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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ang, Zhen, ed., The Urban Generation. introduction: (4)

ycsj 2010. 7. 17. 19:57

0.the translocation of an alternative spectatorship (21-33)

: 대안적 관객의식의 자리 옮김(위치 이동)

 

위에서 논의한 것처럼, 1990년대 ‘도시 세대’ 영화의 출현과 다양화는 우선적으로 배급과 상영 부문에서 일련의 강요된 시장 주도 개혁들과 뒤엉켰다. 이 변덕스러운(fitful. 발작적인) 구조 변화들은 스튜디오들을 심각하게 흔들었고 그들에게 비자발적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승인한 유일한 셀룰로이드 문화의 제작자로서의 독점적인 권력을 양보할 것을 강요했다. 그 권력은 스튜디오들이 영화 산업 국유화(nationalization)의 완성 후 1950년대 초기 이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생산과는 동떨어진 채 모든 영역을 지배해온 거대 폭군이었던 [the Chinese Film Distribution, Exhibition and Import and Export Corporation]의 쇠퇴는 가능성 범위의 공간을 더 넓혔다(open up). 그러나 이 변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눈사태가 중국에서 일상생활이 되기 전에 활발하고 다양한 지방(local) 영화문화를 건설할 기회를 잡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부과했다. 1993년의 개혁에 따른 개방적 영화 시장을 만들려는 시도는 제작과 배급 사이의 <연계의> 돌연한 단절, 지금은 지방적으로 통제되고 있는 이익 추구의 시장을 조절할 적절한 정책의 결여, 그리고 국내 영화, 부분적으로는 획기적인 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가혹한 검열로 인해 무산(stillborn)되었음이 증명되었다. 1990년대 후반 국내 영화 산출량과 전체 박스 오피스 영수증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반면, 보다 경쟁적인 국내 영화 시장이 혼합된 간접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부상했다. 동시에 독립 영화와 비디오--신통찮은(of sorts) 중국 영화클럽 문화--를 위해 기울인 상영의 대안적 공간과 실천이 또한 모든 역경(odds)에 대항해 완강하게 등장했다. (21-22)

20세기의 마지막 20년간 일반적으로는 중국어 영화의 전 지구적 단계와 특수하게는 대륙 영화에 대한 주도권(ascendance)은 같은 기간 확장된 국제영화제(festival) 문화와 거침없이(inexorably) 연계되었다. 홍콩 영화가 국내 영화 인구가 할리우드와 다른 수입영화를 능가하곤 하는 경기 좋은(booming) 지방 시장을 즐긴 반면, 1980년대 타이완과 대륙의 뉴웨이브 영화의 비평적 성공은 영화제가 놓아준 영광의 길을 밟았다. 제49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장이머우의 [추쥐 이야기](1992)의 황금사자상 수상과 깐느에서 천카이거의 [패왕별희]의 <d'Palm d'Or> 수상 그리고 두 작품의 국내외 상영은 비평계와 일반에게 5세대 영화의 절정에 달한 성공을 표지했다. 그리하여 이 성공은 총체로서의 중국 영화의 국제적 상태를 강화(consolidation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 5세대의 성공 전설은 동료들과 후배들에 의해 다양한 층위에서 학습되고 반복되었다. 중국 영화제작자들은 영화제가 해외의 비평적 찬사와 재정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장소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제작자들에게 그런 장소는 롱 숏(long shot. 遠寫)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의 인정과 잠재적 관객을 얻는 계단인 것처럼 보였다. {## not only 와 but의 착위} 그리고 독립 세대는 정말 대중적 부분과 실험적 부분에서 비슷하게(alike) 그 일을 수행했다. 우원광과의 인터뷰에서 자장커는 BFA에서 그가 받은 ‘교육’의 일부에 [국제 영화제 조사(A Survey of International Film Festival)]라는 중국어책 읽기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고백했다. (22-23)

