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왕안이의 [푸핑]

ycsj 2020. 9. 20. 11:55

『장한가』를 통해 상하이를 살펴본 김에 최근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푸핑(富萍)』대한 이야기도 해보지요. 작가 왕안이(王安憶)는 ‘상하이 읽기’에서 건너뛸 수 없는 작가입니다.

왕안이는 푸젠(福建)성 퉁안(同安)현 출신으로, 작가 루즈쥐안(茹志鵑)의 딸입니다. 1954년 난징(南京)에서 태어나 1955년 어머니를 따라 상하이로 이주했습니다. 1969년 중학교 졸업 후 1970년 안후이(安徽)성 우허(五河)현에 하방(下放)되었고, 1972년 장쑤(江蘇)성 쉬저우(徐州)지구 문예공작단에 배속되었다가 1978년 상하이로 돌아와 『아동시대(兒童時代)』 편집을 담당했습니다. 1987년 상하이작가협회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래 중국작가협회 이사, 상하이 작가협회 부주석과 주석을 거쳐, 2004년부터 푸단대학(復旦大學) 중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 상하이 작가 장아이링과 비교되곤 하는 왕안이는 1980년대 중반까지는 지식청년 관련 작품을 쓰다가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삶의 진실을 탐구하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대표작으로 『비, 솨 솨 솨(雨, 沙沙沙)』(1981), 「유수처럼 사라지다(流逝)」(1983), 『미성(尾聲)』(1983), 『소포장(小鮑庄)』(1986), 『황산의 사랑(荒山之戀)』(1993), 『상하이의 번화한 꿈(海上繁華夢)』(1989), 『유토피아 시편(烏托邦詩篇)』(1994) 등의 중단편소설집이 있고, 장편소설로 『69학번 중학생(69屆初中生)』(1986), 『황허의 옛 도인(黃河故道人)』(1986), 『기실과 허구(紀實與虛構)』(1994), 『장한가(長恨歌)』(1995) 등이 있다. 21세기 들어 『푸핑(富萍)』(2000), 『계몽시대(啓蒙時代)』(2007), 『천향(天香)』(2011) 등의 단행본을 출간했습니다.

왕안이는 상하이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 많아 그 작품들을 ‘상하이 민족지’라 할 수 있으며 중국 내에서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했고 해외 각국에서 초청받아 강연을 합니다. 최근 한국에도 두 차례 다녀갔으며 2009년 『장한가』로 이병주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최근 국내에서 많은 중국 작품이 번역·출간되고 있는데 당대 최고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왕안이의 작품이 유독 많이 출간되지 않는 것은 그 ‘문화적 두터움(cultural thickness)’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옌(莫言), 위화(余華), 쑤퉁(蘇童)의 소설이 거의 모두 번역된 것에 반해 왕안이의 작품은 『장한가』와 『푸핑』 2종만 번역되었습니다.

21세기 벽두에 출간된 『푸핑』은 1964년 상하이로 진입한 시골 처녀를 초점인물로 삼아 그녀가 상하이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바꿔 말해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사회주의 시기 농민의 도시 진입 상황과 농민이 관찰한 도시 상황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푸핑』은 전작인 『장한가』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입니다. 『장한가』는 1940년대 후반 ‘미스 상하이’로 뽑힌 왕치야오의 운명과 삶의 부침을 묘사했는데, 왕치야오의 1940년대의 젊음과 사회주의 30년의 중년 그리고 포스트사회주의 시기의 말년을 통해, 상하이의 부침과 운명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민족지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푸핑』에서는 시골 처녀 푸핑을 초점인물로 삼아 문화대혁명 직전 상하이의 세 공간과 그곳 거주민의 생활상을 보여줍니다.

