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64) ‘20세기 중국문학’을 논함-황쯔핑·천핑위안·첸리췬

ycsj 2010. 3. 20. 14:52

‘20세기 중국문학’을 논함

 

황쯔핑·천핑위안·첸리췬 지음

 

 

 

우리 세 사람은 각자의 연구과제 속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20세기 중국문학’이라는 개념을 형성했다. 초보적인 토론을 통해 우리는 이것이 목전에 존재하는 ‘진다이(近代)문학’, ‘셴다이(現代)문학’, ‘당다이(當代)문학’이라는 연구틀을 관통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연구 영역의 확대에 그치지 않고 20세기의 중국문학을 나눌 수 없는 ‘유기적 총체[整體]’로 파악해야 함을 의식했다.

‘20세기 중국문학’이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문학의 진행과정이고, 고대 중국문학으로부터 ‘근현대’ 중국문학을 향해 전변하고 과도하며 그것을 최종적으로 완성할 진행과정이며, 중국문학이 ‘세계문학’의 총체적 틀로 나아가 합류하는 진행과정이고, 동서방 문화의 대충돌․대교류 과정에서 문학 방면(정치 도덕 등의 여러 방면과 마찬가지로)에서 ‘근현대’ 국족의식(심미의식도 포함)이 형성되는 진행과정이며, 오래된 중화국족 및 그 영혼이 언어 예술을 통해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교체되는 대시기에 획득한 새로운 탄생과 흥기를 반영하고 표현하는 진행과정이다.

연구 작업을 전개하기 전, 우리는 ‘비통시성’ 즉 공시성에 치중하여 이 개념에 대한 기본 구상을 개략적으로 논술하고자 한다. 역사 분기(分期)는 줄곧 역사철학의 중요한 범주의 하나였다. 문학사 분기도 마찬가지로 문학사 이론과 관련된 근본 문제이다. 그러나 ‘20세기 중국문학’이라는 개념이 포함하는 내용은 분기 문제를 훨씬 초월한다. 그것이 야기하는 이론적 측면의 관심은 우리에게 최소한 역사적 측면에서 야기되는 흥미와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초보적인 논술을 통해 기본적인 윤곽을 그릴 것이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총체적 구상 단계로부터 실마리를 분석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모순과 약점 그리고 억측을 드러낼 수 없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문제의 초보적 정리만이 ‘미몽(迷夢)’ 속에서 새로운 연구 전망을 진정으로 드러낼 수 있다. 우리는 이 방면에서 토론이 이루어져 가르침을 받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파노라마식 촬영’으로 조급하게 훑는 것은 대상을 단순화시켜 무단(武斷)의 오류를 면치 못함으로써 정채가 나는(#) 대량의 ‘줌-인 촬영’을 생략하고 대상의 풍부성과 구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고찰해보면, 최초의 작업이 이런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진전된 연구는 골격에 피와 살을 돌려주고 세부 묘사로 줄거리를 보충함으로써 스케치의 기초 위에 큰 화폭의 유화를 그리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개념은 풍부해지고 완전해지며 수정되고 경정(更正#)될 것이다.

현재의 기본 구상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세계문학’으로 나아가는 중국문학, ‘국족 영혼의 개조’를 총주제로 하는 문학, ‘비량(悲凉)’을 기본 핵심으로 하는 ‘근현대’ 미감 특징, 문학 언어 구조로 표현되는 예술사유의 ‘근현대화’ 진행 과정, 마지막으로 이 개념과 연계된 문학사 연구의 방법론 문제.

 

 

1.

 

20세기는 ‘세계문학’이 초보적으로 형성된 시대이다.

1827년 괴테는 보편적 인성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세계문학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만 20년 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세계시장의 개척으로 인하여 모든 국가의 생산과 소비는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물질적 생산이 그러할 뿐 아니라 정신적 생산도 그러하여서 각 국족의 정신 생산물이 공공의 재산이 되었다. 국족의 일면성과 한계성은 갈수록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수많은 종류의 국족적·지방적 문학이 하나의 세계문학으로 형성되었다. 역사는 두 사람의 논단이 정확했음을 웅변으로 증명했다. 20세기에는 이미 특정 국가의 문학만을 고립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그 서술의 과학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문학은 더 이상 폐쇄된 환경에서 저절로 생성되었다가 저절로 사멸하는 자족적인 것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진 국가에서 발생한 특정한 문학 현상도 많건 적건 결국은 우리의 문학 발전에 영향을 줌으로써 세계문학의 총체적 틀 속에서 아마도 미소한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이러한 문학 현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라별 문학이 세계문학의 대체계(大體系)로 합류된 후 ‘체계질(體系質)’, 즉 실체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체 사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질을 획득하게 되었다.

‘세계문학’이 초보적으로 형성된 대략적인 상한선은 19세기말로 확정할 수 있다. 각 국족문학이 세계문학으로 나아가 그것에 융합되는 경로는 각기 달랐다. 19세기 초 연이어 독립을 획득한 라틴아메리카 각국은 원주민인 인디언의 문학 전통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식민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속하는 문학을 창건하려고 모색했다. 외래의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는 장기간 궁정과 교회에 봉사했기 때문에 갈수록 화려해져서 라틴아메리카의 대자연과 사회의 풍모를 표현할 수 없었다. 1980년대에 라틴아메리카는 각종 문화가 상호 배척하고 상호 침투하는, 지구에서 가장 세계적인 대륙이 되었다.『마틴 페예로』와『남(藍)』등의 우수작 출판은 “스페인의 아메리카가 마침내 자신의 시를 가지게 되었고 자기 문화의 다방면의 성질에 충실한 서정적 표현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유럽 대륙의 문화, 인디언 문화, 흑인 문화 등이 상호 충돌하여 생성된 문학의 결정체로,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자신의 독특한 목소리로 세계문학의 대합창에 참가했다. 한편 본토의 오래된 문화 전통이 웅혼(雄渾)한 아시아·아프리카 대륙은 라틴아메리카와는 달랐다. “19~20세기 사이의 아프리카 각국 문학의 특징은 수세기이래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전통문학의 전범이 근현대형의 신문학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는 이들 국가가 문을 닫아걸고 자기 것만을 고수하던 것을 극복하고 기술 문명과 세계문화-비록 식민 제도 아래에서 추악한 형식을 통해 섭취했지만-를 수용하고 근현대 사회의 온갖 복잡한 문제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의 사상 계몽 운동에 수반하여 서양문학을 수용했고, 1880년대에 문학개량을 전개했다. 인도는 1857년 잉글랜드의 식민 통치를 반대하는 국족 투쟁에 수반하여 서양 문화의 자극에 도움 받아 국족문학이 부흥되기 시작했다(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최초의 시인 타고르는 1880년대에 창작을 시작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자신의 문학 전통에 용맹하게 반기를 들기 시작한 모더니즘의 선구자들이 동양 문화와 아프리카의 흑인 문화로부터 예민하게 영감을 섭취했다. 그럼으로써 서유럽문학은 각 대륙의 독립적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의 도전을 받고 침투를 거쳐 심도있게 변화했다. 이들 변화는 대부분 1880년대 또는 그보다 조금 늦게 발생했다.

