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

[스크랩] [여기 그리고 지금]-아파두라이, 아르준(2004)

ycsj 2009. 8. 23. 08:51

*현대화->근현대화(modernization), 현대성->근현대성(modernity), 서구->서유럽, 세계화->전 지구화

 

1.여기 그리고 지금

현대성은, 보편적 적용이 가능함을 자처하고 동시에 이를 갈망하는 몇몇 이론의 소그룹에 속해 있다. 현대성에 새로운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이중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볼 때 계몽의 프로젝트가 일관성 있게 창출해온 것 중 하나는, 이미 충분히 현대적이기를 소망했었을 일단의 개인들이다. 자기 충족적이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이런 생각이론과 일상적 삶의 양 영역에서 다양한 비판과 저항에 부딪쳐왔다.(7)

어려서 봄베이 살 때, 나는 현대성을 특히 다양한 감각을 통한 종합적인 미학으로서 그리고 주로 이론에 선행하는 방식으로 경험했다. 미국 문화원의 도서관에서『라이프』지와 미국 대학들을 소개하는 안내문들, 할리우드 영화, 스탠포드 대학에 유학 중이던 형을 통해 청바지 등.(7-8)

식민지에서 해방된 봄베이에서 영국이 자신의 제국을 서서히 잃게 만들었던 작은 패배들이 나의 삶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삶의 여정. 봄베이에서 보았던 영화를 통해 구체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인 현대성에서 시작되어, 1970년대 초반 시카고 대학의 사회과학 수업에서 맞닥뜨린 이론으로서의 현대성과 대면하는 것으로 이어져 있었다.(9)

***사실로서의 현대화와 이론으로서의 현대화가 맺는 관계

 

1)오늘날의 세계

 

모든 중요한 사회적 동력에는 그 전조와 선조, 그리고 유사한 사건들과 기원이 있다. 상이한 사회 속에서 특유의 삶을 살았던 현대화의 선구자들이 자신이 역사적으로 지켜본 것들을 동시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깊은 근원을 가진 복합적 계보학 덕분이었다(3장 참조). 이 책 역시 과거 수십 년간 사회들 간의 관계를 결정지었던 일반적인 단절에 대해 다루고 있다. 변혁-사실상 단절이라 할 만한-을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은 급격한 변형에 관한 초창기의 사회학 이론들과는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10)

서구 사회학 이론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기존 이론(콩트, 마르크스, 퇴니스, 베버, 뒤르켕)의 부정적인 유산 중 하나는, 단일한 계기를 상정하고 그런 운동의 출현이 스스로를 극적 단계로 끌어올림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극적이고 유례가 없는 방식으로 구분한다는 생각을 강화시켜왔다는 점이다. 전통과 현대의 단절이라는 구도로 드러나며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본질적인 차이로 유형화되어버린 이 관점은, 변화의 의미와 과거의 정치학을 거듭하여 왜곡하고 있다.(10)

이 책은 단절rupture에 관한 이론서다. 이 단절 이론은 매체media와 이주migration를 두 가지 중요한 분석 개념으로 삼고 있으며 이 양자의 결합이 현대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자질의 하나인 상상력의 작업 work of the imagination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전자 매체가 기존의 대중 매체 전반은 물론, 여타의 전통적인 매체의 영역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살펴볼 것이다.(10)

전자 매체는 상상된 자아와 세계를 구성하는 새로운 자원들과 원칙들을 제공함으로써 대중 매체의 장(場)을 변형시킨다. 이는 상관적인 문제다. 전자 매체는 좀 더 광범위한 영역을 재구성하며 특징짓는다. 그 속에서 활자 매체와 그 밖의 매체들, 예컨대 구술적·시각적·청각적인 매체는 여전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새로운 전자 매체는 뉴스를 시각·청각적인 전자 단위로 압축하여 전송하고, 영화 관람이라는 공적인 공간들과 비디오 시청이라는 사적인 공간들 사이의 긴장을 조성하며, 사회적 담론의 영역으로 스스로를 즉각적으로 병합시킨다. 또한 매혹적인 것, 세계주의, 새로운 것들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통해 전자 매체는 뉴스와 정치, 가족생활, 스펙터클 오락의 어느 것과 결합되건, 자기와 다른 상황적 능력 contextual literacy에 간섭하고 그것을 역전시키며 변형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이와 같이 세계 내에 존재하는 기존의 소통과 행위 양식을 전자 매체가 어떻게 변형해내는가를 살펴보려 한다.(11)

