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발제

스티븐 샤비로, 2024, 2022, 2021

ycsj 2024. 3. 28. 12:15

 

샤비로, 스티븐, 2024, 『기준 없이―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 이문교 옮김, 갈무리. 2024-02-24

원제 : Without Criteria: Kant, Whitehead, Deleuze, and Aesthetics

샤비로, 스티븐, 2022, 『탈인지―SF로 철학하기 그리고 아무도 아니지 않은 자로 있기』,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2-10-22

원제 : Discognition

샤비로, 스티븐, 2021, 『사물들의 우주―사변적 실재론과 화이트헤드』,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1-12-06.

원제 : The Universe of Things: On Speculative Realism

 

 

샤비로, 스티븐, 2024, 『기준 없이―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 이문교 옮김, 갈무리. 2024-02-24

원제 : Without Criteria: Kant, Whitehead, Deleuze, and Aesthetics

 

책 소개: 『기준 없이』에서 스티븐 샤비로는 하나의 철학적 공상을 제안하고 탐험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대신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탈근대 사유를 위한 지침이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이데거의 물음은 이런 것이다. “어째서 차라리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반면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어째서 늘 새로운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 대중음악에서 DNA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샘플링되고 재조합되고 있는 세계에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의 질문이야말로 진정 긴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준 없이』는 탈근대 이론, 특히 하이데거가 아닌 화이트헤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관점에서 감성론/미학 이론을 다시 사유하면서 행하는 샤비로의 실험이다.

샤비로는 화이트헤드를 질 들뢰즈와 연관시킨다. 화이트헤드와 들뢰즈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공명과 친화성을 찾아내고, 화이트헤드에 대한 들뢰즈적 독해와 들뢰즈에 대한 화이트헤드적 독해를 제안한다. 또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관념들을 통해 작업하면서 칸트를 참조한다. 샤비로는 칸트의 사유에 들어있는 일정한 측면들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가 받아들인 철학적 “구축론”(constructivism)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주장한다.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는 일반적으로 함께 묶여 다뤄지는 철학자들은 아니다. 그러나 『기준 없이』는 이 세 명의 철학자를 나란히 놓으면서 현대 예술과 미디어 실천들의 관심(특히 디지털 영화와 비디오 부문에서의 발전들)에 속하는, 그리고 문화이론의 논의들(상품 물신주의에 관한, 또 내재성과 초월성에 관한 질문들이 포함된 논의들)에 속하는 다양한 쟁점들을 조명한다. 더 나아가, 화이트헤드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통해서 그리고 아주 최근의 이론적 담론에서 나타나는 “윤리적 전회”와의 꼼꼼하고 사려 깊은 대조를 통해서 사비로는 현대 문화에 대한 비판적 미학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목차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5

서문 : 어떤 철학적 공상 11

 

1장 기준 없이 29

2장 현실적 존재와 영원한 객체 61

3장 정서의 맥동 117

4장 빈틈의 생명 161

5장 신, 또는 기관 없는 신체들 213

6장 귀결들 299

 

‘살아있는 추상의 기술들’ 총서 편집자 서문 335

옮긴이 후기 337

참고문헌 351

인명 찾아보기 361

용어 찾아보기 364

 

책 속에서

P. 7 『기준 없이』에서 나는 화이트헤드의 사상과 들뢰즈의 사상 사이의 놀랍고도 예기치 못한 친연성들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 두 사상가 모두 세계를 열린 다양체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양자 모두 우리에게 이러한 다양체들이 고정된 실체들이 아니라 유한하지만 진행 중인 과정들이라고 말해 준다.―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P. 23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관념들을 통해 작업하면서 나는 거듭해서 칸트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면 적어도 칸트의 특정 영역들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수적임을 발견했다.― 서문

P. 58 『판단력비판』은 칸트의 체계에서 단지 지엽적인 역할만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가 철학은 이성 대신 “순수 느낌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제삼 비판(『판단력비판』)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장 기준 없이