‘세계문학’ 형성의 복잡한 과정을 논술하는 것은 이 글의 임무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대체적으로 비슷한 추세가 중국에서도 ‘동보적(同步的)’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중국인이 의식적으로 서양을 학습한 것은 아편전쟁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함과 대포’의 학습에서부터 정치․경제․법률을 학습하고 다시 문학예술을 학습하는 데까지는 긴 역정이 소요되었다. 1840년부터 1898년까지의 반세기 동안 이미 쇠퇴한 고전 중국문학은 근본적인 부딪침도 없었고 신선한 생기도 주입되지 않았다. 1895년의 갑오전쟁(甲午戰爭)은 중국 ‘근현대사’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태평천국(太平天國)의 실패로 조성된 상대적 안정과 장기간의 침체 국면은 이 전쟁으로 인해 타파되었고,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學爲體, 西學爲用)’은 우매한 ‘임기응변의 철학’에 지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1898년에는 유산되고 만 무술변법(戊戌變法)이 발생했다. 바로 이 해에 옌푸(嚴復)가 번역한『천연론(天演論)』이 간행되었고, 선진적인 근현대 자연철학이 최초로 체계적으로 소개되었으며, 전에 없던 세계사적 안목과 자강(自强) 정신이 중국의 수세대에 걸친 청년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 량치차오(梁啓超)가「『정치소설 번역 출판』서」를 지었고 서양문학이 대량으로 수입되기 시작하여 소설의 사회적 기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지위로 상승되었다. 같은 해 추팅량(裘庭梁)의「백화문은 유신의 근본임을 논함」이 발표됨으로써 문학 매개의 문제가 명확하게 제출되었다. 이로부터 고대 중국문학과 전면적이고 심각한 ‘단절’이 시작되었다. 문학 관념에서부터 작가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표현 수법에서부터 장르, 언어, 변혁의 요구와 실제적 도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동시에 출현했다. 낡은 세태를 폭로하고 신사상을 선전하며 시문을 개혁하고 백화를 제창하며 소설을 중시하고 화극(話劇)을 수입했다. 이는 20년 가까운 힘들고 긴 ‘진통’이었다. 1919년 5․4운동에 이르러서야 이 ‘단절’이 최종적으로 완성됨으로써 ‘20세기 중국문학’은 이륙의 ‘임계 속도’를 넘어섰고 별다른 장애 없이 세계문학의 근현대적 조류에 합류했다. 5․4시기는 20세기 중국문학의 최초의 빛나는 고조였고 ‘튼튼한 요새를 지어 죽음을 각오한 전투’ 정신과 철저한 비타협적 정신은 역사 발전을 추동하는 수준에서 과감하게 부정하고 과감하게 추구하는 위대한 정신이었으며, 현실을 보다 높은 발전 단계로 추동할 수 있는 혁명적 역량을 드러냈다. 그리고 ‘과학’과 ‘민주’는 마침내 20세기 정치․사상․문화(문학도 포함)가 진지하게 추구하는 근본 목표가 되었다.

20세기의 중국문학은 굴욕과 고통이 충만한 상황에서 세계문학으로 나아갔다. 찬란한 고대 전통을 완전히 새로운 안목으로 재구성하지 않으면 최신 세계 조류의 충격을 받은 중국 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고 그것을 표현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중국 국족의 영혼과 사유 능력 그리고 창조성을 질식시킬 것이며 또한 각성과 해방의 큰길로 달려가는 인민 대중의 요구에서 이탈될 것임이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그것은 목마른 사람이 샘물을 찾듯이 열려진 외부세계로 나아가 찾고 학습하고 끌어 들여, 무엇이든지 ‘가져와서[拿來]’ 다시 고민하는 것이다. 탁 트이고 관용적인 가슴과 엎드려 공손히 절하는 자비감(自卑感)은 대개 뒤섞여 있어 혼란을 야기하기 마련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필연적으로 중국 국족의 대중에게 유용하고 유리하며 아울러 그들에게 수용되는가의 여부로, ‘박래품’을 감별하고 선택하며 소화하는 엄중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엄숙하게 책임지려는 자존심과 실용주의적 편협은 또한 뒤엉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 것이다.

중국문학의 근현대화는 상호 연계되고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측면으로 동시에 전개되었다. 이른바 ‘유럽화’(사실은 ‘세계문학화’)와 ‘국족화’가 그것이다. 이처럼 서로 대립되면서 서로 연계되는 힘든 행정(行程)에서 루쉰(魯迅)이 지적한 것처럼 내외의 이중 질곡 또는 이중 위험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모두 우리의 ‘지모(遲暮)’(즉 낙후)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다. 세계의 문학예술이 이미 ‘유럽 중심주의’를 극복했고 각 국족의 척도로 자기 국족의 예술을 측정하는 시기에, 우리는 오히려 옛것이 좋다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3천 년의 진부한 내부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럽의 신예술의 창조자들은 이미 그들 자신의 전통에 용맹하게 반기를 들기 시작한 때 우리는 세계의 문예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음으로 인해 이 새로운 반기를 ‘경건하게 수용’했는데, 이는 다시 존경할 만한 몸 밖의 새로운 질곡이 되었던 것이다. 루쉰은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타오위안칭(陶元慶)의 그림처럼-필자) 새로운 형태, 특히 새로운 색으로 자신의 세계를 그려야 한다. 그러면 그 중에는 여전히 중국의 이전의 영혼이 존재한다.” “내외 양면 모두 세계의 시대사조와 합류하면서도 결코 중국의 국족성이 질식되지 않았다.” 사실상 ‘국족-세계’를 횡적 좌표로, ‘개인-시대’를 종적 좌표로 삼는 좌표 체계가 존재하므로, 20세기 중국문학의 각 창작을 모두 이러한 좌표 체계에 놓고 고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계문학’ 속의 중국문학이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초기의 협애한 시계를 뛰어넘는 것은, 최근의 안목과 언어, 기교와 형상으로 최근 세계에 대한 중국 국족의 독특한 예술 인식과 예술 전유를 표현하고, 한 시대에 중대한 의의가 있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최근 인류의 공동 운명과 긴밀하게 상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탁 트인 각도로 19~20세기 사이의 문학상의 ‘단절’을 보게 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이번 변혁이 왜 오래된 중국문학사의 수많은 시문 혁신 운동과 다른지, 낙후하고 수동적인 ‘학생’이 왜 굴욕감을 가득 가진 동시에 자신감을 가득 품고 ‘나아가 세계의 문학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는지, 세계의 각 문학 유파와 사조는 그것이 빠르던 늦던 결국 중국에서는 ‘원격 감지’하게 만들었는지, ‘강대’해 보이던 진부한 문학 관념과 언어 그리고 규범이 왜 결국 붕괴되고 신속하게 대체되었는지 등등. ‘세계 역사’를 척도로 삼는 ‘경기장’에서 공통의 숭고한 목표는 가혹한 도태를 야기할 뿐만 아니라 가장 열렬한 추구를 환기시킨다. 어떠한 구차함과 정체(停滯), 자기 위안 또는 자기 허풍도 모두 일시적이고 가소로울 뿐이다. ‘세계문학’은 각 국족에게 어떠한 휘황찬란한 과거가 있든지 간에 자신에게 속한 최근의 가장 훌륭한 문학을 내놓으라고 핍박하고 있다.

