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융 텍스트를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 국가주의적 맥락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중국 근현대 무협소설이 태동하던 시점에 ‘민족’은 네이션(nation)과 에스닉(ethnic) 두 층위로 해석될 수 있었다. 전자는 외적의 침입에 대한 중국 네이션(Chinese nation)을, 후자는 만주족에 대한 한족(Han ethnic)을 가리킨다. 사실 중국 문화라는 것이 한족 중심의 56개 에스닉의 혼성문화라는 것은 오늘날 상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현대 무협소설의 태동기인 1910년대에는 반제(反帝)와 반만(反滿)이 착종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전자보다 후자를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했다. 이 두 가지는 쑨중산(孫中山)에 의해 삼민주의(三民主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민족주의’로 개괄되었다. 쑨중산 민족주의의 핵심은 중국 경내의 각 에스닉이 일률적으로 평등해지는 것’이었다. “종족 혁명에서 민족 자결로, 불평등 조약 승인에서 불평등 조약 폐지로, 오족 공화에서 각 민족의 일률적 평등으로, 쑨중산의 민족주의는 여기에서 최고 수준에 도달하였다.”(리쩌허우, 2005: 521). 요컨대 쑨중산은 일찌감치 에스닉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 중심의 중화 네이션의 국민국가(nation-state) 건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국민국가 체제로 제국주의에 대항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태동기의 근현대 무협소설에서도 ‘민족문화 고양’이 제기되었지만 그것은 중화 네이션으로까지 승화하지 못한 한족 중심주의(Han-centricism)를 크게 넘어서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융의 전기 대표작인 ‘사조삼부곡’도 한족이 북방 소수민족―만주족, 거란족, 몽고족―의 침입을 받고 그에 대항하는 과정을 그렸다. 여기에서 진융은 이민족에 대한 한족의 저항이라는 주제를 통해 한족 중심적 주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쑨중산의 ‘오족 공화’의 경지는 진융의 후기 작품에서 구현되고 있다.
진융은 처녀작 『서검은구록』에서부터 에스닉(ethnic) 문제를 의제화하고 있다. 만주족 황제 강희(康熙)는 공식적으로 한족 혈통이 50% 섞여 있었다. 강희의 손자인 건륭(乾隆)이 한족 대신의 아들이었다는 민간 전설을 바탕으로 쓴 『서검은구록』은 네이션(nation) 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에스닉을 풍자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청나라의 기반을 안정시킨 강희제는 재위 기간이 60년에 달했다. 당시 강희제의 아들들은 황태자 자리를 차지하려고 알게 모르게 쟁투를 벌였다. 그러나 강희제는 황태자 선정에 신중하여 황자의 능력뿐만 아니라 황손의 됨됨이까지 고려했다. 강희 58년 8월 13일, 넷째 황자 윤정(훗날 雍正帝)의 측비가 해산했다. 윤정은 기다리던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자 매우 실망했다. 며칠 후 한족 대신 진세관이 아들을 낳자 사람을 시켜 데려오라 했다. 그런데 안고 들어간 것은 아들이었는데 데리고 나온 것은 딸이었다. 진세관의 아들이 바로 건륭이라는 것이다. 『서검은구록』에서 반청(反淸)단체인 홍화회의 우두머리는 진세관의 둘째 아들인 진가락이다. 그러므로 청 황제 건륭과 반청조직의 우두머리인 진가락은 부모가 같은 친형제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중국 네이션’의 개념이 없었다. 오직 한족과 만주족이라는 에스닉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동생은 형에게 만주족 황제를 관두고 한족 황제를 하라고 핍박하고, 형은 마지못해 수락했다가 결국 동생을 배신하고 만주족 황제로 만족한다. 우리는 유전학적으로는 한족인 청 황제가 자신이 한족임을 확인한 후에도 만주족을 선택한다는 줄거리를 통해, 역으로 ‘에스닉’도 구성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작품 연대기로는 『서검은구록』보다 나중이지만 시대 배경은 그보다 앞선 『천룡팔부』는 북송 철종(哲宗) 시기 윈난(雲南)의 대리(大理)국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한족의 북송, 거란족의 요, 돌궐족의 서하, 그리고 선비족 모용가의 비전으로서의 연(燕)까지 5족의 5국이 공간 배경을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북송이 중심이지만 1094년은 북송의 멸망(1126년)까지 30년 남짓 남은 시점으로 북송과 요의 갈등은 극단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작품의 제1 주인공 교봉은 무림의 최대 조직인 개방 방주로 등장한다. 한인으로 자란 교봉은 알고 보니 거란족 출신의 소봉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30년 넘게 한족으로 살아온 교봉이 자신을 거란족 소봉으로 조정하는 과정은 간단치 않았다. 처음의 황당함은 점차 포기로 바뀌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양부모와 사부를 해친 대악인을 추격하게 된다. 교봉은 우여곡절 끝에 거란족 소봉의 정체성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거란족처럼 한족을 미워할 수는 없다. 교봉으로 자라서 두 개의 네이션/에스닉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결국 소봉으로 죽는 그는 여전히 다음의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다. ‘한인 중에서 선한 사람이 있는 반면 악한 사람이 있고, 거란인 중에도 선한 사람이 있는 반면 악한 사람이 있다. 왜 한인과 거란인으로 나뉘어 서로 살상을 서슴지 않는 것일까?’ 그의 죽음은 요의 침략을 막지만 결국 북송은 망하고 남쪽으로 옮겨간 남송은 훗날 원에게 멸망함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소봉의 문제 제기는 결국 개인 차원에서 해소되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천룡팔부』의 시대 배경인 송 시절은 아직 네이션 개념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교봉/소봉은 그 출생의 특이함으로 인해 요와 송 양국의 네이션 정체성과 거란족과 한족의 에스닉 정체성을 경험하게 된다. 『서검은구록』의 시대 배경인 건륭 시절도 그렇고 아래에서 살펴볼 『녹정기』의 배경인 강희 시절도 마찬가지로 네이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연히 두 개의 네이션/에스닉 정체성을 경험한 교봉/소봉은 시대를 앞선 인물이었고, 그러므로 그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진정한 비극적 영웅의 캐릭터에 부합한다.
