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유럽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 비판

ycsj 2023. 1. 6. 10:40

4. 비판적 중국연구의 과제 의 1절

 

근현대 비서양 사회의 지식인들은, 유럽의 ‘모던’ 과정이 있었고 비서양 사회는 그것을 모범으로 삼아 다소간의 특수성을 가미해서 ‘근현대’ 과정을 겪은 것으로 이해해왔다. 이를테면 중국공산당이, 맑스-레닌주의의 보편적 원리와 중국의 특수한 상황을 창조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마오쩌둥 사상을 평가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심지어 ‘모던’을 유럽인의 삶의 이해로 보고 유럽 이외 지역의 ‘근현대’는 그것을 모방한 것이므로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의사(擬似)-근현대’와 ‘의사-탈근현대’가 있을 뿐이라는 극단적 주장도 있다.15 그러나 이런 이해와 주장이 그동안 간과해온 사실은 유럽의 모던이 유럽 내
부에서 순수하게 형성·발전한 것이 아니라 ‘유럽과 유럽 외부의 관계’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모던 이전의 유럽은 로마 문명의 주변이었고 이슬람 제국에 억압당했으며 중국 문명에 개화되었던 역사가 있다. 이 부분을 간과하면 유럽중심주의에 함몰되기 마련이다.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 개념은 사미르 아민이 ‘자본의 발전의 중심-주변부 또는 의존성 모델의 세계적 맥락’을 논의하면서 1970년대에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논자에 따라 ‘서양중심주의(Western-centrism)라고도 하는데, 이는 서양 문명에 기초하고 편향된 세계관으로, 유럽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변명하는 자세를 가리키기도 한다.16 아리프 딜릭은 유럽중심주의를 ‘20세기의 역사 구성 원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구미인들은 세계를 정복했고, 지역의 이름을 다시 지었고, 경제와 사회와 정치를 재조정했으며, 시공간과 다른 많은 것들을 인식하는 전근대적 방식을 지우거나 주변부로 몰아냈다.”17 이는 유럽의 역사 기술에서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역사기술의 시간적·공간적 가정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중심주의는 제국주의를 통해 그 영향력을 확대했고, 2차대전 종식 후 식민지 시대가 종결되었음에도 유럽인뿐만 아니라 비유럽인도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클라크18는 동양사상이 서양사상을 계몽하는 과정을 추적한 바 있고, 아부-루고드19는 유럽이 패권을 차지하기 전인 13세기에도 이미 ‘세계체계(world system)’가 존재했음을 밝혔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마지막 저서인 [모세와 일신교]를 꼼꼼히 분석하는 과정에서, “일신교가 발생적으로 이집트적이었다면, 역사적으로는 유대적이었다”20라고 함으로써, 헤브라이즘의 이집트적 기원과 모세의 이집트적 정체성을 밝히면서 이스라엘의 ‘성서 고고학’을 비판한 바 있다. 헬레니즘과 함께 유럽 문명의 양대 축이라 일컬어진 헤브라이즘의 기원에 이집트 문명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유럽중심주의의 허구성을 반증한다. 아리프 딜릭은 유럽 모던의 대문자 역사(History)를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복수의 역사들은 민족의 목적론이나 하나의 모더니티란 목적론에 의해 정의되고 강제되는 하나의 역사(History)에 대항”한다.21 그동안 타자화되었던 비서양 사회의 역사들이 유럽 모던의 대문자 역사를 비판하고 그에 대항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포스트식민주의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스튜어트 홀은 서양과 비서양에 관한 지식이 사실과 판타지로 구성되었음을 적시하고, 서양인들이 복잡한 차이들을 무너뜨리는 일면적인 유형화 묘사를 통해 비서양을 대타자(the Other)로 재현하는 과정을 밝혔다. 그는 먼저 유럽을 지리적 개념으로 간주하고 역사 구성물로서 ‘서양’을 제시했다. 홀은 서양이라는 관념이 서양 사회를 반영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서양이라는 관념이 서양 사회의 형성에 핵심적이었다고 보면서 서양이라는 관념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날카롭게 지적해낸다. 그에 따르면, ‘서양적’ 사회는 발전된, 산업화된, 도시화된, 자본주의적인, 세속적인 그리고 모던한 사회다. 그 사회들은 중