『푸핑』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1964년과 1965년의 상하이의 공간과 사람입니다. 작가는 이주에 초점을 맞춰 상하이인이 어떻게 이 도시에 모이게 되었는지를 묘사합니다. 소설 속 푸핑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작은아버지 집에서 자라다가 ‘할머니’의 손자와 혼약하게 되어 상하이에 오는데,. 우리는 시골 처녀 푸핑이 상하이에 진입해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통해 1960년대 상하이 민족지를 재구성해볼 수 있습니다.

『푸핑』은 양저우(扬州) 시골 처녀가 상하이로 이주해 생계를 도모하는 이야기로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인공 푸핑은 건강하고 부지런하지만 우둔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번화가 화이하이루에 살다가 쑤저우허 쓰레기 운반조 사공을 하고 있는 외숙 집으로 옮겼습니다. 지금까지 왕안이 소설에서 이 두 곳은 자주 등장하는 곳으로, 작가는 이들 거리의 생활에 늘 친밀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이 끝나갈 무렵 18장에서 왕안이와 그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 등장하는데 그곳이 바로 메이자차오입니다. 이곳은 쓰레기장 위에 지어진 낡고 허름한 빈민굴로, 왕안이의 소설 세계에서는 거의 처음 출현하는 곳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서술 태도의 변화로, 그녀는 푸핑을 통해 이곳 사람들이 “외부에서 온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를 취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비하’가 아니라 “일종의 자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해설합니다. 그들은 비록 고물을 줍고 막일을 하여, “사람들에게 불결한 인상”을 주지만, “그들은 성실하게 일해서 의식주를 해결하였고, 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은 한 푼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뒤죽박죽이고 구질구질한 생계 이면에는 착실하고도 건강하며, 자존적이고 자족적인 힘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푸핑은 외숙집이 답답할 때면 메이자차오를 자주 쏘다니면서 점점 마음이 끌리고 마침내 모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상하이 생활을 풀어내는 소설인데도 그 불빛은 거의 모두 삶의 변두리, 즉 시골에서 온 아가씨, 쑤저우 강의 뱃사공, 관리사무소의 목수 등을 비추고 있으며, 중심인물인 ‘할머니’와 뤼펑셴 등도 모두 가정부이고 뒤쪽 곁채에 살면서 뒷문으로 드나듭니다. 그리고 아파트와 서양식 건물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만, 텍스트는 서유럽적이지도 않고 사회주의적 규범에 부합하지도 않는 삶을 소설세계의 중앙에 위치시킵니다. 소설에서 대부분의 서술이 메이자차오의 바깥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음미해보면 그것들은 최종적으로는 거의 모두가 메이자차오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로 개막을 알리는 기나긴 징과 북이 마지막에 진정한 주역을 끌어내는 것처럼 말이지요. 메이자차오 빈민굴이 상하이 이야기의 주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푸핑의 ‘결혼 원정기’

상하이대학 문화연구학과 왕샤오밍 교수는 「‘화이하이루’에서 ‘메이자차오’까지―왕안이 소설 창작의 전변」에서, 왕안이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1990년대 상하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작가가 『푸핑』에서 메이자차오 빈민굴에게 주역을 맡긴 것은 바로 1990년대 유행했던 ‘상하이 노스탤지어’를 비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지요. 왕안이는 노스탤지어에 가려진 상하이의 진면목을 이야기하기 위해 1960년대 상하이로 갑니다. 그리고 양저우 아가씨의 상하이 진입을 통해 상하이 노스탤지어 이야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묘사합니다.

왕샤오밍은 새로운 이데올로기, 즉 신자유주의가 권장하고 있는 올드 상하이 노스탤지어 풍조와 거리를 두고 있는 왕안이의 글쓰기에 박수를 보내며 그 차이점을 열거합니다. 왕안이는 양저우 출신의 푸핑을 사회주의 신중국의 1960년대 상하이로 진입시키는데, 그녀는 화이하이루의 문간방에 거주하다가 ‘수상노동자의 거주구역’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메이자차오의 빈민굴로 가 보금자리를 튼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왕샤오밍의 『푸핑』 해석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고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는 모자(母子)의 메이자차오가 주역이라는 점에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푸핑』을 푸핑 한 사람의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요소들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그러면 푸핑의 동선(動線)을 따라 1960년대 상하이의 공간과 거주민에 대한 민족지 답사를 시작해볼까요. 이 글에서는 푸핑의 동선을 가족 찾기 여정, 바꿔 말하면 ‘결혼 원정기’로 설정해보겠습니다.