중국이 포스트 냉전 시기의 전 지구적 무대에 깊이 연루됨에 따라, 대륙 횡단 여행의 손쉬움과 확장으로 왜소해진 중국에서 퍼스널 컴퓨터와 인터넷에 흠뻑 젖은 채 성인을 맞이한 젊은 영화제작자들은 자신의 전망과 전문가적 행위에서 순조롭게(readily) 코즈모폴리턴이 되었다. 1949년 이래 ‘철 밥그릇’과 문화 엘리트의 특권의 혜택을 받아온 이전 세대의 영화제작자들에 비해 ‘도시 세대’ 멤버들은 자기 자신의 프로젝트, 특히 재정 독립의 프로젝트를 감당(manage)하고 추진(promote)해야 하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나라의 동시대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크고 작은 국내와 국제 영화제에 참가했다. 야마가타, 로테르담, 뉴욕의 마가렛 미드 영화제 등의 다양한 다큐멘터리 영화제와 단편 영화제가 대형 장편만 만드는(big-feature-exclusive) 4세대와 5세대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새로운 무대를 제공하고 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풍성한 역사적 멜로드라마 또는 문화적 알레고리로 5세대에게 주어진 메이저 국제영화제 상은 서양의 영화연구 커리큘럼에서 중국 영화를 ‘내셔널’(아마도 허구의) 영화로 수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전 지구적 흐름과 함께, 1990년대 젊은 독립 영화제작자들의 국제영화제 참가는 중국 사회의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최근 중국 사회에 대한 자신의 관계와 긴장을 정확하게 공개함으로써 최근 중국 영화에 대한 획일적인 인식에 도전했다. (23)

그러나 국제영화제는 그런 영화들의 운명이 봉인될 최종적인 목적지는 아니다. 코즈모폴리턴 관객들은 이국적이거나 이견의(dissenting) 안목으로 중국 영화에 동정적인 외국 감정가들이 될 필요가 없다. 국제영화제에 제출한 대부분의 독립 중국영화가 외국 배급자를 찾지 못한 반면 그들은 지방 영화제 또는 대학, 아카이브, 박물관, 디아스포라 공동체 그리고 다른 아트하우스 프로그램에서 열리는 소규모의 ‘영화제’를 찾아 더 멀리 여행하곤 했다. 우리가 이를 통해 이 국제적 하위문화에 참여한 ‘‘도시 세대’’ 계열은 좋은 예이다. 2001년 2월과 3월 몇 주 동안 수상 영화와 새로운 최고 집단(premier)을 포함한 약 12편의 영화가 몇몇 대학들의 관중들에 이어 the Harvard Film Archive, the Walter Reade Theater at Lincoln Center, 그리고 National Gallery of Art in Washington D. C.의 열광적인 관중들에게 상영되었다. (23-24)

이 ‘2급 영화제’는 관례적인 예상을 넘는 관중들의 호응을 자아냈다. ‘‘도시 세대’’ 시리즈 이벤트 몇 달 후 나는 젊은 중국인 건축가와 건축학과 학생들(그리고 그 친구들) 그룹 사이에서 진행된 온라인 토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지역에 살고 시리즈에 종교적으로(religiously) 참여했고 자신들 사이에 열띤 토론에 몰두했었다. 이 ‘건축 동료들(archicomrades)’에 의해 유지되는 웹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나는 ‘‘도시 세대’’를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링크를 발견했다. 대부분의 온라인 토론은 자장커의 [샤오우]를 둘러싸고 진행되었는데, 몇몇 멤버들은 영화의 예술적, 사회적 의미에 대한 분량 있고 날카로운 읽을거리(lengthy and incisive readings)를 제공하고 있었다. 몇몇 멤버들은 또한 ‘도시 세대’ 영화제작자들과 비교해서 장이머우(Keep Cool)와 황젠신(Stand Up, Don't Stoop) 등의 5세대 감독에 의해 제작된 도시 개념(the notion of urban)에 대한 다른 접근을 대비시키고자 했다. 한 멤버는 신 ‘도시 세대’가 ‘과정’으로서의 도시화를 직접 다룸으로써 자신을 차별화한 반면, 이전의 도시 영화는 대부분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도시’에 관한 것이었음을 기민하게 지적했다. 다른 멤버는 뚜렷한 긴급함으로(with palpable ungency) 영화제작자들과 그 또는 그녀 자신의 장래 건축가 그룹의 사회적 책임을 비교하려 했다. “오늘날의 새로운 ‘도시 세대’-사실 우리와 같은 세대-는 자신들의 전복적인 미학과 제작 전략을 가지고 최근 중국 도시화를 고찰함으로써 이데올로기 투쟁의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고 있다. … 중국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분야(discipline)로부터 자기 스스로의 비판적 작업을 완전히 개념화하고 그것을 시작하기까지 최소한 5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 (24-25)

