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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ang, Zhen, 2007, The Urban Generation, introduction(2)-(pp.9-15)

ycsj 2010. 7. 8. 22:12

0.the identity of an “independent” cinema (9)

: ‘독립’ 영화의 정체성

 

골치 아픈 짐을 지고 있는 독립이라는 배지는 도시 세대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자질일 것이다. 그것은 실험적 영화제작자(장위안, 장밍, 러우예, 자장커, 왕취안안, 그리고 우원광과 장웨와 같은 다큐멘터리 감독)와 조금 상업적인 감독들(예를 들어 장양과 스룬주)이 공유하고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영화의 명망과 자신들의 일부 제작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5세대 감독들은 대개 국가 지원 스튜디오 시스템 내에서 작업했다. 그러나 수많은 젊은 영화제작자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을 제도적․재정적으로 독립적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국영 스튜디오에 배정된 일을 그만두고 지하의 저예산 제작에 몰두했고 공식적 제재 없이 국제 영화제에 참가했다. 이 점에서 도시 세대와 국가에 의해 훈련되고 고용된 앞선 세대의 핵심적 차이점은, 그들의 서로 다른 미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사회적․직업적 정체성에 의해서 정의되고 있다. (9-10)

그러나 ‘독립 영화’라는 가시면류관은 6세대 영화제작자들의 머리에 불필요하게 몰려들지(descend upon) 않았다. 다만 6세대 영화가 자신의 형성기에 어떻게 ‘독립적’이었고 현재 어떻게 ‘독립적’으로 남아 있는지가 중국 내외의 비평적 토론의 초점이 되어왔다. 이는 또한 이 책의 몇몇 필자가 다루고 있는 쟁점(issue)이기도 하다. 장위안, 왕샤오솨이, 허이(허젠쥔), 우원광에 의해 독립적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초기에 덜 상업적이거나 2-3급의 영화제(특히 로테르담, 도쿄, 낭트, 카이로)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는데, 이는 다양한 이익단체들에 의해 의혹으로 간주되었다. 현상과 독립 사이의 마찰은 1993년 도쿄와 1994년 로테르담의 사건들에 의해 악화되었다. 당시 이 영화제작자들 몇몇은 자신들의 작품을 자국의 공식적 승인 없이 경쟁 부문과 상영(screening)에 제출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영화를 ‘불법적으로’ 해외로 송출했다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즉각 징계 받았다. 그리고 여권 압수와 이후 영화제작 금지로 이어졌다. 다른 한편 중국 비평가와 명망 있는 감독들은, 그들에 대해 어느 정도 어른인 척하는 동정심(patronizingly sympathetic)을 보이면서도, 희생자들이 예술적으로 미숙할 뿐 아니라 정치적 상식(political savvy)에 지나치게 몰두했다고 여겼다. 한때 개성파 감독이었던 장이머우는 신세대가 기회주의자라고 눈살을 찌푸린다. 그는 그들이 “바깥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성공의 길에도 익숙”하며 서양 비평계에 열심히 정보를 제공(eagerly catering)한다고 묘사한 바 있다. 1993년 전체로서의 5세대(톈좡좡만 예외)는 마침내 그리고 결정적으로(decisively) 중국의 공식적 영화기구에 의해 포옹되었고 그들이 주는 왕관을 받았다. 아울러 거대예산의 히트작을 통해 솜씨 좋게(skillfully) 시장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장이머우는 다시 한 번 이 리그에서의 자신의 숙달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5세대에서 젊은 세대의 선구자들이 썼던 ‘죄인’이라는 고깔을 젊은 세대가 계승해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이러니하다. (9-10)

