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도시에 진입한 농민: 아큐와 샹쯔

ycsj 2021. 1. 1. 17:02

* 아구이/아큐: 阿桂/阿貴(?)―>A-Gui―>阿Quei―>阿Q

샹쯔/시앙쯔/샹즈/상자: 祥子: Xiangzi.

 

 

[1] 중국 근현대문학사 지형도―新舊, 左右, 中外, 중국/중국어/중국인

 

5․4 계몽문학관은 과거와 단절하는 ‘신문학’을 주장하면서 ‘구문학’을 비판했지만, 그것은 아속(雅俗)을 구분하는 전통을 답습하고 있었으며 공공연하게 ‘아(雅)’를 추켜세우고 ‘속(俗)’을 ‘타자화’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5․4 계몽문학관은 전통적인 ‘문이재도(文以載道)’ 문학관의 연장이기도 하다. ‘통속문학’은 낡고 퇴폐적인 것으로 단죄되어 문단에서 추방되었다. ‘인민 해방’을 구호로 내세웠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좌파문학사’는 ‘인민문학’을 위해 ‘우파문학’과 ‘동반자문학’을 타도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그들을 탄압했다. 그리고 ‘좌파들’은 서로 경쟁하며 ‘극좌’로 치달았다. 해방이라는 구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자신들조차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말았다. 이 글에서는 이런 현상을 ‘타자화(otherization)’라 명명했다.

중국 근현대문학사 담론에서, ‘신문학사’ 담론은 ‘신문학’의 생존을 위해 ‘통속문학’(구문학, 전통 백화문학, 본토문학, 봉건문학)을 배제했고, ‘셴다이(現代)문학사’ 담론은, ‘셴다이문학’과 함께 ‘신문학’을 구성했던 ‘우파문학’과 ‘동반자문학’을 억압했다. 5․4시기 소수자(minor)였던 ‘신문학’은 간고한 과정을 거쳐 당시 주류였던 ‘구문학’을 대체했으며 담론권력을 확보한 후 구문학을 배제했고, ‘셴다이문학’은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아 ‘자신과 다른(異己)’ 문학을 억압했다. 구문학의 배제와 우파문학의 억압은 중국 근현대문학의 다양한 가능성을 스스로 배제한 결과를 초래했다. 개혁개방의 신시기에 접어들어서야 사상해방을 맞이한 학계는 1985년 ‘20세기중국문학’ 담론을 제창함으로써 ‘셴다이문학’에 의해 억압되었던 ‘우파문학’과 ‘동반자문학’을 해방했다. 그리고 21세기 벽두에 ‘두 날개 문학’ 담론을 제기하면서 ‘신문학’에 의해 지워졌던(erased) ‘구문학’을 복권했다.

‘20세기중국문학’ 담론에 이어 ‘두 날개 문학’ 담론이 중국 근현대문학 연구자들에게 광범하게 수용된다면 중국근현대문학사는 스튜어트 홀의 맥락에서 ‘정체성의 정치학’ 그리고 이 글의 맥락에서 ‘타자화의 정치학’을 초보적으로 구현한 셈이 된다. 배척과 억압의 주체와 객체였던 담론들이 서로의 차이(difference)를 인지하고 존중하면서 ‘구성적 공동선’ 또는 ‘차이 안의 통일성들’을 지향한다면 중국근현대문학사 담론은 ‘다문화적(multi-cultural)’ 상태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셴다이문학과 당다이(當代)문학의 학제와 학회 상의 분파가 단기적 극복 과제라면, 중심 대 주변, 강자 대 약자, 주류 대 비주류, 지배 집단 대 차이 집단 등 근현대적 이분법의 지양은 중국근현대문학사 담론의 장기 지속(longue durée)의 과제다.

21세기 들어 중국근현대문학사는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 이전의 관행이었던 5․4 기점이 부정된 지 오래고 범위도 지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기점 면에서 첸리췬(錢理群) 등의 20세기중국문학사가 1898년을 기점으로 제시했고 판보췬(范伯群)은 1892년으로 앞당겼으며 옌자옌(嚴家炎)은 1890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왕더웨이(王德威)에 따르면 1851년 태평천국 시기로 앞당겨진다. 『해상화열전』을 기준으로 본다면 5․4에 비해 약 3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문학사 범위도 지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삼분법 시기의 셴다이문학사는 좌익문학사였지만, 20세기중국문학사에서 우파문학을 복권했고 두 날개 문학사에서 통속문학을 복원시켰다. 여기까지는 이른바 ‘국가’ 범위라 할 수 있다. 21세기 들어 중국근현대문학사는 자기 변신을 통해 초국적(trans-nation)으로 팽창하고 있다. ‘중국문학’으로부터 ‘중어문학(漢語文學/華語文學’으로 그리고 ‘중국인문학(漢人文學/華人文學)’으로 자기 변신하고 팽창하면서 재구성 단계에 들어섰다. 이들 담론은 중국근현대문학사를 고정된 실체로 보기보다는 유동적인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포스트주의(postism)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가능한 모든 범주를 아우르는 통합의 움직임은 자연스레 범위 밖에 있는 것을 배제하는 움직임과 동시에 진행된다. 이런 움직임이 이 글에서 최근 중국의 논의를 흥미롭게 고찰하면서도 우려를 금치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기점과 어떤 범위가 타당하냐는 질문보다, 그 기준이 무엇이고 기점과 범위에 대한 논의를 통해 중국근현대문학사를 바라보는 시야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설정일 것이다. 이제 중국근현대문학사는 기존의 고정된 관행에서 벗어나 다양한 담론들이 각축할 수 있는 담론공동체를 형성해 재구성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2] 근현대 중국의 도시화(城市化/城鎭化)