전자 매체는 현대화가 곧 세계화 globalization인 것처럼, 다시 말해 현대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이 동전의 양면처럼 나타나는 환경에 새로운 변형을 일으킨다. 전자 매체는,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의 관찰자 간에 항상 거리감을 조성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담론의 변형을 강제한다. 또한 전자 매체는 모든 사회와 개인에게 자아를 형성해내는 실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전자 매체를 통해 개인들은 자신의 삶을 은막의 스타들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삶을 시나리오로 삼아 공상영화를 만들 수도 있으며, 뉴스쇼와 다큐멘터리의 그럴듯함이나 흑백이 뚜렷한 전자 매체와 활자화된 텍스트 양식에 자신을 얽어매기도 한다. 전자 매체는 형식의 순전한 다양성(영화, 텔레비전, 컴퓨터, 전화)과 일상의 단조로움을 관통하는 속도로 인해, 한 인간이 일상의 사회적 기획 everyday social project으로서의 자기 이미지를 만드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11-2)

매체의 경우는 이주에도 적용된다. 대량 이주에 관한 이야기는 인류사에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이주 문제가 대량으로 유통되는 이미지와 가상적인 대본들 혹은 대중적 감각 등의 급속한 흐름과 연합될 때, 세계는 현대적 주체성의 생산에 있어서 새로운 방식의 불안전성을 갖게 된다. … 현재의 세계에서, 우리는 재빨리 옮겨 다니는 이미지들과 탈영토화된 관객들이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이산(離散)된 공공 영역들 diasporic public spheres을 창출해내는데, 이는 중요한 사회 변동에 관해 전통적으로 최종적인 조정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 국민국가의 중요성에 입각해 있던 이론들을 무력화시키는 현상이기도 하다.(12)

간단히 말해 전자 매체의 등장과 대량 이주 현상은, 현재의 세계가 단순히 기술적으로 새로운 흐름에 직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작용을 요구하는(때로는 강제하는) 새로운 종류의 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관찰자와 이미지들이라는 두 요인은 동시에 순환하며 특유한 불규칙성을 만들어낸다.(12)

사람들과 이미지들은 예견치 못한 장소, 다시 말해 지역이나 국가 단위의 대중 매체가 쳐둔 방역선과 내 지역의 확실함 certainties of home 바깥에서 서로 마주치게 된다. 대중 매체에 의해 중개된 사건들과 이동 중인 청중들의 이와 같은 관계야말로 세계화와 현대화의 핵심이 된다. 이 책에서 나는 상상력의 작업이 이런 문맥 속에서 볼 때, 순수하게 해방적인 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규율에 종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오히려 상상력의 작업은 논쟁하고 경쟁하는 공간이며, 그 속에서 개인들과 집단은 그들이 실천하고 있는 현대성을 세계적인 것과 결합시키려 한다.(13)

 

2)상상력의 작업

 

집단적인 재현은 개인의 의지를 초월한 현상으로서, 사회의 도덕성을 대변하는 힘으로서 규정되었으며, 객관적인 사회적 사실로서 간주되었던 것이다.(13)

지난 수십 년간 하나의 변화. 이 변화는 지난 세기 전체에 걸쳐 일어난 기술 변화에 입각해 있는데, 이 시기에 상상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사실로서 형성되어왔다. 이러한 발전은 이제, 상상된 세계들의 복수성의 토대가 되었다.(14)

피상적으로 보면 현대화된 세계에 와서 상상력의 역할이 새로워졌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되어 보인다.

우리는 결국 평범한 사회적 삶이 덧없다고 말하는 온갖 종류의 예술과 신화, 전설들을 모든 사회가 나름대로 생산해왔다고 생각하는 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들 속에는 각각의 사회가 상상 속에서 사회적 삶을 재가공하는 다양한 종류의 신화들을 통해 평범한 사회적 삶을 초월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었음이 잘 드러난다.

심지어 가장 단순한 사회의 개인들조차 자신의 사회적 삶을 재구성할 공간을 꿈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꿈속에서 그들은 금지된 정서적 상태와 감각들을 향유할 수 있었고, 일상적인 삶의 감각 바깥으로 넘쳐흐르는 사물들을 볼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모든 표현들은 상상력과 제의(祭儀) 사이의 복합적인 대화를 가능케 하는 기반으로 작동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과정은 대개의 제의가 요구하는 상태들, 즉 일종의 도착 상태나 아이러니, 수행 과정에 대한 열정적인 집착, 협동 작업 등을 가능케 함으로써 일상적인 사회적 규범을 한층 강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모든 사실들은 지난 세기의 가장 뛰어나며 모범적인 인류학적 저작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는 것들이다.(14)

후기 전자 기술의 세계 내에서 상상력이 새로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세 가지 근거를 갖는다.