5세대의 출발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스튜디오 시스템과 홍콩 및 타이완의 대량 기금을 끌어들인 초국적 공동 제작 경향(trend)의 모험 위에 건설되었다(built). 이 모험은 1990년대 초기에 정점에 달했다. 젊은 감독들은 처음부터 이런 기관의 지원에서 배제되었다. 독립(영화)의 길에 승선한 후 ‘공식적’ 자원(심지어 스튜디오에서 관리하는 공동 제작을 위한 해외 기금)을 이용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1993년 중국 영화국(China's Film Bureau)에 의해 발표된 장위안과 6명의 영화제작자에 대한 (제작) 금지는 전국의 16개 국영 스튜디오, processing lab, 장비 대여 서비스(equipment rental services)에 전달되었고 그 결과(so as to) 이들 영화제작자들에 대한 어떤 진전된 움직임도 효과적으로 미연에 방지했다. 국영 스튜디오의 공식적 가맹자들에게 그들의 주니어 상태는 그들을 연공서열과 (체제에 대한) 충성에 기초한 계서제(hierarchy)의 바닥에 처하게 했다. 그 결과 많은 젊은 영화제작자들은 MTV와 TV 제작물에 종사하기 위해 오랜 동안 떠났다. 그들은 스튜디오에 그들의 직장 명목과 건강 및 연급 이익을 위해 유지비를 지불했다. 한편 그들은 자신들의 장편(feature)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 비공식적이거나 비국가적인(民間 또는 社會, 비정부적인) 자원들을 최대한 끌어 모으려 했다. (10-11)

의미심장하게도 독립영화의 불규칙적인 궤도는 1990년대 영화 산업의 구조적 변화들과 맞물렸다(paralleled 병행되었다). 1993년 7명의 영화제작자들에 대한 금지는 일련의 ‘심화’ 개혁 또는 더욱 철저한 시장화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사회주의) 영화 시스템에서 그것(film system)은 (의사-자본주의 또는 국가-자본주의) 산업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길고 복잡한 탈바꿈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른바 ‘지하’ 영화에 가해진 제한은 때로는 강요되거나 조직된 주선율 영화의 대중화(popularization)를 공공연하게 가능하게 했던 새로운 정책을 집행하는 데 있어 최소한의 분열이 있음을 확신(ensure)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 정책들은 은밀하게 상업적이고 ‘무해한(harmless)’ 장르에게 ‘새해 경축’ 코미디(賀歲片)와 같은 특혜를 주었다. 이 개혁에서 결정적인 조치는 분장제(分掌制? the shared-based distribution. fengzhan ?) 정책의 공식적 보장이다. 국내와 수입된 생산물에 적용되는 분장제는 전시 분야를 자극하고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오기 위해 공포되었다. 이리하여 젊은 독립 영화제작자들은 국내외에서 당국과 이른바 블록버스터(大片)에 의해 지배받는 시장에 의해 이익으로 더 내몰렸고 소외되었다. 그러나 이런 기죽이는(daunting) 상황은 완강한 젊은 제작자들이 스튜디오와 시장 경제의 변화(shift)에 의해 만들어진 좁은 공간을 탐험하는 일을 중단시키지 못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의 가장 어려운 시절에 신세대에 의한 가장 도전적인(daring) 몇몇 영화가 거의 동시에 제작되었다. 장위안(The square, East Palace, West Palace), 왕샤오솨이(Frozen, So Close to Paradise), 후쉐양(Morning Glory: ?湮沒的靑春 1994), 관후(Dirt), 러우예(Weekend Lovers), 허젠쥔(Postman), 닝잉(On the Beat), 장밍(Rainclouds over Wushan, a.k.a. In Expectation) 등이 그것이다. 이 영화들은 엄격한 검열 또는 이익에 쫓긴 배급자와 상영자의 무관심으로 인해 중국 관객들에게 접근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다양한 국제 영화제에서 비평적 찬사와 상을 받았다. (11-12)