푸핑은 무척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그녀는 텍스트 내에서 거의 말이 없고 대부분 타인에 의해 묘사됩니다. 그녀는 겉으로는 어눌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총명하고, 유순해 보이지만 매우 굳세어서, 매사 모두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푸핑이 상하이로 들어와 이동한 주거공간은 왕샤오밍의 관찰처럼 화이하이루에서 쑤저우허 그리고 메이자차오로 귀결되지만, 그녀의 공간 이동을 꼼꼼하게 관찰해보면 그녀 나름의 의식적/무의식적 목표가 있습니다. 앞당겨 말하면, 그것은 다름 아닌 가족 찾기입니다. 그녀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친척집에 맡겨졌기에 가족애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런 그녀이기에 예비 신랑의 수양할머니에게서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외숙 가족에게서 희망을 찾아보지만 여의치 않습니다. 우연히 만난 모자에게서 자신이 찾던 가족의 분위기를 찾아내고 거기에 안착하지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푸핑』은 바로 주인공 푸핑이 상하이에 와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족을 찾는 여정을 그린 텍스트입니다.

푸핑은 자신의 주거공간과 가족을 주체적으로 선택합니다. 왕샤오밍의 『푸핑』론이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주거공간을 고찰한 것이라면, 이 글에서는 결혼 원정기로 봅니다. 푸핑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혼을 하고 약혼자의 수양 할머니가 일하고 있는 상하이 화이하이루 룽탕(弄堂)의 문간방으로 이주하면서 상하이 생활을 시작합니다. 명목은 약혼자 리톈화의 수양할머니 거처에 머물면서 대처 구경도 하고 결혼 준비도 하는 것이었지만, 푸핑의 속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공간과 환경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것이었고 그게 상하이행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녀는 조실부모하고 작은아버지 집에 얹혀살며 눈칫밥을 먹어봤기에 자신만의 가정을 꿈꾸고 있었고 그녀의 상하이행은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가정 찾기 여정, 바꿔 말하면 결혼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앞당겨 말하면, 푸핑은 애초부터 리톈화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푸핑에게 남자를 고르는 기준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리톈화의 조건은 그동안 자신이 겪어왔던 환경보다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그런 조건이었습니다. 푸핑은 그걸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상하이행을 결행합니다. 푸핑은 설 이후 상하이에 온 리톈화에게 요구합니다. “우리 분가해서 살아요.” 그러나 그에게 분가란 불가능합니다. 그는 평생 업보처럼 가족과 친척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순종적이었다.” “일종의 책임 정신이 깃들어 있으며, 그것은 때로 상당히 강인하고 심지어는 반항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결국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외숙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외숙 부부에 대해 푸핑은 서운함이 있습니다. 고아가 되었을 때 외숙이 자신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하이에 거처가 없어 찾아가긴 했지만 어렸을 때의 서운함은 몸에 새겨져 있었고, 더구나 외숙모가 자신의 조카 광밍의 짝으로 맺어주기 위해 자신을 받아들였음을 인지하고는 거리감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극장에서 만난 모자와 가까워집니다.

