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사회 성격의 총체적 해부
41부작 연속극 <한밤중>은 마오둔의 동명 소설을 저본으로 삼아 개편했습니다. 양커(楊克)가 감독하고 류쥔(刘钧)과 천바오궈(陳寶國)가 주연한 이 드라마는 CCTV 2009년 신년 대작으로 시청자들을 만났지요. 그러면 먼저 원작의 작가와 작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오둔은 5․4신문화운동 세례를 받고 1920년대 혁명사상을 의식 차원에서 선취하고 의욕적으로 혁명실천에 투신했지만 생활에서 혁명과 괴리를 절감하고는 좌절합니다. 그는 문예이론가 겸 혁명 활동가로서의 생활을 반성하면서 새로운 방식을 모색했고 그것은 소설 창작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마오둔 연구자 왕자량(王嘉良)은 “그의 모든 소설이 생동하면서도 깊이 있는 근현대 중국사회의 ‘편년사’를 구성”하고 있다고 평했고, 첸리췬(錢理群) 등의 『중국현대문학 30년』에서도 ‘혁명적 리얼리즘 소설 예술의 고봉’이라는 표제로 명명하면서 마오둔 소설이 “5․4운동부터 해방전쟁 전야까지 중국 사회편년사를 제공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두 평자의 공통어는 ‘중국 사회 편년사’입니다. 편년사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연대순으로 적은 기록을 뜻하는데, 마오둔은 이를 문학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지요. 이는 민족지학자의 민족지 글쓰기와 유사합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40년대 후기에 쓰인 [이월의 봄꽃처럼 붉은 서리 맞은 나뭇잎(霜葉紅似二月花)]은 20세기 초와 5․4운동 전야의 중국사회의 일각을 드러내었고, 1929년에 쓰인 [무지개(虹)]는 5․4운동부터 5․30사태까지의 중국 지식 청년들이 가졌던 개인주의로부터 집단주의로의 고난에 찬 역정을 묘사했습니다. [식] 삼부작은 대혁명의 역사와 대혁명 실패 후의 사회심리를 반영하고 있으며, 1932년에 발표된 [한밤중]은 자신이 처한 시대를 모든 분야에 걸쳐 정면으로 묘사하여 1930년대 중국사회의 축도를 보는 듯 그리고 있습니다. [첫 단계의 이야기(第一階段的故事)], 「주상강위(走上岡位)」, [단련(鍛鍊)] 제1부는 상하이 8․13사변부터 상하이 함락까지의 사회생활을 배경으로 삼아 항일전쟁 초기 각 계층의 인민생활과 사상의 격렬한 변화와 동향의 복잡한 흐름을 광범하게 반영했습니다. 또한 [부식(腐蝕)]은 환남사변(晥南事變)으로 대표되는 국민당 정부의 제2차 반공 고조기를 배경으로 삼아 국민당의 파시즘 특무통치의 잔혹함과 추악한 면모를 폭로했고, 1945년에 창작된 유일한 극작 [청명 전후(淸明前後)]는 항일전쟁 후기의 중국 민족부르주아지의 몸부림과 고투를 묘사했습니다. 그의 리얼리즘적 창작정신과 ‘사회 편년사’적 작품의 창작실천은 수미일관하게 그의 전 문학생애를 관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30년 5월부터 7월까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자본가와 금융가, 노동자와 농민, 수많은 지식인을 등장시켜 중국사회의 정면과 이면을 총체적으로 조감한 [한밤중]은 살아 있는 역사서와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작품 완성에 도움을 줬다는 취추바이(瞿秋白)가 “장래 문학사에서 1933년은 『한밤중』 출판을 기록할 것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라고 평한 이래, 그에 상응한 문학사적 주목과 평가를 받아 왔습니다. [한밤중]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인 중국에서 정상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길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민족부르주아지의 출로가 암담하다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답하고자 썼다고 작가가 그 창작의도를 분명하게 밝힌 바 있지요.