 

도시라는 현상이 모든 시대와 공간을 통틀어 가졌던 공통의 맥락 가운데 ‘생태학적이고도 기능적인 맥락’을 찾고 있는 존 리더(Reader, John)에 따르면, ‘도시는 문명의 특성을 드러내는 인공물’로 ‘인류가 거둔 모든 성취와 인류가 겪은 모든 실패가 도시라는 물리 사회적 구조에 새겨져 있다’라고 보면서, 20세기 초 4분의 1이던 도시 거주자가 21세기 초에는 절반가량으로 늘었고 2030년에는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도시에 살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흔히 도시와 농촌을 대립시키고 후자는 낙원이고 전자는 지옥으로 대비시키는 것과는 달리, 존 리더는 “석기 시대가 끝난 것은 돌이 다 떨어져서가 아니라 누군가 청동을 다루는 법을 알아냈기 때문”이라는 멋진 비유를 하면서, 도시가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그 속에서 해결책을 찾을 것을 낙관하고 있다. 도시가 문제가 아니라 도시로 가는 사람들 그리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문제다.

최근 개혁개방으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는 중국의 경우 도시화의 정도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중국 ‘국가통계국’의 자료에 따르면, 1952년부터 1978년의 26년간 중국의 도시화 수준은 12.46%에서 17.92%로 연평균 0.21% 상승했는데, 이는 동시기 세계 평균수준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러나 개혁개방 후 도시화는 빠른 속도로 지속되어 도시화율은 1978년의 17.92%에서 1992년의 27.63%로 연평균 0.7%의 비율로 상승해 개혁개방 전의 3배를 기록했다. 그리고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중국 도시화율은 27.63%에서 40.53%로 상승해 연평균 1.17% 향상했다. 도시 현대화 건설, 작은 성진(城鎭)의 발전과 경제개발구 및 공업단지 조성을 표지로 삼아 도시화는 전면적으로 빠르게 추진되어 도시의 종합 수용 능력과 농촌 인구 흡수 능력도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상승했다. 중국연구를 어렵게 만드는 규모의 문제는 중국 도시 연구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대도시권’ 개념은 한 국가와 지구의 사회경제의 발전 수준을 측량하는 중요한 표지가 되었다. 현재 중국에서 ‘대도시권’이라 할 만한 지역으로는 징진탕(京津唐) 대도시권, 창장(長江) 삼각주 대도시권, 주장(珠江) 삼각주 대도시권이 있다. 이 가운데 징진탕 대도시권의 중심인 베이징은 오랜 수도인지라 최근 도시화를 대변하기 어렵지만, 창장 대도시권의 상하이와 주장 대도시권의 선전은 개혁개방 이후 도시화를 대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상하이와 선전(深圳)이 연해 지역이라면 21세기 들어 주목을 받았던 충칭의 도시화는 내륙이라는 지리적 위치와 함께 그 사회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주목을 요한다.

이와 관련해 추이즈위안(崔之元)은 중국의 도시화를 다음과 같이 개괄한 바 있다. “선전과 상하이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중국을 상징한다면 충칭은 21세기 최초 10년 중국의 발전 추세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 도시화를 단계적으로 분류한 것인데, 지금 중국 대륙에서 도시화는 선전, 상하이, 충칭의 세 모델이 혼합되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가운데 상하이모델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 할 수 있다. 왕샤오밍(王曉明)은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상하이 지역의 도시화는 정말 최근 30년의 총체적 ‘경제발전’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발전의 기본 형태를 명확하게 표현했다. GDP가 이끌고 협의의 경제 효율, 즉 자본 증식을 창조하는 것을 주요 동력으로 삼는 활력이다. 그것은 또한 이 발전의 두 가지 기본 특징인 협의의 사회 재화의 거대한 증가와 각종 사회 조건의 장기적인 악화 그리고 양자의 상호 작용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 전체 중국 대륙의 도시화의 절대 부분은 모두 상하이와 비슷하므로 그것은 ‘푸둥(浦东)모델’이라는 말로 개괄할 수 있다.” 그러나 상하이모델에 대한 그의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 그리고 2012년 4월 충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워크숍을 진행했지만, 지금까지 충칭모델은 상하이모델의 변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최근 중국 도시화의 현주소를 보기 위해서는 도시화의 소용돌이에 놓여있는 충칭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다.