사실 푸핑의 상하이행은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삶과 가정을 찾기 위한 여정입니다. 리톈화와 정혼했을 때부터 그녀는 리톈화 본인보다 그가 떠안고 가야 할 환경에 넌더리를 냅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작은아버지 댁에서 눈칫밥을 먹어야 했던 그녀는 자신의 삶과 가정을 가지고 싶었던 것인데, 리톈화와 결혼해서는 자신의 바람이 무망함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셈이지요. 여하튼 리톈화를 통해 상하이로 오게 된 푸핑은 화이하이루, 쑤저우허를 거쳐 메이자차오에 정착합니다. 푸핑은 결코 민족지학자에 걸맞은 인물은 아니지요. 고집이 센 만큼 주관이 강하기에 관찰에 능한 편도 아닙니다. 다행히 작가는 푸핑에 의존한 일인칭시점을 채택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부묘사에 능하면서도 대국적인 안목을 가진, 『장한가』의 화자와 비슷한 그런 성찰적인 화자를 등장시킵니다. 그럼 푸핑의 동선을 따라 1963년과 1964년의 상하이의 대표적인 세 공간과 그 공간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고찰해보지요.

푸핑은 서두에서 양저우 농촌에서 상하이로 진입한 후 지속적으로 경계를 넘나듭니다. 그녀가 처음 도착한 곳은 화이하이루 룽탕의 스쿠먼(石庫門) 주택이었지만 뒤이어 쑤저우허 판자촌으로 이동한 후 두 곳을 넘나듭니다. 하지만 스쿠먼도 판자촌도 그녀의 안식처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녀가 정착한 곳은 메이자차오의 빈민굴입니다. 이제부터 그 과정을 따라가 보지요.

 

 

할머니와 화이하이루

 

『푸핑』 첫 장의 주인공인 할머니는 스스로 상하이인이라 생각합니다. 그녀는 화이하이루(淮海路)로 대표되는 상하이 중심에 정체성(identity, 認同)을 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열여섯 살 때부터 상하이로 와서 남의 더부살이를 한 지 30년이나 되었으니, 상하이 토박이인 셈이었다.” 그러나 성찰적 화자가 보기에 그녀는 도시 여자도 시골아낙도 아닌, 양자가 반반씩 섞인 혼종적(hybrid)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었다.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컨대 할머니는 상하이에서 30년을 살아왔지만, 결코 도시 여자가 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더 이상 시골아낙 같지도 않았다. 결국 반반씩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이 반반씩의 아낙이 합쳐져 하나의 별난 사람이 된 셈이다. 한길을 걸어가는 그녀들을 바라보면 한눈에도 가정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도시 사람과 시골 사람의 피부와 말투가 섞인 그런 혼종적인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이것이 바로 상하이인의 정체성입니다. 상하이인의 정체성은 ‘라오(老)상하이인’과 ‘신(新)상하이인’이라는 역사적 개념을 전제하되, 양자를 불변하는 고정된 개념으로 설정하지 않고, 양자가 끊임없이 섞이고 호동(互動)함으로써 ‘상하이인’이라는 문화적 개념을 생성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할머니는 상하이에서 거주한 지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외지에서 상하이로 이주한 주인집들을 지도하여 상하이인으로 교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녀의 지도를 통해 거친 산둥(山東) 군인들도 약간 점잖은 저장(浙江)인들도 세련된 상하이인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화자는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그녀들의 고향인 시골 양저우(揚州)에는 여자들이 예로부터 밖에 나가 가정부가 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묘한 자부심이 있었지요. 바로 자신들이 상하이 중심에 산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녀 역시 도시 한복판의 주민이라는 선입견을 지니고 있었으며, 화이하이루만이 상하이라 일컬을 만하다고 여겼다.” 그러기에 자베이(閘北)나 푸퉈(普陀) 지역을 황량한 시골로 간주하고 쑤저우허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왕래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상하이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생활하였으며, 가정부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일할 집은 그녀가 선택하는 것이지 남이 자기를 선택해서는 안 되었다. 또한 그녀는 서쪽 지구의 화이하이루에서만 일하기로, 그리고 상하이 사람의 집에서만 일하기로 정했다.” “그녀는 젊은이들보다 오히려 이 도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기이한 소문이나 해괴한 이야기부터 유괴범 이야기, 귀신 이야기, 연극 이야기, 헐리웃 영화, 자기 고향 이야기 등등. 그러나 그녀는 은행과 같은 서양 제도에 대해서는 익숙해지려 하지 않고 “믿음직한 돈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와 같은 새로운 문화는 쉽게 받아들였지만 제도에 대해서는 오히려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큰아버지의 손자인 리톈화(李天華)를 양자로 들입니다.