작품이 창작될 당시는 ‘계몽과 구망(救亡)의 상호촉진’ 단계에서 ‘구망의 계몽 압도’로 바뀐 1930년대였습니다. 리쩌허우(李澤厚)에 따르면, 구망의 정세, 국가의 이익, 인민의 기아와 고통이 모든 것을, 지식인이나 지식인 집단의 자유․평등․민권․민주주의와 갖가지 아름다운 이상에 대한 추구와 요구를, 개인의 존엄․개인의 권리에 대한 주의와 존중을 압도했던 상황이었습니다.
[한밤중]은 마오둔의 창작 중에서 최고의 작품이고 문학사에서도 반드시 언급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한밤중]은 인물 형상화, 이야기줄거리의 박진감과 재미, 심리나 상황묘사의 핍진함 등 1930년대뿐만 아니라 중국근현대문학사 어디에 놓더라도 손색이 없는 작품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이 부르주아지 상승기의 프랑스 귀족사회의 몰락과정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살아 있는 근대 프랑스의 역사서 역할을 하고 있고, 솔로흐프의 [고요한 돈강]이 카자흐 지방의 적군과 백군의 혼란한 내전관계를 묘사함으로써 차르 몰락 전후의 러시아가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면, 마오둔의 [한밤중]은 1930년대 초 상하이를 배경으로 삼아 중국사회의 정치사회적 격동과 불안, 신흥 부르주아지의 부상과 지주계급의 몰락, 사라지는 시대와 떠오르는 시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930년대 사회 성격
1929년부터 1934년 사이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중국 사회성격 논쟁’은 “중국이 도대체 어떤 성격의 사회인가”에 대한 “격렬한 학술논쟁”으로, ‘신생명파’, ‘신사조파’, ‘동력파’ 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역사는 때로 반복되기도 하지요. 1930년대 사회 성격 논쟁은 기본적으로 중국 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당시 중국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인가 봉건주의 사회인가를 주요 쟁점으로 삼았습니다. 이로부터 6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자유주의와 신좌파의 논쟁’에서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문제적이었습니다. 첸리췬(錢理群)의 평가에 따르면, “신좌파는 중국 사회의 자본주의화가 세계자본주의 체계의 유기적 구성부분이라고 보았고, 중국 사회의 질적 변화를 표지한다고 보았습니다. 자유주의자는 사회 성격과 사회제도 측면에서 1990년대 중국 사회는 마오쩌둥 시대와 일맥상통하며, 사회주의라는 이름하에 실행되는 전제였고, 수천 년의 봉건적 잔재가 중국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으며, 따라서 중국 특색의 집권(集權)전제에 대한 비판이 역시 미완성의 임무라고 보았습니다.” 신좌파가 현 중국을 자본주의 사회로 보고 있는 반면 자유주의자는 봉건제와 사회주의가 혼합된 사회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1930년대는 워낙 국민당과 공산당이 생사를 건 계급투쟁을 수행하고 있던 시절인지라, 사회성격 논쟁은 기본적으로 학술논쟁임에도 불구하고 학술 범위를 뛰어넘어 정치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리쩌허우는 이 논쟁의 의미를 “반(半)봉건․반(半)식민지적 사회성격은 다시 과학(학술)적으로 긍정되었으며, 반제․반봉건 혁명의 임무는 의심할 나위 없이 명확해졌다”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원리와 당시 중국의 실제가 결합한 창조적인 이론의 산물이었으며, 이 논쟁의 가장 큰 수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호 변증법적으로 절합되어야 할 계몽과 구망의 균형이 무너지고 “계몽을 구망의 궤도에 종속시키는 현대 사상사의 두 번째 이정표”가 되어 “‘과학적 인생관’을 좀 더 구체화하고 혁명화하여 사람들에게 토지혁명과 반제․반봉건을 위해 생활하고 투쟁하라고 했다.” 이 논쟁의 의의는, 먼저 정치적으로 “논전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사회의 반봉건 반식민지 성질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공산당의 “신민주주의혁명 도상의 장애물을 제거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이론적으로, 논전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한층 더 전파함으로써, 사적 유물론이 이론전선에서 점차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실천적으로, 중국의 토지혁명전쟁에 대해 추진역할을 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이 논전은 4․12 쿠데타 이후의 문화전선상의 위초와 반위초 투쟁의 일부분을” 형성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른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 정립되었던 것입니다.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중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농촌경제의 기초 위에 건립되었으며, 농촌경제는 기본적으로 봉건적 토지제도, 즉 지주의 농민에 대한 경제외적 강제에 의한 착취를 주체로 하고 있었다. 제국주의는 침입을 개시했지만 결코 광범위한 농촌의 자연경제를 와해시키거나 소멸시키지는 못했습니다. …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제적 영향과 침투는 결국 연해지역과 중․대도시 주변의 농촌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완전한 지배 지위나 그것을 주재할 만한 지위에 오르는 것과도 아예 거리가 멀었던 것이지요.” 국가적으로는 농촌 자연경제 또는 봉건적 토지제도가 주된 생산양식이지만 연해지역과 대도시에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침투했다는 의미입니다.