노골적으로 ‘독립적인’ 많은 영화들이 중국에서 개봉을 위해 검열 받고 금지되고 있는 반면, 새로운 종류의 유연한 ‘독립(영화)’가 정책 변화와 기관 제한의 새로운 물결이라는 맥락 속에서 출현하기 시작했다. 1996-1997 개혁- …(12:8-10) -은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에 대한 적절한 공헌을 보장(ensure)하는 영화와 TV 프로그램 제작에 대해, 통제라기보다는 하향식 ‘지원’을 분명히 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검열, 공동 제작, (박스 오피스 영수증에 대한) 과세 그리고 국산 영화 비율의 방어에 관한 수많은 새 규정들이 공포되었다. 주선율 영화의 미학적 향상과 대중화를 자극하기 위해 일련의 공식 상(예를 들어, 영화문학을 위한 샤옌상과 최우수 장편 영화를 위한 화뱌오 정부상 등, 이들에게는 두둑한 금전 부상도 주어졌다)도 제정되었다. (12)

영화 순환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제도적 변화는 영화에 대한 행정적 힘이, 뒤이은 재정적․문화적․정치적 결과들(consequences)과 함께 문화부로부터 새로 설립된 ‘방송․TV․영화부(the Ministry of Broadcasting, Television and Film)’로 완전하게 이동한 것이었다. MBTF는 정부가 후원하는 모든 미디어 생산을 감독(oversee)하는 중심 조직이다. (앞에서 언급한 7명의 영화제작자에 대한 금지도 이 기관에 의해 발표되었는데, 이는 영화 부문을 인수(taking over)하려는 철권을 분명하게 보여주려 한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변화는 전체 영화 산업에서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만들어냈다. 주류 영화는 국제 영화제에서 공간을 창조할 것이라는 점에서 개성적인 영화제작자들에 대한 강력한 탄압(crackdown)을 환영했다.(공식적 출품작은 독립적 출품작과 경쟁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로서의 영화국은 영화가 문화적 영역에서 자신의 엘리트 상태를 잃기 시작하고 동영상 제작 산업에서 지도자가 되기를 멈춘 실재(reality)에 자신이 직면해 있음을 발견했다. 반면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그것이 여전히 더 세밀하게 관찰되고 있다. 재정적 조건에서 1993-1994 개혁에 따라 prepaid blanket sales의 보호막(protection)을 일찌감치 제거한 스튜디오들은 MBTF의 관할 아래에서 제한된 정부 기금을 다른 독립체들과 경쟁하면서 자기 자신의 더 많은 자원들을 끌어 모을(solicit) 것을 강요받아 왔다. 상충하는 원칙들에 따라 재단된 이 일련의 구속들은 스튜디오들의 엄격함과 약화를 초래했다. 스튜디오의 장편(feature) 제작의 산물들은 1997년 총 88편이었고 1998년에는 겨우 82편이었다. 이는 이전 몇 년간 150편에서 급격한 하락이었다. (12-13)

이데올로기적 통제의 강화와 짝진(coupled) 영화 제작의 권리(entitlement)와 로케이션(location: 야외촬영 or 지역할당?)의 동시적 분산은 긴장과 모순으로 가득 찬 문화적 공간을 창조했다. 가장 확고하게 지반을 굳힌 국유 부문으로서 영화 시스템- … -은 상징적 권력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곳은 ‘개혁’을 향해 둘둘 말리고 경쟁하는 요구들이 충돌하고 있다. 이는 포스트사회주의 에토스와 그 생산에 수반된 모드의 모호함(ambiguity)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전환’이 계획 경제의 분해라면- … -국가는 그에 부착된 많은 조건(strings)에도 불구하고, 영화 시스템을 촉발시키면서 기꺼운 마음으로 시장에 완전히 풀어주어야 한다. (13)