첫째, 상상력은 예술과 신화, 제의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 내의 평범한 다수들이 수행하는 일상적인 정신적 작업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효율적으로 격리되었던 일상적인 삶의 체계 속으로 상상력이 침투해 들어간 것이다. 물론 여기엔 선조들이 있었다. 위대했던 혁명들과 적하(積荷) 숭배에서, 그리고 모든 시대의 해방적 운동 속에서 강력한 지도자들은 그들의 비전을 사회적인 삶 속에 새겨 넣고자 했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변혁을 향한 강력한 운동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 평범한 개인들이 일상적 삶의 실천 속에 상상력을 배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주와 매체가 이루는 상호 문맥적인 현상 속에서 잘 예증된다.(14-5)

희망의 이산과 공포의 이산, 혹은 절망의 이산.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러한 이산들은 기억과 더불어 욕망으로서의 상상력을 다수의 평범한 개인들의 삶 속에, 그리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신화나 제의의 원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화 예술 mythographies 속에 끌어들인다. 종래의 것에 비해 새로운 신화 예술이 갖는 핵심적인 변별점은, 그것이 단지 일상적인 삶의 확실성과 대조가 된다는 점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기획을 위한 하나의 시안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신화 예술은 아비투스(habitus)가 가진 냉담한 힘을 변모시켜 다수가 함께 엮어내는 즉흥적인 시의 뜨거운 박동을 만들어낸다. 대중 매체의 중개를 거쳐 산출되는 다양한 이미지들과 문자들, 모델들과 서사들은 오늘날의 이주와 과거의 이주를 선명히 구분케 하는 특징이 되고 있다. … 대중 매체에 의해 중개되는 상상력의 힘은 이주자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범위 또한 이미 국가의 영역을 뛰어넘고 있다.(16)

두 번째는 상상과 환상 fantasy이 다르다는 점이다.

지난 60년간의 현대화 이론가들의 통념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종교성의 영역이 점차 감퇴하는 시기였다. 놀이 문화 또한 쇠퇴했으며 모든 수준에서 자발성이 억제된 시기이기도 했다. …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 번째 오류는 종교의 사망과 과학의 승리를 너무 일찍 선언하였다는 점이다. … 두 번째 오류는, 전자 매체를 대중의 아편으로 규정하려 했다는 점이다.(16-7)

전 세계에 걸쳐 이루어지는 대중 매체의 소비가 종종 저항과 아이러니, 선택 가능성,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행위 agency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17)

현대 사회에서 소비한다는 것은 일종의 단조로운 노역의 반복에 불과하며, 이는 자본주의화된 문명화 과정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쾌락이 있으며, 쾌락이 있는 곳에서는 항상 행위가 존재한다. 자유는 어찌 보면 다루기에 까다로운 상품일 뿐이다.(18)

환상이라는 개념은 현실적인 기획이나 행동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며, 무언가 사적이며 심지어는 개인적이기까지 한 반향이 그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상상력에는 현실적인 기획이라는 감각이 존재하며 그것이 미학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든, 특정한 유형의 표현으로 나아가려는 단초라고 느껴진다.

환상은 허공 속에 흩어져버리지만(환상은 자기 충족적인 체계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그렇지 않다. 특히 상상력은 그것이 집단적일 경우 행위를 격발시키는 강력한 연료가 된다. 동네 주민이라는 것과 국가의 국민이라는 것, 윤리적인 경제와 불법적 지배, 더 높은 임금과 외국인 노동자의 장래라는 생각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집단적인 형식을 띤 상상력이다. 오늘날 상상력은 도피의 수단이 아니라 행위의 무대다.(18-9)

세 번째는 개인적인 의미에서의 상상력과 집단적인 의미의 상상력 간의 차이다. 상상력은 특수한 개인에게 선천적으로 부여된 능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단의 자산으로서도 기능하며, 이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 이른바 ‘정서적 공동체 community of sentiment’란 개념(Appadurai 1990)은 함께 상상하고 사물을 감각할 수 있는 집단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글읽기와 비평 및 향유의 집단성이라는 조건하에서 대중 매체가 만들어낼 수 있던 것 중 하나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잘 설명했듯이 인쇄자본주의는 한 번도 대면해본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동일한 정체성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중요한 매체로 기능할 수 있었다.(19)

전자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또 다른 형식들 역시, 이와 유사하면서 좀더 강력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 매체들은 국가의 경계 내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와 비디오 같은 종류의 대중 매체를 집단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강렬한 숭배심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닌 광범위한 공동체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19) * 인터넷을 통한 전자민주주의

보이지 않는 대학(invisible colleges-과학이 지배하는 세계를 지칭: Diana Crane, 1972)이라는 개념과 유사.(20)

이 공동체들은 즉자적으로 발생한 것이지만 항상 대자적인 단계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상상력의 공유로부터 행동의 공유로 나아갈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다. … 이 공동체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들이 국제적인 성격, 심지어는 탈국가적인 성격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개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작동한다.