이것은 여전히 계속되는 진행과정이다. 중국문학은 장차 자신의 찬란한 고대 전통으로 세계를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현재 세계의 문예 사업 속에서 자신의 당대적 창조성을 나날이 드러낼 것이다. 문을 닫아걸고 외부와 왕래를 끊는 것은 쌍방향적인 소극 정책으로 세계를 문밖에서 막고 자신을 성에 가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방도 결국은 쌍방향적인 개방이어야 한다. ‘20세기 중국문학’의 개념에서 보면, 과거에 우리는 중국문학이 어떻게 외국문학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변화가 발생했는가에 대해 비교적 많이 연구했지만 ‘세계문학 속의 중국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하지 않았고 세계에서 20세기 중국문학의 지위와 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사실상 국제 한학계(漢學界)에는 중국 고대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이 근현대 중국문학에 대한 연구로 바뀌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단방향적인 ‘영향 연구’를 신속하게 쌍방향적 혹은 입체 교차적인 총체 연구로 대체해야 한다.

 

 

2.

 

 

그러나 레닌이 말했던 것처럼 일은 “아시아의 가장 낙후한 농민 국가”에서 진행되었고, 사방에 위기가 잠복해 있는 격렬하고 다난한 시대를 거쳤으며, 역사(즉 문학사라 할지라도)는 항상 험난한 혈전을 통해 전진한 전투였기 때문에(20세기 중국 작가가 겪은 재난들을 생각해보라), 20세기 중국문학의 진행 과정은 결코 위에서 논술한 것처럼 ‘호방한 정서를 가슴에 가득 안고(豪情滿懷)’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치는(乘風破浪)’ 것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문학은 자각적으로 ‘계몽’의 임무를 짊어지고 과학과 민주로 봉건을 계몽했다. 그중 가장 깊이 있고 가장 굳센 대표자는 루쉰이었다. “‘왜’ 소설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20여 년 전의 ‘계몽주의’ 사상을 품고 있다고 대답하겠다. 그것은 ‘인생을 위하고’ 이 인생을 개량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쁠레하노프가 말한 것처럼 각 시대에는 자신의 중심 고리가 있고 시대에 의해 규정되는 특색의 소재가 있다. 근현대 국족의 형성과 흥기는 세계적 범위에서 보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되었다. 독특한 특색을 가진 이 고리는 18~19세기 사이에는 도이취의 고전철학으로, 19세기에는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자의 문학 이론과 비평으로, 20세기에는 중국의 사회·정치 문제의 격렬한 토론과 실천으로 체현되었다. 20세기 중국에서는 정치가 모든 것을 압도하고 모든 것을 뒤덮었으며 모든 것을 희석시켰다. 문학은 시종일관 이 중심 고리를 둘러싸고 전개되었고 항상 그것에 복무하고 복종했으므로 개성은 그다지 훌륭하게 실현되지 못했다. 정치사상 이외의 다른 사상의 계몽 활동은 거의 전개되지 못했다. 20세기 중국문학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의 구호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이거나 소극적인 항의에 지나지 않았을 뿐, 순(純)예술의 추구는 될 수 없었고, 문학은 정신적 격려의 면에서는 얻은 바가 있었지만 다양화라는 면에서는 잃은 바가 있었다. “모든 문예는 확실히 선전이지만 모든 선전이 문예인 것은 결코 아니다.” 문학가와 정치가의 사회생활에 대한 관심의 각도는 필경 다를 수밖에 없었다. 량치차오는 최초의 ‘소설 구국’론자였지만 그는 또한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혼을 제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루쉰은 한 걸음 더 심화시켜 ‘국민성 개조’라는 역사적 요구를 제출했다. 즉 문학 창작에서 ‘인간의 정립(立人)’을 목적으로 삼아 4천년 동안 침묵한 ‘국민의 영혼’을 형상화함으로써 병적인 사회의 치료를 요구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정치에 비해 보다 넓은 내용을 포함했다. 그 중에는 국가의 흥망과 국족의 흥기에 관심을 가지는 정치의식이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 및 그 정신을 중시하는 문학의 근본 특징에 부합됨으로써 20세기 중국문학의 자각적인 사명감이 되었다. 문학은 이를 빌어 상아탑에서 나와 국족 및 대중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계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이재도(文以載道)’의 옛 둥지에서 벗어 나와 예술 법칙에 부합되는 궤도를 따라 힘들게 발전했다. 이리하여 계몽의 기본 임무와 정치적 실천이라는 시대의 중심 고리는 20세기 중국문학이 ‘국족 영혼의 개조’를 자신의 총주제로 삼을 것을 규정했고 그에 따라 사상성은 문학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예술 형식․언어 구조․표현 수법에 대한 기본적 요구를 좌우했다.

20세기 초 루쉰은 쉬서우상(許壽裳)과 도쿄에서 ‘국민성 개조’의 문제를 토론하면서 ‘어떤 것이 이상적 인성인가’, ‘중국 국민성에서 가장 결핍된 것은 무엇인가’, ‘그 병근은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했다. 사실상 ‘국족 영혼의 개조’라는 총주제 가운데에는 상반되면서도 상생(相生)적인 두 가지 주제가 존재했다. 하나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루쉰 식의 비판 정신을 가지고 문학에서 ‘문명 비판’과 ‘사회 비판’을 행하여 장기적인 봉건 통치에 의해 조성된 우매․낙후․비겁․마비․사리사욕․보수를 깊이 있고 첨예하게 공격하는 동시에 “그 불행을 슬퍼하되 그가 싸우지 않음을 분노한다”는 태도를 아큐․푸구이(福貴)․천환성(陳奐生)과 유사한 형상에 응축시켰다.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슴 가득한 열정을 가지고 ‘중국인의 척추’를 발굴함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부르거나 이상화된 영웅을 창조하여 전 사회가 본뜨는 모범으로 삼았다. 첫 번째 주제에서 불후의 형상인 아큐와 그의 ‘정신승리법’이 탄생되어 그 예술 생명력과 예술적 매력이 오래도록 쇠퇴하지 않았다. 이는 국족 성격의 발굴이 부정적 방향에서 넘볼 수 없는 깊이에 도달한 것이라면, 두 번째 주제에서 이상적 인물은 층위가 무궁무진하고 무한히 변환되었다. 때로는 급진적이면서도 냉혹한 혁명가로, 때로는 야성적 순박함이나 옛 협객의 풍모로, 때로는 ‘충효가 갖춰’지거나 ‘온순하고 착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양보하는’ 모습으로, 때로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고함, 위대함, 완전함’으로 회귀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상적 인물 탐구의 다양성과 단계성을 드러내었고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사회 역사적 배경 아래 ‘이상적 인성’에 대한 다른 이해를 드러내었다. 인성과 국족성은 항상 구체적이고 풍부하므로 다른 측면에 대한 발굴이나 강조는 때로 역사 행정(行程)의 제약으로 인해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전 단계에서는 비판되거나 회의되던 품성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보편적으로 찬양되거나 긍정되기도 했다. 종래에 이상적 화신으로서의 여성 형상에서 이러한 기이한 지위의 전이 내지 ‘교체’ 상황이 가장 선명하고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신여성’은 대개 부지불식간에 ‘동방 여성’의 대립면으로 밀려났다. 이는 분명 새로운 국족 영혼을 주조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있고, 계몽 활동과 부정적 방향에서 봉건주의를 청산하는 활동이 줄곧 철저하지 못하게 진행되었음을 보다 잘 설명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한 세기 동안 연속되었던 기본 임무일 것이고 문학의 총주제는 이 방향을 향해 계속 심화되고 전개되었다.