충칭모델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던 추이즈위안은 한 회의의 발언에서 ‘충칭모델’의 의의를 “국유자본 증식과 민간 재부 축적의 동반 전진(國資增値與藏富於民攜手竝進)”으로 요약한 바 있다. 그는 동반 전진의 메커니즘을 “사회 자본에 대한 국유자본의 영향력과 추동력을 통해 국유자산의 증식을 실현하고 나아가 경영 수익을 상납해 정부가 감세를 통해 민영 경제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개괄했다. 그러나 충칭모델은 조타수 보시라이(薄熙來)의 실각으로 더는 실험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3] 도시에 진입한 농민: 농민공 조류(民工潮)

 

그들은 선량하며 정직하고, 까칠하지 않으며, 특기도 없고, 수수하며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고 마치 칭찬할 만한 것도 없는 듯하다. 그들은 몸은 쉽게 움직이지만 입은 쉽게 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노동은 잘하지만 사색은 잘 못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순진해서 손해를 보고도 추궁을 할 줄 모르고, 단순해서 속임을 당하더라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기꺼이 고액의 대가를 지급하고 지극히 낮은 수준의 생활조건을 받아들이며, 초인적인 고난을 견디면서 즐거움은 거의 얻지 못한다. 그들은 환상이 거의 없고 실제 생활에 힘쓸 뿐이다. … 그들의 단점은 확실히 끔찍하다. 그들의 단점이 변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또다시 황제를 배출하게 될 것이다.

 

이는 개혁개방 직후 도시에 진입한 농민의 특징을 개괄한 것인데, 그들은 선량하고 정직하고 수수하며 실천적인 등등의 장점이 있지만, 봉건적이고 노예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에서 30년 이상 살아온 농민의 양면성을 종합한 평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사회주의 혁명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천환성(陳奐生)의 형상에서 아구이/아큐를 발견할 수 있고 천환성의 모습에 샹쯔(祥子)가 중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5․4 신문화/문학운동의 핵심 과제인 계몽은 여전히 미완이고 루쉰이 문학의 목표로 내세웠던 국민성 개조는 실현되지 않았다. 5․4시기 중국의 계몽정신은 서양에서 전래되어 촉발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의 계몽주의가 그대로 이식된 것이 아니라 중국적 특수성과 결합하여 다양한 의미망을 형성했다. 이에 대해 수많은 논자가 견해를 피력했다. 천쓰허(陳思和)는 우선 ‘신문학’의 계몽 전통을 ‘계몽문학[啓蒙的文學]’과 ‘문학 자체의 계몽[文學的啓蒙]’의 두 측면으로 나누고 양자의 결합과 분리의 과정을 추적했다. 전자는 계몽을 위한 문학으로 그 선성은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까지 소급할 수 있고, 후자는 심미적 층위에서 문학 개념의 혁신을 지칭하는 것으로 왕궈웨이(王國維)에서 비롯되었다. 천쓰허는 5․4 계몽의 내용을 ‘반제 구망의 계몽’, ‘민주와 과학의 계몽’, ‘휴머니즘, 개성해방의 계몽’으로 분류했는데, 이는 리쩌허우(李澤厚)가 계몽을 구망과 대등하게 설정한 것보다 넓은 개념이다.