이들 미래의 중국 건축가 및 중국계 미국 건축가들에 의한 온라인 토론을 읽으면서 나는 그들이 얼마나 열렬하게 ‘‘도시 세대’’라는 용어를 자신들 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자연스러운’ 직함(designation)으로 껴안고 있는지를 알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런 이벤트를 조직하는 것이 어떻게 이런 인터넷 그룹과 같은, ‘소수’이고 가변적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공중을 우연하게(inadvertently, 무심결에) 창조해낼 수 있는지에 의해 열광하고 고무되었다. 이들 온라인 영화 공동체를 소개함으로써 나는 구별 짓기(differentiating) 과정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질화(homogenizing) 과정으로서의 전 지구화의 배경에 ‘대항하는’ 중국 영화의 대안적 공공 영역의 형성에서, 국가적 범주뿐만 아니라 다른 미디어의 삼투성(permeability)을 강조하고자 한다. 젊은 영화제작자들이 영화제 산업에 요령 있는(savvy)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팬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영화들과 자신들의 열광과 통찰력을 공유할 방법들을 찾는 것에 똑같이 익숙하다. ‘영화제’가 끝난 오랜 이후 이벤트는 새로운 의사 전달 기술들에 힘입어 사후 세계(afterlife)를 얻은 듯싶다. (25)

‘영화광들’(‘건축동료들’이 자신을 일컫는) 관중 또는 그룹과 비슷한 것이 중국에서 존재하는가? ‘도시 세대’ 영화, 특히 독립 제작이 거기에서 보일 기회가 있는가? 1990년대 중반 중국의 배급제도는 생산 부문에 앞서 외부 압력뿐 아니라 내부 압력 아래 급속하게(by leaps and bounds) 시장으로 진격했다. 이전의 Chinese Film Distribution, Exhibition and Export and Import Corporation(1995년 China Film Co.로 바뀜)으로 대표되는 중앙 권력의 철수 이후 영화 산업에서 복수의 구성(plural configuration)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7년 이후 통제가 가장 엄중했지만 영화 문화가 항상 가장 활력이 넘쳤던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반자율적인(semiautonomous)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선두 주자들은 각각 베이징의 쯔진청 회사와 상하이의 융러 회사이다. 이 회사들은 특히 펑샤오강(쯔진청)의 대중 코미디와 펑샤오닝(융러)의 ‘신주류’ 영화를 촉진(promote)하면서 제작과 배급에 관여하고 있다. 두 도시에는 동시에 영화의 다른 세트를 보여주는 분리된 극장 체인과 함께 최소한 두 개의 경쟁적 배급 라인(yuanxian, 院線)이 있다. 가끔 젊은 감독들의 상업적으로는 덜 유망하지만 획기적인 영화가 뽑히는 행운을 차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는 닝잉의 [I Love Beijing]이 상하이의 최근 오픈한 멀티플렉스에 열광적인 관중들이 꽉 찬 것을 보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초국적 자본이 출자한 전 지구적 스타일의 멀티플렉스의 급습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새로운 배급적 실천이 국내 영화에 실재적 위협을 제기하는 보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의 밀어닥침(현재 매년 20편, 이후 더 늘어날 전망)을 위한 길을 확실히 포장하는 반면, 그것은 무심결에 세련된 때론 예측할 수 없는 ‘윈도우 쇼핑’ 능력을 가진 새로운 관객을 위한 무대를 제공하기도 한다. [Shower]와 같은 독립적인 이마르(Imar) 회사에서 제작한 대중 영화는 그런 저예산 국내 제작물에게 어마어마한 흥행 수익을 만들어내면서 이런 장소에서 총아가 되었다. 2004년 11월 [The Last Level-Shengdian]--왕징이 감독한, 젊은 컴퓨터 게임 중독자의 사이버공간에서의 모험에 관한 소예산(2백만 위안 또는 240,900 달라) 영화--은 화싱 International Multiplex에서 성공적으로 개봉되었고 이어서 베이징대학 상영에서 완전 매진되었다. (25-26)