1930년대 사회 성격을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인식한 마오둔은 『한밤중』의 창작 목적을 아래와 같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이 소설을 쓴 것은 형상적 표현으로 트로츠키파와 부르주아 학자에게 다음의 내용을 회답하려는 것이었다. 중국에는 자본주의로의 발전의 길이 없다. 중국은 제국주의와 봉건세력 그리고 관료매판계급의 압박 아래서 더욱더 반봉건화 반식민지화 되었다. 중국의 민족부르주아지 중에는 비록 프랑스 부르주아지와 같은 성격을 갖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1930년의 반식민지 반봉건의 중국은 18세기의 프랑스와 다르며 중국의 민족부르주아지의 전도는 대단히 암담했다. 그들은 연약할 뿐만 아니라 동요했다. 당시 그들이 나아갈 수 있었던 길은 제국주의에 투항하여 매판화의 길로 나아가거나 봉건세력과 타협하는 두 길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오둔이 [한밤중]을 창작한 목적은 1929년부터 진행된 ‘중국 사회성질 논전’에 대해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인 중국에서 정상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길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민족부르주아지의 출로 역시 암담하다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오둔은 자신의 창작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애초에 ‘도시-농촌 교향곡’을 구상했었지요. “나는 최초에 이 도시-농촌 교향곡을 도시부분과 농촌부분으로 나누고 도시부분을 삼부작으로 쓰려 했으며 초보적 개요도 썼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계획은 창작과정에서 변모되어 처음에 구상했던 ‘도시-농촌 교향곡’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중심인물 우쑨푸의 고향인 솽차오전(雙橋鎭)을 배치함으로써 최초의 창작계획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게 했고, 농촌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로 ‘농촌 삼부작’을 창작함으로써 ‘도시-농촌 협주곡’을 완성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첫째, 제국주의 경제 침략의 압박, 세계 경제공황의 영향, 농촌파산의 환경 등의 상황에서 민족공업은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더욱 잔혹한 수단을 사용하여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강화하고 있다. 둘째, 이로 인해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정치적 투쟁을 야기하고 있다. 셋째, 당시의 남북대전, 농촌경제의 파산 및 농민폭동이 민족공업의 공황을 더욱 심화시켰다”라는 사실에 집중하여 이를 작품 속에 반영, 창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의 문제를 노동자 및 농민과의 관계 속에서 깊이 해부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한밤중]은 대도시 상하이를 주무대로 삼아,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의 본질을 깊이 있게 해부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 산업자본가와 매판 금융자본가, 대자본가와 중소자본가의 갈등도 밀도 있게 파헤쳤습니다. 나아가 ‘신유림외사(新儒林外史)’라고 일컬어질 만큼 자본가의 주위에 맴도는 다양한 지식인들의 군상을 예리하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세계 자본주의에 편입되어가는 중국의 중심도시 상하이의 주요공간인 공채시장과 공장이라는 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1930년대 상하이 민족지를 재구성해봅니다.
