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발제

초우, 레이, 2005, 『디아스포라의 지식인―현대 문화연구에서 개입의 전술』--요약 발제(2)

ycsj 2022. 6. 3. 17:55

 

2. 토착민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Where Have All the Natives Gone?)

 

1) 진짜가 아닌 토착민/원주민 (The Inauthentic Native)

50: 공산주의 중국의 토착민이라면 당연히 그 국가의 공식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가정

51: 인류학의 역설적인 시나리오: 서양의 인류학자는 문명화되거나 인류학자 자신처럼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문화를 구축하는 작업을 맡은 토착민을 보면 불편해진다. * 마거릿 미드, 제임스 클리퍼드(“그들[토착민]의 문화수집이 그녀[인류학자] 자신의 문화수집을 복잡하게 만들었기때문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등

곤경: 판에 박힌 토착민이 그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학자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토착민이 더 이상 자신의 틀 안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52)불편한 사실이다.

52: 서양 비평가의 입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표명하는 정치적문화적 차이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지원자가 갖고 있으리라 상정되는 진정성의 지표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만약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온 한 토착민이 자본주의를 신봉한다면, 그녀는 이미 타락한 것이다. 순수하지 못한 민족적 표본은 그에게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 서양 학자가 보기에, 사회주의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중국인/토착민은 진정성이 없다.

 

2) 이미지로서의 토착민 (The Native as Image)

# identification: 동일화보다는 동일시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

52: 동일시와 이미지의 특수한 관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

프레드릭 제임슨: “시각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포르노그래피적이다. 포르노그래피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가 가진 힘을 극대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하나의 벌거벗은 몸인 것처럼 응시하도록 요구한다.” 시각 이미지에 대한 이 직설적인 정의는 문제의 주제가 영화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오늘날 문화비평이 직면한 여러 문제를 집약하고 있다.

본다고 하는 행위는 벌거벗은 육체에 대한 투사(projection)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본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말해서 폭력의 일차적 동인(agency)이다. 그것은 수동적 희생자의 위치에 놓인 타자를 시각적으로 관통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스스로를 타자 속에다 드러내는 공격적인 광경이다. 그것은 공격당한 자의 장소이다. 더욱이 이미지는 공격에 의해 파괴되고 노출된 뒤에 남겨진 것이다. 그래서 제임슨은 이미지란 적나라하고 포르노그래피적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 시각의 폭력성, 시각적 권력, 시각적 즐거움, 관음증/절시증, 포르노그래피적, 벌거벗은 몸을 응시, 시각적 관통

53: 많은 사람에게 이미지는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많은 비판적 담론에서 이미지는 암묵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저항전략들이 협상되는 장소이다. 비판적 담론은 대안적인 광경, 이미지를 변화시키게 될 대안적인 시각의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이 이미지의 장에 진입하려 한다. 따라서 오늘날 가장 중요한 비평적 시도 가운데 하나는 억압된 희생자로서의 타자의 주체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주체성은 이미지의 뒤쪽/아래/주변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오염되고 왜곡된 이미지, 벌거벗겨진 이미지, 나체로 환원된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이런 식으로 주관성/주체성을 재창조하는 데 따르는 문제점은, 심층과 감춰진 진실과 내면적 목소리를 중시하는 정치로써 이미지의 권력관계, 즉 표층에서 행해지는 정치적 행위에 대항하려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가장 중요한 측면오로지 이미지로서 그것이 갖는 힘이 간과되고 방치된다. 대체되어야만 할 나쁜 것으로서의 이미지라는 관념이 지니는 문제를 의식하면서, 나는 토착민에 관해 아래와 같은 주장을 펼치려고 한다.

# 이미지가 저항전략들이 협상되는 장소라는 말은, 대중문화가 지배이데올로기와 저항이데올로기가 투쟁하는 장소라는 그람시의 성찰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초우는 지배문화에 의해 오염되고 왜곡된 이미지에 대항해 비판적 담론이 제시하는 대안적인 풍경 가운데 하나가 억압된 희생자로서의 타자의 주체성을 탐구하는 것이라 분석한 후, 후자가 가지는 문제점을 적시한다. 즉 비판적 담론은 심층과 감춰진 진실과 내면적 목소리를 중시하는 정치로써 이미지의 권력관계, 즉 표층에서 행해지는 정치적 행위에 대항하려 한다.”(초우, 53)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미지 자체의 힘은 간과되고 이데올로기 효과만 중시된다.