화이하이루는 할머니의 판단대로 상하이의 중심입니다. 우선 신식 문물의 상징인 영화관과 병원 그리고 신식 학교가 가깝습니다. 그러면 상하이에 갓 진입한 푸핑의 눈을 통해 화이하이루 룽탕을 관찰해보지요.

할머니가 거처하는 화이하이루 룽탕(弄堂)에 대해 푸핑은 처음에는 전설 속의 수정궁 같은 느낌을 가집니다. 그러나 수정궁은 푸핑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수정궁 같은 룽탕에 대해 서먹서먹한 거리감을 가집니다. 그녀에게는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푸핑은 영화보다 이 거리의 삶에 훨씬 흥미가 있었다.” 영화보다 실재 삶에 훨씬 흥미를 느끼는 시골 처녀 푸핑은 작가의 또 다른 주인공인 왕치야오의 영화적 삶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영화의 도시 상하이에서 푸핑은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영화가 아닌 생활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녀가 정말로 흥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 다른 것, 이를테면 문 두 짝 크기의 포목점이고 조그마한 잡화점이고 재봉 가게입니다. 이 가게와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 “푸핑은 수정궁처럼 화려한 거리의 이면에 노동과 밥벌이를 위한 삶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그녀에게 이토록 번화한 거리에 다가서도록 해주었으며, 서먹서먹한 거리감도 말끔히 씻어주었다.” 이처럼 상하이 노스탤지어에서 서사하는 화려함 이면에 자신의 노동력에 의존해 생활하는 사람이 있고, 푸핑도 그들로 인해 상하이에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을 통해 푸핑의 시야는 넓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수록 모두들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집집마다 두터운 장부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마치 “영화나 연극 속에서 연기하는 배우 같았다.” 그래서 푸핑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푸핑은 처음에 상하이 사람들이 복을 타고난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무엇이 사람을 살아가기 팍팍하게 만드는지 알게 되었다. 상하이 사람들이 바로 그렇다.” 이제 푸핑은 상하이의 중심인 화이하이루에 사는 사람들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곳은 더 이상 푸핑이 살고 싶은 곳이 아닙니다. “상하이 말도 대충 이해하게 되었고, 속어와 입에 발린 실속 없는 말들도 어느 정도 알아듣게 되었”을 무렵, 푸핑은 자베이 지구 동역 부근의 쑤저우허 판자촌으로 이동합니다.

쑤저우허는 창장(長江)의 지류인 황푸장(黃浦江)의 지류인 우쑹장(吳淞江)의 상하이 관통 부분을 가리키는 속칭으로, 그 연안은 상하이가 처음 형성되고 발전한 중심입니다. 6세대 감독 러우예(婁燁)는 동명 영화의 서두에서 쑤저우허의 전설과 이야기, 기억과 쓰레기 등을 카메라에 담아왔다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쑤저우허는 상하이인, 특히 서민들 삶의 애환이 깃든 상하이의 젖줄입니다. 특히 쑤저우허 연안의 자베이 지구는 해방 전부터 판잣집 밀집 지역이었습니다. 판자촌(棚戶區)은 상하이시가 형성되면서부터 외부에서 진입한 하층민의 거주지로 주로 부둣가에 형성되었습니다.