대중 매체에 의해 생성된 이런 공동체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이들이 각자의 취향이나 쾌락 또는 정치적인 성향이 갖는 지역적인 특성과 경험을 서로 나눌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초지역적인 사회적 행동으로 전화되는 가능성들을 갖는다는 점이다.(20)

Salman Rushdie 사건: 『악마의 시 The Satanic Verses』

전자 매체와 대량 이주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급격한 단절에 대한 나의 접근은 명백히 초국가적이며 심지어 탈국가적이기조차 하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으로 나의 작업은 고전적인 현대화 이론과는 엄밀하게 구분된다.(22)

더 이상 현대화 기획은 자유적인 국민국가에 의해 독점되지 않는다. 대중 매체와 초국가적 이동이 이 독점적 지배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전자 매체와 상상력의 작업이 이룩해내는 일상적인 주체성의 변형은 단순히 문화적인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애착, 관심, 열망이 점차 국민국가의 그것들을 가로질러 잘라내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인 주체의 변형은 매우 깊이 정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24)

이러한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이산(離散)된 공공 영역들은 … 대개의 국가들과 대륙들에 소재한 도시 내에서 문화적인 삶의 활기찬 부분이며 그 속에서 이주와 대중 매체의 중개는 현대적인 것으로서의 전지구화와 전지구적인 것으로서의 현대화라는 새로운 의미를 재구성해내고 있다. Mira Nair, <Mississippi Masala>(24)

이산된 공공 영역들의 다양한 종류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화한 현대를 구별 짓는 하나의 특별한 표지다.(25)

 

3)인류학의 시각

 

인류학은 일종의 저장고다. 그것은 나와 매우 다른 종류의 다양한 인생을 살고 있거나, 살았던 삶의 주인공들에 대한 민족지(民族誌 ethnography) 속에서 발견되는 산 체험들의 저장고다.(25-6)

인류학의 다양한 장점들: 유사성이 항상 하나 이상의 차이들을 은폐하고, 또 유사성과 차이는 서로를 무한히 은폐하고 있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방법론상의 편리함이나 끈기를 가진 존재만이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인류학과 인류학 전문가들이 이런 자료들에서 만들어내는 감수성에 기대어 말하자면 나는 세계화가 문화적 동질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고 본다. … 그러나 인류학은, 많은 실천 중에서도 문화적인 것이야말로 다른 것을 변별하는 핵심적인 기준이라고 특권을 부여하는 전문적인 경향이 있다.(26)

문화 culture-명사형, 실체-문화실체론

명사형인 문화란 개념은 … 문화를 일종의 대상이나 사물로서, 혹은 실체로서 간주하려는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 정신적 실체라는 함의를 통해 명사형 문화는 불평등한 지식과 삶의 양식들이 갖는 위계질서의 현존이라는 엄연한 사실들을 외면한 채 공유와 동의, 결속 등의 개념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그것은 삶의 변방으로 내몰리거나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관과 관심을 약화시킨다. 물질적 실체라는 관점에서 문화를 정의하려는 태도에는 인종 문제를 포함한 생물학적 결정론의 냄새가 나며 이는 과학적 범주로서는 이미 폐기된 것에 불과하다.(27)

문화적 cultural-형용사적, 국면

형용사로서의 문화적이라는 개념은 전혀 다른 영역, 즉 차이들과 상반되는 것들, 비교 가능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연구자를 데려감으로써 좀 더 유용한 결과를 낳는다. 문화의 형용사적 의미는 현상이 갖는 문맥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위에 위치하며, 소쉬르적인 언어학에서도 나타나듯이 차이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 위에 있다. 이런 정신이야말로 구조주의의 덕목 가운데 하나인데, 우리는 구조주의가 비역사적, 형식적, 이항대립적, 정신적이며 텍스트 간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덕목을 잊는 경향이 있다.(27-8)

문화라는 개념이 안고 있는 특질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바로 차이라는 개념이다. 차이는 어떤 사물이 지니고 있는 실체적인 질을 나타내기 보다는 다른 사물과의 대조 가운데서 나타나는 비교적인 특성을 말한다.(28)

문화는 그것이 실체로 간주되는 한 유용한 개념이 아니다. 차라리 문화는 현상의 한 국면, 즉 상황이나 육화되는 정도에 따라 차이를 갖는 하나의 국면으로서 간주될 때 좀더 유용한 개념일 수 있다. 실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국면으로서의 문화라는 관점을 가지면, 문화를 더 이상 개인들과 집단의 산물로 간주하지 않게 되고, 우리가 차이들에 대한 대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발견적인 도구로 문화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28)

나는 문화적이란 용어를 통해 특정한 차이들만을 지칭하고자 하는데, 이 차이들은 집단적 정체성의 동원을 표현하거나 그것에 기초를 제공하는 것들만을 지칭한다. 이런 방식으로 차이를 규정하게 되면 우리는 대단히 거친 선택 기준을 갖게 된다. 그런 원칙을 따르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사회 집단의 안팎에 존재하는 집단 정체성 group identity과 관련되어 있는 다양한 차이들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집단적 정체성의 동원 현상을 문화적인 것의 핵심에 둠으로써, 나는 사실 외관상으로는 반동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 내가 문화라는 단어를 민족성 ethnicity이라는 관념과 유사한 무엇인가처럼 사용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29)