54: 토착민을 [제대로] ‘발견할방법은 없을까? 토착민을 이미지로 환원/추상화시키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토착민을 어떻게 취급할 수 있을까?

내가 토착민오늘날 종종 억압받고 주변화되고 부당한 취급을 받는 자의 대명사가 된에게 주목하려는 것은, 포스트콜로니얼 담론에서 토착민이 차지하는 공간이 오류와 환상, 기만과 불결의 공간이기도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피억압자의 잉여가치로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편법에 불과하다. 이런 손쉬운 방법으로 전환하기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토착민의 공간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3) 침묵하는 대상으로서의 토착민 (The Native as Silent Object)

54: 토착민을 생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포트스톨로니얼 시대에 우리 자신의 근대성을 생산하는 것이다.

토착민에 관한 현재의 이론적 논의에서 토착민의 공간이 백인의 징후라는 형식으로 설정된 경위를 검토

나는 라캉을 따라 징후라는 용어를 주체에게 존재론적 일관성과 근본적인 구조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란 의미로 사용한다.

55: 슬라보이 지제크: 징후의 비경멸적 의미: “여성은 남성의 징후이다는 남성은 자신의 징후인 여성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남성의 존재론적 일관성은 자신의 징후에 의존하며, 자신의 징후 속에 외재화된다.

백인의 징후로서 토착민이 점유하는 공간, 주체로서의 백인에 대한 관계에 외재화되는 토착민의 장은 본질적으로 객체적인 공간, 그 대상에 의해 점유되는 공간이다.

()백인이 포스트콜로니얼 상황에서 징후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그리고 징후는 전통적으로 이차적이고 파생적인 의미로 간주되기 때문에, 식민주의에 비판적인 다수의 논자는 징후 또는 대상으로 자리매김되는 비백인의 주체를 탈환하는 방향으로 그들에 관해 쓰려고 시도한다. 그 결과 일종의 주체화(subjectivizing: 주관화?)가 불가피해지는데, 이런 점에서 반제국주의 프로젝트는 여성의 주체성을 이론화함으로써 여성의 왜곡되고 침해된 정체성에 진실을 되돌려주려는 페미니스트들의 프로젝트와 궤를 같이 한다. 그 전형은 토착민에 대한 프란츠 파농의 논의이다. 프로이트가 구성한 여성과 마찬가지로(비판을 하면서도 많은 페미니스트가 반복하는), 파농이 구성한 토착민도 오이디푸스적이다.

프로이트: “여성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파농: “흑인 남성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토착민(흑인 남성)은 백인, 즉 아버지를 쫓아내고 싶은 성난 아들로 상상된다. # 가부장적이다.

56: 프로이트는 나아가 여성을 결여로 표상하지만, 파농은 토착민이 뭔가를 도둑맞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토착민 역시 결여이다. * 오이디푸스적 사고법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중국여성에 관해서를 독해하면서 가야트리 스피박은 자민족중심주의적 소외을 비판한다.

57: 선망은 파농이 토착민을 구성하는 기본조건으로 들었던 폭력의 다른 측면이다. 그러나 두 가지 정서하나는 타자가 가진 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정서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있기 위해 타자를 파괴하는 정서는 모두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산물로서, 자기/타자의 위계구조에서 하위를 차지하는 타자가 무언가를 결여’(경멸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의미에서)하고 있다는 발상에 근거한다. 토착민의 운명은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여성의 운명과 유사하다. 여자는 결코 남근을 가질 수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 남근과 그 대용물을 선망해 마지않는다는 것이다. 토착민은 결코 서양인이 될 수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 서양인과 그 대용물을 선망해 마지않는다.

토착민의 무언의 진실을 밝히려는 전투: 스피박은 서양의 비평가인 크리스테바의 발언 자체가 이미 그녀의 특권적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반면, 크리스테바는 침묵하는 중국여성 앞에서 반드시 인식해야 할 것은 서양적 발언의 한계와 분절화하는 행위 자체의 한계라고 말한다.