‘국족 영혼의 개조’라는 총주제와 연계되어 20세기 중국문학에는 두 종류의 형상이 시종일관 세밀한 관심을 받았다. 농민과 지식인이 그것이다. 이 두 형상 속에서 총주제는 영혼의 소통, 영혼의 각성, 영혼의 크고 높음과 희미하고 작음, 영혼의 교육과 ‘재교육’의 상호 전화 등등으로 다종다양하게 변형되어 전개되었다. 문학에는 심각한 ‘자기 계몽’의 정신이 표현되었고 가혹한 자책과 겸허한 반성은 과거 시대의 문학과 다른 나라의 문학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사방에 위기가 잠복해 있던 대시대에 책임이 이처럼 중대하고 사명이 이처럼 숭고했으며 도덕의 순결한 기준은 추호의 모호함도 없이 향상되었고 문학에는 자기희생의 성스럽고 순결한 정감이 충만했다. 이러한 희생에는 사람들이 받은 근현대 교육과 일부 지향 및 내면생활이 포함되었다. 지식인의 자기 계몽은 심각하고 진실했으며 때로는 일종의 왜곡되고 심지어 병적 성분까지 포함됨으로써 문학이 손발을 제대로 놓지 못하는 결점이 형성되었고 볼테르식의 예리함과 루소식의 솔직함 및 용감함이 결여되었다. ‘지혜의 고통’은 항상 이성적 역량을 압도했고 문학에는 호방함이 부족하고 저상(沮喪)함이 넘치는 현상이 출현했다.

‘세계문학’을 ‘참조 체계’로 삼을 때 몇몇 우수작을 제외하면 총체적으로 보아 20세기 중국문학은 인성의 발굴면에서 철학적 깊이가 두드러지게 결여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식의 영혼의 ‘고문(拷問)’은 거의 없었고 심층 의식의 해부는 개성화의 생동한 표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악한들은 항상 희화화되어 표면 묘사로 흘렀다. 진실한 자기반성은 원래 어떤 깊이에 도달하려는 희망이 있는 법인데 아쉽게도 대개 정치적 층위와 윤리적 층위에서의 점검에 머물렀다. 이른바 ‘보편적 인성’의 개념은 사실상 금세기 중국문학에 진정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이는 한계라기보다는 특징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인성의 약점이 항상 국족 성격의 고질로 인식되고 폭로된 것은 중국 국족의 고유문화에 각성되고 엄준한 비판 의식을 가지게 했음을 설명한다. ‘인간 정립’의 목적은 ‘모래로 된 나라를 인간의 나라로 전화’시키기 위함이었고 나아가 문학 총주제에 강렬한 국족의식을 체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 기본 특징으로 볼 때 20세기 중국문학은 바로 근현대 중국의 국족문학이었다.

오래된 국족이 근현대에 들어와 신생과 흥기를 쟁취하는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국족 영혼의 개조’를 총주제로 삼은 문학은 진지한 문학이고 열정적인 문학이며 침통한 문학이었다. 순리대로 보면 국족의 위기감에 근원한 ‘초조감’이 20세기 중국문학을 감싸는 총체적 미감 특징이 되었다.

 

 

3.

 

 

20세기는 위기와 초조가 충만했던 시대이다. 인류는 공전의 진전을 획득한 동시에 공전의 좌절을 경험했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핵군비 경쟁, 에너지 위기, 환경오염과 생태계 균형의 파괴, 인구의 폭발 …. 인간과 인류는 전에 없던 준엄한 도전에 직면했다. 20세기 문학에는 위기감과 초조감이 침투되었고 19세기 문학의 이성, 정의, 낭만적 격정 또는 늠름하고 깨끗함과는 확연히 다른 미감 특징이 침투되었다. 총체적으로 보아 20세기 중국문학이 품고 있는 미감 의식은 20세기 세계문학과 깊이 통하는 점이 있다. 고전적인 ‘중화(中和)’의 미는 불안하고 강렬한 초조에 의해 충격을 받아 개변되고 은폐되었다. 이것은 19세기 초의 궁쯔전(龔自珍)의 시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궁쯔전은 근심 걱정에 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보호하고 지키는 원대한 포부(劍)와 문학 예술 상의 창조적 완성(簫)’의 미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반세기 후에 량치차오의『신중국 미래기(新中國未來記)』는 유창하지만 목이 쉬도록 외침을 면치 못했고, 일단의 ‘견책소설(譴責小說)’들은 문언문과 백화문이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실에 구애되지 않고 구세태의 종기를 파헤쳤으며,「광인일기」와 같은 놀랄 만한 작품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세밀하게 살펴보면 동서양 문학에 체현된 위기감에는 기본적으로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 서양의 ‘모던 리터리춰’에서는 개인의 자아 상실, 자기 소외, 자아 분열이 전 인류의 생존 환경과 직접적으로 ‘용접’되어 있었고, 그 초조감과 위기감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생리적 층위, 심리적 층위(예를 들어 사르트르의『구토』) 및 ‘형이상학’적·철학적 층위(예를 들어 베케트의『고도를 기다리며』)에 체현되었다. 이러한 초조감과 위기감은 극단적으로 구체적이고 파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 추상적이고 신비적이었으며 모호하고 공허한 심각함으로 융합되었다. 또한 그것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했을 뿐 아니라 근현대 인류가 기술 사회에서 직면한 가위눌림을 놀랄 정도로 드러내었다. 반면 중국문학에서 개인의 운명에 대한 초조는 전 국족의 위기감 속으로 침투되었다(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위다푸의「타락(沈淪)」). “낙후는 매맞기를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은 길게 울리는 경보처럼 20세기 동양 대륙을 관통하여 울렸고 초조감과 위기감은 주로 윤리적 층위와 정치적 층위에 체현되어 극단적 구체와 극단적 추상 사이에 개재되어 분명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유럽중심주의와 개인주의 의식은 서양문학으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을 인류의 운명과 직접 동등시했고 자신이 처한 병태와 불행을 직접적으로 세계 본체의 부조리로 귀결시켰다. 반면 시대와 나라를 걱정하는 중국 작가들은 시종 국족의 위난과 낙후를 세계 문명의 진행 과정의 놀랄 만한 특례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루쉰은 “중국인은 ‘세계인’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큰 공포”를 제기했던 것이다. 문학에는 강철이 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는, 희망이 충만한 초조감이 체현되었다. 그러나 같은 초조감이더라도 홀시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루쉰의「광인 일기」와『야초』혹은 쭝푸(宗璞)의『나는 누구인가』와『달팽이집(蝸居)』혹은 베이다오(北道)의『낮선 바닷가(陌生的海灘)』혹은 류쒀라(劉索拉)의『너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你別無選擇)』와 같은 작품들은 내용에서 언어 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20세기 세계문학과 공통된 미감 특징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 내면의 초조감은 철저하게 중국적이지만 오히려 ‘근현대 중국’적이다.