세와 봉건주의 붕괴 이후 특정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들의 결과였다. 이렇게 구성된 서양이라는 관념은 지식을 생산했으며 전 세계적인 권력관계의 체계를 조직하는 요인임과 동시에 사고방식과 말하는 방식 전체를 조직하는 개념이자 재현 체계 나아가 평가 기준이 되었고,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이는 ‘비서양 사회들’을 ‘타자화(otherization)’하는 것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홀은 서양과 비서양 사회들의 개념이 그 중심에 놓인 ‘재현’ 체계 형성과정 분석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의 결론은 서양의 특수성이 비서양 사회들과의 만남과 자기비교에 의해 생산되었다는 것이다.22 홀에 의하면, 유럽의 점진적 통합, 경제발전을 향한 지속적인 도약, 강력한 네이션-스테이트 체계의 출현 그리고 여타의 모던 사회 형성에서 드러난 모습은, 마치 유럽이 내부로부터 자신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조건과 원료 그리고 동력을 받았던 것처럼 ‘순수하게 내적인’ 이야기로 말해지지만, 이 과정 또한 외적이고 지구적인 존재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모더니티의 토대를 침식하고 변형시키고 있는 특정한 ‘지구화’의 유형(생산, 소비, 시장과 투자의 국제화)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매우 긴 이야기의 최종 국면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초기의 유럽 해상제국의 확장, 신세계에 대한 착취, 유럽인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인간들과 문명들과의 해후, 상업과 정복 그리고 식민화를 통해 그들을 유럽의 역동적인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 등은 모던 사회와 모던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핵심적인 삽화들이다.23
스튜어트 홀의 접근법은 ‘다인과론적 접근(multi-causal approach)’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다인과론적 접근은 기존의 유럽 중심적 서술을 지구적 맥락(global context)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모던 사회를 유럽 내적 현상이 아니라 범세계적인 현상으로서 간주하며, 모던 세계를 단일한 역사적 변동이 아니라, 일련의 주요한 역사적 변동들이 가져온 예측되지 않고 예상할 수도 없었던 결과로 다룬다. 이런 입장에 서야만 ‘서양 보편–비서양 특수’라는 ‘중심–주변’의 틀을 깰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홀은 미셸 푸코의 ‘담론’ 개념과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기대어 15세기에서 18세기 말에 나타난 ‘서양과 그 외의
사회들’에 관한 담론을 분석한다. 앞당겨 말하면, 이 담론은 서양/동양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에 따라 세계를 구분지어 재현함으로써 조야하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구분을 이끌어내고 ‘차이(difference)’에 대한 과잉 단순화된 개념을 만들어냈다.24
유럽중심주의는 ‘서양의 특수성’을 보편화하고 비서양 사회들을 ‘타자화’한 역사적 구성물이다. 서양의 특수성, 즉 ‘서양’이라는 정체성은 서양 사람들을 점차 독특한 유형의 사회로 주조하는 내적 과정, 즉 ‘서양 예외주의’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형성되었다. 서양 예외주의는 서양 이외의 지역을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하면,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유럽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25으로, “‘동양’과 (대체로)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26 그리고 결론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 구체적으로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유럽 문화가 동양을 정치적·사회적·군사적·이데올로기적·과학적·상상적으로 관리하거나 심지어 동양을 생산하기도 한 거대한 조직적 규율”27이다. 이는 비유럽 지역에는 발전도, 계몽도, 인권도 없다는 생각을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의 무서움은 그런 생각이 유럽인만이 아니라 비유럽인의 내면까지도 장악한다는 점이다. 고모리 요이치는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를 “몇 세대에 걸친 지식인, 학자, 정치가, 평론가, 작가라는 오리엔탈리즘에 꿰뚫린 사람들이 반복 재생산한 표상=대리 표출(representation)에 의해 구성된 현상”28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유럽중심주의는 자신의 욕망을 휴머니즘으로 포장하므로, ‘선의의 제국주의’(존 스튜어트 밀)라고 불리고 피식민지 주민들은 그에 감사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에 자발적으로 동원되곤 한다.