P. 105 화이트헤드가 실체들뿐만 아니라 형상들을, 또는 현실적 존재들뿐만 아니라 영원한 객체들도 반드시 실재적인 것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윌리엄 제임스의 근본적 경험론의 정신 속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2장 현실적 존재와 영원한 객체

P. 135 수용의 방식으로서의 “주체적 형식”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화이트헤드를 칸트의 초월론적 감성론과 연결해 주는 것이다. 칸트가 특권화하고 인식의 전면에 내세우는 모든 것에 대해서 화이트헤드는 그것에 선행하며 또한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운동에 이끌린다.― 3장 정서의 맥동

P. 191 새로운 것의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바로 이중 인과의 이율배반을 다루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방식이다. 칸트 못지않게 화이트헤드는 작용인과 목적인을 구분하면서도 그것들을 화해시키기를 추구한다.― 4장 빈틈의 생명

P. 271 기관 없는 신체와 상당히 비슷하게, 신은 단지 준-원인일 뿐이다. 신은 현실적으로 우주를 창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에게 창조는, 정확히 들뢰즈와 과타리에게서 창조가 모든 욕망하는 기계들의 생산적인 활동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현실적 계기들의 합생적인 결단들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5장 신, 또는 기관 없는 신체들

P. 306 화이트헤드는 사유가 그것의 한계로까지 밀어붙여질 때 그리고 그것의 “시론적인 정식들”이 변화된 상황들의 압력 아래서, 또는 단순히 추가적인 증거 앞에서 붕괴될 때, 마비되기보다는 자극된다고 주장한다.― 6장 귀결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스티븐 샤비로와 『기준 없이』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1954~)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로, 1981년에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웨인 주립대학교 영어학과 드로이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관심사는 영화 이론, 시간, 미학, 과학소설, 범심론, 자본주의, 정동, 주체성 등이다. 샤비로는 2021년에 『사물들의 우주』, 그리고 2022년에 『탈인지』의 한국어판이 갈무리 출판사에서 출간됨으로써 현대철학의 새로운 흐름인 ‘사변적 실재론’의 저자 중 한 명으로 한국 사회에 이미 소개된 바 있다.

『기준 없이』(영어판 2009년 출간)도 사변적 실재론과 관련이 있을까?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사변적 실재론을 직접 논증하기 위해 저술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후속 저작인 『사물들의 우주』(영어판 2014년 출간)와 『탈인지』(영어판 2016년 출간)에서 샤비로가 전개하는 사변적 실재론화이트헤드의 유기체 형이상학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샤비로는 『기준 없이』에서 화이트헤드 철학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섬세한 해석을 전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변적 실재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주로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맺는 철학적 연대성을 해명할 뿐 아니라, 나아가 양자의 철학이 칸트의 세 가지 비판(특히 『판단력비판』)과 맺는 관계를 미학/감성론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아름다움은 진리보다 더 광범하고 더 근본적인 개념이다

샤비로가 보여주는 화이트헤드 철학에 대한 해석은 넓게 보아 그레이엄 하먼이나 데넷 및 베넷과 같은 사변적 실재론자들의 입장과 공유하는 몇 가지 철학적 주제와 입장에 대한 기초 작업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아름다움은 진리보다 더 광범하고 더 근본적인 개념이다”라는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격언에 대한 샤비로의 강조와 해석은 그레이엄 하먼 같은 철학자가 주창하는 제1철학으로서의 미학이라는 입장과 공명하는 점이 분명히 있다. 샤비로는 “모든 진정한 실재론은 사변적이어야 한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실재와 마주할 때 우리는 사변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사물들의 우주』, 130쪽).

그런데 이러한 사변적 실재론의 성립 조건은 정확히 사물 자체의 인식가능성을 부정한 칸트의 입장, 즉 우리가 자신의 사고에서 벗어나 생각하거나 사물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개념 밖에서 사물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구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샤비로는 그레이엄 하먼과 화이트헤드가 상관주의의 순환에서 벗어나 전-비판적 또는 전-칸트적인 독단주의로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 전-비판적 자유를 실현하는 길을 모색했다고 평가한다. 그러한 사변적 실재론의 길은 긍정적인 존재론적 테제와 긍정적인 인식론적 테제를 함께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특히 화이트헤드는 그 길을 인식론적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미학에 단적으로 초점을 맞춤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샤비로가 볼 때 미학은 내재적이고 비인지적인 접촉의 영역이기 때문에 인식에 선행할 뿐 아니라, 오히려 지식으로 이끄는 유혹적 측면조차도 갖는다는 것이다.