문화에 대한 형용사적 접근 방식. 이런 접근은 문화가 갖는 상황적이고 contextual 자기 발견적이며 또한 비교 가능한 차원들을 강조하고, 차이로서의 문화 특히 집단 정체성의 영역 안에서 차이로서의 문화라는 개념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 집단 정체성이라는 다양한 개념을 만들어내기 위해 차이들을 착취하는 인간 담론이 사람들에게 스며든 것이 바로 문화라고 나는 제안한다.(29)

민족성-자연화된 집단적 정체성-이라는 관점

문화와 집단 정체성이 맺는 관계. 제한되지 않은 의미에서의 문화는 오늘날의 세계가 보여주고 있는 과도한 차이들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개념일 수 있다. 오늘날 차이들은 다양한 수준과 가치들을 가지고 있으며 좀더 진폭이 큰 사회적 결과를 낳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문화의 개념을 이와 같이 다양한 차이들의 부분집합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축약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문화는 차이의 경계를 명료하게 분절해내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좀더 작은 집합체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므로 경계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문제로서 문화는, 다양한 차이들 가운데 몇몇 차이들로 구성되는 집단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30)

내가 말하고자 하는 민족성의 핵심은 차이들을 의식적이며 상상에 입각한 방식으로 주조하고 동원해내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차이들의 열린 저장고로서 구성되는 문화 1은, 집단의 정체성을 그려내는 표지들을 구성하는 차이들의 부분집합으로 존재하는 문화 2의식적으로 변형된다.(30-1)

하지만 특정한 차이들을 동원해 이들을 집단 정체성과 연계시키는 이같은 과정은 또한 민족성과도 다르다. 최소한 민족성에 대한 상대적으로 오래된 관점에 따르면 그러하다.(31)

집단 정체성의 관점에서 특정한 차이들이 자연스럽게 조직화된 결과로서 문화를 보는 것, 즉 문화를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나타나 형성되었으며 실천적 요인과 구조적 요인들 사이의 긴장 속에서 조직된 결과로 간주하는 것은, 민족성을 원시적인 감정들의 귀결로 보는 태도와는 상반된다. 그것은 이른바 민족성을 도구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전도에 대해 두 가지 특징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문화주의에 대한 해명으로 귀결된다.

첫째, 민족적 정체성을 도구적인 개념으로 사용한 결과는 현재 차이의 가치를 안정시키려 하는 데 대한 반구조적인 대응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은 베버적 의미에서 도구 합리적이기보다는 가치 합리적일 것이다. 이 관점은 문화 외적인 도구성(정치적, 경제적, 정서적인)이 아니라 순수하게 정체성에 정향된 도구성을 갖는다.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면, 집단적인 차이들을 드러내는 요인들을 동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차이의 가치에 대한 논쟁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사회적 부나 안전 혹은 권력에 대해 차이가 만들어내는 결과 따위에는 무관심하다.(31-2)

둘째, 대개의 도구적 관점은 내가 보기에 집단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동원되는(결과적으로 또 다른 목적에 종속되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차이의 기준이, 어떤 과정을 통해 육체를 가진 주체들에게 (재)각인되고 결과적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대단히 선동적인 방식으로 체험되는가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32)

실체로서가 아니라 차이들이 나타나는 국면, 차이에 기반한 집단 정체성, 집단 정체성을 정의하기 위해 동원된 차이들의 부분집합을 자연화하는 과정으로 문화를 간주하는 것은 확실히 한 단계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32)

문화주의 culturalism라는 용어는 단독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다. … 그러나 문화주의란 용어를, 바로 지금 매우 자각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운동들의 특징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것도 유용하리라 생각한다.(32)

문화주의란 단순하게 말한다면 국민국가 수준에서 동원되는 정체성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7장…에서 나는 지난 10년간의 민족 분쟁에 대한 근본주의적 관점을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다. … 다양한 장소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민족 분쟁은 문화주의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좀 더 광범위한 변형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 문화주의는 좀더 큰 국가적이며 초국가적인 정치학의 필요에 의해 문화적 차이들을 의식적으로 동원하는 현상이다. 문화주의는 매우 빈번하게 치외법권적인 역사 혹은 기억들과 연관되어 있고, 때로는 피난민들의 지위와 망명자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대개의 경우 현존하는 국민국가나 다양한 초국가적 기구로부터 좀 더 확고하게 인정받으려는 투쟁과 연관되어 있다.(33)

