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

61) 중서 교류와 모던 상하이의 부침

ycsj 2010. 2. 24. 23:30

중서 교류와 모던 상하이의 부침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1842년 난징(南京)조약이 체결된 다음해 개항을 맞이한 상하이는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다. 1843년 개항 이전부터 상하이는 인근 도시의 기능을 흡수하고 있었고, 그보다 훨씬 이전인 1685년 청 강희제(康熙帝: 1662-1722)가 개방했던 네 곳의 항구 가운데 하나인 강해관(江海關)이 상하이 인근인 쑹장(松江)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 정화(鄭和)의 대항해(1405-1433)도 이곳에서 시작했다. 이렇듯 상하이의 지정학적 가치는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왔었고 1843년의 개항을 계기로 집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서 교역의 관점에서 아편전쟁 이전의 광둥(廣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40년 이전 광저우(廣州)는 국가의 공인을 받은 특허상인 ‘13공행(公行)’을 대표로 하는 광둥무역체계의 중심이었다. 이들은 서양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외교업무도 관장했다. 서유럽의 중상주의와 중국의 중화주의의 동상이몽의 현장으로서 광둥무역체계를 고찰한 리궈룽(李國榮)에 의하면, 명․청에 걸친 300년의 봉쇄 이후 강희제가 4곳의 항구를 개방한 지 70여 년 만에, 방비가 통상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건륭제(乾隆帝: 1736-1795)는 한 곳만 남기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4곳의 항구가 개방되었을 때도 서양 선박은 주로 월해관으로 입항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각 항구의 역할에 차이가 있었고 광저우의 성숙한 양행(洋行) 제도와 해안 방위 등의 조건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아편전쟁 이전 월해관은 중서 해상 교통의 중요한 교차로이자, 나라의 재화와 부가 모이는 곳인 동시에 대외무역의 전통과 해안 방어에서 특수한 지위를 가진 곳이었다. 때문에 쇄국 정책을 실시하던 때에도 특별한 공간으로 취급받아, 아편전쟁 이전 중국 대륙의 유일한 개방 항구가 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광저우는 중서(中西) 무역의 중심이 될 수 있었고 그 중심에 광저우 13행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월해관 대신 세금을 징수하는 등 관청의 승인을 받은 유일한 대외무역 대리상이었다. 그들이 광주항의 모든 대외무역을 담당했으므로, 내륙의 화물들은 반드시 그들에게 수속비를 낸 뒤 그 이름을 해관에 보고해야만 수출할 수 있었다. 행상은 많은 이익을 남겼지만, 책임 또한 무거웠다.”(리궈룽 2008, 48)

미국의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은 2001년, 지난 천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50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그 가운데 미국의 록펠러(Rockefeller, John D.)와 빌 게이츠(Gates, Bill)가 있었고 중국에서는 칭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元太祖)과 쿠빌라이(忽必烈, 元世祖) 그리고 근대의 쑹쯔원(宋子文)과 함께 오병감(伍秉鑒)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포함되었다. 오병감은 반진승(潘振承)의 동문행(同文行, 1744)에 이어 이화행(怡和行, 1783)을 연 오국영(伍國營)의 아들로, 1801년 가업을 계승한 후 1807년 광저우 총상(總商) 자리를 이어받아 행상의 지도자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같은 책, 104) 그러나 광저우는 마치 양날의 검처럼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는 동시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17-18세기 중서 무역을 총괄했던 13행은 19세기 중엽 국가 위기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는 주로 아편전쟁의 배상금 부담과 5구통상으로 인한 독점적 지위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 13행은 상업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행상들도 파산하거나 외국 상인들에게 매판(買辦)으로 고용되는 등 저마다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일부 영리하고 모험심 강한 상인들은 새로이 개항된 상하이로 가서 떠오르는 부자가 되기도 했다. 1850년대 상하이는 광저우를 대신해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 되었다. 과거 작은 어촌이던 상하이가 전국 최대의 무역항이 된 것은 광둥 상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상하이는 난징조약 이전부터 번성하기 시작했다.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8년 전인 1832년 6월 21일 영국 상선 아머스트(Amherst)호가 청나라의 금령을 깨고 상하이에 들어와 18일간 머문 적이 있었다. 그 선장 린제이는 중국 해안 경비태세를 자세히 정찰했고 훗날 영국정부에 중국 침략을 진언하기도 했다. 그가 동인도회사에 제출했던 보고서에 따르면, 아머스트호가 입항하고 일주일 동안 상하이에 들어온 상선이 400척을 넘었는데, 배의 크기가 100톤에서 400톤까지였고 선적도 톈진(天津), 푸젠(福建), 광둥(廣東)뿐만 아니라 타이완(臺灣), 류추(琉球), 안남(安南), 타이(Thailand) 등 다양했다. 개항 이전부터 상하이는 동남아시아와 교역이 이루어졌던 곳이다(진순신 2000, 206-7쪽 참조). 이로 미루어보면 상하이는 1830년대 초에 이미 국내외 해상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난징조약 직후 개항된 상하이에 가장 먼저 온 사람들은 서양인 및 그들과의 무역에 종사했던 광둥인이었고, 뒤를 이어 오랜 도시 경영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인근의 닝보(寧波)인들이 몰려왔다. 광둥인들이 상하이의 대외무역을 주도했다면 닝보인들은 주로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모던 상하이는 ‘바다가 모든 하천을 받아들이듯(海納百川)’ 광둥 무역과 닝보 금융 등의 경험을 받아들인 기초 위에 ‘몸소 서양을 시험(以身試西)’해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창안(inventing)했다.