58: 그들을 선망이란 것으로 주체화시키는 비판적 욕망, 그들을 침묵하는 대상으로서 존경하는 겸허한몸짓 이외에 이 토착민을 기술할 다른 방도는 없는 것일까?

크리스테바처럼 타자의 불가사의한 매력에 빠져드는방식은 많은 유럽의 지식인에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철학적이고 기호학적인 몸짓이다. 이들의 담론은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투이고, 루소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타자와 대면할 때는 고백조가 된다. 그 타자가 아시아와 극동일 때, 유럽의 지식인은 항상 단정적인 어조로 말해야만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이 타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두렵고 매혹적인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린다.

알렉산드르 코제브의 일본 방문, 1959. 10년 후의 롤랑 바르트(기호의 제국)

59: 미셸 세르도 동양에 가서 역사의 종말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가 총체적인 절대적 타자를 발견한 곳은 중국농촌이다. 중국의 흙

60: 그렇게 토착민은 이미지(‘공허한일본의 의례나 중국의 흙’)의 형태로 고정되어 하나의 절대적 존재(관념?)가 된다. 그리고 토착민의 침묵이 우리에게는 발언의 기회가 된다. 제임슨이 묘사한 의미에서, 서양 학자의 시선은 포르노그래피적이고 토착민은 단순한 나신이 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토착민의 구성은 이미지 동일화의 수준에 머무르는데, 이 동일화는 우리가 토착민과 얼마나 닮았으며 토착민이 우리를 얼마나 닮았는지 그 정도에 따라 우리자신의 정체성이 측정되는 과정이다. 이미지의 유사성을 배제하고 토착민을 상상하는 방법은 없을까?

60: 바로 이 질문이 서벌턴은 말할 수 없다라는 대담하고 도발적인 스피박의 주장을 촉발했다. 스피박의 발언은 토착민을 침묵하는 대상으로서 영원히 고정시켜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61: 베니타 패리. 바바의 표현을 사용하면, 식민지적 텍스트의 잡종성이란 서벌턴이 이미 무언가를 말하고 있음을 뜻한다.

바바의 잡종성이란 용어가 해체, 반제국주의, ‘난해한이론의 가면을 쓴 채 소생시킨 것은 지배문화가 그 자체의 평형상태 유지를 위해 허용한 것에 대한 오래된 기능주의적 관념이다. 이러한 기능주의는 대영제국의 식민정치뿐 아니라 고전적 인류학과 사회학의 조사방법의 근간을 이룬다. 그것이 허용하는 기능주의적인 주체 구성영미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속에 확고하게 새겨진은 우리가 토착민에게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토착민을 우리 자신과 유사한 존재로 만들려는 이미지에 의한 동일화 과정의 이면이다.

# 초우는 바바를 비판하고 스피박을 옹호한다.

61: 스피박의 논문에서 핵심적인 것은 이미지에 의한 동일화의 두 가지 측면, 서벌턴에게 허용된 자유의 두 가지 유형객체의 형성주체의 구성에 대한 항의이다. 객체의 형성은 서벌턴이 자신과 같은 피억압자로부터 (객체로서) 보호되는 결과를, 주체의 구축은 서벌턴이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동화될 수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완성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 때문에 스피박은 서벌턴이 이미 말했다고 하는 낙관적 관점에 도전한다. 서벌턴은 말할 수 없다. 전지구적으로 통용되는 상세하고 너저분한 긴 목록에 정중하게 여성이라는 항목을 만들어 넣는다 해서 거기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62: 그것을 대신할 혁신적인 대안의 구성은 서벌턴 담론이 본질적으로 제국주의 담론으로 번역 불가능함을 인식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항쟁(différend) 개념에 대항관계에 있는 두 담론간의 접근 불가능성 또는 번역 불가능성이라는 정의를 부여하여 사용하는 스피박은 있는 그대로의 삶에서 서벌턴을 구성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서벌턴이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는 것자체가 이미 확고한 지배와 억압의 역사에 구조적으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서벌턴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만, 우리는 토착민을 다른 식으로 동일화하는 과정에 착수할 수 있다. * 부바네스와리 바두리라는 젊은 힌두 여성이 생리기간 중에 자살한 사례. 소리 없는 몸짓

