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옆의 반도라는 지정학적 이유로 한국은 중국과 오랜 교류를 이어왔다. 또 같은 이유로 근현대 100년의 공백을 뛰어넘은 수교 이후 중요한 무역 상대국으로 자리 잡는 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도 중국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거나 ‘짱꼴라’라 부르며 맹목적으로 무시하고 혐오하는 한국인의 숫자가 적지 않다. 최근에는 수교 이전의 적대 관계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자아내고 있다. 한국인의 중국 인식을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전통 중국에 대한 관습적 존중으로부터 서양의 중국위협론의 영향을 받아 중국 혐오로 나아가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소름 돋는 반공주의의 질곡에 사로잡혀 있던 한국인들에게 마오쩌둥과 사회주의 중국을 처음으로 소개한 이는 리영희 선생이었다. 그러나 리 선생의 노력은 강고한 군사독재정권의 삼엄한 경계망 속에서 일반 대중에게 전파되고 유통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가운데 민항기 사건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이 있었고, 급기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이후 1992년 드디어 한중수교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한중 관계가 수립되었고, 작년 30주년을 맞이했다.
근 1백 년의 공백과 진영 모순을 건너뛴 채 진행된 새로운 한중 관계는 다사다난한 과제를 안고 있다. 한중 관계는 1992년 수교 이후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양적으로 비약적으로 팽창한 동시에 양국 간의 체제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한국무역협회 통계자료에 따르면, 한국과 중국 간의 무역총액은 1992년 약 64억 달러에서 2021년 3,015억 달러로, 약 30년 만에 약 47.27배 증가했다. 우여곡절의 대표적 사례로 2003년 동북공정, 2005년 전통문화 원조(元祖) 논쟁,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2015년 한중 FTA 공식 발효, 2016년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 배치와 그에 이은 한한령(限韓令) 등을 들 수 있다. 한국도 민주화운동 등 커다란 변화를 겪었지만,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변화는 천지개벽(天地開闢)에 비유할 만하다. ‘대국굴기(大國崛起)’라는 중국 관방 레토릭은 국내외에 설득력을 확보했고, ‘대국굴기’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슈퍼차이나’로 전유(專有)하는 한국 언론매체의 인식 변화는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 수준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일반 한국인의 중국 인식은 중국의 거대한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주도해온 보수주의자들은 중국의 거대한 변화가 기존 친미 정책에 균열을 일으킨다고 여기고 끊임없이 중국의 굴기를 깎아내렸다. 그 결과 한중수교 이후 우호적이었던 한국인의 중국 인식은 점차 비호감으로 돌아서고 기어코 혐오의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한중 관계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변수가 작용한다. “미중 전략적 경쟁의 심화, 중국의 급속한 성장에 따른 한중 간 비대칭성 확대, 북한 및 북핵 문제의 고착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중·반한 정서 등의 주요 변수에 의해 움직이게 될 미래 한중 관계는 ‘경쟁’과 ‘갈등’의 양상으로 전개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한국 보수언론의 끈질긴 선전 선동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문제를 중국 문제로 돌리는 ‘짱깨주의’가 판치는 한국 사회에서 반중과 혐중 정서는 역대 최저점을 찍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문제를 중국 문제로 돌리는 것과 중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층위가 다르다. 그런데도 청년 세대의 혐중 정서는 원인 분석이 어려울 정도로 만연되고 최근 대학 신입생 모집에서 중국 관련 학과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반중과 혐중의 흐름이 심상치 않은 한국의 당면 과제는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知中)이고 중장기 과제는 ‘중국과 더불어(與中)’ 사는 것이다. 지중은 친중(親中)과는 다르고, “국익의 최대화 관점에서 중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용중(用中)과도 다르다. 사드 배치와 한한령(限韓令)을 겪은 현시점에서 한국의 지중은 중국의 지한(知韓)과 동보(同步)적일 필요가 있다. 우리만 중국을 이해한다고 한중 관계가 수월해지는 것은 아니고 중국이 먼저 바뀌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정부와 비교하면 중국 정부의 정책이 중국 인민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한중 국민 상호 간의 인식 악화 문제를 해결하는 공은 일차적으로 중국 측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라는 진단은 한국 중심의 일면적 분석이다. 아울러 복잡한 국제 관계에서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출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한중 관계에 미국을 절대 변수로 놓아서도 안 된다. 물론 현재의 미중 갈등으로 인해 한국의 선택지가 넓지 않음에도 집중할 부분은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전통 근린국가이자 주요 무역 상대국을 제대로 아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과업이다.
그러나 지중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중(與中)은 지중의 기초 위에 중국과 더불어 공존하고 상호존중하는 한중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기본자세라 할 수 있다. 유세종은 공존의 지혜로 “내가 손해 보고 내어주기도 하고, 또 상대가 내어주게 만들기도 하는, 이중삼중의 면밀한 부동이화(不同而和)”의 정신을 제시했다. ‘부동이화’는 『논어(論語)』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재구성한 것으로, 이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정신과 상통한다. 박민희도 ‘균형잡힌 중국관’을 가지고 맹목적인 ‘혐중’을 반대하며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공정한 이해와 동행’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가 지향하고 달성해야 할 과제임이 틀림없다. 날로 복잡해지는 주변 환경에 ‘복잡계의 산물’인 인간 주체는 복잡하게 대응해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하며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는 것은 우익 보수가 가는 길이다. 공부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고찰하고 복잡하게 대응한다. 그로 인해 대중과 괴리되는 경향을 경계하면서, 복잡한 중국 공부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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