 

 

1949년 대륙이 공산화된 후 이들 상하이 금융인들은 마오쩌둥(毛澤東)뿐만 아니라 장제스(蔣介石)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나기 위해 홍콩을 선택했다. “(상하이) 금융인들은 국민당 정권의 수탈에서 벗어나고자 최선을 다해 외국 은행의 금융기술을 익혔다. 즉, 해외로 재산을 도피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공부했던 것이다. 중국 금융 산업의 발전이 30년 앞당겨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마오쩌둥이 아니라 장제스의 이러한 테러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시그레이브 2002, 346-7) 이들은 서유럽식 금융업과 상업 실무를 습득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서양의 규칙에 따라 국제적인 금융게임에 참가했다. 그리고 금융 산업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형성된 전 세계 화교들의 국경 없는 네트워크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80년대 개혁개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의 급속한 부상은 홍콩과 타이완을 포함한 해외 화교 자본 및 그들이 매개한 자본 투자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인데, 이들을 돌아오게끔 만든 사람이 ‘상하이의 붉은 자본가’이자 ‘개혁·개방의 전도사’인 룽이런(榮毅仁)이었던 것이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선언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상하이의 민족자본가 룽이런을 발탁한 것이었다. 1949년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해방시키자 대부분 자산가들이 홍콩 등지로 도망갔으나 룽이런은 상하이를 지켰다. 그리고 그의 재산을 공산당에 헌납했다. … 문화혁명 때 하방당해 고초를 겪다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자 다시 전면에 나섰다. 빠른 경제성장을 위해 화교자본이 절실했던 덩에게 룽이런 이상의 카드는 없었다.”(박형기 2007, 39) 이처럼 모던 상하이에서 성장한 금융인들은 근현대 중국 경제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중서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 측 창구는 1840년 이전의 광저우, 1843년 개항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전까지의 상하이, 1950년대 이후의 홍콩,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의 광저우와 선전(深圳), 1990년대 이후 상하이가 중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크게 보면 주장(珠江) 삼각주와 창장(長江) 삼각주 사이를 오간 셈이다. 중국 근현대 장기지속(longue durée)의 관점에서 볼 때, 상하이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의 대외 창구 노릇을 했다. 외국인 조계와 국내외 이주를 통해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모던 상하이는 1930-40년대 이미 세계적인 국제도시의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1949년 공산화된 이후, 그 영광을 홍콩에게 넘겨주었다. 식민지였으면서도 20세기 자본주의 정점의 하나를 구축했던 홍콩의 발전은 상하이의 후견 아래 이루어졌던 셈이다. 1930년대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파리’ 또는 ‘모험가들의 낙원’으로 일컬어졌던 상하이가 왕년의 영광 회복을 선언하고 나선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푸둥(浦東) 지구 개발로 뒤늦게 개혁개방에 뛰어든 상하이는 10여년 만에 중국 최고 수준의 발전을 이루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상하이는 중국 근현대사의 진행과정을 압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따라서 상하이와 상하이인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근현대 중국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