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한국의 ‘영웅문’ 현상

ycsj 2022. 8. 29. 22:41

중문학자 이치수(2001)는 한국의 중국 무협소설 번역·소개의 역사를 ‘김광주 시대’, ‘와룡생/워룽성 시대’, ‘김용/진융 및 기타 시대’의 세 시기로 나눈다. 무협소설 번역가이자 작가인 박영창도 ‘한국의 중국 번역 무협’을 ‘김광주시대’, ‘와룡생/워룽성 시대’, ‘김용/진융 시대’로 구분했다. 진융은 워룽성에 이어 중국 무협소설 유행의 또 하나의 고조를 대표한다. 1986년에 『영웅문』시리즈가 출판되면서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외국 번역소설로 꼽혔고 1986년부터 1989년에 이르는 3년간 ‘飛雪連天射白鹿, 笑書神俠倚碧鴦’의 14부와 「월녀검」이 모두 번역되었다. 몇 년 되지 않은 기간에 외국 작가의 작품이 모두 번역 소개된 것은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로, 우리나라의 번역문학사상 특기할만한 사건이었다(이치수, 2001: 77~78). 진융에 관한 학술 연구도 적잖이 진행되어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점도 특이하다. 21세기 들어 다시 출판된 『사조영웅전』(2003), 『신조협려』(2005), 『의천도룡기』(2007)는 판권계약을 통한 번역이라는 측면에서 무협소설 번역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보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전 판본과 비교할 때 원전에 충실한 완역이라는 점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른바 ‘영웅문 키드’가 이제는 ‘원전에 충실한 완역’에 환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앞당겨 말하면, ‘영웅문 현상’은 한국의 고유한 현상으로, 진융 작품의 ‘문화적 두터움(cultural thickness)’과는 거리가 있는 문화 현상으로 파악해야 한다.