만약 ‘초조’라는 것이 비규범적인 미감 용어라면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가 이 초조의 핵심 부분을 심각한 ‘근현대적 비극감’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이 핵심의 주위에는 기타 미감의 분위기가 미만하고 있어 때로는 명쾌하고 때로는 격앙되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감상적이며 때로는 열렬하고 때로는 미망(迷妄)에 빠진다. 중국 고대문학에 비극감이 결여되었다고 하는 것은 편파적인 지적으로, 그것은 ‘언필칭 그리스’ 즉 고대 그리스 비극을 유일한 척도로 삼은 결과이다. 각 국족은 모두 각자의 슬픔과 비극에 대한 특수한 체험과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국문학이 고전적 비극감과 확연히 다른 근현대적 비극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봉건사회의 ‘초안정 형태의 구조’ 속에서 ‘대단원(happy ending)’의 결말은 중국인의 현세 생활에 대한 집착과 열애, 그리고 “착한 사람에게는 좋은 보답이 있고 악한 사람에게는 나쁜 보답이 있다”는 훌륭한 바램이 체현되어 있다. 신구가 교체되는 대충돌·대전환의 시대에 ‘대단원’에 대한 공격은 의심할 바 없이 ‘눈을 부릅뜨고 보고’ 참담한 인생을 직시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왕궈웨이(王國維)의『홍루몽 평론(紅樓夢評論)』은 서양의 근현대적 비극관을 들여온 시작이었다. 중국문학이 신속하게 흡수하고 동질성을 인식한 것은 고대 그리스나 셰익스피어의 비극 의식이라기보다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생명 철학’에 의해 야기된 인생의 근본적 고통이었고, 입센에 의해 계발된 사회에 직면한 개인의 이름 없는 격분이었으며, 고골리와 체호프에 의해 계시된 일상적인 ‘거의 별 볼 일 없는 비극’에 대한 특이한 관심이었다. 따라서 20세기 중국문학에서 고전적 ‘숭고’를 찾는 일은 어렵다. 루쉰의『외침(吶喊)』과『방황『彷徨)』, 마오둔(茅盾)의『한밤중(子夜)』과『2월의 꽃 같은 상엽홍(霜葉紅似二月花)』, 라오서(老舍)의『낙타 샹즈(駱駝祥子)』와『베이징 사람(北京人)』, 바진(巴金)의『추운 밤(寒夜)』및 신시기의「범인 리둥중의 이야기(犯人李銅鐘的故事)」,「중년이 되어(人到中年)」,「리순다의 집짓기(李順大造屋)」,「서망모초지(西望茅草地)」,「검은 준마(黑駿馬)」 등의 일단의 우수작에서 체험하는 것은 ‘비장(悲壯)’이라기보다는 ‘비량(悲凉)’이다. ‘비량의 안개가 꽃 숲을 덮었다.’ 한편으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 전통이 가장 어려운 변화에 직면했고 다른 한편으로 근현대 사회가 아직 탄생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에 없던 격렬한 충돌이 폭로되었다. 한편으로 ‘역사의 필연적 요구’는 오래된 중국의 대문을 급격하게 두드리는데 다른 한편으로 이 요구가 형성된 역사적 조건은 이 요구를 실현시킬 역사적 조건과 오히려 심각하게 이탈되어 있었고 동시에 이 요구를 의식한 선각자들은 이 요구를 실현시킬 물질적 역량을 고통스럽고 고독하게 찾았다. 한편으로 역사 목표의 명확함과 긴박함은 항상 가장 거대한 열정과 일체를 돌아보지 않는 투신을 격발시켰고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장애물의 모호함(‘아무 것도 없는 진지’)과 완강함은 또 이 열정과 투신을 아무런 효과도 없게 만들었다 …. 이러한 비량의 미감은 20세기 중국문학에 고유한 것으로 풍부한 사회 역사적 내용을 가진 미감 특징이다. 그것은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기 암흑을 돌파함으로써 대두된 해방의 희열과도 다르고, 계몽 운동에 구비된 굳센 이성적 역량과도 다르다. 중국에서 개성 해방이 가져온 고민과 방황은 항상 희열보다 많았고, 계몽 활동은 시종 형편없이 진행되어서 이성적 역량은 항상 비이성적 열광에 의해 중단되고 간섭받았다. 일상적 궤도를 뛰어넘는 역사 운동은 거대한 진보를 가져온 동시에 거대한 실패도 가져왔다. 재난은 항상 사악함으로만 조성되는 것은 아니고 피해자들도 대개 그 재난을 피하기 어렵다. 급속한 전환의 빠른 리듬과 응고에 가까운 완만함이 병존했고 첨예한 대립의 사분오열과 비개성적인 모호함이 함께 존재했다. 바로 이 모든 것이 20세기 중국문학으로 하여금 같은 시대의 세계문학과 통하는 근현대적 비극감을 가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특한 비량의 색채를 가지게 했다. 5․4시기의 ‘호반시사(湖畔詩社)’의 시, 근거지(根據地)의 쑨리(孫犁)의 소설 및 1950년대 전원 목가와 같은 작품에서 그리고 비창하고 침울한 대형 교향곡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밝은 소리가 매우 적었다. 보다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이 대지가 침중하게 회전하면서 내는 차갑고 침울한 소리였다.