공채거래소의 자본가
개항 이후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상하이의 주인공은 더 이상 사대부와 지주가 아니었습니다. 소설에서 우쑨푸의 부친 우나으리가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대해 아무런 방비도 없이 급습을 받아 풍화되었다면, 강남(江南)에서 피난 온 지주 펑윈칭(馮雲卿)은 자본주의의 그물망에 뛰어들었다가 서서히 침몰되는 형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방의 뉴욕’으로 표기되는 이민과 금융의 도시, 그리고 ‘동방의 파리’라는 기표가 전달하는 유행과 대중문화의 중심, 조계로 대표되는 상하이 도시문화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바로 서양 자본주의 외래문화를 수용한 상업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상업문화가 주류였던 상하이에서 새로운 주체는 단연 상인이었습니다. 이들은 19세기 시행착오를 거쳐 20세기 들어 어엿한 자본가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공장을 운영하는 산업자본가로 발전했고 나아가 공채에 투자하는 금융자본가로도 장성했습니다. 이제 상업문화가 주도하는 상하이에서 전통 신사(紳士)와 지주는 생존하기 어렵게 된 것이지요.
식민지 반봉건 중국의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상하이에서 경제의 심장은 공채거래소였습니다. 1930년대 상하이 공채거래소에서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는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한밤중』 11장에는 공채거래소의 풍경이 아래와 같이 묘사됩니다.
증권거래소는 청과물시장보다도 훨씬 떠들썩했다. 꽉 들어찬 사람들로 거래소 안은 질식할 것 같은 땀 냄새로 가득 찼다. … 테이블을 두드리는 사람, 전화통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벌겋게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손을 쳐들고 입을 크게 벌리며 외쳐대고 있었다. 칠팔십 여 명 되는 중개업자, 그들의 보조원들 백여 명, 그리고 무수한 투기꾼들이 숫자를 부르는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마치 천둥치는 소리 같아서 어느 누구의 귀에도 확실히 들리질 않았다.
요즘이야 인터넷상에서 온라인으로 거래하지만 당시 오프라인 거래는 모두 거래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주식시장을 재현한 대부분 영화에서 표상된 바와 같이 거래소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투자자/투기꾼들뿐만 아니라 중개인과 보조원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정보를 수집하고 일분일초를 다투어 사고파는 거래소의 풍경은 전쟁터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자금은 ‘총알’로 비유되었고 총알이 떨어지면 전장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입니다.
텍스트에서는 ‘후방병원’처럼 ‘공채전선에서 패배하여 후퇴한 사람들이 한숨을 내쉬며 모여 앉은’ ‘기다란 목제의자’의 풍경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벌건 얼굴에 핏발 선 눈을 부릅뜬 채로 쑥덕거리며 서로 얘기하고 있는 그들의 관자놀이에는 지렁이 같은 푸른 핏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가운데 혼자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는 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임에 분명했다. 그의 얼빠진 듯한 눈앞에 땅 팔고 빚에 쫓겨 도망가는 비참한 환영이 어른거리고 있는 듯했다.
『한밤중』에서는 바로 거래소를 배경으로 우쑨푸와 자오보타오(趙伯韜)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가 벌어집니다. 먼저 우쑨푸를 보면, 그는 [한밤중]에 출현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도입부에서 묘사된 그의 외모는 강인한 인상을 주고 있지요. 쑨지런(孫吉人)과 왕허푸(王和甫) 등의 대자본가들로부터 합작을 제의 받아 이중(益中)신탁회사를 설립하여 그 결정권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주인추(朱吟秋)나 저우중웨이(周仲偉) 등의 중소자본가로부터는 구원의 요청을 받을 만큼 재계에서 능력과 신망이 높았습니다. 이처럼 그의 “재력과 수완, 매력에 대해 그들은 오래전부터 앙모해왔었지요.” 심지어 그의 주요한 경쟁상대인 자오보타오로부터도 끊임없이 합작 제안과 회유를 받기도 합니다.