한국의 ‘영웅문 현상’에서 특이한 점은 진융의 작품이 모두 번역되었음에도 독자들은 유독 ‘영웅문’ 시리즈에 집착한다는 사실이다. ‘영웅문’의 원작인 ‘사조삼부곡’이 흥미로운 작품인 것은 틀림없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소오강호』, 『천룡팔부』, 『녹정기』로 이어지는 후기 대작들이 훨씬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인 협객의 성격만 보더라도, 유가적 협객(원승지·곽정), 도가적 협객(양과), 불가적 협객(장무기)을 거쳐, 협객의 일반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비협(非俠)적 인물(적운·석파천)과 심지어 시정잡배에 가까운 반협(反俠)적 인물(위소보)로 변천해가는 계보만으로도 그 전복적 성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진융의 작품에는 수많은 역사 사실과 문학작품 그리고 문화적 요소들로 충만하다. 중국 불교에 입문하려면 진융의 작품을 읽으라는 천핑위안(陳平原, 1992)의 권고는 과장이 아니다. 송말부터 명 건국까지의 역사를 재미있게 읽으려면 ‘사조삼부곡’에서 시작하고 명말 청초의 역사 공부는 『녹정기』와 함께하면 좋을 것이라는 권유는 필자의 심득(心得)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복합적인 의미구조를 가진 진융 텍스트의 ‘문화적 두터움’은 장르문학으로서의 무협소설 애독자들의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영웅문 키드’들은 무협지 ‘영웅문’으로 충분할 뿐, 그 문화적 수준을 향상해야 이해할 수 있는 중국의 문사철(文史哲)과 제반 문화, 중국 상상, 전통 만들기, 성별 정체성과 내셔널 정체성(gender and national identity) 등의 주제에는 관심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관련 담론을 보면 중국 무협소설에 대한 오해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김용의 영웅문’을 중국을 대표하는 무협소설로 간주하고 그것을 독파하면 중국 무협소설을 정복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주로 한국 무협소설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논자들의 담론에 등장한다. 전형준(2003)은 좌백 이후 한국의 무협소설을 ‘신무협’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워룽성·진융·구룽(古龍)에 대한 전복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전복의 문화적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그는 후속 작업(전형준, 2007)에서 무협소설이라는 장르문학을 ‘문학’으로 승격시켜 진지하게 ‘평론’하고 있다. 이진원(2008)은 한국에서 창작·번역된 무협소설과 그에 관한 평론 및 연구를 총망라하면서, 한국 무협소설이 중국 무협소설의 단순한 번역 또는 번안에서 유래한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그 기원을 조선 시대 또는 그 이전까지 소급하여 영웅소설이나 군담소설에서 무협소설의 맹아를 발견하려 한다. 그리고 중국 무협소설의 영향과 무관한 일제강점기의 역사무예소설을 그 후예로 삼고 1980년대의 창작 무협소설과 1990년대의 신무협을 그 ‘창조적 계승’으로 설정하며 그 흐름을 ‘한국적 무협소설’로 명명한다. 한국 무협소설은 바로 이 ‘한국적 무협소설’과 중국 무협소설을 모방하여 창작한 ‘중국식 창작 무협소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협소설에서 ‘한국적’ 정체성을 모색하는 이진원의 시도는 그가 이론적 근거의 한 축으로 기대고 있는 전형준이 보기에는 “자신을 서구라는 타자와 동일시하는 서구 지향적 무의식과 자신을 중국이라는 타자와 구별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무의식, 얼핏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무의식의 공모”(전형준, 2008)일 뿐이다. 한국 무협소설의 기원과 맥락을 발굴하려는 이진원의 노력은 서유럽 지향의 무의식과 내셔널리즘 지향의 무의식이 공모한 결과가 된다. 그런데 전형준이 ‘전복’이라 명명한 내용이 명실상부한 ‘전복’인지도 대조가 필요하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신무협은 현실도피와 대리만족이라는 기존 무협소설의 틀을 초월하거나 전복하고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실존적 탐구를 나름대로 의미 있게 수행했다”(전형준, 2008). 그뿐만 아니라 신무협은 문학 수준의 향상, 내용과 형식 면에서의 독자성, 근현대성과 포스트근현대성 그리고 문화적 동시대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신무협이 전복했다는 대상으로 한국의 무협소설 외에 중국 무협소설 작가들까지 포함한 것은 섣부르다. 특히 진융의 작품을 현실도피와 대리만족이라는 틀에 단순 대입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나아가 한국 신무협이 전복한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지만, 전형준의 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진원과 전형준이 비교 대상으로 삼은 ‘김용의 영웅문’은 사실 ‘진융의 사조(射雕)삼부곡’을 번역한 『소설 영웅문』인데, 이는 완역이 아니라 양적으로 70% 수준의 번역이었고 그 문체라든가 문화적 측면까지 평가하면 50% 이하의 조악한 번역물이다. 그러므로 ‘김용의 영웅문’은 ‘진융의 사조삼부곡’과는 다른 별개의 텍스트이자 한국의 문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김광주의 『정협지』를 번안소설이라 한다면, ‘영웅문’ 또한 축약이나 생략했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번안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영웅문’의 번안·출판은 이전 단계 무협지의 도식적 성격을 깨뜨린 사건이었지만, 원작의 의미와 재미를 상당히 훼손시켰다는 것이 이 글의 판단이다. 그리고 ‘김용’에 관한 담론도 ‘영웅문’ 3부작(원문 기준 각 4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고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소오강호』(4권), 『천룡팔부』(5권), 『녹정기』(5권) 등의 대작 장편 정도까지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진융 작품의 문화적 두터움이 이들 6부의 대작에 구현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서검은구록』(2권), 『벽혈검』(2권), 『협객행』(2권), 『설산비호』(1권), 『비호외전』(2권), 『연성결』(1권) 등의 장편과 「월녀검」(30쪽), 「원앙도」(52쪽), 「백마소서풍」(104쪽) 등의 중·단편을 빼고 진융의 작품세계를 운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특히 『협객행』의 문자해독능력(literacy)에 대한 신랄한 풍자, 『연성결』의 인간의 처절한 욕망에 대한 철저한 해부, 『비호외전』의 미완의 종결 등의 ‘문화적 두터움’은 한국 독자와 연구자들에게 제대로 수용되어야 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영웅문’ 시리즈는 진융 텍스트의 두터움(thickness)을 충분히 번역하지 못하고 그 표층인 무협 층위만을 번역한 점에서 ‘문화번역’의 부정적인 사례가 되고 말았다. 출판사가 주도했을 표층 번역은 당시 독서 시장의 요구에는 부응했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우리는 중국에 대한 심화 학습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21세기의 새로운 완역은 독자에게 외면당했다. 대중문화에 각인된 문화를 번역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진융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상업적 번역은 표층에 머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오역되면 바로잡기가 쉽지 않다. 영웅문에 길든 ‘영웅문 키드’들이 새로이 완역된 ‘사조삼부곡’에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그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