명확하게 금지된 영화뿐만 아니라 표면적으로 대중 관객에게 공급되지 않는 다른 독립 영화들은 어떠한가? 배급과 상영 부문에서의 공식적 통제가 느슨해지고 국영 영화와는 다른 대안적 현장(venue)에서 붐과 함께 새로운 스크린 실행의 전체 무리(cluster)는 동영상의(동영상이라는?) 다른 공공 영역을 형성해왔다. KTV 바, 프로젝션 비디오와 VCD(종종 소프트 포르노와 액션물의 혼합을 특징으로 하는 해적판)와 같은 현장들은 중국 전역의 크고 작은 도시와 지방의 현급 도시(town)들에서 어디에나 존재하는(ubiquitous) 것이 되었다. 싼 가격과 다른 ‘서비스들’(음주부터 마사지 그리고 그 이상까지의)과 함께 그것들은 이주자와 사회 하층들을 지배적으로(predominantly) 흡인했다. 보다 최근에는 일부 저속한 KTV와 가라오케의 사촌들에 설치된 많은 영화 바들이 대도시에 등장했다. 이 영화 바들은 주류 영화들이 거의 제공하지 못하는 외국과 중국의 예술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데 열심인 학생, 지식인, 외국 국외추방된(expatriate) 외국인 공동체 그리고 다른 영화 애호가들을 만족시켰다. (26-27)

베이징이 중국 독립 영화와 아방가르드 문화 전체의 중심이 됨에 따라 몇몇 영화 바들이 새로운 영화클럽 문화 형성에 적극 연루되어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VCD와 DVD의 대중화는 영화 바가 대형 스크린에서 유럽, 미국 그리고 일본의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중국에서 영화광 문화의 부활이 VCD의 포스트모던 기술의 ‘원시적’이거나 ‘해적판’ 형식에 의해 광범하게 가능해졌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 문화의 발전은 또한 최소한 그것들의 이소적(heterotopic)이고 공동의(communal) 성격에서 초기 중국 영화문화와 연관된 관객 의식(spectatorship)의 찻집 형식을 상기시키는 영화 실천과 함께 도시 현장의 급증으로부터 득을 보았다. 2001년 여름 조사 여행 동안 나는 그런 현장 세 곳을 방문했다. BFA 근처의 the Yellow Pavilion Bar(아마도 최초의 것), 도시 동부의 바가 밀집한 싼리툰 지역의 the Butterfly Swallow Bar, 그리고 대학과 연구기관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 동북 모퉁이의 칭화대학 부근의 the Box Cafe가 그것이다. the Box Cafe의 프로그램 팸플릿에 ‘상상의 공간’이라 불리는 별도의 영화 방이 있다. 이 영화 바는 비디오 또는 레이저 프로젝션 설비들의 다양한 구성방식(formats)을 가지고 있고 상영 후 비공식적인 토론회를 열기도 한다. 상업 시설(commercial establishment)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서비스산업에 적용되는 느슨한 규정을 이용한다. 수많은 아방가르드 갤러리 바(상하이의 the Top Gallery와 베이징의 the Courtyard)와 함께 같은 정신(the same spirit)을 공유하는 그런 공간은 레저와 교육, 소비와 문화 생산을 결합시켜 대안적 영화문화를 위한 환영받는 고향(much-needed home)을 제공한다. (27-28)

