민성’을 깊게 파고든다. 앞당겨 말하면, 홍콩인들이 국제 대도시 담론을 기꺼이 받아들인 심층에 식민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중국 각지에서 홍콩으로의 이주는 영국의 식민통치 이후 진행되었고 현재 홍콩 거주민은 대부분 이주민 또는 이주민의 후손이다. 중국 각지에서 모여든 이주민은 “중국의 더 가혹한 여건을 피해 자발적으로(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왔다.”(Chow, 2013b: 221). 그러므로 로콰이청(Lo, Kwai-cheung: 羅貴祥)은 홍콩의 “식민 주체는 자발적으로 식민통치에 가입하는 자율-선택 집단”(Lo, 1990: 163)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표층적으로 볼 때 홍콩 이민자들은 ‘중국의 가혹한 여건’보다 영국의 식민통치가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중국의 가혹한 여건’은 초기에 청 왕조의 봉건 통치였고, 후기에는 권위주의적인 공산 정권의 지배였다. 이들은 “(영국의-인용자) 식민통치 하에서 고국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홍콩에 영주권을 확립했다.” 홍콩의 식민성은 “피식민자가 삶의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했다”(Chow, 2013b: 222). 그러므로 식민지 홍콩은 일반 식민지와 다른 몇 가지 특성을 보여준다. 하나는 식민지를 자발적으로 선택했으므로 홍콩인에게 ‘식민성’은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식민성은 본질적으로 폭력을 수반하므로, 식민성이라는 폭력의 내면화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반환 이후 식민의 주체가 고국 정부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는 거의 저항하지 않았던 홍콩인들이 중국 정부의 강압 통치에는 저항한다는 점이다. 초우는 식민성의 이중성에 주목한다. “주변화의 모든 비극을 수반하는 역사의 초개인적 조건인 식민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으며, 그 기회 속에서 억압의 일상적 경험은 대안적 형태의 자유를 향한 자의식적 추구와 맞물려 있다.”(Chow, 221)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영국의 식민통치 시기에 형성된 이중적 식민성의 한 측면인 ‘대안적 형태의 자유를 향한 자의식적 추구’가 자본주의의 폐해에 반대하는 근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환 후 중국의 강압 통치에 저항하는 주요한 이론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홍콩 문제에 대한 레이 초우 통찰의 핵심은 “홍콩이 영국 식민주의가 종결된 후 영토 주권상의 독립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반환 이전에 예측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홍콩은 독립적 지위의 전망이 없다.” 그러므로 영국과 중국의 두 식민자 사이에 놓인 홍콩의 포스트식민 상황은 이중과제를 가지게 된다. “홍콩은 중국 내셔널리즘/본토주의의 재차 군림에 굴복할 수 없다. 이는 홍콩이 과거에 영국 식민주의에 굴복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Chow, 1992: 93). 그러나 현실은 이전에 영국 제국주의에 순종했었고 다시 중국 내셔널리즘의 군림에 굴복하고 있다. 이제 홍콩에서 ‘항인치항’의 가능성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홍콩의 인구는 1841년 7,500 명, 1931년 85만 명, 1945년 75만 명, 그리고 2018년 745만 명이다. <홍콩>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C%BD%A9#%EC%A3%BC%EB%AF%BC_%EB%B0%8F_%EC%9D%B8%EA%B5%AC) (검색: 2023.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