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발제

초우, 레이, 2005, 『디아스포라의 지식인―현대 문화연구에서 개입의 전술』--요약 발제(3)

ycsj 2022. 6. 6. 21:19

Chow, Rey, 1993, Writing Diaspora: Tactics of Intervention in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 Indiana University Press, Bloomington.

3. [페미니즘적] 포스트모던 자동인형 (Postmodern Automatons)

    1)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치환문제의 재론 (Modernism and Postmodernism: Restating the Problem of “Displacement”

    2) 시각, 또는 오류로 점철된사회적 대상 (Visuality, or the Social Object “Ridden with Error”)

    3) 대상에서 전략으로 (From Object to Strategy)

 

 

4. 1990년대의 교육, 신뢰, 중국 지식인: 파국 이후 담론의 편린

(Pedagogy, Trust, Chinese Intellectuals in the 1990s: Fragments of a Post-Catastropic Discourse)

 

112: 범죄 정권은 낙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열성분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12: 지식인들은 십중팔구 사회 전체에 속하는 충동욕망혼란방해를 폐기물의 형태로 취합한다. (롤랑 바르트, 지식인은 무엇에 필요한가?, 목소리의 결중에서)

 

1) 아이들의 왕(King of the Children)

112: 중국 지식인이 감내해야 했던 생활공간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 이 공간은 신선한 공기가 유입되지 않는 공간이다.

113: 19896월의 천안문 학살사건은 근대중국의 역사를 정지시켰다. 이것은 파국적 정지이다. 지난 150년 동안 중국 역사가 재앙의 연속이었다면, 198964일의 사건은 그 완결편이라 말할 수 있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중국의 전통적 부패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희망을 상징하던 정부가 민간인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근대성이라는 지속적 외상(trauma) 속에서, 문화의 연속성과 ()생산에 대한 질문이 중국 지식인을 다시 찾아와 괴롭힌다. 그것은 교육(pedagogy)에 관한 질문이다.

두 가지 목표: 첫째, 나는 중국 지식인에 의해 체험된 ‘64의 외상을 세심하게 구분된 여러 겹의 객관적 분석을 통해 기록할 뿐 아니라, 그것을 일차적으로 외상으로서 기억하고자 한다. 둘째, 나는 현재 해외에, 특히 미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 지식인의 시각에서 담론적 개입의 몇 가지 가능성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 두 번째 과제는 사실상 상상의 지도를 통해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는 것으로, 앞으로 많은 재고와 논의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976년을 배경으로 한 아청(阿城)아이들의 왕(孩子王, 1984)은 당면한 문제에 접근하는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114: ‘교과서 베끼기방법식자(識字)로서의 글쓰기, ‘작문으로서의 글쓰기

115: 라오간은 글쓰기란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난 뒤에 그 체험을 기록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명확성(淸楚)과 정직성(老實). ‘기본으로 돌아가글을 쓰자는 접근 방식

116: 역사적 전환기에 과거의 부담을 씻어낸 새로운 글쓰기 방식에 대한 신념을 갖는 것은 세계의 문자문화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117: 알기 쉽고 간명하고 직접적인 언어종종 백화즉 인민의 언어라 지칭되는를 시급히 제정하는 것은 근대 국민국가로서의 중국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과제의 하나였다.

# 만청 백화문운동, 54 백화문운동 등. 조선과 일본의 언()문일치운동

언어와 정치의 상호 관계: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

신화는 정치적 의미를 자연화함으로써 그 의미를 은폐하는 발화의 형식

신화와 반대되는 유형의 발화: 교육혁명을 상기시킨다.

118: 신화적이지 않은 언어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언어이다. # 나무꾼의 현실적 언어

중국적 맥락에서 새로운 교육법이 씻어내고자 하는 불순물은 미디어에 속박된 부르주아적 생활의 신화가 아니라, 혁명의 이름 아래 언어를 획일화한 공산주의적 정설의 신화이다.

언어를 탈신화화

정치적 언어또는 행동의 언어는 신화를 탈신화화할 뿐 아니라 중국 공산주의의 탈신화화, 즉 탈신화화를 의도한 공식적인 강령 자체를 탈신화화하려는 것이다. (p.78) # 신화탈신화화(to demithify)재신화화재탈신화화

119: 아이들의 왕기본으로 돌아가기(Back to basics)’ 접근법.