20세기 중국문학이 진전하는 각 단계에서 우리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비량과 침울 속에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므로 ‘야성’을 외치고 ‘힘’을 외치며 ‘양강지미(陽剛之美)’ 또는 ‘대장부 풍격’을 외치게 된다. 이러한 외침은 항상 모호함과 공허함으로 인해, 더욱이 상술한 ‘의식한 역사 내용’이 험난한 역사 행정과 서로 부합되지 않음으로 인해 내재적으로 문학 창작에 표현되지 못했고 대개 표면화되고 가미된 풍격 색채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외침은 필경 유약한 전원시 전통에 대한 모종의 반감을 체현했고 큰 소리로 외치며 맹렬히 돌진하는 역사 운동에 대한 일종의 바람을 체현했다. 따라서 ‘비량’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자신의 심층 구조로 삼는 미감 의식은 두 가지 서로 닮지 않은 미감 색채를 포함하게 되었다. 하나는 이상화된 격앙이고 하나는 ‘조화의 요술을 꿰뚫어 보는’ 풍자이다. 20세기 중국문학의 발전 행정에서 이 두 가지 색채는 때로는 흥망성쇠하고 때로는 교체되고 융합됨으로써 수많은 변형태를 만들어 냈다. 대개 변혁의 역사 운동이 비교적 순조롭게 매진할 때나 역사 충돌이 비교적 첨예하고 명랑화되었을 때에는 이상화된 격앙이 주도적 색채가 되었고, 변혁의 발걸음이 늦어지거나 역전되었을 때나 역사 모순이 미묘하게 잠재하여 모호한 때에는 세상사를 통찰하고 자신을 통찰하는 냉철한 풍자가 주도적 색채로 되었다. 또한 냉철한 풍자가 ‘격앙화’에 의해 뜨거운 풍자로 변하고 격앙이 ‘냉철한 풍자화’에 의해 감상으로 변하는 역사 시점도 있었다. 그러므로 양자가 상호 약화됨으로써 엄숙하고 딱딱한 ‘정극 의식’이 미감 색채의 주도로 떠오르게 되었다. 20세기 중국문학에서 격앙과 풍자의 두 가지 미감 색채를 상징하는 것은 궈모뤄(郭沫若)의『여신(女神)』과 루쉰의『외침』․『방황』이다. 일반적으로 ‘로맨티시즘’이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습용해서는 이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다. 대체적으로 말해 국족의 신생의 빛나는 원경에 착안하고 역사 목표의 명확함과 절박함에 착안하는 작가는 이상화된 격앙에 경향 되었고, 국족 영혼의 재창조라는 험난한 임무에 착안하고 역사 기점의 준엄한 ‘선천적 부족’에 착안하는 작가라면 얼음과 같은 냉철한 풍자로 불같은 울분을 싸는 것에 경향 되었다. 격앙과 냉철한 풍자는 불만스럽게 느끼는 현실 상황의 산물이다. 전자는 그 밝음과 온난함으로 인해 격려를 받게 되고 후자는 엄준함과 맑음으로 인해 보다 심각하게 역사 운동의 본질을 드러내게 된다.

20세기 중국문학의 총체적 미감 특징을 내재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심미적 각도에서 문학이 ‘의식한 역사 내용’을 본질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오래된 신생 국족이 최근 세계의 예술적 체험과 철학적 체험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 실마리의 윤곽을 거칠게 그려보더라도 이 방면에서 진지하고 착실한 연구가 일단 전개되면 장차 ‘심층’에서 총체적으로 한 시대 문학의 횡단면을 드러냄으로써 중국 국족의 백년 가까운 문학 행정의 총체적 미감 경험을 진실하게 드러낼 것임을 의식할 수 있을 것이다.

 

 

4.

 

 

‘내부’적으로 20세기 중국문학의 유기적 총체성을 파악함에 있어 홀시할 수 없는 작업은 전체 문학의 진행 과정에서의 예술 형식(장르)의 변증적 발전을 밝히는 것이다. 중국문학사에서 20세기처럼 격렬한 ‘형식의 대전환’이 출현했던 적은 없었다. 이전에 ‘점차 증가되고 병존시키는’ 식의 흥쇠 변화는 비타협적인 ‘형식 혁명’에 의해 대체되었다. 고전적 시(詩)․사(詞)․곡(曲)․문(文)은 단번에 문학의 정종(正宗)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문언소설은 기본적으로 소멸되었으며, 화극․보고문학․산문시․근현대 단편소설과 같이 완전히 새로운 장르들은 이전에 볼 수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예술 형식이 막 성숙되자마자 즉시 보다 새로운(이전에 잠재되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도전에 직면했다. 중국문학이 일단 당대 세계문학과의 내재적 ‘공통 언어’를 획득하자마자 더 이상 문을 닫고 점잖게 정교한 형식을 다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새로운 사상의 전파와 근현대 자연과학의 수입에 따라 예술 사유의 근현대화도 시작되었고, 예술 형식의 흥성과 폐기, 탐색과 쟁론은 이러한 내재적 근본 요구의 외화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었다. “언어는 사유의 직접적 현실이다.”(마르크스) 문학 언어의 변혁은 당연히 예술 사유 변혁의 돌파구가 되었다. 이러한 각도에서만이 ‘시계(詩界) 혁명’(“내 손으로 내 입을 묘사한다”)부터 백화문 운동에 이르는, 언어라는 매개에 초점을 맞춘 역사 운동의 근본적 의의를 이해할 수 있고, 금세기 중국문학의 커다란 진전이 ‘팔고(八股)’화된 언어 모델(舊八股, 新八股, 洋八股, 黨八股, 邦八股)에서 벗어나려고 행했던 비할 바 없이 험난한 박투(搏鬪)를 이해할 수 있다. 후세 사람들은 표점부호(標點符號)의 사용이 당시에 어떠한 전투를 치렀는지 상상하기 어렵고, 류반눙(劉半農)의 “‘她’자와 ‘它’자의 창조”가 5․4시기에 거둔 커다란 전과에 대해 루쉰이 왜 그토록 칭찬했는지를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20세기 초 문예 혁신의 선구자들은 문예부흥 시기의 위대한 모범-초서, 단테-들이 라틴어[의 자모]를 결합시켜 자기 국족의 ‘살아 있는 언어’로 ‘사람의 문학’을 창조한 것을 여러 차례 제기했다. 그들은 후세 문학사가에 의해 경솔하게 ‘형식주의’라고 일컬어졌던 이 언어 혁명이 사실은 바로 국족 문화를 재창조하는 중대한 관건임을 자각적으로 깊이 있게 의식했던 것이다.

백화문 운동에는 서로 연계되어 있는 두 가지 근본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신(新)사상의 ‘전파’이다. ‘백성의 지혜를 계발하고 민권을 신장’시키는 것은 신사상을 ‘평민화’, 통속화시킴으로써 형식적으로는 보편적으로 낙후된 문화 수준과 융화하는 동시에 선진적 사상 내용이 진부한 형식에 의해 천박해지는 위험이 잠재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신사상’의 전파이다. 이는 반드시 새로운 용어와 새로운 구법을 들여와 중국 백성이 아직 익숙지 않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형상 및 새로운 표현 방식을 채용하는 것인데, ‘믿을 만하지만 순통하지 않기’ 때문에 전파하는 데 ‘해석’하기 어려운 곤란이 존재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두 가지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雅)와 속(俗)의 논쟁, 보급과 제고의 논쟁, ‘주의(主義)’와 ‘예술’의 논쟁, 선전과 오락의 논쟁, 국족화와 근현대화의 논쟁이 백년 가까운 중국문학 발전의 각 중요 단계를 관통했다. 그들 사이의 장력(張力)은 또한 20세기 문예 형식의 변증적 발전의 기본 궤적을 좌우했고 각 장르의 탐색과 실험 그리고 논쟁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장력장’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중 산문과 소품문(小品文)이 가장 운이 좋았고 소설이 그 다음이며 희극은 상당히 험난했고 시의 길이 가장 울퉁불퉁했었다. 이것은 주로 각 장르 자신의 본성 및 그들과 전통, 그들과 독자의 관계 등의 복잡한 요소에 의해 결정되었다.

