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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해방과 좌절: 위다푸(郁達夫)의 「타락(沈淪)」 감상

ycsj 2021. 1. 18. 19:42

중국 근현대문학사에서 위다푸만큼 다양한 평가를 받는 작가도 많지 않다. 사상적 측면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자퇴폐적 염세주의자라는 극단적으로 대립된 평가를 받고 있는가 하면, 예술적 측면에서도 로맨티시스트’, ‘감상주의자’, ‘잉여인간(剩餘人間)’, ‘사소설 작가등의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위다푸에 대한 이와 같은 다양하면서도 상반된 평가는 각 논자의 평가 기준의 단순함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위다푸 자신의 복잡하고 다양한 삶과 의식 때문으로 보인다. 신해혁명을 전후해 사춘기를 겪은 소년, 신교육과 구교육을 동시에 받고 낙후한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근현대화된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을 보내야 했던 청년, 이러한 것들은 위다푸의 섬세하고 내성적인 기질을 더욱 심화시켰고 그의 성격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러기에 그의 생애를 검은 구름 같은 어두운 현실은 그의 반항적 성격을 길러 주었고 민족의 치욕과 겹겹의 상처는 용암과 같은 애국의 감정을 길러 주었다”(8:203)라고 두 개의 축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의 복잡한 심리와 정서를 전제로 할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위다푸의 소설 작품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생활한 예민한 지식인의 복잡다단했던 삶의 반영이다. 그러기에 그의 소설은 작가의 자서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액면 그대로 자서전으로 받아들인다면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자서전적 소설자서전과는 별개의 것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를 통하여 위다푸를 인식하고 위다푸를 통해 를 인식하며 와 위다푸를 통해 54시기로부터 항일전쟁 폭발 전야에 이르는 역사 시기에 일부 지식인이 겪은 우여곡절의 험난한 사상적 역정을 인식할 수 있다.”(13:231) 그러나 위다푸 소설의 서정적 주인공을 통해 그의 삶의 한 부분을 내밀하게 살펴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바로 작가의 삶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근년에 이르러 위다푸 소설 속의 주관성과 서정성의 분석을 통해서 서정적 주인공은 결코 작가 자신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되고 정련된 후 창조된 예술전형이며 그러한 예술전형은 사회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를 가진다는, 설득력 있는 견해(8ː216)가 나오고 있다.

위다푸 소설의 자서전적 서정적 주인공은 54시기의 개성해방 사조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54시기의 개성해방 사조는 봉건적 예교를 타도하는 돌파구였고 그 이론적 기초는 휴머니즘이었다. 54시기의 개성해방은 인간해방의 구체적 표현일 뿐 아니라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의 토대였다. 신구(新舊)가 격돌하던 당시 개성해방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는데, 개성의 내면세계를 투시하는 것과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간들이 만나 형성한 사회인 인간의 외부세계를 분석하는 것이 그것이다. 1930년대의 마오뚠(茅盾)이 후자의 대표였다면, 위다푸는 바로 전자의 대표였다 할 수 있다. 그의 관심은 주로 자신의 내면 심리와 정서였었고, 누구도 이야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감히 발설할 수 없었던 시대에 그는 자신의 내면 심리의 흐름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묘사함으로써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청년 지식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위다푸는 일인칭과 삼인칭을 주로 사용하여 서정적 주인공의 내면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갔다.