 

쑤저우허와 쑨다량

 

1930년대 쑤베이인의 붕호구(棚戶區)는 외국조계를 둘러싸면서 형성되어 거의 완벽한 원을 형성할 정도로 넓은 공간에 많은 인구가 집중되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1949년 5월 상하이가 해방되었을 때 200호 이상의 판자촌은 322곳이나 있었는데, 그 가운데 2천호 이상이 4곳, 1천호 이상이 39곳, 5백호 이상이 36 곳, 300호 이상 159곳, 200호 이상이 93곳이었습니다. 그 면적은 322만 7천 평방미터였고, 거주민이 115만 명에 달했습니다. 한때 상하이시 중심을 포위하듯 형성되었던 판자촌은 해방 이후 지속적인 도시계획에 따라 대규모 판자촌은 사라졌지만, 21세기 들어서도 옛 성곽 주변, 쑤저우허와 황푸장 양안과 철로 인근 지역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쑨다량(孫達亮)은 열두 살에 고향을 떠나 큰아버지를 따라 뱃일을 했다.” 중간에 큰아버지의 배려로 9개월간 공부한 것을 제외하고는 30년 가까이 쑤저우허에서 생활한 셈입니다. 그가 쑤저우허에 온 것은 “상하이가 점령당했던 이듬해였다.” 그때는 상하이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고 “쑤저우는 곳곳마다 일본인 천지였다.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이 이별과 변고의 슬픔을 한 켠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쑨다량은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일을 도맡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가 일본 사람에게 징발”되는 등 고난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는 버텨나갔지요. 쑨다량은 이처럼 쑤저우허에서 뱃일을 하면서 일본군 점령시기를 보냈고 이후 국민당 통치시기를 거쳐 신중국의 인민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삶은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버텨나갔다.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가 다시 조금씩 조금씩 호전되었다. 일본인들이 떠난 뒤, 국민당도 떠났다. 쑤저우허에 점차 평화가 찾아왔고, 분뇨 부두는 국유로 귀속되었다. 크고 작은 똥두목들도 더 이상 큰소리를 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여전히 노동을 하고 밥을 먹었지만, 그래도 이 두 가지는 항상 보장되었다. 1950년, 쑨다량은 스물두 살의 나이에 아내를 맞아들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는 쑨다량에게 그대로 투영됩니있다. 1956년 합작사가 세워진 후 그는 “쓰레기 운반조에 배치되었다.” 그는 부인과 함께 ‘강 언덕 위의 집’을 삶의 목표로 삼고, 친척들을 돌보고 1960년의 기근을 극복하면서 1963년 드디어 “강 언덕에 22평방미터짜리 허름한 단칸집을 사들였다.”

사실 푸핑 어머니가 세상을 떴을 때 외숙이 상하이에서 와 장례를 치렀습니다. 푸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3년이나 되었기에 푸핑이 갈 곳은 두 군데밖에 없었지요. 한 곳은 외숙 집이고, 다른 한 곳은 작은아버지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외숙이 상하이에 호적을 올리는 문제가 쉽지 않다는 핑계로 책임을 회피한 바람에, 푸핑은 작은아버지 집으로 오게 되었던 거지요. 여러 해 동안 외숙은 책임을 떠맡을까 봐 아예 왕래도 끊고 편지조차 없었습니다. 사실 푸핑도 외숙을 잊은 지 오래였습니다.

푸핑은 재회 후 “외숙에 대해 상당히 멀고 낯선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랫동안 더부살이의 고단함에 대해 외숙에게 서운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찍 부모를 여읜 푸핑은 작은아버지 네를 따라 살았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혼사처럼 중요한 일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마음만 졸일 따름이었다. 푸핑은 자기의 혼사 이야기가 나오면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좋다 궂다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이처럼 종신대사인 결혼에서조차도 자기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던 푸핑은 그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외숙과 외숙모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내구(內疚)가 있었기에 푸핑은 쑤저우허 판자촌의 외숙 집 다락방이 편하지 않습니다. 달리 갈 곳이 없기에 부득불 그곳에 머물던 그녀는 우연찮게 외숙을 따라 메이자차오를 방문하게 되면서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이후 그곳을 드나들다가 예전에 극장에서 만났던 모자를 재회하게 되지요.