기본으로 돌아가기는 자연의 물리적 세계와 인간의 문화적 세계가 일치하기를 갈망하는 이상주의이다.

그녀(라이디)가 라오간에게 이 귀중한 물건(사전)을 전해주는 장면은 남근숭배와 페티시즘의 의미로 가득 차 있다.

121: 반영주의(reflectionism) # 반영론(?)

이 반영주의는 중국지식인이 권위주의적 국가와 맺고 있는 관계를 특징짓는, 지위 높은 대상에 대한 종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한 사람의 말이 신뢰를 형성한다: 중국 지식인과 국가 (A Person’s Word Forms Trust: Chinese Intellectuals and the State)

122: 지식인과 언어의 관계는 지식과 정권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人格(인간성, 위엄)을 강조하는 경향

124: 심각한 고난을(특히 근대에) 경험해왔음에도, 왜 중국인은 아직도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가? 왜 모든 재앙 뒤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그토록 강렬한 향수가 중국 지식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까> 전통문화가 초래한 크나큰 고난은 중국인을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인을 전통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제주의가 고난을 낳고 그 고난이 다시 전제주의를 낳는 악순환이 아닌가?

125: 덩샤오핑 세대의 권력자들, 이들은 20세기 전반부에 인민의 편에서 서서 전통의 억압, 봉건적 부패, 외국 제국주의에 맞서 전심전력으로 싸웠던 젊은이들이 아니었던가? 그렇지만 그들이 개인적으로 근대중국의 갖가지 억압의 역사를 인민과 공유한다는 사실이, 그들이 체제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았을때 그들 스스로 억압의 도구가 될 가능성을 차단하지는 않는다.

감정적인 공유가 조직적인 정치폭력을 비판하기 위한 기초로는 너무나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125-126)

126: 전향적인 가치와 감정이 왜, 어떻게 시간이 지나면서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도구로 바뀌는가 하는 것이다.

중국정치에 미치는 중국 지식인의 주체적 영향력

人言爲信

통치의 기초인 지도자의 인격에 대한 믿음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그가 하는 말의 일치에 대한 신앙에 의해 뒷받침된다.

우주와 인간성의 통합, 인간과 언어의 통합 등은 전통적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127: 체제순응적 지식인: 굴원(屈原), 두보(杜甫)

사회의 양심이 되어 인민을 대변한다는 것은 국가에 헌신하겠다는 도억적 집념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그 결과 종종 권위주의적 국가를 역사적으로 용인하게 된다. 국가는 인간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개인은 국가와 함께 융화되고 용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3) 반대 세력의 형성 (The Formation of Opposition)

128: 중국공산당의 최대 업적 중 하나가 중국 인민 대다수에게 정치의식을 심어준 것이라면, 문제는 정치의식이 공식화되고 난 다음에 어떻게 그것이 유효성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처음에는 분산된 대중의 정치적 통합을 목표로 삼았지만, 이제는 대중운동에 제동을 거는 기능밖에 갖지 않은 무장한 관료집단이 되었다. 이데올로기(알튀세가 사용하는 의미의)의 관점에서 (129) 볼 때, 중국공산당은 일견 체제와는 반대 성격을 지닌 개념과 용어를 계속 전유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해왔다.

129: 중국의 지식인에게는 반대가 어떻게 구상되고 정립되는가?

웨이징성과 팡리즈의 사례

130: 우리는 우리의 감독 아래 우리에게 책임을 지는 대표자들을 신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대표자들은 우리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들이어야지, 우리 위에서 권위를 강요하는 사람들이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 권위주의를 견제하고 규제하는 대안적인 권력 형태

팡리즈는 과학과 지식이 정치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

132: 팡리즈의 지식에 대한 옹호와 웨이징성의 대중적 정치 참여에 대한 주장은, 서양 자유주의 시각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현대중국의 정치 상황이 억압에 처해 있으며 그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팡리즈와 웨이징성의 주장은 많은 서양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공동전선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133: [직업적 자율성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유를 얻어주기 위해 비판적 지식인 대열에 합류하겠으며, 그토록 위험천만한 일에 작은 관심이라고 가지려 하겠는가?