샤비로는 『판단력비판』의 전반부, 특히 미학에 관한 칸트의 논의에서 칸트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며, 칸트 자신의 체계 구축법에서는 배제된 사변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칸트는 미적 판단을 단지 지성의 필연적 작동에서 벗어난 예외로 간주하는 것 같지만, 실제 칸트의 정식은 이 이상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준 없이』에서 샤비로는 칸트, 화이트헤드, 그리고 들뢰즈가 사변적 미학의 구성을 위한 맹아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현재적 맥락에서 샤비로는 메이야수의 극단적 우연성과 하먼의 불변하는 진공 속에 갇힌 객체의 대안으로서 화이트헤드의 사변적 미학을 제안한다(『사물들의 우주』, 279쪽). 샤비로가 해석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세계에서 현실적 계기들의 경험은 실제로 그 근본에서 미적이며, 그렇게 미적인 것을 통해 우리는 세계 속에서 행위를 하며, 세계와 세계 속 다른 사물들을 사고의 단순한 상관항으로 환원함이 없이 그들과 관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샤비로는 『기준 없이』를 하나의 실험이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바로 하이데거 대신 화이트헤드로 몸을 돌려 귀를 기울이는 관점에서 탈근대 이론을, 특히 미학 이론을 다시 사유하려는 시도이다.

 

하이데거 대신 화이트헤드였다면

스티븐 샤비로는 만일 화이트헤드가 탈근대적 사유의 영감의 원천이었던 하이데거의 자리를 대신했다면 지금 우리의 지적 풍경은 아주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샤비로는 만일 그랬다면 우리가 지금 과도하게 사로잡혀있는 일부 문제들은 덜 중요한 것이 되었을 것이고, 오히려 다른 질문과 전망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구체적으로 샤비로는 『기준 없이』의 「서문」에서 여러 주제를 통해 화이트헤드와 하이데거를 비교하면서 20세기의 이 두 사상가가 비록 반본질주의적이고 반실증주의적인 새로운 사유의 길, 철학의 새로운 방식, ‘경이’라는 철학의 능력을 발휘할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 사용하는 개념과 방법, 정서와 정신에서 매우 다를 뿐 아니라, 철학의 여러 문제들(철학에서의 시작의 문제, 철학사에 대한 물음,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 언어에 대한 태도, 글쓰기 스타일, 과학 기술에 대한 입장, 재현에 관한 물음, 주체성에 관한 물음)에서 극단적으로 대비된다고 본다. 이 책의 서두에서 샤비로는 그 모든 문제에 대해서 화이트헤드가 하이데거보다 우월한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결국 “만일 하이데거 대신 화이트헤드였다면”, 철학에 대한 ‘구축론적 접근’이 하이데거와 그의 후계자들의 입장을 특징짓는 끊임없는 해체의 과업들보다 우선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독단적인 언명이 아닌 끊임없이 개정에 열려 있는 사변과 구성 및 발명이 미덕이 되는 지적인 풍토가 정착되었을 것이라고 샤비로는 예상한다. 한마디로 샤비로가 이런 가정을 시도하는 이유, 그런 가정이 필요한 이유는 여러 문제에 관한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하이데거가 아닌 화이트헤드를 통해서 적어도 우리 시대에는 해체가 아니라 구축, 즉 구성이 철학의 진정한 과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기준 없이’의 의미

샤비로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잘 설명해 준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이트헤드와 들뢰즈가 동일하게 미학을 자신들의 철학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있는 방식이 현대 서구 사상에서 미학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판단력비판』의 임마누엘 칸트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칸트는 미학을 인식론(『순수이성비판』의 주제)과 윤리학(『실천이성비판』의 주제) 모두에 종속시키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미학을 예외들의 영역, 즉 경험적 지성 및 도덕법칙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경우들의 영역으로 개방하고 있다.