그는 민족공업의 발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이른바 ‘산업구국’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가정생활조차도 사업에 종속시키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경영관 역시 독특했지요. 그는 “견식이나 수단, 담력이 없는 사람들이 그저 무사안일하게 기업을 이끌어 가는 것을 매우 증오했습니다. 이런 기업가들에 대해 우쑨푸는 늘 가차 없이 욕을 퍼부었고, 그런 기업들을 자신의 ‘철로 된 손아귀’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대자본을 소유하고 있지만, 판단력과 담력이 뒤지는 두주자이(杜竹齋)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토지와 금괴와 공채를 전문으로 하는 일에 손을 대는 것은 반대했습니다.
민족 자본가이면서 산업자본가적 철학이 철저한 그에게 자오보타오처럼 외국과 은밀하게 손잡고 국내 시장을 조종하려는 행위는 반민족적, 반국가적인 매국행위로 보였습니다. [한밤중]은 강인하고 능력 있으며 사업에 헌신적인 데다가 산업입국의 고귀한 포부까지 겸비한 산업자본가 우쑨푸가 매판 금융자본가 자오보타오와 벌이는 한판 대결을 이야기의 주선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제는 증권을 통해 대박을 노리다가 쪽박을 찬 얘기들이 심상해졌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런 얘기들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스룬주(施潤玖) 감독의 1999년 작 『아름다운 신세계(美麗新世界)』에서도 상하이 여성 진팡(金芳, 陶虹분)은 힘들게 번 돈을 일확천금의 허황된 꿈을 안고 주식에 투자하고 심지어 남주인공 장바오건(張寶根, 姜武분)의 돈까지 털어 넣지만 결국 모두 날리고 맙니다. 소설 속 증권교역소의 모델이었을 ‘상하이 화상(華商)증권거래소’는 1933년 새롭게 단장했는데,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시설이 완비되고 규모가 가장 큰 증권거래소였지만, 항일전쟁 발발 후 영업이 정지되었습니다. 이는 1990년 12월 19일 새로 개장한 ‘상하이증권거래소’의 전신이기도 합니다.
우쑨푸의 반대편에서 우쑨푸를 공채투기에 끌어들이고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으로 그를 자신의 휘하에 편입시키려는 인물이 금융자본가 자오보타오입니다. 그는 착상이 기발하고 판단력이 빠른데다가 행동이 대담하며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는 미국 제국주의를 위해 길러진 매판자본가로서, 미국 자본을 근거로 하여 자금난을 겪는 작은 공장들을 인수하고 어느 정도 자본이 축적된 기업들을 합병하여 트러스트를 조직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산업입국을 표방하는 우쑨푸나 산업자본가들의 연합체인 이중회사는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지요. 우나으리의 장례식에서 처음 등장하는 그는 우쑨푸를 유인하는 미끼로 공채투기의 조그만 비밀을 제공하여 우쑨푸를 뛰어들게 만듭니다. 기본적으로 우쑨푸가 작품 전편을 통해 공채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자오보타오가 던진 이 미끼를 문 것에서 기인했던 것입니다. 이후의 과정은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가 발버둥 치다가 결국에는 잡혀 먹히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쑨푸가 험난한 풍파를 뚫고 성장한 대어임에는 분명하지만 우쑨푸를 요리하는 자오보타오는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낚시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주인추의 누에고치 자금이라든가 이중회사의 예금 인출 등의 낚싯줄을 늦추지 않고 대기하고 있다가 마지막 대결에서 우쑨푸에게 치명타를 가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주로 사용한 방법은 바로 우쑨푸 주위에 있는 인물의 매수였습니다. 우쑨푸의 공채시장 대리인 한멍샹(韓孟翔)과 정보원 류위잉(劉玉英)을 매수하여 우쑨푸에게 등을 돌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형이자 사업 동료인 두주자이로 하여금 공채시장에서 우쑨푸 진영을 이탈하여 자오보타오 진영에 가담하게 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자오보타오는 온갖 경제적 수단을 동원하여 우쑨푸를 옥죌 뿐만 아니라, 기존의 가치관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타인에게까지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일탈을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궁극적 승리를 노립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1930년대 상하이 공채거래소에서는 금융자본이 독판치는 형세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우쑨푸와 자오보타오 등 대자본가 외에 주목할 만한 인물로 류위잉(劉玉英)을 들 수 있습니다. 소액 투자자이자 대투자자의 정보원 노릇을 자처하는 류위잉은 “총명한 여인"이었지요.