중국 근현대의 지식인은 대개 계몽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민주와 과학’이든, ‘반제 구망(救亡)’이든, ‘휴머니즘과 개성해방’이든 시대와 역사가 그들에게 부여한 과제를 계몽의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노력은 간혹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대부분 좌절과 실망, 현실과의 타협, 죽음 등으로 귀착된 것이 역사 현실이었다. 그들은 혁명에 종사하다가 처형되기도 했고(「약藥」의 샤위夏兪), 새로운 전망을 찾지 못하고 지나간 시대를 반추하다 소멸되기도 했으며(「쿵이지孔乙己」의 쿵이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피해망상증에 걸리기도 했다(「광인일기」의 광인). 구식 가정으로 도피하기도 했으며(「술집에서在酒樓上」의 뤼웨이푸呂緯甫), 전망을 상실하고 타락하기도 했고(「고독자孤獨者」의 웨이롄서우魏連殳)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정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타락沈淪」의 ‘그’). 과도기 지식인은 ‘계몽자’의 성격을 가지지만 그들의 계몽행위는 대개 난관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새로운 것을 대변하는 그들은 옛것에 침윤된 대중을 계몽시키려 하지만 결과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전망을 선취한 점에서 ‘선각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계몽 주체와 대상의 괴리로 인해 실패하기도 하고 심지어 계몽행위로 인해 옛것을 수호하려는 기득권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수난자’의 성격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대개의 ‘계몽자’는 한두 차례의 실패와 수난을 받으면 좌절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좌절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의 원천은 참회에서 비롯된다. 사실상 20세기 중국문학의 진행 과정에서 참회의식은 “십자가처럼 그들의 정신 활동을 제약한 동시에 반역의 깃발처럼 현대 중국 지식인과 전통문화의 차별을 표지”했다. 참회는 반성과 다르다. 반성은 “이성에 기대어 자신의 행위를 조절하고 내면 정서의 평형을 유지하는 사유형태”임에 반해, 참회는 “과거에 형성된 오류, 심지어 죄악에 대한 심각한 인식으로 대개 강렬한 정서 요소를 띤다.” “그러므로 참회에는 필연적으로 감정상의 고통과 영혼 내적인 시련을 수반하게 된다.” 곧 100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돌아볼 때, 5․4 계몽자 가운데 진정한 참회의 수준에 도달한 지식인이 몇이나 있었을까? 리쩌허우가 “오직 루쉰만이 위대했다”라고 평했을 때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을까? 한순간 위대했던 사람들, 일정 기간 위대했던 사람들도 어느 시점에 그 위대함을 견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깎아 먹는 것은 바로 진정한 참회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참회는 고해성사와 다르다.

사회주의 신중국은 계몽적 지식인에게 하방(下放)이라는 형태로 참회를 강요했지만, 그 방식은 계몽적 지식인이 대중에게 행했던 것과 다를 바 없었고 게다가 국가 권력의 개입은 일시적 효과를 보장할 뿐 장기적으로 스며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므로 개혁개방 이후 “지식인들은 마침내 ‘빈농과 하층, 중농의 재교육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하방(下放) 담론에서 해방되었으며 지식인들은 농민 형상의 약점을 통해 새로이 자신을 긍정하게 되었다.” 타의적 참회를 강요하는 하방 담론에서 해방된 논리가 바로 그것이 강요했던 ‘노동자와 농민에게 학습’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에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그 기괴한 결합인 ‘농민공’은 “대중문화의 타자가 되어 지속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신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30년은 무효가 되고 ‘이럴 거면 혁명은 왜 했어?’라는 질문에 답할 길이 없게 된다.

5․4신문학에서 농민이 계몽 대상이었다면 사회주의 혁명문학에서는 주체로 묘사되었다. 계몽주의 담론에서 농민은 우매하고 마비된 모습으로 그려져 사회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면 혁명문화에서의 농민은 즐겁고 개방적이며 진취적인 긍정적 형상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개혁개방 직후 급변 시기에 농민은 다시 타자화되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 시기 농민의 주체화 과정이 실패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는 “혁명문화 시대에는 계몽주의적 현대성 서술이 억압되었지만 신시기에는 혁명문화의 현대성 서술이 억압”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신시기에는 계몽주의와 혁명문화가 공통으로 억압했던 ‘욕망’이 부상했는데, 농민은 예전에 ‘계몽’에도 무관심했고 ‘혁명’에도 무감각했던 것처럼, 어떻게 ‘욕망’할지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들은 언제나 ‘타자’였다. 때로는 지식인의 계몽 대상이 되고, 때로는 국가 권력의 조종 대상이 되고, 때로는 대중문화의 조롱 대상이 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척된 것이 근현대화(modernization)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농민이 도시로 진입하는 것은 근현대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쑨즈강(孫志剛) 사건으로 인해 2003년 중국에서는 ‘농민공 조류’ 및 ‘삼농(三農)’ 문제가 논쟁의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사실 농민공 조류는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랄 수 있는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1980년대 중후기부터 출현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의 ‘농민공 조류’는 대략 1,500만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즉, 농민공 문제를 사회주의 실천과정에서 국가의 ‘도농 이원대립’ 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중국 내 자유주의 논자들의 지적은 근시안적인 분석이 되는 셈이다. 뤼신위는 이들의 논조를 반박하며 ‘농민공 조류’를 도농 간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적 차이가 드러난 문제로 파악한다. 그녀는 사회 구조적 전제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농민공 조류’에 대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확장하고 있다. 뤼신위는 농업과 시장, 토지와 인구, 도시와 농촌의 세 가지 측면에서 1980-90년대 ‘농민공 조류’의 발생 원인을 분석해, 그것이 농업의 위기, 토지 수용이 불가능한 잉여 노동력 문제 그리고 도시와 농촌 관계의 악순환 결과임을 밝히고 있다.