역설적으로 국영 스튜디오의 쇠퇴는 ‘시스템’ 외부 또는 부분적으로 그것과 중복되는 독립적 또는 반독립적인 다른 그룹에 의한 영화 제작을 자극했다. 1997년 12월 공포된 특별 규정은 한걸음 나아가 장편 제작의 대안적 채널을 합법화했고 그럼으로써 텔레비전 방송국과 인가된 제작 독립체 같은 다른 기구들이 영화국에 승인을 위한 대본(scripts)을 제출하고 ‘장편 제작’ 인가를 얻을 수 있도록 용인했다. 이 법규는 부분적으로(often) 공식 기구 또는 상업적 기업의 우산 아래 수많은 제작 독립체의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재정적으로 독립적이고 성공한 MTV, 광고 그리고 다른 매체 관련 기업들의 트렌드는, 대중문화 또는 대량문화의 더 자유로운 영혼의 제작자들과 얽혀있는 독립 영화제작자들을, 창조적인 워크숍을 셋업하거나 대부분은 가내공업 패션인 미디어 회사를 형성하도록 고무했다. 독립 영화의 이 새로운 수확의 다수는 시설에 접근(to access the facilities)하거나 개봉권(release label, 상영권)를 얻기 위해서 또는 그 둘 다를 위해 어느 정도(in some capacity) 공식 스튜디오와 공동 제작을 지속적으로 모색하고 있다.(13-14)

독립 영화 실천의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전환은 장원이 독립적으로 제작한 [햇빛 찬란한 날들]의 국내외적 성공에 의해 표지되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제작자이자 감독의 명성과 왕숴의 원작 소설의 인기의 결과였다. 이 사건은 장양의 [애정 마라탕]으로 이어졌고 다시 [아름다운 신세계]와 [샤워]로 이어졌는데, 이는 베이징에 기반을 둔 이마르 영화사(Imar Film Co. Ltd)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영화사는 1996년 미국인 피터 로에르(Peter Loehr, Luo Yi)에 의해 설립되었다. 외국인 투자와 제작자를 포함하고 또한 시안 스튜디오와 공동 제작하는 이마르 현상은 분명 ‘주류’도 아니고 정치적 현상에 대한 대립도 아닌 대안 영화를 유지하기 위한 시장화와 멀티미디어적 접근(이마르는 음악·TV 산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웹사이트도 운영했다)이라는 모험을 시험하고 있다. 한편 주제 내용()과 영화 형식()에서 최근 다른 독립 작품보다 덜 대립적인 루쉐창의 [The Making of Steel, 長大成人]은 그 중국어 제목처럼 6세대의 ‘성년’을 나타내는 이정표로 단언되었다. 1998년 그 개봉과 흥행 성공은 변화중인 영화 시스템과 자신을 다소간 ‘독립적’이라 여기는 젊은 영화제작자 사이의 쉽지 않은 공동 제작의 시작을 표시했다. (14)

1998년 베이징 스튜디오와 상하이 스튜디오는 ‘젊은 감독 희망 프로젝트’(靑年導演希望工程)을 출범시켰다. (-농촌 교육 지원에 희망 프로젝트 주제의 다양함-?) 그것은 한 영화제작자의 개인 프로젝트(검열관의 승인에 따라) 당 평균 200만 위안(25만 달러)을 투자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지원이 장비, 서비스 그리고 개봉 딱지로 주어졌다. 장위안, 왕샤오솨이, 허젠쥔 등의 베테랑 6세대 감독들과 왕취안안, 진선, 왕루이, 리훙, 마오샤오루이를 포함한 새로운 재주꾼들은 이 프로젝트에 다양하게 뽑혔다. 스튜디오들은 심지어 고급 비평가 포럼(스튜디오 직원들과 감독들도 참석하는)을 조직하고 일부 영화의 일반 개봉을 비밀에 부치는 등 이를 홍보하려 노력했다. 신임 감독 선출을 위한 공개적 움직임은 6세대의 아방가르드적 모서리를 희석시킨 반면, 부지불식간에 광범하고 결과적인 트렌드로서 도시 세대의 출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