“그녀의 아버지는 십여 년 전 증권시장의 파동으로 파산하여 자살했다. 그녀의 오빠 역시 ‘투기꾼’으로, 그의 반평생은 ‘횡재’와 ‘야간도주’의 되풀이였다. … 그녀의 시아버지인 루쾅스(陸匡時)와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은 모두가 입만 뻥긋했다 하면 ‘입찰가격’이니 ‘공채’니 하는 얘기만 하던 이들이었다. 최근엔 그녀 자신도 증권거래소를 낮 동안의 ‘집’으로 삼고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만 원 어치를 사들였다 다시 오천 원어치를 팔았다 하고 있었다. 거래에 있어서 그녀는 냉정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오빠 심지어 남편의 전철을 거울삼아 견실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안정적으로 자금을 운용하되 “자신의 몸을 밑천으로 이용”할 줄도 알았기에 자오보타오와의 교류도 ‘투기’의 일환으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공채거래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자오보타오의 호텔방을 찾아가는 것을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 그가 다른 여자와 같이 있는 것도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거래소에서 일희일비하는 소액 투자자들을 바라보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래소를 조종하는 거물들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시가나 물고 있을 테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1930년대 상하이 공채거래소에는 전란을 피해 상하이로 온 지주 펑윈칭부터 민족자본가 우쑨푸와 매판자본가 자오보타오, 중개인 한멍샹과 정보원 류위잉 등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지식인과 정객 그리고 군인 등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신흥 계급의 등장
증권교역소가 금융자본가의 주무대라면, 공장은 산업자본주의의 심장입니다. 그러나 『한밤중』에서 공장은 생산 현장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파업을 추동하는 노동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회사 측의 대응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1930년 5월부터 7월까지 우쑨푸의 위화(裕華) 제사공장은 자본주의의 심장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우쑨푸가 보기에 “지금의 노동자들은 이미 이전의 노동자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중국의 노동자들은 수많은 투쟁을 통해 단련되기도 했지만, 훨씬 더 많은 좌절의 경험도 맛보았습니다. 그들은 제국주의, 자본주의, 봉건주의라고 하는 삼중의 압박 아래 유례없는 생활의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그 현장이 바로 공장입니다. 마오둔은 우쑨푸가 경영하는 위화 제사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움직임을 집중적으로 묘사하여 당시 노동자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특히 투쟁하는 노동자는 신흥계급인 노동자 가운데서도 선진적인 그룹이었지요.
이들은 각성한 노동자로, 자신의 계급적 현실과 사회구조의 모순을 깨닫고 공장 내에서 일반 노동자 대중을 계몽시켜 파업을 지도하는 그룹입니다. 천웨어(陳月娥), 허슈메이(何秀妹), 주구이잉(朱桂英) 등이 이들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공산당 활동가들의 지도를 받아 공장 내에서 타오웨이웨 등과 대립하면서 암암리에 일반 대중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합니다. 그들은 ‘야학’을 통해 글자를 깨치고 ‘노동자 문예소조’에서 문학적 소양을 배양하여 노동자 통신원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자신의 열악한 생활조건 속에서 자연적으로 각성해나가기도 했습니다.