문화주의적인 운동은 상상력의 작업이 취하는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며, 종종 이주와 분리라는 사실 혹은 그 가능성에 의존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운동들이 정체성과 문화 및 유산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체성과 문화 및 유산은 문화주의적 운동이 국가나 여타의 문화의 현안 혹은 문화 집단과 투쟁할 때 항상 동원되는 중요한 어휘들을 구성한다. 문화주의에 입각한 운동은 다양한 양상으로 타나난다. 그러나 이들을 문화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바로 문화적 자산들을 신중하고 전략적이며 대중적인 방식으로 동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방식은 다양할 수 있지만 말이다. … 그 어떤 집단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문화주의적 운동이라도 모두 반국가적이고 문화의 경계를 넘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 정신은 동일하다. … 광범위한 의미에서 문화주의는 대중 매체와 대량 이주 및 세계화의 시대에 문화적 차이들이 취할 수 있는 전형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다.(33-4)

 

4)지역 연구는 어떻게 수행되었는가

 

인류학 분과 내에 문화 지역이라는 생각이 등장한 것은 양 세계 대전 사이였다. 지역 연구라는 분과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개발도상 지역이 갖는 전략적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방법으로까지 완전히 자리 잡았다. … 이 두 관점(인류학적 관점과 지역 연구의 관점)은 집단과 그 삶의 방식을 특징짓는 문화적 차이를 기입한 특별한 지도를 그리려 하고 있으며, 지역 연구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차이들이 민족적인 문화 차이의 지형학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34-5)

이에 따라 지리적 구분과 문화적 차이, 국경이 같은 모습을 갖게 되며, 세계상을 국가-문화 단위에서 그린 지도를 통해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지역 연구는 이와 같은 공간적 상상력에 연구에서 얻은 정보의 전략적 중요성이라는 커다란(비록 때로는 암묵적이기도 하지만) 의미를 공간적 상상력에 중첩시킨다. 2차 대전 이후 확장되어온 대학 내에서의 지역 연구 기관과 냉전, 정부의 기금이 맺은 연대는 이런 관점에서 설명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연구는 … 흔히 규범적인 사회학을 떠받치고 있다고 간주되는 관점들의 현혹에 맞서는 균형추로서 기능해왔다.(35)

1945-1989년 동안 미국 내에서 진행된 지역 연구들은 미국의 대외 정책적 필요에 의해 밑그림이 그려진 전략의 소산이었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대학과 재단, 싱크 탱크의 운영자들과 심지어 정부조차도 과거의 지역 연구 방식은 1989년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연구로 고무된 좌파 비평가들과 시장주의자들 및 자유화를 옹호하는 이들과의 연합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기존의 지역 연구 성과들에 대해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편협성과 역사 물신주의의 결과물이라고 조소하면서 비난한다.(35-6)

지역 연구의 전통은 일종의 양날 검과 같다. 악명 높게도 예외적인 것에 헌신하고 ‘미국적인 것’에 대한 끝없는 선입견에 빠져 있는 사회에서, 지역 연구의 전통은 외국어와 대안적인 세계관에 대한 진지한 연구 그리고 유럽 사회와 미국 외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회·문화적인 변동에 관한 광범위한 전망에 대한 연구가 숨쉴 수 있는 매우 협소한 도피처였다.

지역 연구는 (좁고 엄격한 의미에서의) 문헌학으로 나가려는 경향이 있고 전문적인 문헌학과 과도하게 스스로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연구는 미국 학계, 좀더 광범위하게는 미국 사회의 일반적 경향인 세계의 거대 지역들을 주변부로 간주하려는 지속적인 경향에 대해 몇 안 되는 성실한 균형추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지역 연구는 고유의 세계 해석 내에 안주하고 있다는 점과 전문가적인 과정 자체를 안전판으로 삼고 있다는 점, 현재 및 과거에 진행되었던 초국가적 영향 관계에 지나치게 둔감했다는 점 등에서 한계를 갖는다.

따라서 비판과 개혁은 불가피하다.(36)

지역 연구는 세계화가 그 자체로 역사적인 과정이며 균일하지 않은, 심지어 지역화localizing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건전한 상식의 원천이다. 세계화가 반드시, 심지어는 대개의 경우에서조차 동질화나 미국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이한 각각의 사회들이 현대성의 물질적인 토대를 자신들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듯이, 다수의 지역들과 역사들, 언어들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를 심화시킬 수 있는 공간은 많이 남아 있다. … 장기 지속 longue duree문화적 형식의 계보학이 상이한 지역을 순환하는 문화에 관한 것이라면, 형식들의 역사학은 형성된 형식들이 지역적인 단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정착해 들어가는가를 묻는 학문이다. 형식이 만들어지고 정착되는 이와 같은 역사적이면서 계보학적인 과정은 균일하지 않으며, 다양하고 우연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맥이라는 냉혹한 원칙으로서의 역사(E.P. Tompson)만이 존재하게 된다. … 만일 지역 연구의 전통이 다시 활성화되어야 한다면, 중요한 것은 지역적인 것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며, 지역성이 자신을 드러내게 되는 역사적 과정이 세계의 역동적인 흐름에 점차 종속되어가고 있음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순전히 지역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밝히려고 하며, 이는 마지막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37-8)