시는 문학의 예술사유가 새롭게 창조될 때 가장 예민한 첨병 노릇을 한다. 시언어는 일반 문학 언어의 ‘고급 언어’이고 일반 문학 언어에서 승화되어 다시 일반 문학 언어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선천적으로 ‘대중에서 이탈’되는 ‘선봉성’을 가지고 있다. 20세기 세계의 시언어에는 놀랄 만한 거대한 변화(물리학 언어와 회화 언어의 변혁만이 이에 비교할 수 있다)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과 때를 같이하여 생겨난 중국 신시는 오래된 시의 왕국으로부터 험난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신시가 한 걸음씩 전진하며 행한 ‘시도’는 ‘그로테스크’하기도 했었고 ‘시같지 않’게 변하기도 했다. 어렵게 탐색하고 정련하여 시다운 시가 출현하기 시작하자마자 사람들이 떼 지어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급속히 노화되었다. 시체(詩體)의 이러한 과정은 ‘자유화’와 ‘격률화’가 교대로 주도권을 잡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신시의 역정은 시종일관 주쯔칭(朱自淸)이「『중국신문학대계 시집』선시 잡기」에서 말한 것처럼, “어떻게 낡은 쇠사슬에서 해방되고 어떻게 새로운 언어를 학습하고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찾는가”하는 끈질긴 노력으로 표현되었다. 시체(詩體)의 해방과 부활 그리고 새로운 창조 등등의 복잡한 운동은 20세기 중국문학이 예술 사유 방면에서의 몸부림과 좌절, 진전과 전망을 가장 선명하게 압축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체현했다. 그리고 각 장르 중 신시는 가장 민감하고 가장 긴밀하게 당시 세계문학과 ‘동보(同步)’적 연계를 유지했다. 바이런, 셸리, 휘트먼, 보들레르가 타고르, 발레리, 말라르메, 베른하렌, 마야꼬프스끼, 엘리어트, 오든, 릴케, 엘뤼아, 네루다 등과 함께 중국 시단에 들어왔다. 만약 시가 ‘해석할 수 없는’ 문학 작품이라는 사실을 의식한다면 이러한 ‘동보’가 포함하는 깊은 의의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시적 사유의 ‘선봉성’은 첫째, 신시의 형식 탐색을 가장 멀리 나아가게 했고, 둘째, 그것이 야기 시킨 논쟁을 가장 격렬하게 했으며, 셋째, 그 과정에서 이러한 활발하면서도 불안정한 본성이 시 자신의 ‘모순의 주요한 측면’이라는 사실을 초래했다. 이와 대조적인 것은 희극이다. 그것은 ‘관중의 수용’을 그 생존 조건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물적 조건(무대, 배우, 극단 조직, 경제적 지원 등)의 제약을 직접 받기 때문에 ‘모순의 주요한 측면’은 희극 자체의 탐색에 있다기보다는 관중 소양의 제고에 있다. 훙선(洪深)은「『중국신문학대계 희극집』도언(『中國新文學大系』導言)」에서 20세기 초 화극의 맹아와 초보적 진전을 큰 편폭으로 상세하게 기재함으로써 상술한 조건에서 벗어난 종합적 고찰은 희극문학의 변증적 발전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만약 시체의 발전이 가장 활발한 예술 신경의 예민한 노력임을 드러낸 것이라면 희극 형식의 발전은 근현대 예술과 대중의 가장 직접적인 ‘육박전’임을 말해 준다. 그것은 전체 예술 형식 대오에서 완만하면서도 착실하게 전진한 강대한 후위였다. 그러나 물적 조건의 활발한 추동력이라는 면에서 근현대 물질문명의 20세기 중국 희극 예술에 대한 영향과 작용을 낮게 평가할 수 없다(영화, 텔레비전의 소극적 측면의 압력과 적극적 측면의 계발을 포함). 희극 예술의 새로운 창조는 그것이 일단 돌파되자 공고하면서도 지속적인 승인을 얻었다(자주 상연되는『뇌우(雷雨)』와『찻집(茶館)』및 수많은 모방작을 생각해보라). 이것은 시 풍격의 신속한 교체와 대비된다. 1960년대부터 브레히트의 희극 체계가 중국 화극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신시기이래 그것은 ‘스타니(슬라브tm키斯坦尼:이 말은 뜻이 분명치 않음-옮긴이)’ 및 중국 고전의 이야기 전달의 희극 체계와 더불어 다원적 발전과 다원적 융합의 추세를 형성했다. 이는 아마도 중국 화극의 미래 발전을 고찰하는 분석의 실마리일 것이다.