농촌에서 도시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파산한 농민’이다. 농촌에서 더는 먹고 살 수 없어서 도시로 간 것이다. 아구이도 웨이좡에서 더는 먹고 살 수 없어서 ‘대처’로 나갔고 샹쯔 또한 부모를 여의고 베이핑으로 갔다. 그러나 이들이 도시에 진입했다고 해서 바로 시민 또는 노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구이는 생계를 위해 처음에는 거인(擧人) 나으리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도둑질에 가담했고 문제가 생겨 장물을 가지고 웨이좡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시의 장물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혁명도 가져왔다. 물론 그것들이 자신을 해칠 거라는 것도 모른 채. 그에 반해 샹쯔는 베이핑에서 악착같이 살려고 기를 쓴다. 베이핑에서 샹쯔의 삶을 평자들은 삼기삼락(三起三落), 즉 인력거를 세 번(사실은 두 번) 샀다가 강탈당하고 모은 돈을 갈취당하고 후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파는 과정으로 요약하곤 한다. 세 번의 과정을 거친 샹쯔는 결국 도시의 유민(流氓)이 되고 만다. 소설의 주요 내용은 인력거꾼의 생활이지만, 인력거꾼 생활은 샹쯔가 파산한 농민이 도시로 들어와 유민이 되는 과정에 잠깐 거친 단계였을 뿐이다.

그러면 아래에서 두 작가의 두 작품을 살펴보자.

 

 

[4] 「아구이 정전」

 

(1) 불멸의 루쉰

20세기 중국에서 루쉰(魯迅)은 불멸하다. 5․4를 논할 때 빠뜨릴 수 없고 1930년대 좌익문학에서도 결락될 수 없다. 사회주의 30년 동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개방 초기의 금구를 타파하는 데에 루쉰 연구가 돌파구 노릇을 했다. 루쉰은 마오쩌둥(毛澤東)식 혁명에서도 필수적인 존재였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데에도 유용한 방법이 되었다.

루쉰의 삶과 정신 역정은 그 결과처럼 단순하지는 않았다. 20세기의 과도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은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신(新)과 구(舊)의 갈등 속에 있게 했고, 동서 교류라는 시대적 특징으로 인해 서양에 대한 지향과 배척의 사이에서 배회했다. 게다가 좌와 우의 극한적 대립은 후기 루쉰에게 선택을 강요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현실적 선택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는 경계인이었고 ‘역사적 중간물’이었다.

전 베이징대학 중문학부 교수이자 루쉰 연구의 권위자인 첸리췬은 루쉰 정신을 ‘반역’, ‘탐색’, ‘희생’으로 요약한 바 있다. 루쉰의 반역은 도저한 회의주의와 부정정신에 기초했고 그 탐색은 창조 정신과 개방 정신에 연결되었다. 그리고 루쉰의 희생정신은 그를 ‘중국혼’ 또는 ‘강골’로 추앙받게 만든 관건이었다.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에게 루쉰은 줄곧 화두였다.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는 전후 일본의 무기력한 지성계를 타개하기 위해 루쉰을 가져갔고, 한국의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와 신영복도 독재정권의 억압에 맞서면서 끊임없이 루쉰의 삶과 사상을 언급했다. 그뿐만 아니다. 한국의 중국 근현대문학계에서 1990년대 초 이데올로기 금구를 뚫고 나올 때 선봉에 세웠던 것도 루쉰 연구였다.

장편소설 한 편 없이 중국 최고 작가 반열에 오른 루쉰은 키워드의 산실이다. 나그네 정신, 절망에 대한 반항, 역사적 중간물 등등. 그 가운데 루쉰의 실천방식인 ‘쩡자(掙扎)’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사적으로 싸우다’의 의미를 가진 이 말은 루쉰 실천의 핵심이다. ‘쩡자’했기에 ‘철로 된 출구 없는 방’에서 외칠 수 있었고 절망에 반항할 수 있었다. 루쉰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 ‘쩡자’했다. 그리고 ‘쩡자’의 근원에는 생명과 평등을 향한 인본주의적 가치 지향과 평민의식이 있었다.

혁명의 전망이 불투명한 ‘지금 여기’에서 루쉰식 혁명의 의의는 무엇일까? 그리고 루쉰식 혁명이 지닌 인문학적 성격, 혁명의 출발지로서의 개인, 혁명의 일상성 등은 어떤 것일까? ‘21세기로 걸어들어온 루쉰’을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최근 몇 년간 학계가 시끄러웠다. 사라져간 혁명의 시대에 마오쩌둥과 루쉰이 계속 논의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평민의 시대가 아직 오지 않아서인가?