 

메이자차오와 모자

 

푸핑이 모자를 만난 내력은 이러합니다. 외숙모의 안배에 의해 푸핑은 광밍 등과 연극 공연을 보러갔는데, 자리다툼에 휘말린 광밍이 극장 밖으로 쫓겨나고 망연자실 서있던 푸핑을 잡아끈 사람이 노부인이었습니다. “노부인은 몹시 여위었지만, 얼굴빛은 맑고 담백해 보였다. 노부인은 옆자리 아들에게 안쪽으로 당겨 앉으라 하고서 억지로 푸핑을 자리에 앉혔다. 아들 역시 마른 편에 안경을 쓴 젊은이였다.” 그러나 그뿐 그들의 만남은 이후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푸핑은 메이자차오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아니 어쩌면 푸핑은 그들을 찾으러 메이자차오를 돌아다녔을 겁니다.

모자의 내력 또한 간단치 않습니다. 장쑤 류허(六合)에서 온 모자는 ‘중국은행’ 말단 직원이었던 가장이 장티푸스로 세상을 뜨자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가장의 고향인 류허에 가서 기탁해보지만 여의치 않게 되자 엄마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굳은 결심을 하고 상하이로 되돌아와 생활전선에 뛰어듭니다. 그녀는 남편의 옛 동료가 구해준 메이자차오 곁채 한 칸에서 머물면서, “적당하고도 안정적인 일자리는 아예 꿈꾸지도” 못하고, “고생해본 솜씨를 쌓아야 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아들을 학교에 보냅니다. 아들은 엄마의 보살핌 아래 “성적도 괜찮아 해마다 표창을 받았다.” 고등학교 진학은 하지 못하고 지역에서 일을 배정해준다 했지만 대공업지구에서 “장애인에게 적합한 수공업 공장은 아주 드물었다.” 아들은 몹시 고달프게 자랐지만 “고통 속에서 조금이나마 느꼈던 따스함은 그에게 깊고도 풍성한 인상을 남겼다.” 모자 “둘은 이렇게 조심스러웠으며, 남들에게 받아들여진 신세임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아는 밝음(自知之明)’을 가지고 눈치껏 분별 있게 굴어온 것이지요. 화자는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습니다. “약자의 자존자애(自尊自愛)란 자신의 처지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법이다.”

그는 기계 종류를 좋아해서 작은 수리공이 됩니다. 장애인 생활 보조를 받으면서 종이상자 공장 일을 하게 된 모자는 우연히 “양저우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이들과 가까워진 “푸핑은 마음이 아주 느긋했다. 이들 모자 모두 성품이 아주 안온한 데다, 이 두 사람의 처지가 자기보다 나을 게 없지만 그래도 살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서히 함께 밥을 먹는 식구(食口)가 되었습니다.

 

상하이 민족지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척된 것이 근현대화 과정이었습니다. 농민의 도시 진입은 근현대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쑨즈강(孫志剛) 사건으로 인해 2003년 중국에서는 ‘농민공 조류’ 및 ‘삼농(三農)’문제가 논쟁의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사실 농민공 조류는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랄 수 있는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1980년대 중후기부터 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개혁개방 이후 처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의 ‘농민공 조류’는 대략 1,500만 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 진입한 농민이라는 주제의식으로 중국근현대문학사를 조감해보면 중국 근현대화의 다양한 양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약 30년간의 빗장도시(gated city) 상태’에 놓여있었다고 알려진 상하이에 진입한 시골처녀의 상하이 정착이라는 점에서 왕안이의 『푸핑』은 주목을 요합니다. “당시 상하이의 호적은 들고 나기가 쉬워, 이후처럼 나가기는 쉬워도 들어가기는 어려운 때와는 달랐다.” 『푸핑』은 1964년 상하이로 진입한 시골 처녀를 초점인물로 삼아 그녀가 상하이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사회주의 시기 농민의 도시 진입 상황과 농민이 관찰한 도시 상황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푸핑』은 전작인 『장한가』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입니다. 『장한가』는 1940년대 후반 ‘미스 상하이’로 뽑힌 왕치야오의 운명과 삶의 부침을 묘사했는데, 왕치야오의 1940년대의 젊음과 사회주의 30년의 중년 그리고 포스트사회주의 시기의 말년을 통해, 상하이의 부침과 운명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민족지적 성격을 가집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푸핑』에서는 시골 처녀 푸핑을 초점인물로 삼아 문화대혁명 직전 상하이의 세 공간과 그곳 거주민의 생활상을 보여줍니다.

