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장한가> (3)

ycsj 2015. 2. 26. 08:05

<장한가> (3)

 

왕치야오에게는 숙녀의 꿈이 있었다. 하나는 생활 속의 숙녀(상하이 생활)였고, 다른 하나는 환상 속의 숙녀(사진관 쇼윈도 속의 왕치야오)였다. “전자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드는 것이었고 후자는 눈을 부시게 하는 것으로 제각기 귀숙처가 있었다.” 숙녀 왕치야오는 소녀 왕치야오에 비해 성공 이후, 인내심, 조용함, 나서지 않음 등을 갖추게 되었다. “그녀는 천성적으로 알고 있었다. 음이 높으면 악기의 줄이 끊어지기 쉽다는 것을. 그녀는 또 스스로 알고 있었다. 높이 올라갈 실력이 못 되면 늘 억제하고 모자라는 듯 처세하는 게 좋다는 것을. 그 효과는 비록 즉시 나타나지는 않지만 나날이 쌓여서 점점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을.” 17세의 소녀가 이런 처세술을 몸에 익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왕치야오의 독특함은 17세 때나 57세 때나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17세에 터득한 세상살이는 57세에 죽기 전까지 변함없이 그녀의 전가의 보도 노릇을 했다. 학창 시절 우페이전과 장리리는 그녀의 처세술에 좌지우지 되었고 10살 위의 청 선생까지도 왕치야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17세에 성장을 멈춘 왕치야오. 상하이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언제 어떻게 습득했는지 알 수 없는 패션과 음식에 대한 감각, 이는 왕치야오을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왕치야오의 선배격인 옌 사모님은, 먹는 것은 사람 됨됨이의 내면이고, 사람 됨됨이의 외면은 옷에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취향과 마음가짐이 옷에 드러난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옌 사모님에게는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삶의 전부인 셈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파티와 패션이다. 그것들이 이들의 출세욕과 공명심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30년은 파티와 패션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제3부에서 중점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과 이후 사이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아함에서 저속함으로의 타락이다.

천쓰허는 왕치야오가 현실 생활계 밖에 서있는 허구 인물이라 평했는데, 이는 모순처럼 들린다. 이를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잠재적이면서 실재적이다. 참고로, 관념적인 것(the ideal)은 실재적인 것(the real)에 대립하고,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은 현실적인 것(the actual)에 대립한다. 그러므로 왕치야오은 관념적인 인물이 아니라 잠재적인 동시에 실재하는 인물로 보아야 한다. 그녀들은 1940년대 이전에도 존재했고 1980년대 이후에도 존재했다. 장아이링과 옌 사모님(또는 치야오의 외할머니)이 그 전신이라면 상하이 베이비의 작가 웨이후이(衛慧)와 장융훙 등은 그 후예라 할 수 있다. 상하이 베이비의 주인공 코코 등은 그녀들의 적녀(嫡女)인 셈이다. 그녀들은 예나 지금이나 상하이의 주인으로서 상하이를 장식하고 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왔고 만들어 나갈 것이다.

장한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정치적으로 주변인이었다. 왕치야오와 옌 사모님 등 여성뿐만 아니라 청 선생, 캉밍쉰, 싸샤 등의 남성들도 그러하다. 정치 중심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리 주임은 소설 속에서는 역으로 주변인이다. 물론 왕치야오와 관련해 상당 분량의 묘사가 있지만 이는 이른바 대서사와는 거리가 있다. 심지어 해방 이전의 장리리의 부친이나 해방 이후 옌 사모님의 남편 등도 모호하게 묘사되고 있다.

작가는 여기서 작중인물의 여성-되기를 실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순한 여성 중심의 서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가 말한 소수자-되기와 연계시킬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소수적(mineure)’이란 말은 다수적(majeur)’이란 말과 반대인데, 단순히 수적인 비교를 하는 개념이 아니다. 다수자 내지 다수성이란 척도의 기준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다수적인이란 지배적인내지 주류적인이고, 언제나 권력이 함축되어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소수자-되기란 다수적인 것의 지배 권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장한가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다수이기보다는 미시 생활 속의 소수자에 가깝다.

3부에 출현하는 젊은 남성들샤오린, 라오커라 등도 정치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취향을 추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왕치야오는 좋은 스승 노릇을 할 수 있었다. 1945, 1949, 1957, 1966년 등은 중국 혁명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해이지만 왕치야오들에게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생활을 꾸려갈 뿐이다. 다만 청 선생은 예외였다.

청 선생은 탈이념적 미학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는 1930년대 상하이 모던의 선구자이자 대표였다. 여러 가지 서유럽 문물을 수용하고 향유하다가 사진 찍기로 귀결되었지만, 그것은 왕치야오를 위한 것이 되었다. 그는 친구에게 소개받은 왕치야오를 처음 만나 사진을 찍은 날부터 왕치야오의 아름다움에 반해 끝까지 왕치야오를 포기하지 못하다가 자살하기 얼마 전 자고 가라는 왕치야오의 제안을 받고 나서야 그 고뇌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중국식 사회주의의 극단이었던 문혁의 폭력에 죽음으로 항거했다. 그의 죽음은 올드 상하이의 종결을 의미한다.

청 선생의 불행을 언급하면서 한 가지 의문을 지우기 어렵다. 거의 모든 사람이 문혁의 폭력을 비켜가지 못했는데, 청 선생을 제외한 나머지 왕치야오은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서술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는 못했다는 것을 지적해두어야 한다. 특히 조금만 멋을 부려도 부르주아 반혁명분자로 매도되었던 당시 시대 분위기를 감안할 때 핑안리 주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옌 사모님과 왕치야오처럼 한껏 멋을 부린 여성들이 비판받지 않고 상하이에서 문혁을 무사히 넘긴 것이 가능했을까 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의문이다. 근현대사의 중심 상하이, 혁명사의 중심 상하이에 대한 지독한 반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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