적어도 이 책에서 인도는 단순한 사례 이상이다. 인도는 지역적인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전지구화된 세계 속에서 부상해 나오는가를 잘 보여주는 특수한 장소site 이다. 식민화의 과정이 현재의 정치를 어떻게 인증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인 동시에, 역사학과 계보학이 어떻게 서로를 굴절시키는가를 보여주며, 전지구적 사실이 어떤 방식으로 지역적 형식을 띠고 나타나는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인 것이다.(38)

나는 국민국가 시대의 종말이라고 간주되는 시대감각에 의해 추동되고, 세계화를 탐구하기 위해 쓰는 책의 최종적인 참조점을 국민국가(nation-state)에 두는 일의 아이러니(혹은 모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학문적 한계와 전공은 동전의 양면이다. 독자들에게 바라기는, 인도를 파편화된 사회적 사실이나 조잡한 민족주의의 반영물로 보지 말고 하나의 프리즘으로 봐달라는 것이다.(38-9)

세계화에 대한 글쓰기란 특히 미국의 대학 연구소 같이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환경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경우, 일종의 심하지 않은 과대망상증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과대망상증은 특정한 지식 형식을 통해 자신을 가공하는데, 그 경우의 지식 형식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나의 경우는 이 지식 형식(인류학과 지역 연구)으로 인해 습관적으로, 움직이는(지) 않는 차이들의 지도 위에 실천들·공간들·국가들을 기입하게 되었다. 이런 습관은 직관이 아니라 사실의 차원에서 이런 책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국가들과 이념들, 사회적 운동들 간의 연관성이 갖는 이산(離散)과 탈영토화, 비규칙성에 대해 의식적으로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39)

 

5)애국심 이후의 사회과학

 

마지막으로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에서 당대의 가장 뛰어난 사상가들을 단련시켰던 현대 세계의 문제, 즉 국민국가nation-state와 그 역사, 국민국가가 현재 겪고 있는 위기와 미래에 대해 말해보도록 하자. 국민국가의 위기가 책을 쓰게 된 동기 자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글을 써가던 6년 동안 나는 현대가 낳은 복합적인 정치적 형식으로서의 국민국가가 최후의 단계에 와 있음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39)

이 책에서 나는 국민과 국가를 결합하고 있는 연결 부호(-)에 일관된 관심을 표명하였는데, 이는 국민국가의 시대가 이제 막 그 종결점에 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진전된 논의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러나 이 관점은 예측과 진단의 사이, 또는 직관과 정밀한 검토의 사이 어디쯤인가에 존재하는 것인 만큼 꼼꼼히 살펴야 하는 것이다.

첫째, 나는 이 책의 논의에서 분석적인 요소와 윤리적인 요소를 구분하고자 한다. … 내가 종종 부딪히는 윤리적 의문은, 만일 국민국가가 소멸한다면 사회적 소수들은 누가 지킬 것이며, 민주적인 권리의 최소한의 배분이나 시민사회의 합리적인 성장 가능성은 누가 수호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대답은 알 수 없다, 이다. … 대안적인 사회적 형식과 가능성들에 대해서라면, 초국가적인 연합과 연대라는 좀더 다양하게 이산된 형식의 씨앗들을 간직하고 있는 기존의 사회적 형식들과 장치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 물론 초국가적 운동들의 다양한 형태로부터 지속적인 초국가적 통치의 형식으로 나아가는 길이 절대로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한다.(41)

윤리적 입장이 다소 분명치 못하지만, 분석적인 입장은 비교적 선명.

주권을 위협하는 중요한 요소들, 국가의 정당성은 빈번하게 훼손, 미국·일본·독일 등도 인종과 권리의 문제나 구성원으로서의 지위와 복종의 문제, 시민됨과 권위 사이의 논쟁은 이미 문화적으로 일반화된 문제(42)

한쪽에서는 명백하게 안정적이고 합법적인 경우들에 의존하여 국민국가 형식의 지속성에 대한 논의를 펼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특히 동유럽의 사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류의 인종 혹은 민족주의에 기반하여 상반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42)

동유럽은 현안이 되고 있는 인종적 민족주의 일반의 복합성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취급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동유럽, 특히 세르비아계는 영토와 언어, 종교, 역사 및 혈통이 다 함께 일치하는 민족주의에 대한 계속되어온 열망의 한 사례로서, 민족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과서적 사례로서 여겨지고 활용되어왔다.(43)

대항민족주의나 분리주의, 초국가주의, 인종적 기획의 부활 등에 있어서 대개의 경우 일반적인 경향은 영토상의 주권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결권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팔레스타인의 경우에서처럼 영토상의 문제가 핵심적인 사안이 될 경우에서조차 영토와 국경 문제는 권력과 정의 및 자율권의 쟁취라는, 보다 핵심적인 논의의 기능적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43)

*‘보스니아의 오류’

보스니아 사태 당시 사람들이 동유럽의 인종적 분쟁을 부족주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오인한 것으로서, 그 선두에『뉴욕 타임스』가 있었다.