토착민의 정체성은 모방될 수 없으며, 이미지의 유사성을 뛰어넘는다. 자살한 이 여성의 침묵하는 공간에 의해 제시되는 동일화의 유형은 상징적 동일화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슬라보이 지제크: 가상적 동일시(imaginary identification)에 있어서 우리는 타자를 비슷한 이미지의 수준에서 모방하려 한다. 우리가 타자와 비슷하다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타자의 이미지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상징적 동일시(symbolic identification)에서는 타자가 모방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 비슷하지 않은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을 타자와 동일화한다.상상적 동일시에서 우리는 닮음의 수준에서 타자를 모방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와 닮았기때문에 타자의 이미지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반면, 상징적 동일시에서 우리는 정확히 그가 모방할 수 없는 지점, 닮지 않은 점에서 타자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한다.

# 지제크의 상상적 동일시와 상징적 동일시

 

4) 로컬한 것의 복권, 새로운 역사의 발견 (Local Resurrections, New Histories)

63: 포스트콜로니얼 상황의 쟁점 중 하나인 토착민 문제는 근대성의 문제이자 근대성과 위기에 처한 진정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토착민에게 매료된 것이 근대성의 불가역성이란 측면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서양세계의 토착민이 서양 자신의 지적인 상황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온 역사에 관해서는 훌륭한 연구가 많이 있다. 모더니즘은 이 유명한 1세계예술가들이 비서양인의 문화와 예술작품을 자신의 창의성안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서양의 예술가들이 시대와 장소, 작가별로 구체적으로 분류되어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데 비해, 비서양인의 예술작품은 계속해서 체계적인 착취와 왜곡에 시달리고 있다.

64: 낸시 암스트롱: 문화비평의 새 물결은 여전히 우리가 타자를 응시하는 힘을 구사하는 주체가 되든가 아니면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을 받는 객체가 되든가 양자택일해야 한다고 상정한다.

64: 우리가 해석행위를 통해 토착민의 희생된 목소리/자아를 부활시킴으로써 지배적 담론에 도전하게 되면서이것은 많은 신역사주의적’ (65) 연구의 배후에 숨어 있는 충동이다우리는 원래 침묵을 지키며 보이지도 않았을 토착민의 장으로 성급하게 진입하여 자신을 토착민의 살아 있는 대리인/증인으로 전환시킨다. 우리가 가시화되는 이 과정은 토착민의 경험이 번역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중화(中和)시키고, 그 번역될 수 없었던 사실의 역사를 은폐한다. 토착민의 원래의 맥락특수성을 성급하게 제공하면 지배담론과의 공범관계가 생길 수 있다. 지배담론이 지닌 변환하고, 고쳐쓰고, 투명하게 하는 힘이야말로 헤게모니 확립의 원천이며, 토착민이 아무리 완강하고 불투명하게 저항하려 해도 그것을 표상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65: 근대성의 문제는 단순히 다양한 체험융합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는 항쟁(différend)에 기초하여 이른바 1’ 3’ 세계가 대립하는, 다시 말해 3세계의 체험을 1세계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이다. 왜냐하면 토착민의 경험이 번역될 수 있기 위해서는 토착민이 단지 말할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말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하는데, 정당성의 증거는 제국주의와의 조우 속에서 파괴되어왔기 때문이다.

66: 토착민의 침묵이야말로 그가 배제되고 억압된 가장 중요한 단서. 그 침묵은 제국주의적 억압의 증거(벌거벗은 육체, 더렵혀진 이미지)인 동시에, 그 억압에 대한 원래의 증인이 없는 상황에서 그 증인을 대신하여 연기하거나 위장함으로써 제국주의 지배 이전의 응시로서 행동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5) 백인의 눈 대신 유색인의 눈을 (A Brown Man’s Eye for a White Man’s Eye)

66: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는 텍스트: 말레크 알룰라의 식민지의 하렘: 알제리 여성의 모습을 담은 그림엽서에 초점을 맞춘다.

이 텍스트의 의도는 반()포르노그래피(이미지를 왜곡하는 나쁜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와 토착민의 복원이다. 이런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는 내가 볼 때 문화비평이 어떻게 토착민에 대한 착취를 심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싥례이다.