 

(2) 함께 보는 「아구이 정전」

 

1. 중국 근현대사와 작가 루쉰

1) 半봉건 半식민지의 역사

아편전쟁(1840)~청일전쟁(1894)~신해혁명(1911)~5.4운동(1919)~공산당 창당(1921)~4.12정변(1927)~좌익작가연맹 결성(1930)

2) 反봉건 反제국주의의 주체

출생(1881)~난징 유학(1898)~일본 유학(1902)~의대 입학(1904)~의학에서 문학으로(1906)~문예 잡지 실패(1907)~귀국(1909)~중학교 교사(1910)~1911부터 1918까지 침묵~「광인 일기」(1918)~「아큐 정전」(1921)~사상 전변(1927~28)~사망(1936)

『신청년』, 베이징여사대 사건, 혁명문학 논쟁, 좌익작가연맹, 두 가지 구호 논쟁 등

2. 루쉰은 왜 「아구이 정전」을 썼는가? : 민족 영혼 개조

1) 가장 이상적인 인성은 무엇인가?

2) 중국 국민성의 가장 큰 결함은 무엇인가?

3) 그 병의 근원은 무엇인가?

3. 「아구이 정전」의 인물 성격과 줄거리

아큐

자오(趙)나으리, 자오수재, 첸(錢)수재, 바이(白)거인

웨이좡(未莊)마을 건달들: 왕털보, 샤오디

비구니

제1장 序

전기 아닌 전기를 쓰는 목적과 애로 사항

명칭, 성, 명, 본적의 애매함

제2장 優勝記略―간략한 승리 기록

행적

객관적 패배―>주관적 승리로 전환 : 정신승리법

치명적 약점: “아구이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중에 하나하나 말해버린다.”

제3장 속 우승기략―속 간략한 승리 기록

웨이좡 마을 사람들의 노예 근성

“그것은 쿵즈 묘에 바친 황소 같은 것이 비록 돼지나 양과 같은 짐승이면서도 성인이 젓가락을 댔기 때문에 선유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었다.”

굴욕적인 사건

왕털보와의 싸움

가짜 양놈

해소: 비구니 희롱

제4장 戀愛的悲劇---연애의 비극

승리의 비애

남녀 문제에 있어 철저함

서른의 나이

우(吳)마에게 구애했다 사죄함

제5장 생계 문제

마을 사람들의 경계와 냉대

곡절 분석―>샤오디로 귀결

샤오디와 대결―용호상박

차마 구걸은 하지 못함

정암사에서 무를 훔쳐 먹음

떠날 결심

제6장 從中興到末路

추석 직후 아구이의 귀향: 刮目相對

존경의 원인: 전대와 물건―>인물 평가 기준은 부귀

좀도둑질 전력이 밝혀지고 다시 경멸로 돌아섬(돈도 떨어짐)

제7장 革命

아구이의 혁명관: 전변, 유쾌함

혁명에 대한 공상: 입신출세에 불과―>신해혁명의 한계와 연결

정암사 혁명사건

제8장 不准革命

웨이좡 마을은 혁명 후 점차 안정

자오씨집 약탈: 아구이의 환상과 중첩(overlap)

제9장 大團圓

아구이 체포, 투옥

심문 조서 자필 싸인 장면

처형 이후 아구이에 대한 평가

4. 아구이의 시대성

1) 반봉건 반식민지인 구중국의 실패주의의 상징: 신해혁명, 5․4 신문화운동, 그 이후 문화 운동 퇴조기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

2) 중화 민족의 열악한 민족성 상징: 나태, 비겁, 이중성 …

3) 인간의 분열상 상징: 초민족적, 초시대적인 성격, 인간의 분열상, 인간의 이중성, 황당성을 상징

5. 아구이의 성격 : 극도의 이중성과 정신승리법

1) 객관적 실패와 주관적 승리

2) 물질적 무소유와 정신적 자만, 자족

3) 사상적 예의 숭상, 성현 추존, 이단 배척: 행동면 규범 이탈과 범법

4) 이성적 측면에서 남녀 간의 경계와 구속: 감성적 측면에서 구애, 욕구

5) 이중성(처참함과 득의, 실패와 승리, 물질과 정신, 현실과 환상, 희극과 비극, 눈물과 웃음)의 대립과 모순, 갈등―>정신승리법으로 통일, 해소(아구이의 정신적 승리에 (반)비례하여 독자들의 비감은 증대)

6. 아구이의 보편적 성격

1) 사회학: 유랑 고용농의 형성(무산, 유랑, 임시 고용 …)

2) 정치학: 봉건 전제주의의 산물(우둔, 마비, 우스꽝스러운, 불생불사의 …)

3) 심리학: 정신병 환자의 초상(환상, 과대망상, 변태심리 …)