방문 기간에 베이징 영화 바의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2000년 몇몇 BFA 졸업생들과 다른 영화광들에 의해 2000년 4월 설립된 ‘실천사’(實踐社. Practice Society)라는 협회에 의해 조직(편성)되고 있었다. ‘실천사’ 의제의 중심목록은 독립적이고 아마추어적인 영화를 촉진하는 노력이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실천사’ 또한 영화제작 실천, 특히 디지털 비디오 제작에 열성적이었다. 그 DV 다큐멘터리 그룹은 정기적으로 만나 회원들의 재공품(在工品. work in process)들을 상영하고 토론했다. ‘실천사’의 영향은 인터넷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미디어(Furong, Vision 21과 같은 문학예술 잡지, 특별 ‘실천’ 칼럼 또는 포럼을 통해)로 확산되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활동에 관심있는 영화광들과 함께 온라인 토론 그룹을 지휘(conduct)함으로써 문화적 정향의 웹사이트들(예를 들어 www.sina.com)과 공동 작업하기도 했다. ‘실천사’의 지하 간행물(samizdat jounal) Touch Film의 제4호는 다음과 같은 설문에 대한 온라인 반응을 게재했다. “당신이 [비디오]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주제에 렌즈의 초점을 맞추겠는가?” ‘witch's mirror’, ‘cinekino’, ‘Godard’ 등으로 알려진 영화광들이 조예가 깊고(intimate) 상상력이 풍부하며 때로 기이한 촬영 계획을 보내왔다. 주체들은 무한하다. 그리고 미래의 ‘아마추어’ 영화제작자 공동체는 집단적 꿈 공장 온라인의 ‘실천’, 부분적으로는 실제 실천에서 현실화된 실천에 참여를 통해 탄생했다. 이 아마튜어들의 온라인 협회는 가상이지만 즉시 연결되는 공간에서 ‘실천사’의 영화 촉각(예를 들어 회원들이 마우스 클릭만으로 away from one another하는 ‘touch film’ 또는 ‘接觸電影’)과 직접 해보는(hands-on) 접근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 아마추어 영화는 영화 감상의 수동적 사랑에서 파생된 시각적으로 집중된 관중의식(spectatorship)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일상생활에 관능성(sensuality)을 회복하는 동영상을 만들고 공유하는 것을 포함하는 생산적인 관중의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안 영화의 경험 또는 제작을 통해 그러한 촉각 실천(tactile practice) 그리고 직접성, 근접성(proximity), 연관(involvement)에 대한 강조는 현장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실천사’ 부속의(attached) DV 그룹이 다큐멘터리 제작에 우선적으로 전념하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28-29)

베이징의 ‘실천사’가 이끌고 있는 이 같은(the kind of) 영화클럽 문화는 사실 상하이와 선전에서 조금 덜 아방가르드 포즈를 취하는 선구자가 있다. 1996년 10월 상하이의 수많은 영화광들이 ‘101 워크숍’--그것이 구축된 10월 1을 따라 지은--을 구축했다. 그 조직은 대부분 앞에서 언급한 융러 회사에서 출간한 Film Story 잡지의 ‘Readers' Club’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 이 클럽은 160명의 회원과 300명의 새로운 지원자를 가지고 있었다. 회원의 다수는 상하이의 젊은 도시 전문직 종사자들이고 대부분의 활동은 대도시에서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멤버십은 약 30개의 도시로 확장되었다. 상하이 시정부(the Shanghai Municipal Government)의 지원을 받은 1999년 상하이 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지난 영화제에서 영화 안내와 비평이 없었던 것을 우려한 101워크숍 멤버들은 ‘영화제에 관한 10일간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만들어 참여 극장들에 배급했다. 이 팸플릿은 매우 인기가 좋아 영화제 티켓보다 더 빨리 팔렸다. (29-30)

이 영화광 세대의 집착에 가까운 헌신은 음악과 비디오의 ‘열병 친구들’(feverish friends. 發燒友)과 비교되어 왔다. 그네들은 최고 수준의 시청각 장비를 구입하고 즐기는 데 상당한 돈과 시간을 소비하고 자신들 사이의 느슨한 교환 네트워크도 구축하고 있다. ‘열병 친구들’과 영화광들의 결정적인 차이는 후자가 토론과 프로그램을 조직하고 리뷰를 출간하며 더 중요하게는 국내 도시들의 다른 비슷한 영화광 그룹들과 교류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대안적 공공 공간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 있다. 두 가지 현상에 다리를 놓은 선전(深圳)의 ‘위안잉후이’(Film Connection)의 설립은 좋은 사례다. 광저우 기반의 영화 잡지 [電影 zuoping作品?](Film works)의 한 편집인은 영화감상 클럽(a viewing club)에 관한 아이디어를 시청각 장비 회사의 총지배인과 나누었는데, 총지배인 자신이 ‘열병 친구들’이면서 회사 제품을 위한 특별한 시범(demo)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1999년 그들은 시범 공간을 클럽 본부로 바꾸고 거기에서 뉴스레터를 찍고 수상한 상업영화와 단편뿐만 아니라 옛 영화와 새로운 외국과 중국의 예술영화의 정규 상영을 조직했으며, 홍콩 감독 앤 후이(Ann Hui)를 포함한 영화제작자들과의 토론회도 열었다. 고급(high-caliber) 장비로 정교하게(exquisitely) 디자인된 상영실의 장벽 안에서 소리와 영상의 ‘열병 친구들’은 ‘영화를 공유하고 인생을 공유’(分享電影, 分享人生)하는 수많은 시간을 보냈다. (30)