『푸핑』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1964년과 1965년의 상하이의 공간과 사람입니다. 작가는 이주에 초점을 맞춰 상하이인이 어떻게 이 도시에 모이게 되었는지를 묘사했습니다. 소설 속 푸핑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작은아버지 집에서 자라다가 ‘할머니’의 손자와 혼약하게 되어 상하이에 옵니다. 우리는 왕안이의 『푸핑』을 상하이 민족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 푸핑이 상하이에 진입해 화이하이루에서 쑤저우허로 그리고 다시 메이자차오로 이동하는 과정을 민족지학자의 참여관찰(participant observation)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주관이 강한 푸핑은 그다지 훌륭한 관찰자는 아니지만, 그녀는 작가가 안배한 ‘성찰적 화자’의 도움을 받아 1960년대 상하이 민족지를 완성합니다.

그녀는 수정궁 같고 영화 같은 상하이에는 서먹한 거리감을 느끼지만 자신의 노동에 의존해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친근감을 느낍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푸핑의 다스제(大世界) 나들이는 상징적이지요. 푸핑은 두 차례 나들이를 나가는데 한 번은 샤오쥔과 또 한 번은 할머니, 뤼펑셴, 치사부 등과 함께 갑니다. 두 차례 모두 그녀는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지만, 처음에는 발에 물집이 생기고 두 번째는 아예 길을 잃습니다. 조금 단순화하면 푸핑은 상하이 상징인 다스제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푸핑의 발길은 계속 주변부를 향합니다. 화이하이루에서 쑤저우허로, 그리고 다시 메이자차오로.

결혼이라는 화두와 연계시켜보면, 푸핑에게 화이하이루는 리톈화와 긴밀하게 연계됩니다. 사실 푸핑은 리톈화의 운명에 동참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지금까지 자신의 운명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녀는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하이로 왔습니다. 그녀는 결국 화이하이루를 떠나 자베이 판자촌으로 이동합니다. 그러나 거기도 안식처가 아니란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외숙모는 사람의 도리와 팔대 조상을 들먹이며 푸핑에게 돌아가라고 윽박지르지만, 푸핑은 외칩니다. “저를 낳아준 어머니는 있어도 길러준 어머니는 없어요. 팔대 조상님이 절 위해 해준 게 뭐가 있어요?” 한동안 외숙네 살림을 도와주던 푸핑은 우연찮게 메이자차오를 방문하게 되고 거기에서 종이상자에 풀칠하며 생계를 꾸리는 모자를 만나면서 그녀의 결혼 원정기는 마무리됩니다.

『푸핑』을 상하이 민족지로 본 이 글의 목표는 푸핑의 결혼 원정기를 통해 절반이 완성됩니다. 상하이 민족지로서의 『푸핑』의 두터움은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더해야 드러날 것입니다. 텍스트에는 푸핑의 약혼자 리톈화, 쑤저우 출신의 뤼펑셴, 사기꾼으로 매도되어 신장으로 도망친 타오쉐핑, 푸둥(浦東)에서 온 치 사부, 외숙 이웃인 샤오쥔, 닝보(寧波) 출신의 노부인 등 저마다 개성이 강한 인물 군상이 등장합니다. 1963년과 1964년의 상하이 민족지는 이들에 대한 참여관찰과 인터뷰 기록에 대한 심층 분석을 통해 완성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