1921년 개작된 위다푸의 타락(沈淪)은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한 중국인 유학생의 지순한 사랑에 대한 지향과 성적 욕구 사이의 갈등을 과감하게 고백한 작품이다. ‘는 상당히 해박한 문화적 소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異性)에 대해서는 사춘기적 소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의 폭넓은 문화적 소양은 워즈워스, 하이네, 황중쩌(黃仲則:황준헌?) 등 동서고금의 시를 원문으로 해독할 수 있는 지적 역량과 그것을 음미하고 즐기는 예술적 감상력으로 표현된다. ‘의 예술적 소양은 감상 능력에 그치지 않고 어려서부터 창작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전유(專有)하고 향유하는 소양도 겸비하고 있다. 이러한 소양은 신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신식 중고등학교를 전전하며 교육을 받았다. 신식교육과 학교를 쉬는 틈틈이 서재에서 익힌 문학적 훈련은 원래부터 자유분방했던 그의 예술가적 기질과 어울려 폭넓은 문화적 소양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적 소양이나 문화적 소양은 자신의 정감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우울증이라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그의 우울증은 새로운 지식을 학습하려다 겪은 최초의 좌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비록 자신에 닥친 부당한 억압을 적극적으로 개혁하려는 의지는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순종하는 연약한 모습을 가진 것도 아니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16년이다. 신해혁명 이후 54운동 이전의 중간 지점이다. 이 시기는 쑨원(孫文)이 주도하던 국민당의 신해혁명이 형식적으로는 청 왕조의 통치를 종식했지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찬탈로 다시 왕정복고로 되돌아가던 시기였고, 혁명에 대한 새로운 요구는 있었지만 아직 명확하게 힘의 정향(定向)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다. 새로운 요구는 191954 신문화운동으로 폭발되었다. 반제 반봉건을 기치로 한 54의 핵심은 사상해방과 개성해방이었다. , 근대 이전의 중국중심론은 물론 서양의 충격에 대한 중국적 대응으로서의 중체서용(中體西用)구국 논리사유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기 시작한 범사회적인 사상해방과 개성해방 운동이었다. 루쉰적인 냉철한 애국 사상과 궈모뤄(郭沫若)적인 열정적 애국 사상은 표층적으로는 중국 전통에 대한 비타협적인 비판과 미래에 대한 로맨틱한 기대라는 다른 현상으로 드러나지만 두 가지 모두 중국 민족과 중국 사회에 대한 도저한 애정과 관심이 밑받침되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위다푸는 사회적 층위보다는 인간의 내면이라는 층위에 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타락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그때까지 직접적 표현은 고사하고 그에 대한 관심의 표명조차 금기시되었던 성적 심리를 솔직하게 묘사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엄한 제도라 할지라도 본능적인 것을 일시적으로 은폐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장시간 동안 억누를 수는 없는 법이다. 본능의 정상적인 발출을 억제할 때 그것은 왜곡되거나 폭발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의 왜곡된 성적 심리가 결국 어떻게 폭발되고, 그것이 한 젊은이를 어떻게 파멸시키는가를 삼인칭으로 담담하게 묘사하였다. 정상적인 출로를 찾지 못한 청년 학생 하굣길에 만난 여학생, 들판에서 목도한 남녀의 사랑, 우연히 보게 된 하숙집 딸의 목욕 장면과 같은 우연한 사건에 충격을 받게 되고 마침내 기방을 찾아가 우발적으로 성적 욕구를 해소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책감으로 갈등을 겪다가 자살에 이른다.

는 신해혁명 이후 54까지의 기간에서 그다지 모범적인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당시 해외유학생이면 누구나 직접 경험했을 말초적 자극, 한창 성적 욕구에 눈뜬 시절의 젊은이, 아무런 간섭과 통제가 없는 유학 생, 이런 것들은 스물한 살의 에게 사춘기적 고민에 빠질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더욱이 중국보다 일찍 근현대화 되었고 전통적으로 개방적이었던 일본, 그들의 남녀 혼욕 등의 풍속은 지순한 애정에 대한 열정과 육체적 본능의 충동 사이에서 번민하는 내성적 기질의 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이러를 통해 54 시대정신의 주요한 측면인 개성해방의 한 표현을 인지하고, 나아가 그 당시 젊은이들의 심리와 정서를 부분적으로나마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소설의 근현대화 과정에서사 시, 시점의 전변과 함께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서사구조의 전변이었다. 전통 소설에서 서사구조의 중심은 당연히 줄거리였는데, 만청 작가와 54 작가의 공동 노력으로 서사구조의 중심은 인물의 성격과 배경으로 전이되었다. 위다푸 대부분의 소설 역시 인물의 성격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다푸의 소설은 이야기 줄거리를 중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완전하고 두드러진 사건도 없다. 대부분 일상생활에서의 인물의 정서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일반 소설에서의 줄거리위다푸에서는 정서로 변하였다”(18ː56)라는 지적은 그의 소설에서 정서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지적한 말이다. 타락의 주인공 는 예민한 정서의 소유자다. 그는 자연에서 아늑함과 기쁨을 느끼고 그것을 찬탄한다.

 

여기가 바로 너의 은신처다. 세상에 사는 옹졸한 인간들은 모두 너를 질투하고 있으며 너를 비웃고 조롱하고 있다. 오로지 이 대자연만이, 옛날부터 날마다 새로워지는 창공과 눈부신 태양만이, 이 늦여름의 미풍과 이 초가을의 청신한 대기만이 너의 벗이고 너의 자애로운 어머니이며 또한 너의 사랑하는 님이다.(16ː17)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련함으로 바뀌고 슬픔과 원망으로 바뀌어 는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는다. 그는 책을 읽을 때도 그 책에 감동되어서 단숨에 그것을 뱃속에 집어삼키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16ː18) 하다가도 이내 싫증을 느끼곤 하였다. 감동한 시를 읽고 그 시를 번역했다가 돌연 허전함을 느껴 자신을 조롱한다. 이처럼 기복이 심한 그의 정서는 타락을 이끌어 가는 주선(主線)으로 작용하고 있다. ‘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자 는 그들을 원수로 취급하게 되고, 대상이 일본인일 경우에는 그 원인을 조국의 허약함 때문에 자신을 깔보는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복수심을 불태우기도 한다. 내면의 바람과 현실적 무능 사이의 갈등이 바로 의 정서의 주요한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된 정서의 주인공은 자신의 현실적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지순한 사랑을 구하게 된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나는 지식도 원하지 않고 명예도 원하지 않으며 쓸모없는 돈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약 나에게 에덴동산의 이브를 한 사람 하사하시어 그녀의 육체와 영혼을 전부 나에게 귀속시켜 주실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합니다.(16ː24)