4) 사상사: 좡쯔(莊子) 철학 사상의 왜곡 영향(소극 은둔, 초감성의 환상 추구, 절대 자유 추구)

5) 중국 근현대사: 신해혁명의 거울(신해혁명의 필연성, 한계, 실패의 교훈 …)

6) 철학: 소외된 인성의 전형

7. 기타 : 아구이는 지금 우리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5] 『낙타 샹쯔』

 

 

(1) 인민 예술가 라오서

 

라오서(老舍: 1899-1966)는 원명이 수칭춘이고 자는 서위이며 필명이 라오서로, 만주족이다. 그는 베이징성의 한 빈민 가정에서 태어나 대잡원(大雜院)에서 험난한 유년과 소년 시대를 보냈다. 그는 사회 저층의 시민 생활에 매우 익숙하고 시정 골목에 유전되는 희곡과 민간 설창 예술을 좋아했다. 이런 경력은 훗날 창작에서 평민화와 경미(京味) 풍격 형성에 유리했다.

그는 급진적인 신문화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5․4운동에 대해서도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고 1920-30년대에 그는 시대 주류와 시종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으며 창작에서도 시세에 구속받지 않는 자족적인 심태를 표현하곤 했다. 그는 창작에서 시대를 한탄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일반적인 범주를 초월해 현대 문명의 병근을 탐색했다.

1924년부터 5년간 영국을 방문해, 안목을 넓히고 창작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1930년 중기부터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해 『낙타 샹쯔』를 발표할 무렵 창작 전성기를 맞이했고 1940년대 『사세동당』을 발표했다. 항일전쟁 시기 라오서는 시대의 홍수에 말려들어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1938) 총무부 주임을 역임했고, 1940년대 말 잠시 미국에 나갔다가 신중국 건국 이후 귀국했고, 1950-60년대 『찻집』과 『정홍기 아래』(미완)를 발표했다. 그는 다산 작가로, 1천여 편, 7~8백만 자의 글을 남겼다.

문화 비판과 민족성 문제에 대한 특별한 관심, 전환기 중국문화 특히 속문화에 대한 냉정한 관찰, 비판과 그리움(미련), 베이징 시민의 일상생활에 대한 파노라마식 풍속 묘사를 통해 달성(242-3) 구조보다는 독특한 문체와 풍격 방면에 공헌

라오서는 5․4 작가와는 달리, 문화 비판 시야를 가지고 ‘시민 세계’를 묘사했다. 1920-30년대 주류문학은 주로 계급 해부 방법을 주로 활용했는데, 라오서는 시종 ‘문화’로 인간 세계를 분할했다. 그는 특정한 문화 배경 아래 인간의 운명, 그리고 문화 제약 하의 세태인정, 도시의 생활방식이자 정신 요소로서의 문화의 탈변에 관심을 기울였다. 라오서가 보기에, 시민 사회에서 계급의 구분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정말 중요한 것은 인성과 인륜 관계에 대한 문화의 영향이었다. 그는 시민을 구식 시민, 신식 시민, 정파 시민 등으로 나눴는데, 특히 구식 시민 형상 묘사에 뛰어났다. 그들은 도시인이지만 여전히 향토 중국의 자식으로, 몸에 침중한 봉건 종법 사상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그들의 인생 태도와 생활방식은 모두 구식으로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다. 라오서는 희극적 과장을 통해 이 인물들의 정신 병태를 드러냄으로써 베이징문화 내지 전통문화 중의 소극적이고 낙후된 측면에 대한 비판을 실천했다. 그들은 안분지족하고 기존의 규칙 관례 등을 고수하는 시민으로, 조심스레 자신의 소강(小康) 생활을 지키고 모든 변화를 두려워한다.

라오서는 전통 문명의 낙후한 측면을 비판하는 동시에 외래 서양 자본주의 문명에 대해 대단히 신중하고 나아가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다. 후자는 주로 신식 시민 형상에 대한 만화식 묘사에 표현되었다. 그 외에도 저층 시민의 명운(命運)을 표현하는 작품에도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고 배척하는 주제가 관통되어 있다. 아울러 정파 시민은 이상적 시민 형상이다.

그의 대표작 『낙타 샹쯔』는 도시 문명병과 인성 관계를 탐토(探討)한 작품이고, 작가와 하층 인민의 심층적인 정신 연계를 집중적으로 체현했다. 구식 시민과 신식 시민 묘사에는 통속 희극적 색채가 강한 반면, 도시 빈민 형상 묘사 작품에는 비극성이 짙게 깔려 있다.