시와 희극 사이에 위치한 것은 20세기 중국문학의 가장 중요한 장르인 소설이다. 이 장르의 총체적 발전을 연구할 때에는 반드시 장편소설, 중편소설, 단편소설이라는 하부 장르로 세분해야 한다. 단편소설의 근현대 생활의 단면 묘사 방식은 신시와 유사한 ‘선봉성’을 가지고 있다. 이 하부 장르는 20세기 중국문학에서 짧고 민첩하며 형식의 융통성 있는 다변함 때문에 시종 고도의 중시를 받았다. 마오둔의 당 시 견해에 따르면 루쉰의『외침』과『방황』은 “매 편이 새로운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후 장톈이(張天翼)와 선충원(沈從文)은 단편 장르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 신시기이래 단편소설의 변화는 더욱 다양했다. 고도로 중시할 만한 것은 20세기 초 루쉰의 소설 창작이 그 시작부터 당대 세계문학과 “공통적인 최신 경향”을 드러냈다는 점이다(푸르세크). 이는 의심할 바 없는 ‘동보(同步)’ 현상으로, 시․산문․정론․철리․소설의 경계선을 타파한 근현대 의식은 서정소설이라는 갈래를 루쉰, 위다푸, 페이밍(廢名), 선충원, 샤오훙(蕭紅), 쑨리, 루즈젠(茹志鵑), 왕쩡치(汪曾祺), 장제(張潔), 장청즈(張承志) 등의 우수 작가의 수중에서 충분히 발전시켰다. 분명, 중국 소설의 근현대화 과정에는 ‘사시(史詩) 전통’(민간 예술)에 대한 ‘서정시 전통’(문인 예술)의 침투가 결정적인 추동 작용을 일으켰다. 자오수리(趙樹理)로 대표되는 이야기 위주의 서사 장르는 ‘사시 전통’의 근현대적 발전을 말해 준다. 신시기 들어 중편소설의 흥기는 갈수록 주목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문학 현상에 대한 이론적 개괄도 심화되고 있다. ‘중화기(重火器)’라 일컬어지는 장편소설은 한 시대의 역사 내용에 대한 문학의 ‘총체적 이해’의 산물이다. 모순이 복잡하고 다변했던 20세기 중국에서 탐구할 만한 각종 원인 때문에 총체적으로 이 시대의 거대한 바람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대개 유감스럽게도 실현되지 못했다(예를 들어 마오둔, 리제런李劼人, 류칭柳靑 등). 만약 작가가 아직 자신의 역사철학과 ‘장편소설 미학’을 형성하지 못했다면 이러한 거대한 바람은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면서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20세기 중국문학의 면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중국문학의 산문, 소품, 잡문은 국족의 산문 전통과 가장 접근했기 때문에(뿐만 아니라 그것이 백성들에게 ‘희문낙견喜聞樂見’될 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급속하게 고도의 성취를 이루었다. 서사, 서정, 설리, 풍자는 ‘백화로는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없다’는 편견을 타파했고 신문학의 성과를 드러내었다. 산문은 작가의 개성이 가장 자연스럽게 표출되기 때문에 개성이 크게 해방된 시대에 산문이 번성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20세기의 일류 산문가들은 모두 심후한 중국 고전문학의 수양을 가지고 있었고 외국문학에 정통했으며 근현대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풍부한 인생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가 한 시대의 정감 수준의 표지라고 한다면 산문은 한 시대의 지혜 수준(통찰, 기지, 유머, 정취)의 표지이다. 산문의 발전은 한 시대의 개성의 발전 정도와 문화 수양의 정도를 나타낸다. 주의할 만한 것은 산문이 장르면에서 커다란 ‘관용성’을 가지고 있고 이 부류에서의 형식의 새로운 창조 과정에서 장애가 비교적 적다는 점이다. 그러나 또한 전환 압력의 결핍으로 인한 동력은 어떤 새로운 예술 형식(예를 들어『야초』식의 산문시)을 완강하고 끈질기게 추진하지 못했다. 성숙한 심지어 이미 굳어 버린 산문 형식(예를 들어 양숴楊朔 식의 산문)은 또한 신구 교체의 도전을 비교적 조금 받았다. 우연히 어떤 문제(이를테면 ‘루쉰풍’의 잡문이 시효를 잃었는가의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그 착안점은 오히려 ‘입장, 태도’라는 정치적․윤리적 층위에 놓여졌다. 그러나 산문 내부의 각 하부 장르(서정 산문, 소품, 잡문, 보고문학)는 20세기 중국문학의 발전 진행 과정에서 미묘한 흥망성쇠가 있었기에 그 중의 법칙성을 개괄할 가치가 있다.

20세기 세계문학 예술의 커다란 추세는 완전히 새로운 사유 방식․감각 방식․표현 방식을 찾음으로써 근현대 인류의 풍부하고 복잡한 내면세계 및 외부 세계에 대한 ‘전유(專有)’를 발굴하는 것이다. 예술 형식의 실험은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게 했지만 실제로는 문학의 자각 의식의 표현이고, 근현대 자연과학 및 근현대 사회생활의 발전과 깊은 연계를 가지고 있다. 20세기 중국문학(그것이 개방될 때, 총체적으로 보아 그것은 결국 개방될 것이다)은 이 점에서 세계문학과 긴밀하게 상통한다. 루쉰은 바로 문학 형식에 대해 자각적 의식을 갖춘 대가였다. 그가 창조한 문학 장르(예를 들어『야초』와『새로 엮은 이야기(故事新編)』)는 거의 대부분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동서양 문화의 충돌·교류 과정에서 국족적이면서도 근현대적인 참신한 예술 형식은 이미 창조되었고 현재 창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창조될 것이다. 이것은 중화 국족이 세계 역사의 근현대적 진행 과정에서 예술 사유 방면의 주체적 창조성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사회의 물질문명 수준과 보편적으로 낙후된 문화 수준에 제약되었고 수구적 가치 지향과 문화 심리에 답습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예술 탐색은 이처럼 험난하고 구불구불했다. 근 백년을 관통하여 휴식 없이, 때로는 행정 수단의 도움을 받아 결론을 내렸던 예술 논쟁은 탐색의 험난함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탐색의 필요성과 필연성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충분한 이유와 믿음을 가지고 다음 세기가 도래했을 때 이러한 탐색이 필연적으로 보다 자각적이고 보다 활발하며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는가?

 

 

5.

 

 

개념의 수립은 우선적으로 방법 혁신의 결과이고 개념의 형성과 수정 그리고 완비는 다시 새로운 방법을 요구한다.

객관적으로 발생하는 역사는 역사에 대한 논술과 같을 수 없다. 논술은 일종의 취사, 선택, 가감, 정리, 조합, 귀납, 총괄이다. 어떠한 역사 논술도 일정한 역사철학에 의존하고 일정한 참조 체계 및 일정한 가치 기준에 의거하며 일정한 방법을 채택한다. 문학사 논술도 그러하다. ‘20세기 중국문학’이라는 개념은 우선적으로 문학사가 사회 정치사의 단순한 부속물에서 독립되는 것을 의미하고, 문학 자체의 발생·발전 단계의 완정성을 연구의 주요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은 장차 일련의 문제의 새로운 조정(문제의 제기, 문제의 위상, 문제의 의의 등)을 가져올 것인데, 현재의 연구 단계에서는 아래의 사항을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20세기 중국문학’이라는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방법론적 특징은 강렬한 ‘총체 의식(整體意識)’이다. 거시적 시공 척도인 세계 역사의 척도는 우리의 연구 대상을 두 가지 커다란 배경 앞에 놓는다. 종적 대배경은 2천여 년의 중국 고전문학의 전통이다. 우리는 관건적인 ‘단절’을 논증할 때 단절이 바로 깊은 연계이고 탯줄과 비슷한 연계이며 단절이 없다면 그 배경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횡적 대배경은 20세기의 세계문학의 총체적 틀이다. 이것은 동서양 문화의 상호 충돌과 교류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문학의 흥기를 포함한다.

이 개념에 포함된 ‘총체 의식’은 또한 ‘문학 이론, 문학사, 문학 비평’의 세 분야의 분열 현상을 타파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문학사의 새로운 논술은 문학 이론의 혁신을 의미하고 또한 새로운 평가 기준의 확립을 의미한다. 문학의 유기적 총체성은 모종의 ‘공시성’ 구조, 즉 하나의 예술품은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것임을 표시한다. 우리의 개념에는 ‘역사감’(심도), ‘현실감’(개입), ‘미래감’(예측)이 침투되어 있다. 우리의 철학이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세계를 개조하는 데 있는 것이라면, 미래감은 인문과학의 각 분야에 중요하다. 미래가 없다면 진정한 과거도 없고 의미 있는 현재도 없다. 역사는 새로운 창조를 가지고 자신을 실증하고 평가한다. 문학 전통은 문학 변혁의 빛살로 비추어야 한다. 우리의 개념에는 21세기 문학으로 나아가려는 신념, 안광, 포부를 함축하고 있다. 문학사 연구자는 이러한 사명감에 의지하여 동시대인의 문학 발전 과정에 합류함으로써 문학사를 실천적인 학과로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1985. 5. 7 베이징 대학에서

 

(초역 1988.7.30, 수정 200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