 

그러나 그것 역시 현실에서 구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성에게서 느끼는 성적 호기심은 그의 지순한 사랑에 대한 추구를 방해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다. ‘는 결국 그러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타락하게 되고, ‘타락의 충격에 못 이겨 자살하게 된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 극단적 정서로 표현되었고 작가는 그것을 가식 없이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인간의 발견, 개성해방이 구가되던 20세기 초, 계몽문학의 한 흐름인 서정적 주체의 자유로운 발로에 충실하였던 작품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에서 침몰하는 지식 청정서 구조54시기 나약한 계몽적 지식인의 정서 구조와 상통하고 있다. 루쉰이 그들과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찰자의 눈으로 담담하게 그려냈다면 위다푸는 그들과 일체가 되어 보다 직접적으로 긴박하게 그들의 심리와 정서를 묘사했다. 루쉰 소설에서의 지식인, 계몽자가 시대, 사회, 민족, 국가라는 거대 범주의 시대 가치를 안고 싸웠던 인물이라면, 위다푸 소설에서의 무수한 는 세계와 나, 인간 존재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 근현대적 인간으로서의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6. 맺는 글

 

 

인류 역사상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식인은 외적으로는 계몽적 활동, 진보적 사회운동에 참여하였고, 그것은 내적으로 보편적 인간에 대한 진정한 참회에서 시작한다. 이 글에서는 루쉰의 ?납함??방황?에서 관찰자 시점의 일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계몽자 형상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하였다. 작은 사건축복그리고 죽음을 슬퍼하며는 계몽자인 동시에 참회자이다. 이들은 54시기 지식인의 보편적 성격인 계몽자의 형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흔히 과도기 지식인은 계몽자의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의 계몽행위는 대개 난관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새로운 것을 대변하는 그들은 옛것에 침윤된 대중을 계몽시키려 하지만 결과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전망을 선취한 점에서 선각자성격이지만 계몽주체와 대상의 괴리로 인해 실패하기도 하고 심지어 계몽행위로 인해 옛것을 수호하려는 기득권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수난자의 성격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대개의 계몽자는 한두 차례의 실패와 수난을 받으면 좌절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좌절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의 원천은 참회에서 비롯된다. 사실상 20세기 중국문학의 진행 과정에서 참회 의식은 십자가처럼 그들(이 시대의 중국 지식인-인용자)의 정신활동을 제약한 동시에 반역의 깃발처럼 현대 중국 지식인과 전통문화의 차별을 표지”(3ː195)하였다. 참회는 반성과 다르다. 반성은 이성에 기대어 자신의 행위를 조절하고 내면 정서의 평형을 유지하는 사유 형태임에 반해 참회는 과거에 형성된 오류, 심지어 죄악에 대한 심각한 인식으로 대개 강렬한 정서 요소를 띤다.” “그러므로 참회에는 필연적으로 감정상의 고통과 영혼 내적인 시련을 수반하게 된다.”(3ː196)

작은 사건는 초보적이면서도 단순한 참회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에 비해 축복는 복잡한 심리를 노정하고 있다. 후자는 전자보다 더욱 많은 시련을 겪었고 그로 인해 더욱 자기 보호에 능숙하다. ‘는 샹린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마친 후 그 대화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죽은 뒤에도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현장에서 도피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이 두 인물에 비해 죽음을 슬퍼하며의 쥐엔성의 참회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 ‘참회자라는 호칭에 걸맞은 인물은 쥐엔성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참회 자체는 진실하게 다가오지만 그렇다고 참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때 곳곳에 자기합리화의 혐의가 짙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참회의 내용이다. “망각과 거짓을 나의 길잡이로 삼아” “진실을 마음의 상처 속에 깊이 간직한 채 새로운 생활을 향하여 첫발을 내딛으려하는 쥐엔성으로부터 우리는 그가 더는 계몽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20세기 중국의 역사 과정에서 주체에게 가장 필요한 품성의 하나가 바로 잡초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일 터이지만, 그런데도 잡초로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새로운 사회 건설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은 새로운 사회 건설과 밝은 미래에 대한 전망과 결합할 때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루쉰은 고향에서 희망을 길에 비유하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1ː1/71)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계몽자’, 시행착오와 좌절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영혼 심층까지 되새기는 참회자’, 양자의 덕목을 겸비하여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개척하여 걸어가는 선각자야말로 20세기 초 계몽 대상인 우매한 민중에게 참다운 희망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텍스트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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