‘101 워크숍’, Film Connection, ‘실천사’의 예는 소규모이긴 하지만, 이런 형태의 협회와 비슷한 클럽에 대한 선양, 난징, 우한의 영화광들의 관심과 욕망을 자극해 성도(省都) 세 곳에 같은 사례들이 형성되었다. the Rear Window Film Appreciation Club은 열렬한 VCD 소비자이기도 한 한 인터넷 서퍼(surfer)에 의해 시작되었다. 온라인에서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난 후 그는 강박적인 영화광들이 자신의 고향 난징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명(pseudonym) 웨이시디(VCD의 중국어 동음이의어, 동음이철어. homophone)를 쓰면서 그는 난징의 ‘고다르(Godard)' 등의 친구들과 함께 the Rear Window Club을 시작했다. 우한의 영화클럽은 몇몇 VCD 열병 친구들에 의해 2000년 설립되었다. 그들은 베이징을 방문해 동료들로부터 배운 후 대학에서 상영을 시작했고 성도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같은 해 선양의 동북구(창춘 필름 스튜디오가 있던)에서도 클럽이 탄생했는데, 대담하게 Free Cinema(自由電影)라 이름 지었는데 이는 풀뿌리 수준의 문화운동의 독립 정신을 강조한 것이었다.

사실 독립(성)은 수많은 대학 캠퍼스로 확장된 이 새로운 유형의 비상업적 영화광 공동체의 공통된 특색이다. 상업 지향적이지도 않고 사회적으로 가식적이지도 않은 영화광 그룹들은 인터넷, VCD, DVD 시대에 개인의 소외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폭주와 국가가 지원하는 ‘올바른’ 영화의 지속적인 헤게모니에 지배받는 부자연스러운 영화문화의 해결책으로 대안 영화 향유에 전념하고 있다. 이윤 창출을 위해 매 1분까지 사용하는 것이 중국의 트렌드인 시점에 이 아마추어들은 셀룰로이드 꿈에 몰두하고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기꺼이 ‘시간을 죽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레저 타임 취미는 또한 매우 중요한 사회적 심지어 정치적 함축(implication)을 가지고 있다. ‘실천사’의 핵심 멤버인 양쯔는, 영화에 관심 있는 비평가, 영화제작자, 학생 그리고 다른 ‘열병 친구들’의 모임(congregation)은 영화의 ‘열린 플랫폼’을 창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때로 정규 극장에서는 상영될 기회가 전혀 없는 대안 동영상 포럼으로서 영화클럽이 참여(engage)하는 영화 바와 다른 장소들은 이리하여 ‘사적 담론과 개인적 표현’(양쯔의 표현)을 절합(切合. articulation)시키는 ‘비공식 영상물(民間映像)’을 보여주는 일종의 유사 공공 출구가 되었다. 이 흩어진 지점들은 “가능성을 나타내는 사막의 오악시스와 같다.” (31)