진융의 마지막 장편 ?녹정기?는 그 제목부터 풍자적이다. 제1회에서 해설하고 있는 것처럼 ‘축록중원(逐鹿中原)’과 ‘문정(問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천하의 주인이 되려는 것이다. 그러나 녹정공(鹿鼎公) 위소보는 평천하(平天下)의 큰 뜻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품었던 ‘큰 뜻’은 여춘원(麗春院) 옆에 여‘하’원, 여‘추’원, 여‘동’원을 열어 주인이 되는 일이었다. 그는 모십팔을 만나기 전 12~3년 동안 ‘여춘원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왔다. 여춘원은 기방이다. 기방이란 여성의 육체와 남성의 금전이 만나는 곳이다. 특히 위소보에게 있어 그곳은 생존투쟁의 현장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들어간 황궁도 위소보에겐 기방과 다를 바 없었다.
『녹정기』 결말 부분은 네이션과 에스닉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강토를 안정시키려는 만주족 황제 강희와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천지회 사이에서 거취를 정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일곱 부인과 함께 퇴출하는 위소보는 마지막으로 어머니 위춘방을 찾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생부에 관해 물어보니 위춘방의 대답이 걸작이다. 당시 자신을 찾는 손님이 많아서 누구의 씨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위소보는 한(漢)․만(滿)․몽(蒙)․회(回)․장(藏) 가운데 하나이겠지만, 작가는 위소보를 마치 ‘5족 공화’의 합작품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작가는 여기서 리얼리즘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희 시대에는 네이션 개념이 없었음에도 위소보를 5족 공화의 산물, 다시 말해 중화 네이션의 상징으로 내세운 것은 작가의 의식을 작중 인물에 불어넣은 것이다. 더구나 위춘방은 ‘손님 중에 러시아놈이나 서양놈은 없었냐’는 위소보에 질문에 벌컥 화를 내면서 ‘그놈들이 여춘원에 왔더라면 빗자루로 쫓아냈을 거다’라고 답한다. 이는 오늘날의 상황에 견주어보면 이해가 될법하지만, 위소보는 만주족이 한족을 학살한 ‘양주(揚州) 도살’(1645)이 일어난 지 10년 후쯤 태어난 것으로 추정 가능한데, 양주 기방에서 일한 위춘방이 만주족보다 외국인을 더 증오했다는 것은 리얼리즘에 부합하지 않는다(田曉菲, 2002). 결국 진융은 『녹정기』에서 에스닉의 문제를 고의로 국가주의로 전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융 소설은 1950년대 신문에 연재되면서부터 수많은 중국인이 그의 작품을 애독하고 끊임없이 연속극과 영화로 재생산되고 있다. 지금도 TV에서 지속해서 재방송되는 것을 보면 그의 작품이 ‘중국인다움(Chineseness)’의 어떤 부분을 잘 파악해 형상화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륙과 홍콩, 타이완 그리고 여러 지역의 화인(華人)들을 통합(integration)시키는 기제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아울러 1990년대 동아시아에서 환영을 받았던 한류가 이제 포스트한류를 고민하고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동아시아에서 광범하게 수용되고 있는 문화횡단의 시대에, 진융의 작품도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관점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때 진융 텍스트가 근현대적으로 해석한 중국 전통문화의 두터움은 동아시아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 콘텐츠이기도 하지만, 자칫 중화주의 서사와 ‘중국 상상’(유경철, 2005) 또는 ‘전통의 부활’(林春城, 2005)을 강화하는 기제가 될 수 있음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고찰한 오족 공화 서사를 통한 국가주의 표상은 독자들에게 또 다른 대국으로 부상하고 제국으로 나아가는 중국을 합리화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주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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