134: 중국의 지식인들이 신뢰라는 도덕주의적 관념을 지식에 계속 부여하는 한, 그들이 정치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들은 전통적인 정치적 사고를 영속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 권위주의의 대안은 지식과 정치로부터 도피하는 게 아니라, 지식(팡리즈의 주장처럼 독립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을 이용하여 공권력에 (웨이징성이 제안한 방식대로) 대중이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135: ‘이중권력의 체계: “국가의 권력과 인민의 권력은 서로를 보완할 뿐 아니라 서로를 견제한다.”

 

4) 신뢰에서 담론으로: 유토피아를 상상하기 (From Trust to Discourse: Imagining Utopia)

 

136: 현재의 체제를 전복할 가능성을 모색.

첫 번째 발걸음은 중국인이라는 것/중국인다움(Chineseness)’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문하는 것

중국 본토의 내셔널리즘이 공산주의와 분명히 뒤엉켜 있다는 사실. 애국심

그러나 1989년 이후의 중국인에게 그런 애국심의 발로는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에서는 공산주의가 내부적으로 발생했으며, 1920년대·1930년대·1940년대의 진보적 지식인은 그것을 봉건주의의 길고 고통스런 역사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당 지배를 불신하는 것은 총체적인 파국과 다름없으며, 공산주의의 이상화를 국가의 존재 이유로 삼아온 사회에서 여러 가치와 구조가 돌연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권력에 대한 애국적 신뢰가 무너지면서 또 다른 유토피아의 가능성이 등장하기도 한다. 오히려 희망은 더 이상 국가적 경계선에 속박되지 않는 문화적 정체성인 중국인이라는 것을 영속적으로 수정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공산당 지배에 대한 불신은 장기적으로 강요된 중앙집권적 문화에 의해 정치적 차이의 분절화를 저지하는 내셔널리즘의 이데올로기까지 폐기하는 것이어야 한다.

137: 중국에서는 국가에 의해 인정된 역사를 보급함으로써 지난 40년 동안 공산주의, 내셔널리즘, 그리고 국가에 의한 문화의 중앙집권화가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를 강화해왔다.

내셔널리즘으로 되돌아가기는 곤란하다는, 그래서 내셔널리즘을 초월할 필요성이 있다는 인식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은 중국의 지식인이 장차 구축할 파국 이후의 담론을 특징짓는 문화적으로 특수한요소가 될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변화. 현재 중국 내부에서는 그러한 사회적반대세력이 발전할 만한 여지가 없기 때문에, 미래의 변화를 위한 기초작업을 담당해야 할 사람은 중국인이라는 것을 문화적 정체성의 근원으로 여기는 디아스포라의 중국인이다. 라클라우와 무프: “유토피아는 우리가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정도를 뛰어넘어 그 질서를 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가능성: 중국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활동에서 공동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중국인이라는 기호의 적극적 가치를 완화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중요시하는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이 전위적이 장의 첫머리에 인용한 문장에서 롤랑 바르트가 기술한 바 있는 일종의 폐기물이라는 의미에서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138: [바르트의] 그러한 폐기물·충동·욕망·혼란·방해 가운데 제일 먼저 제거되어야 할 것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중국인이라는 이상에 집착하는 것과, 나머지 세계를 계층화시켜 생각하는 경향이다. 이는 중국인이라는 기호의 역사를 포기해야 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기호를 중국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영역에서 행해지는 다른 유형의 연구와 공동작업을 추진하는 토대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 이것이 필요한가? 그러한 공동작업만이 중화사상에 입각해 세계를 바라보는 전통문화의 경향이질적인 것들을 뒤섞고 그것들을 정치적으로 내면화해버리는 태도을 단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강조-발제자)

중국인이라는 것/중국인다움이 고정된 정체성의 축으로 남아 있는 한, 중국의 지식인은 근대에 반복적으로 표면화된 폭력의 중심에 있는 정치적 중앙집권주의를 영속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p.93)

중국의 지식인은 전통적 지식의 정통성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정치적 반대세력의 구축에 이용하는 대신에, 다른 장소로 관심을 돌려 새로운 투쟁의 장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디아스포라 상태의 중국지식인에게 중국학이 저항의 논리적 거점이 될 수는 없을까? 중국연구(China studies)를 후원하는 영역인 중국학(sinology)은 중국 국가의 정치적 구조로부터 중국문화를 내면화하고 중앙집권화하는 경향을 고스란히 계승하여 활동의 전제로 삼고 있다. 중국학과 중국 국가의 공통된 이데올로기적 경향은 적절한 탐구와 도전을 요하는 과제이다.