주변과 중심 모두를 사로잡을 ‘소수’의 ‘유목적’ 영화문화를 구축할 가능성은 2001년 가을 베이징과 다른 도시들에서 열린 제1회 Unrestricted New Image Festival 기간 동안 상당한 성공과 함께 시험되고 현실화되었다. 이전에는 흩어졌던 문화현상의 셀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가상의(virtual) 이웃으로 연계되었고 이번 영화제를 통해, 잠깐이긴 하지만, 구체적(embodied) 운동으로 하나가 되었다. ‘실천사’, ‘101 워크숍’, ‘위안잉후이’ 그리고 自由電影에 의해 집단적으로 시작되었고 많은 잡지와 웹사이트의 지원을 받은 영화제는 1996년 이래 제작된 독립 짧은 장편(short features ?), 실험적 비디오 작품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광범한 선정작들을 보여주었다. 외국 학생들 작품도 허용되었고 공식위원회가 경쟁을 관장했다. 영화제는 열광적인 팬들로 가득한 채 BFA에서 개최되었다. 일반 프로그램에 덧붙여 디지털 비디오 워크숍이 시행되었고 두 개의 특별 시리즈가 제공되었다. 이것들은 세미나 토론과 함께 왕샤오솨이와 자장커의 작품에 헌정되었다. 영화제 기간 동안 웹사이트들은 진행중인 소식들과 리뷰들을 보도했다. 11월 영화제는 상하이에 도착했다. 3일 동안 상하이 신 국립 예술도서관의 상영실은 베이징에서 초연되었던 센세이션을 되풀이했다. 상하이 판에 지방 강세를 주기 위해 그곳에서의 프로그램은 관객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몇몇 상하이 기반의 영화제작자들의 작품을 집중 조명했다. (31-32)

나는 묘사적이면서 분석적인 범주로서 ‘도시 세대’ 영화의 개념적 가능성뿐만 아니라 광범한 실증적 범위를 강조하기 위해 세기 전환기를 둘러싼 대안 영화 관객성과 급부상하는 영화클럽 공동체에 관한 이 스케치를 제공한다. 이 명랑한 아마추어 영화 문화의 도래는 더 실재적이고 의미 있는 방법으로 자장커와 우원광 등의 독립 영화제작자들의 지지를 받는 ‘아마추어’ 영화 이론과 실천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아직은 분산되어 있는 힘들이 인터넷과 순회 프로그램을 통해 점차 합해짐에 따라 지방화(본토화)된 이 소그룹들은 비공식 풀뿌리 운동으로 통합되고 있다. 친근한 영화 바, 영화클럽 운용의 유목적 스타일, 그리고 선정 영화 형식과 구성 방식(format)의 다양성(특히 단편과 DV 영화)은 이 풀뿌리 운동을 영화 지식과 실천의 구조를 잠재적으로 개조할 수 있는 ‘소수 영화(minor cinema)’로 압축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의 모든 부문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상업화 트렌드에 의식적으로 역행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광 협회들은 출판 미디어, TV, BFA, 그리고 많은 반(半) 공식 기업들과 같은 공식적인 공공 영역(public sphere)으로부터 전략적으로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들은 또한 대학과 도서관 등의 다양한 공공 기관에 들어가려 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지하’라고 묘사될 수는 없다. 활동가(중국에서는 거의 허용되기 어려운)라기보다는 아마추어적인 이 문화 생산의 형식은 특히 아르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에 의해 ‘풀뿌리 전 지구화’ 노력이라 묘사된 것으로서 권리가 박탈된 사회 그룹들을 공공연하게 대표하지 않는다. 공식 주류와 할리우드의 잠식(그리고 둘 사이의 공모)으로 대표되는 영상 제작과 보급의 현존 권력 기구에 도전하는 시도에서, 아마추어 영화 운동의 목표는 분투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파두라이의 말로는 “전 지구적 권력이 자신의 지배권을 확대하기 위해 찾고 있는 다양한 형식과 관련된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지속(standing ?)을 위해”서이다. 제1회 Unrestricted New Image Festival의 성공은 영화 영역에서 아래로부터의 전 지구화의 최초의 구체적 열매를 대표한다. 그곳은 전 지구화 전쟁이 계속되고 중국 아마추어 영화제작자들과 그들의 ‘열병 친구들’의 군대에 의해 대안적 공공 영역의 복원이 시도되고 있는 가장 가시적이고 결과적인 장(ground)들의 하나다. 그들은 함께 영상 제작과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상상의 새로운 세기를 구현하려고 나서고 있다. (3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