 

(2) 1920~1930년대 베이핑 인력거꾼 문화에 대한 민족지: 『낙타 샹쯔』(1939)

 

車夫樣的車夫(21:198/최:532)―>“管別人的閑事幹嗎?!”(20:190/최:521)

남다른 인력거꾼이 되고자 했지만 평범한 인력거꾼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523)

베이핑 인력거꾼의 애환

희망과 좌절의 불연속성

체념과 타락

시민 사회 해부, 국민성 해부

시민 사회의 인정세태 및 인물 성격의 희극적 정조를 틀어쥔 작가

비극의 다중성(楊義 등)

인생 비극, 가정 비극, 영혼의 비극: 영혼 해부의 깊이

후뉴의 변태적 문화심리가 조성한 비극(?)

고도 베이핑의 세태풍속사

샹쯔, 만주족 旗人: 청조 지배자로부터 근현대의 하향 전변

인력거 마련 과정, 96원

포획, 낙타를 끌고 도망, 3마리 35원

런허 회사(30원)

인력거는 샹쯔의 화신

양씨집 생활

해프닝: 후뉴의 유혹

새로운 고민, 차오 선생의 구원(오아시스)

차오 선생 인력거 교통사고

가오마의 권고: 고리대, 계. 거절

후뉴의 방문, 자발적 음주

자기 환명(?): 사건: 전세 인력거꾼 대합실/찻집에서 조손 만남(샤오마오)

차오 선생의 위험과 관련 정보부원의 공갈, 돈 뺏김

류쓰의 생일잔치, 부녀의 말다툼

시대 배경: 1928~1931년의 베이핑

군벌 혼전: 쩡궈판의 湘軍, 리훙장의 淮軍, 위안스카이의 북양군벌

위안 사후의 변화

낙타의 상징

인력거꾼의 생활

베이핑 인력거꾼의 세계

개인주의

샹쯔의 변모와 그 원인

 

이 작품은 도시로 진입(進城)한 농민이 몇 년 인력거꾼의 과정을 거쳐 도시 유민이 된 이야기이다. 샹쯔는 도시로 진입했지만 도시민이라기보다는 여전히 농민이다. 그는 열심히 도시에 적응하고 도시에 의해 개조되었지만 그래도 노동자, 시민이 되지 못하고 도시 주변에서 유민으로 살아간다.

소설에서 샹쯔를 나무에 비유한 장면이 나온다. 나무는 농민의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샹쯔의 이상은 농민의 이상으로, 그가 그토록 갈망하는 인력거는 바로 농민이 토지를 갈망하는 것과 같다. 농민이 토지에 긴박 되어 있듯이, 샹쯔는 인력거에 긴박 되어 있다. 인력거에 대한 긴박이 해제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삶을 해체하고 만다. 그는 도망병의 강탈, 정보원의 갈취, 후뉴의 죽음을 통해 인력거의 꿈이 사라지자 몰락하게 된다. 마지막 보루였던 샤오푸쯔마저 자살하자 그는 더는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고 자신을 놓아버린다. 그에게도 혁명이 다가오지만 그는 이제 부응할 처지가 아니다. 결국 롼밍을 밀고하고 블러드 머니(blood money)를 챙기는 지경에 이른다. 사실 샹쯔가 쑨 정보원에게 인력거 구입 자금을 갈취당한 것의 발단이 롼밍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아는 독자라면 샹쯔의 우연한 복수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점의 샹쯔는 복수라는 개념도 적용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샹쯔의 이야기는 과거가 됐지만 농민의 도시 진입 이야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텍스트 및 참고문헌

 

 

루쉰, 『루쉰전집 2권 외침/방황』, 루쉰전집번역위원회(공상철, 서광덕) 옮김, 서울: 그린비, 2010.

라오서, 『루어투어 시앙쯔』(상하), 최영애 옮김, 서울: 통나무, 1986. (245-583)

라오서, 『낙타상자』, 유성준 옮김, 서울: 중앙일보사, 1989. (17-233)

라오서, 『낙타 샹즈』, 심규호․유소영 옮김, 서울: 황소자리, 2008. (4-376)

魯迅, 『魯迅全集 一卷』, 北京: 人民文學出版社, 1959年2月(2쇄. 1쇄:1958年10月).

老舍, 『老舍文集』(第三卷), 北京: 人民文學出版社, 1993年3月(2쇄. 1쇄:1982年5月).

 

錢理群等,『中國現代文學三十年(修訂本)』, 北京: 北京大學出版社, 1998年7月.

임춘성, 『중국 근현대문학사 담론과 타자화』, 파주: 문학동네, 2013.

 

뤼신위(呂新雨), 「‘농민공 조류’라는 문제의식」, 김혜주 옮김, 『문화/과학』 70호, 2012.

쉐이(薛毅), 「문화정치적 관점에서 본 중국의 도시와 농촌」, 손주연 옮김, 『문화/과학』 68호,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