주구이잉의 궁핍한 생활과 분노, 의지가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버텨 온 그녀에게 가뜩이나 낮은 임금에서 다시 2할이나 인하한다는 이야기는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녀가 현재의 생활을 인내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현재의 그녀를 지탱해 주는 기둥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기대에 희망을 걸고 산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자신을 버티게 해주는 최소한의 생계는 해결되어야 합니다. 최저 수준의 생존까지도 위협하는 임금인하 소문은 그녀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땅콩 행상을 다니는 그녀의 어머니가 무심결에 공산당 선전물을 포장지를 사용했다고 해서 물건을 압수당한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런 해결책도 발견되지 않는, 악화일로로 내닫는 상황은 그녀로 하여금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노동자의 각성 여부가 기존의 부조리한 체제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그것에 반항하느냐의 여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시기 중국 노동자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장 내의 지도책임을 맡고 있는 천웨어의 모습에서 1930년대의 이들 선진적 노동자들의 지식수준과 의식수준이 그다지 높은 편이 못됨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연대파업의 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한 회의에서 비교적 자유분방한 여성 활동가인 차이전(蔡眞)이 공장의 상황을 묻자 이에 대해 “천웨어는 떠듬떠듬 힘들고 간단한 어투로 오늘 낮 작업장의 상황과 방금 야오진펑(姚金鳳)의 집에서 가졌던 집회에 관해 설명했다.” 그녀가 ‘투쟁정서가 고양되어 있으므로’ ‘파업에 돌입’할 수 있다고 대답한 부분은 사실 일반 노동자 대중의 실제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천웨어의 답변은 조직에서 요구하는 것에 대한 모범답안이었습니다. 그녀는 주체적인 입장을 확보했다기보다는 자신을 지도한 활동가들의 의견을 주입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의 각성은 아직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각성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녀가 자신의 견해를 주체적으로 가지기 시작한 것은 파업이 실패한 후 소집된 회의에서 마진(馬金)의 의견에게 동조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진은 리리싼(李立三) 노선의 화신인 커쭤푸(克佐甫)의 견해에 대립되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파업현장에서 보여주었던 수동적 태도는 천웨어를 중심으로 하는 공장 내의 지도그룹의 현주소를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초보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들은 아직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출로를 찾지 못합니다. 이들에게는 길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커쭤푸, 차이전, 마진, 쑤룬(蘇倫)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지요. 이들은 지식인 출신의 공산당 활동가들인데, 그 동안의 혁명과정을 겪으면서 이들 내부에서도 일치된 의견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품에서는 커쭤푸-차이전 대 마진-쑤룬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지요. 회의에서의 결정은 책임자인 커쭤푸의 주장대로 관철되는데, 그는 리리싼 노선을 추종합니다. 마오둔은 이들의 회의장면을 핍진하게 묘사함으로써 좌경 모험주의 노선을 측면적으로 비판합니다.
마오둔은 관찰자의 시선으로 1930년 5월부터 7월까지 상하이 공채거래소와 위화 제사공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의 주역인 자본가와 노동자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21세기 한국과 중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일상이고 공기와 같아 오염되어도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1930년대 상하이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의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 내부에서도 대자본가와 중소자본가 사이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고, 특히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 사이에 주요한 관점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노동자 내부에서도 각성한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해 자본가의 주구 노릇을 하는 이들까지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작가는 이들을 파노라마처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특히 『한밤중』에서 독특한 점은 작가가 자신의 현실 인식을 작중인물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판보원(范博文)과 리위팅(李玉亭)입니다.
판보원은 시인이고 리위팅은 경제학 교수인데, 이 두 사람은 상당히 정확한 현실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판보원이 우나으리의 죽음에서 봉건 잔재의 풍화를 직감한 것이 작가적인 직관에 기초한 것이라면, 장쑤쑤(張素素)가 던진,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인 것 같냐는 질문에 대한 리위팅의 대답, 금융계의 거물과 공업계의 거두가 모여 있는 우쑨푸의 응접실을 중국 사회의 축소판으로 비유하고, 상하이에 오자마자 숨이 끊어지려 하는 우나으리를 사라지는 봉건시대의 상징으로 비유하면서 대조시키는 리위팅의 언변은 경제학자의 정세감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보이는 두 사람의 현실 인식의 정확성은 날카로운 분석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지요. 판보원이 우나으리의 뇌출혈의 원인을 추정하는 장면이라든가, 리위팅이 정세를 분석하는 장면은 그들의 논리적인 분석력을 증명하는 예입니다.