보스니아 사태를, 부상하고 있는 민족주의 일반의 모범적인 사례로 간주함으로써 오류를 증폭시킨 것이다.

*보스니아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부유한 북반구 국가들의 정치 체제 자체가 이미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민족주의의 부상은 배타적이지도 않고 근본적으로 영토적이지도 않은 애국심에 기반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44)

국민국가가 최종적인 위기 단계로 진입함에 따라 국민국가 이후의 상상력, 이른바 탈국가적 상상력을 가능케 할 물질적 지반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이 틀림없다는 예상을 해볼 수 있다.(44-5)

여기에서 내가 판단하기에 우리는 대중적인 매체들과 이주 현상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이산된 공적 영역이라 이름 붙인 것들의 다양한 부상에 좀더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앤더슨의 사례. 상상력의 작업과 탈국가적 정치 체제의 출현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존재한다. … 대중 매체가 이미 전자 매체에 의해 점차 대체되고 있고(결과적으로 읽고 쓰는 능력과는 점점 무관해지고 있다), 전자 매체에 힘입어 생산자와 청중들 사이에서는 이미 점차 국경이라는 개념이 소멸하고 있으며, 청중들 자신이 이미 이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주해 있는 사람들과 새로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함에 따라, 우리는 이산된 공적 영역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발견한다.(45)

이슬람 세계는 국가 간 경계와는 무관한 온갖 종류의 논쟁들과 기획들의 전모를 잘 보여주는 가장 친숙한 사례다. 과거에는 명백히 민족적이었던 종교가 현재에는 전지구적 사명을 추구하고 있으며, 전 세계로 흩어진 고객들을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다.

세계 종교로서 힌두교가 지난 10년간 보여준 경향은 매우 적절한 예다. 환경 문제와 여성 문제, 인권 문제 등과 연관된 행동주의적 운동들은 국경을 넘는 담론의 새로운 영역을 창출했으며, 이는 대개의 경우 피난민들과 추방된 이들, 배제된 개인들의 윤리적 존엄성에 의존하고 있다.

국경을 초월하는 대표적인 분리주의 운동들, 예컨대 시크교도들과 쿠르드 족, 스리랑카의 타밀 족 운동들은 일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이산된 공적 영역 내에서 다양한 새로운 매듭들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세계 도처에서 자신들의 이미지를 다듬어 나가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던 다문화주의 논쟁은 자국 내의 소수파들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소수파가 국경을 넘어 종교적, 인종적 연합에 참여하는 것을 정부가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예를 통해 보건대, 전형적인 의미에서든 필요에 의한 것이든 국가적인 성격을 지녀야 살아남는다고 했던 공적 영역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46)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는 이산된 공적 영역들은 탈국가 시대의 정치가 그 속에서 자신을 검증하지 않을 수 없는 가혹한 시련의 도가니이다. 이들의 담론을 추동하는 엔진은 대중 매체(상호작용적이며 표현적인)인 동시에 추방자들, 행동가들, 학생들 및 노동자들의 운동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탈국가 시대의 세계 질서는 동질적인 단위들의 체계(국민국가들로 구성된 현행 체제가 그러하듯이)가 아니라, 이질적인 단위들(사회 운동과 이익 단체, 직업적인 집단, 비정부 기구들, 무장된 경찰들, 사법 집단들) 간의 관계 위에 기초한 체계라고 할 수 있다.(46-7)

미래의 세계가 어떤 운명을 겪을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카데미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협상(호의에 입각한 것과 격렬한 것 모두를 포함하여)을 통해, 즉 상이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들과 운동 단체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세계상들 사이의 협상을 통해 주어질 것이다.

단기간을 예측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예감하듯이 다가오는 세계는 무례함과 폭력이 가득 찬 세계가 될 가능성이 많다.

긴 안목에서 보면, 국가라는 형태에 구속되지 않을 뿐 아니라 국민국가라는 단일하고 일반적인 현존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문화적인 자유와 지속 가능한 정의가 세계 내에 충분히 발현될 수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완성되지 않은 가능성이야말로 여전히 ‘확산 중인’ 현대성 속에서 살고 있는 삶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일 것이다.(47)

 

출처 : 중국의비판적문화연구
글쓴이 : ycsj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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