토착민은 한 번(제국주의 세력의 지배에 의해)도 아니고 두 번(문화적 종속과정에 의해)도 아니고, 세 번이나 착취(exploitation)되었다. 세 번째는 다름 아닌 그 반제국주의 비평가의 손에 의해서.

* 세 번의 착취: 1. 제국주의 세력, 2. 문화적 종속, 3. 반제 비평가의 손

68: 복수하려는 욕망적이 자신에게 한 것을 똑같이 적에게 행하는 식으로, 식민자와 피식민자 양측이 눈에는 눈으로 맞서는 것은 파농 이래로 남성중심주의적 반제국주의 딤론을 관류하고 있는 선망과 폭력의 환상이다. 이 환상은 이미 말한 바대로 오이디푸스적 구조를 갖고 있다.

 

6) 담론복제시대의 토착민 (The Native in the Age of Discursive Reproduction)

70: 근대성은 그 기원에서부터 양의적이다. ‘새롭고’ ‘신기한, 일종의 시원적(始原的) 계기가 되려다 보니, 그것은 해체의 형식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에 선행한 자신보다 근원적인 것과의 관계를 정립해야만 한다.

# 계몽의 이중성: ()봉건과 서양 학습

근대성의 추진력이 과거에 대한 비판이라면, 대부분의 문화비평은 여전히 모더니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71: ‘우리’[우리의 담론. 서양 지식인]그들’[토착민]의 병립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 병립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잉여가치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또한 근대성의 불가역성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토착민의 해체를 직접 목격한 증인이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토착민의 담론을 제국주의자의 담론으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토착민은 상품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만 지각될 수 있다. 현대의 문화연구가 추방된 토착민에게 보이는 관심이 크다는 점에서, 토착민은 아파두라이가 우회에 의한 상품화탈맥락화의 미학이라 부르는 이중과정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72: 발터 벤야민이라는 위대한 모더니스트의 텍스트: 에두아르트 푹스: 수집가 겸 역사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역사철학 테제

74: 나는 비평가의 발언과 비평활동의 대상이 되는 정치적 환경 사이에는 항상 변하기는 하지만 일정한 공범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비판적 담론에 의해서 피억압자토착민서벌턴 등이 진정성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용될 때마다 그들은 신화창조의 장이자 불순한 정치적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되어버리고 만다.

0.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기술복제가 가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예술작품의 오리지널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게 된 과정을 기술.

벤야민은 아우라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동시에 그것의 상실에 매료된다. 아우라는 예술과 그것을 탄생시킨 공동체와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반면, 아우라의 상실은 예술이 대중문화 속으로 해방되어 수집 가능한 것을 모으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가 탄생했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75: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과 그 퇴조에 대한 논의는 배제와 동일화의 모더니즘적 과정에 내재하는 모순을 공유하고 있다. 배제된 물체는 폭력의 기호인 동시에 진보의 기호이다. 원래의 장소에서 폭력적으로 훔쳐내고 치환된 대상은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공간에서 무한정 복제될 수 있게 된다. 배제는 정체성을 구성하지만, 이렇게 구성된 정체성은 언제나 변화를 거듭한다.

현실의 인민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봉사하기를 꿈꾸는 착한 공산주의자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끊임없이 대상을 바꾸는 데 익숙해진 추한 자본주의자처럼 살며 일한다.

# 아이러니. 이런 이중성을 인지하고 솔직하게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를 감추고 전자만을 강조하는 디아스포라 지식인이 다수 존재하는 현실.

76: 벤야민의 텍스트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장 급진적인 메시지는, 종종 소외된 노동이라는 실존주의적 불안으로 표현되는 상품의 대량생산이 사실상 모더니즘적 역사연구에 구조화되어 있는 배제행위라는 것이다.

76: J. 힐리스 밀러

타자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에 바탕을 둔 정치적 변화의 움직임(예술의 정치화)그와 반대되는 추악한 상황으로 쉽게 이행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차이를 구별할 필요에 기초한 정치를 추진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차이우월성으로 전환시키는 데서 생기는 억압을 끌어낸다. 우리가 더 강하고 더 건강하고 더 아름답다는 자부심은 결국 정치의 미학화를 초래할 수 있다.

