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장한가> (2)

ycsj 2015. 2. 10. 22:34

<장한가> (2)

 

상하이대학 왕샤오밍(王曉明) 교수는 1990년대 들어 주택/부동산 시장의 팽창과 동보(同步)적으로 전개되는 상하이 도시공간의 거대한 변화에 주목한다. 그는 1980년대 이전의 6개 공간공공정치 공간, 공업생산 공간, 상업 공간, 거주 공간, 교통 및 기타 사회 서비스 공간, 공원 등의 공공 사교 공간의 구성이 개혁개방 이후 크게 변화한 사실을 지적한다. 그 변화는 공공정치 공간과 공업생산 공간이 대폭 감소하고, 공공 사교 공간은 대폭 줄어든 반면, 상업 공간과 주택 공간 그리고 정치 공무 공간이 크게 확대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왕샤오밍은 상하이의 새로운 공간을 고찰하면서 주택을 중심으로 형성된 건축 공간, ‘을 인생의 중심에 두는 심리구조, 주택과 거주를 핵심으로 하는 일상생활 방식이라는 삼위일체에 주목한다.

왕샤오밍이 도시공간구조의 거시적 변화를 고찰했다면, 왕안이가 묘사하는 공간은 미시적이다. 그녀의 초점은 룽탕에서 토굴로 그리고 다시 거리로 이동한다. 작가는 서두에서 비둘기 시점을 빌어 카메라의 줌인 비슷하게 상하이 전체를 조망하며 룽탕으로 접어들고 룽탕 입구에서 보이는 천창들, 여닫이 창문들, 기와, 베란다, 담장 들을 보여준다. 다시 스쿠먼을 비추면서 천정(天井)과 응접실을 거쳐 계단을 올라 규방, 팅쯔젠(亭子間)으로 들어간다.

비둘기는 우리에게 계속 속삭인다. 룽탕이 이 도시의 배경이라는 둥, “볼륨이 있는 공간이라는 둥, “복잡한 속내를 가지고 있다는 둥, “성적 매력이 있다는 둥. 이 속삭임은 성찰적(reflective)이다. 비둘기 시점이 룽탕에서 마지막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서서히 쌓인 가장 일상적인 정경에서 비롯된 룽탕의 감동과 룽탕의 또 하나의 경관풍문이다. 풍문은 상하이 룽탕의 정신적인 부분이자 사상이고 이다. 풍문은 속되기 마련이고 천속하며 언어의 쓰레기와도 같지만, “이 도시의 진심은 오히려 풍문 속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진심은 화려하면서도 저속하고 진주알 같으면서도 모래알 같다. 그리고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낭만성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고충과 고통을 가지고 있다.

비둘기 시점은 상하이를 조망한다는 점에서 조망자의 시점과,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발터 벤야민의 보행자(wanderer) 시점의 이점을 겸하고 있다. 전체를 조망하면서 구석구석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에게 총체적 윤곽을 제시하고 후자는 섬세한 결을 보여준다.

텍스트에서 왕치야오는 룽탕의 부모 집에서 앨리스의 아파트, 핑안리의 주택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왕치야오의 활동 반경은 이 거처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그녀가 상하이 거처를 벗어난 것은 리 주임이 죽은 후 외갓집에 간 것과 웨이웨이 및 그녀 약혼자와 함께 항저우에 여행한 것이 전부다. 왕치야오 심중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앨리스 아파트이다. 그녀는 거기에서 안정을 찾았다. 비록 상하이 내에서도 여기저기 옮겨 다녔지만 마음속의 집은 앨리스였던 것이다. 앨리스는 사교계의 꽃들의 아파트양갓집 규수와 창부 사이에 존재하고 또 아내와 첩 사이에 존재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여자만 될 뿐 아내도 어머니도 되지 않는다.’ ‘그들의 아름다운 용모는 이 도시의 재산이며 우리의 자랑이다. 앨리스는 1949년 이전 상하이의 특수한 공간이었지만 왕치야오에게는 유일한 자기 집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시기에 숨은 구조(hidden structure)로 잠재하다가 개혁개방과 함께 부활하게 된다.

2부에서는 공간 묘사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1949년 이후 핑안리 룽탕은 제2부에서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룽탕을 대체하는 것은 토굴이라 할 수 있는 왕치야오의 방이다. 이른바 신중국의 이방인들이 인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모여 자신들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그들은 잊힌 존재였고 그래서 안전했다.

공산주의 혁명의 혼혈아요 공산주의 국제화의 산물인 싸샤의 평가에 따르면 온몸에서 오래된 나프탈렌의 고약한 냄새를 풍겨대며, 구차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사회의 쓰레기 부르주아인 것이다. 그럼에도 싸샤는 그곳에서 다양한 먹거리를 맛볼 수 있고 정신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었기에 자주 들렀다. 이들은 핑안리 393층 왕치야오의 방에서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설을 쇠고 겨울에는 난롯가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 놓고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고 자신들의 삶을 영위했다. 그들은 낮 시간은 대강 때우고 밤 시간을 충실하게 보냈다.” “태양이 뜨는 한 노래하고 춤추는 그들만의 무대가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문혁 직전인 1965년도 좋은 시절이었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공간에서 밤 시간에 자신들의 삶을 영위한 것이다. 그 시공간은 더 이상 밝은 바깥이 아니라 음침한 토굴인 것이다. 싸샤의 말대로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상하이 먹거리에 관한 기록이다. 왕자사(王家沙)의 게살 샤오룽바오(小籠包), 차오자자(喬家柵)의 과자, 라오다창(老大昌)의 베이커리, 롄신탕(蓮心湯), 바전야(八珍鴨), 옌수이샤(鹽水蝦), 훙사오카오푸(紅燒拷麩), 충카오지위(蔥烤鯽魚), 친차이더우푸간(芹菜豆腐干), 청쯔차오단(蟶子炒蛋), 그리고 국제클럽, 훙팡쯔(紅房子) 등의 식당들 .

3부에서 왕치야오은 토굴에서 거리로 나온다. 이때 커다란 변화의 하나는 전차의 소실과 댄스파티 성행이었다. 후자는 마치 올드 상하이의 부활을 상징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왕치야오는 올드 상하이의 대표격으로 여기저기 초대받곤 했지만 그녀가 보기에 댄스파티는 엉망이었다. 올드 상하이를 동경했던 26세의 라오커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 둘은 더 이상 댄스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하나는 추억에 젖어 하나는 동경을 꿈꾸며 서로에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이 나이를 뛰어넘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바로 올드 상하이라는 매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는 올드 상하이에 대한 추억에 잠겨있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한 동경의 환몽(幻夢)을 꾸었기에, 현실에서 곧바로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