139: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의 지식인은 전지구적 대중운동의 결과로 발생한 논의에 좀더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이런 지식인이 취할 수 있는 대안적인 길은 담론의 개입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이용하여 담론을 개입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대안적인 담론의 개념: 바흐친의 대화개념은 외견상 독립적인 발화도 대화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과, 언어는 개별 화자에 의해 말해지는 경우라도 공동체적 기반에 의존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대화적 성격은 언어가 인간의 자율적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 사용될 뿐이라는 보편적 믿음에서 언어를 해방시킨다. 바흐친에 의하면, ‘의식언어에 선행하는 존재, 언어로부터 독립된 존재라고 가정되곤 하는은 대화론적으로, 즉 담론에 의해 그리고 담론의 상호관계를 통해 구성된다.

바흐친의 대화론과 유사한 방식으로, 라클라우와 무프의 담론개념도 인식과 표현으로서의 담론에서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담론으로 중점을 옮긴다.

이러한 담론개념은 상이한 사회관계에 참가하려는 노력을 통해 담론이 구성되는 방식을 강조하기 때문에 현대중국의 지식인에게 유용하다.

신뢰강한 사람과 그의 의 맞물림, 그리고 그것에 함축된 사람의 인격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반면, ‘담론은 웨이징성이 논의한 것처럼 인민의 마음속에 있는 법정다시 말해 교섭과 합의를 통해 달성된 공동체적 규제력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팡리즈가 강조한 지식의 독립은 현실 상황에서 분절화/담론화된 부분적 단위(또는 결절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라클라우와 무프에 의하면, 그 단위는 상호 관계 속에서 개방된 사회적 영역을 구성한다.

분절화의 행위는 다양한 결절점의 구축에 의하여 그 결절점 하나하나의 의미를 부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정의 부분적 성격은 사회적인 장의 개방성에서 비롯된다. 개방성 자체는 모든 담론이 담론의 장이라는 무한히 넓은 영역에서 끊임없이 넘쳐 흐른 결과이다.”

이런 식으로 정의하면 담론은 신뢰라는 개념이 내포한 도덕성에서 탈피하여, 유효한 반대 세력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불가결한 집단적 개입이 된다. 이 가능성은 중국 지식인이 추구해야 할 바로 그 유토피아이다.

언젠가는 이 망명객들이 비판적 대중으로 출현할지도 모른다. 이 비판적 대중은 토지에 결부된 특권과 무관하게 중국을 다루게 될 것이다. ’중국의 토양위에 존재한다는 환상을 거부함으로써, 중국의 지식인은 적당한 때가 되면 애국심과 내셔널리즘의 수사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용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141)

141: 중국과의 물리적 거리는 다양한 문화영역에 걸친 담론들을 수평적으로 구축할 가능성이 확보된다. 담론의 수평화가 궁극적으로 현재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중앙집권적인 수직적 구조를 대체하기를 바란다.

141: 중국의 지식인이 현대중국의 역사를 인민의 민주 투쟁으로 특수하게 구성하기 위해서는 지리적 의미에서건 문화적 의미에서건 중국의 영역 바깥으로 이동하는 것이 점점 더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바깥으로의 이동은 망명 중인 반체제 지식인, 피난민, 파국의 생존자 등의 바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전지구적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자각적 이동이다.

로컬한 분절화와 글로벌한 분절화

142: ‘중국적사건을 해석하면서 다른 힘들이 개재되어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로컬한투쟁에 일종의 총체성을 부여한다. 총체성은 다양한 담론이 서로 간섭하는 공간으로, 이 공간에서 지역적 투쟁을 분절화한다는 것은 다른 투쟁들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분절화할 것을 요구하며, 역으로 다른 투쟁들에 대한 담론은 지역적 투쟁에 대한 담론을 전제한다. 여러 담론이 교섭하는 이 공간은 종결되었다(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총체적인 게 아니다. 오히려 총체성의 의미는 바로 타자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143: ‘분리될 수 없는 투쟁특정한 역사적 힘들이 모여서 분리될 수 없고 어 이상 환원될 수 없는 관계를 서로 맺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특정한 투쟁의 정체성의 기초를 구축하는 것이지, 그런 투쟁의 정체성을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결여완전무결하게 구축된 단일한 문화적 정체성의 결여에 의해 반대세력의 유토피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천안문 학살사건에 대한 중국 정부의 반응은 이 유토피아와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144: 中國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