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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 금고문 논쟁

ycsj 2022. 7. 6. 07:02

<今古文经之争>, https://baike.baidu.com/item/%E4%BB%8A%E5%8F%A4%E6%96%87%E7%BB%8F%E4%B9%8B%E4%BA%89/9041258?fr=aladdin (검색일 2019.6.28.)

전국(战国)시대부터 서한(西汉)까지 중국 문자(汉字)는 두 차례의 큰 변화가 있었다. 전국시대에 유행했던 것은 주서(籀书)’, 대전(大篆)’이었다. 그러나 각국에서 사용하는 문자의 차이가 커,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 문자를 통일해 주서를 소전(小篆)’으로 정리했다. 한대(汉代)에는 다시 소전을 예서(隶书)로 간략화했다. 이로 인해, 한대 사람은 예서로 쓴 서적을 금문(즉 당시의 문자)’라 하고 한 이전에 주서 또는 소전으로 쓰여 한대까지 유전된 것을 고문이라 했다.

한대의 금고문논쟁은 쓰인 문자가 금문이냐 고문이냐와 유관하지만, 실제 쟁론 문제는 문자의 배후에 있고 연관된 문제가 매우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5경의 텍스트 내용이 달랐고 그에 따라 경문에 대한 해석이 다른 점이었다.

()의 경우, 금문경(今文经)노시(鲁诗), 제시(齐诗), 한시(韩诗)3(三家)가 있었고, 고문경(古文经)에는 모시(毛诗)일가(一家)만 있었다.

상서(尚书)의 경우, 금문경에 복승(伏胜)대하우(大夏侯)()소하후(小夏侯)() 3가가 있었고 고문경에는 고문상서(古文尚书)일종만 있었다.

()의 경우, 금문경에 대대(大戴)(戴德)소대(小戴)(戴圣)경씨(庆氏)(庆普) 3가가 있었고, 고문경에 ,《일례(逸礼). 주관(周官)(周礼) 2가가 있었다.

역경(易经)의 경우, 금문경에 시수(施雠)맹희(孟喜)양구하(梁丘贺)경방(京房) 4가가 있었고, 고문경에 비씨역(费氏)고씨역(高氏) 2가가 있었다.

춘추(春秋)의 경우, 금문경에 엄씨(严氏)(严彭祖)공양춘추(公羊春秋)》、안씨(颜氏)공양춘추(公羊春秋)》、《곡량춘추(榖梁春秋)3가가 있었고, 고문경에 춘추좌씨전(春秋左氏传)》、《추씨전(邹氏传)》、《겹씨전(郏氏传)3가가 있었다.

5경은 본래 6경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악경(乐经)은 악보만 있고 문자는 없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진시황이 불태워 5경만 존재한다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