요컨대, 유럽이라는 개념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귀퉁이라는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다. 유럽중심주의 또는 서양중심주의는 유대인과 동유럽인 그리고 여성 등에 대한 ‘내적 타자화’와 비서양 사회에 대한 ‘외적 식민화’를 통해 유럽/서양을 예외적인 존재로 구성하면서 비서양 사회를 야만시하는 이항 대립 구조를 만들어냈다. 바꿔 말하면, 유럽중심주의는 비서양 사회를 타자화하는 과정에서 발명되었고(invented), 비서양 사회에 강요되었으며, 비서양 사회 사람들은 그것을 내면화(internalization)했고 열심히 추종해왔다. 비판적 중국연구는 그 미망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서양 보편주의의 산물인 오리엔탈리즘과 제3세계 특수주의의 관계다. 레이 초우는 “오리엔탈리즘과 내셔널리즘 또는 토착주의(nativism) 같은 특수주의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이며, 한쪽의 비판은 다른 쪽의 비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29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한 미국인 중국학자의 연구와 내셔널리즘에29기반한 중국학자들의 연구가 모두 일면적이고 양자 모두 중국이라는 현실을 호도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 중국의 제3세계 특수주의의 핵심에는 마오쩌둥의 ‘3대 이형동질(異形同質, allomorphism)의 오류’가 자리하고 있다. 마오쩌둥의 ‘반제반봉건 혁명론’은 중국의 근현대적 과제가 서양을 학습(반봉건)하는 동시에 서양을 배척(반제)해야 하는 이중적 투쟁임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역사적·사상적 가치를 지닌다. 중국 근현대 과제의 이중성에 대한 마오쩌둥의 인식이 전제되었기에, 리쩌허우의 ‘계몽과 구망의 이중 변주’라는 개괄이 나올 수 있었다. 또한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발전의 특수한 형태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신중국 성립 이후 마오쩌둥의 혁명주의 노선을 ‘모더니티에 반(反)하는 근현대화 이데올로기’30로,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을 ‘모더니티를 추구하는 근현대화 이데올로기’로 개괄한 왕후이의 논단31도 마오쩌둥의 이론에 빚지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이론 차원에서는 이중 과제를 설정했으면서도 실천 과정에서는 하나를 결락하거나 유보하는 오류를 범했다. 반제와 반봉건의 이중 과제에서 전자를 주요 과제로 선택함으로써 ‘구망이 계몽을 압도’한 상황을 연출했고, ‘옌안문예좌담회’에서 보급과 과제라는 이중 과제를 탁월하게 설정하고도 보급에만 치중함으로써 인민공화국의 문예 수준을 제고시키지 못했으며, 신중국 건설 이후 근현대화의 목표와 사회주의적 열망이라는 이중 과제 가운데 사회주의 목표가 공업화에 종속되는 길을 선택했다. 사상가/이론가로서의 마오쩌둥은 근현대 중국의 이중 과제(반제와 반봉건), 사회주의 중국의 이중 과제(근현대화의 목표와 사회주의적 열망), 새로운 인민문학의 이중 과제(보급과 제고)를 훌륭하게 추출했지만, 혁명가/통치자로서의 마오쩌둥은 이중 과제에서 우선순위를 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선택은 상호 대립적이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이중 과제 가운데 하나를 주요 과제로 삼았으며 그 결과 제3세계 특수주의의 편향으로 귀결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