77: 밀러: 문화연구가 로컬문화를 구제하고 그것에 힘을 부여하려고 노력할수록 그 문화의 존립 자체가 더 큰 위협에 직면할 수 있다.

밀러에게 있어서 로컬을 절대적 차이를 갖는 것즉 그것 자체와 완전히 동일화되는 것으로 보고 그것에 계속 매달리는 것은 디지털 복제시대에 세계의 엄격한 계층화에 계속 매달리는 것을 뜻한다.

78: 종속된 문화를 예찬하고 보존하고 강화하려고 노력할수록 문화연구는 자신이 원래 대항하고자 했던 정치질서의 재생산에 더 많은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문화연구는 우리를 전쟁으로 인도하는 모든 내셔널리즘적 심미주의심미주의적 내셔널리즘 중에서 최악의 형식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

 

7) 소문자 타자와 대문자 타자로서의 토착민 (The Native as other and Other)

78: 정리: 토착민의 장소는 이미지의 장소, 침묵하는 대상의 장으로서 나쁜 의미에서 일종의 결여라고 간주된다. 파농 이래로 우리는 토착민의 주체가 선망과 폭력에 의해 성립된다고 가정하는 담론으로 이 결여를 채우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에 대응하는 것으로는 토착민에게 원래의 맥락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토착민을 부활시키려는 새로운 역사학의 물결이 있다. 그러나 신역사주의는 문화적 표본의 모더니즘적 수집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자신이 만들어놓은 아포리아(aporia)에 직면하게 된다. 위기에 처한 진정한 것수집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는 모든 진정한 것을 불필요하게 만들 가능성을 포함한다.

80: 야만인과 문명인의 진정한 차이는 문명인은 타자를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명인의 정체성은 항상 타자성을 통해서만 획득된다.

루소의 야만인은 단순히 문화적 타자가 아니다. 라캉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는 분리이전의 대문자 타자(Other)에 해당한다. 이것은 주체화되고 사유화된 것, 전체로부터 상실된 부분을 일컫는 대상 α가 출현하기 이전의 타자이다. 내가 대문자 타자를 언급하는 것은 토착민의 역사적 경험을 변화의 장으로 활용함으로써, 정치의 영역을 확대하여 착취저항생존 같은 좀더 일반적인 문제까지 고찰하려는 시도이다.

81: 파농에 대한 호미 바바의 독해에서도 정치적 영역을 확대하려는 유사한 시도가 발견된다.

82: 내가 제안하고 있는 것은 토착민을 식민자가 도착하기 이전의 존재, 토착민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기 이전의 존재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식민자의 능동적이고 근원적인 응시에 의해 토착민이 수동적 대상으로 종속된다고 보는 서양의 헤게모니적 모델과는 반대로, 나는 토착민의 응시에 의해 관찰되고 있다고 느끼는 쪽은 실제로 식민자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싶다.

이 응시는 위협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다. 그것은 식민자에게 스스로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들고, 나아가 그로 하여금 응시의 방향을 바꾸어 자기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자각시켜 식민자 자신이 대상으로서의 토착민에게 투영되는 결과를 낳는다. (p.51)위협도 보복도 아닌 이 응시는 식민자 자신을 의식하게 만들어, 이 응시를 돌려서 자신을 바라봐야 할 필요성으로 이어지며, 그 이후로는 토착민-대상에 반사된다.

(the self-reflection of the colonizer: 식민지 개척자의 자기 반성/성찰)은 식민자를 주체(의미와 행동의 원천이 되는 강력한 응시)로 구축하고 토착민을 그의 이미지로 생산하는데, ‘이미지라는 단어에는 온갖 나쁜 의미의 결여가 부착된다. 이미지라는 단어에 부족함이라는 온갖 경멸적 의미가 붙어 있는 가운데, 식민자를 주체(적극적인 응시, 의미와 행동의 원천), 토착민을 식민자의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것은 식민자의 자기반성이다.(p.51)

타자와의 조우에 의해 서양인은 자기를 의식하게 되었고, 자신이 소유한환경에서도 거북하고 불편해진 것이다.