그러나 현실 인식은 가치 지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법. 가치 지향의 지도를 받는 현실 인식과 현실 인식에 기초한 가치 지향은 변증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판보원과 리위팅은 가치 지향의 측면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지요. 이들은 반봉건(反封建)의 측면에서는 공통된 가치 지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직업과 기질의 차이로 인해 당시 상하이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세계에 대해서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로맨틱한 시인인 판보원은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상객들이 모여서 공채에 대해 갑론을박하면서 시끄럽게 떠들자 그는 “투기의 열광이여! 투기의 열광이여 ! 그대 황금의 홍수여! 범람하누나, 모든 제방을 무너뜨리고.”라는 식으로 조소합니다. 또한 장례식 날 으슥한 곳에서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춤을 추는 쉬만리(徐曼麗)의 모습을 보고는 “이것은 저들의 ‘죽음의 춤’이야. 농촌은 갈수록 파산하고 도시의 발전은 갈수록 기형적으로 변해 가네. 금값이 오를수록 쌀값도 오르고, 내전의 포화는 더욱 왕성해지는데, 농민의 폭동 역시 더욱더 퍼져 간다네. 그러나 저들, 돈 있는 자들의 ‘죽음의 춤’은 갈수록 더 미쳐만 간다네!”라고 냉소적으로 노래합니다. 이러한 풍자는 그가 ‘돈 있는 자들’ 속에 속해 있지 않았고, 그리고 그들 속에 편입되고 싶어 하지도 않는 자세에서나 가능한 비판입니다.
이에 반해 냉철한 이론가인 리위팅은 금융자본가가 산업자본 쪽으로도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속셈을 알아차리고,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금융자본가와 산업자본가가 협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쑨푸에게 미리 그 정보의 일부를 알려주면서 넌지시 충고합니다. 그러나 우쑨푸와 자오보타오의 대립이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측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첨예한 정치적 노선의 차이로 인한 것도 개재되어 있음을 간파합니다. 그는 주인추, 우쑨푸, 자오보타오로 대표되는 중소자본가, 민족자본가, 매판자본가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노동자 농민계급에 대응하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쑨푸의 부탁을 받고 자오보타오와 협상하러 갔다가 실패한 후 돌아오면서 공산당 전단을 보고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우쑨푸가 주인추의 목을 조르고 자오보타오는 뒤에서 우쑨푸의 머리를 움켜쥐고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다. 그들은 옆에서는 누군가 칼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에는 정신 팔 겨를도 없다.” 이러한 “괴이한 환상”을 인식하는 순간 리위팅은 자신의 생각이 실현 불가능함을 깨닫고는 스스로 자오보타오를 선택합니다. 이처럼 이들은 궁극적으로 타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자본가에 대한 비판의 강도에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생활은 자본가를 둘러싸고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1933년 발표된 마오둔의 『한밤중』을 통해 1930년대 상하이를 재구성해보았습니다. 1930년대의 상하이의 인물들은 당시 사회의 총체적 모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한밤중』은 1930년대 상하이를 무대로 삼아,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의 본질을 깊이 있게 해부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 산업자본가와 매판 금융자본가, 대자본가와 중소자본가의 갈등도 사실적으로 밀도 있게 파헤쳤습니다. 나아가 ‘신유림외사(新儒林外史)’라고 일컬어질 만큼 당시 상하이의 다양한 지식인 군상을 예리하게 풍자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반봉건․반식민적 성격이 주요한 측면이었던 중국사회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던 대도시 상하이와 한 농촌을 배경으로 좌와 우, 중국과 외국의 대립을 주축으로 하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 내부와 계급 내부에서 진행된 계층별 첨예한 암투를 반영하고, 그 결과 중국에서의 민족자본가가 어떻게 파멸되어 갔는가와 중국의 농촌과 농민이 어떻게 황폐화되고 몰락해 갔는지를 총체적으로 재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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