82: 원초적목격의 증거는 시간상으로 영원히 상실되었기 때문에, 토착민의 오염된 이미지이미지’(토착민 타락의 역사)인 동시에 그 목격자의 응시로서도 역할을 연기해야만 한다. 대상물로서의 토착민의 침묵식민자가 토착민에게 강요한 수동적 침묵과 당장 구분될 수 없는 침묵속에서, ‘원초적목격자의 무관심이 모의적 형태를 띠고 다시 등장한다. 알룰라가 재현한 말없는 그림엽서들처럼, 모방된 응시는 이미지와 식민자의 응시 사이에 존재한다. 식민자가 토착민 여성을 벌거벗긴 곳에서, 나체가 된 그녀의 육체는 식민자가 창조한 오염된 이미지동시에 무관심한 응시로서, 식민자를 도로 빤히 쳐다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옷 밑에는 더 이상 드러낼 비밀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그 비밀이란 건 너의 환상일 뿐이야라고.

# 식민자가 창조한 오염된 이미지 vs. 토착민의 무관심한 응시

 

8) 토착민은 속지 않는 자가 아니다. (The Native Is Not the Non-Duped)

84: 논의의 출발점이었던 진정성의 문제

브라이언 스푸너: 개인의 내면적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과 세심하게 선택된 외부의 사물을 통해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 사이에서 생겨나는 관계

토착민이 무관심하고 오염된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관점지지하는 나의 주장은 사실상 이미지 문제의 근원에 접근하려는 시도이다. 문화연구는 타자를 다룰 때마다 이미지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타자가 표상되어 있는 이미지는 항상 환영기만허위로 불신되기 때문에, 타자를 구제하려는 시도는 종종 타자를 속지 않는 자진정성과 진실한 지식의 원천로 떠받드는 시도로 전환된다. 이런 시도를 하는 비평가 역시 시원적 지혜를 흡수한 덕에 자신은 속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지제크: “라캉이 말하는 속지 않는 자의 오류’(les non-dupes errent), 즉 자신이 속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은 바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85: 이 논리에 따르면, 야만인/원시인/토착민은 표면적인 상징적 질서의 바깥/아래에 숨어 있는 진실이 된다. 이와 같은 토착민개념에 매달리는 문화비평가는 지제크의 유추에 의하면 정신이상의 주체이다.

지제크: “주체의 잘못은 자신을 속이려고 그 기만을 조작하는 은폐된 동인(agency)이 존재한다고 너무 쉽게 믿고 가정하는 데 있다.”

반제국주의 담론 속에서 작업하고 있는 우리에게, 기만을 조작하는 은폐된 동인은 바로 제국주의’, ‘식민주의’, ‘자본주의등이다.

86: 문제가 되는 것은 상징적 질서를 시종일관 우리를 속이려는 음모를 획책하는 장본인으로 지목하고 비판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토착민피억압자야만인을 비롯한 인물들에게 우리가 매혹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가짜경험의 외부 어딘가에 있는 불변의 확실성에 매달리려는 욕망이다. 그것은 속지 않는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사물을 지배하고자 하는 그리 순진하지 않은 욕망이다.

그렇다면 토착민이 무관심하고 왜곡된 이미지라고 계속 주장하는 것은, 토착민에게 그를 속이고있는 상징적 질서를 불신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능력을 반환하는 것인 동시에 토착민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환영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토착민 안에 왜곡과 무관심이 공존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제국주의나 자본주의와 같은 질서 아래에서 자행된 대량파괴를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토착민과 식민자 간의 교착(膠着)상태, 토착민은 식민자의 오염된 이미지이고 반제국주의 비평가는 정신이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월하는 차원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나의 주장은 토착민이 왜곡된 이미지로 표상되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뒤집어이번에는 토착민에게 속지 않는 자라는 신성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토착민을 다시 표상해야만 하는 것일까? 왜곡과 신성화는 동일한 상징적 질서에 속한다.

그렇다면 토착민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들은 오염된 이미지와 무관심한 응시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토착민은 왜곡된 이미지도, 왜곡된 이미지가 아닌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그녀는 무관심하게 우리를 빤히 쳐다보면서, 우리가 상상의 유사성 속에 갇혀 있는 것과 속지 않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을 조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