샤비로에 따르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모두 칸트의 미학적 예외주의를 급진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미감적 판단에 관한 칸트의 설명을 아마도 칸트가 알았다면 놀랐을 법한 급진적인 지점으로까지 밀어붙이면서도 여전히 칸트 자신의 공식화에 근거를 두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은 그가 현실적 계기들(actual occasions)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시작되고, 들뢰즈의 존재에 관한 설명은 그가 독특성들(singularities)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칸트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지성의 기초적 개념들에 대한 미학적 예외들, 도덕법칙의 명령들에 대한 미학적 예외들로 간주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그러한 미학적 사례들이 지성의 개념들이나 도덕법칙의 명령들에 대해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미학적 사례들이 기존의 규범들(즉 ‘기준’)로부터 벗어나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미학적 사례들이 순응하지 못하는 그 규범들이 소급적으로 정립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이 제멋대로인 사례들에 기초해서일 뿐이며, 또한 그것들을 종합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미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독특하다고 말했다. 그것들은 (경험적 지식을 입법하는) 지성의 범주들을 낳을 수 없고, (도덕성을 근거 짓는) 명령이나 명법들의 토대가 될 수도 없다. 칸트에 따르면, 실제로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모방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납득할 수 없는 실패작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본보기적[범형적]인 것이다. 기껏해야 그것들은 모방될 수 있을 뿐이다. 독창적인 작품들은 새로운 독창적인 작품들에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을 뿐이다. 이때 그 새로운 작품들은 독창적인 작품들을 모방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방식대로 독창적이고자 노력함으로써 자신들의 본보기[범형]를 따르려 애쓸 뿐이다.

『기준 없이』의 주장은 화이트헤드와 들뢰즈 모두 본보기들[범형들]과 모방에 근거한 칸트적인 미학적 실천을 취하되, 이러한 실천을 칸트가 배제했던 형이상학적 사변이라는 바로 그 영역들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미학은 더 이상 인식론과 윤리학의 규칙들에 대한 예외가 아니라, 바로 그것들의 실천을 위한 근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지만‘기준 없이’는 오히려 기준의 발생 ‘근거’가 된다.

 

최근 화이트헤드 철학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에 과학철학, 철학(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미학 등 여러 분야에서 화이트헤드(1861~1947)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샤비로는 『기준 없이』의 한 각주에서 구축론 철학자로서의 화이트헤드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이해가 이자벨 스탕게스가 쓴 책(『화이트헤드와 함께 사유하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스탕게스가 제안하는 철학적 구축론은 비토대론의 입장으로서, 진리가 모든 경험에 독립하여 이미 세계 안 저기에 존재하거나 마음속에 존재하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개념을 거부한다. 그 대신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구축론은 다양한 과정과 실천을 통해 경험 내부에서 어떻게 진리들이 생산되는지를 살펴보는 입장이다. 이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단지 주관적일 뿐임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는 항상 어떤 현실적 과정에서 구현되며 이 과정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주체성은 그러한 과정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유일한 것은 아니다. 화이트헤드에게 주체성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이루고 있는 궁극적인 경험의 단위인 현실적 존재(현실적 계기)에게만 허용된다. 무엇보다 구축론은 인간의 인식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지 않는데 그 이유는 진리를 생산하고 구현하는 과정들이 반드시 인간적인 과정들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브뤼노 라투르와 마찬가지로, 스탕게스가 해석한, 그리고 샤비로가 이어받아 해석한 화이트헤드에게 진리를 생산하는 실천과 과정에는 인간 존재들뿐만 아니라, 동물, 바이러스, 암석, 기상 시스템, 중성미자와 같은 “행위자”들이 포함된다.

그렇다고 해서 구축론이 상대주의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스탕게스는 들뢰즈와 과타리에게서 인용한 한 구절에서, 구축론은 “진리의 상대성이 아니라, 반대로, 상대적인 것의 진리”를 주장한다고 말한다. 샤비로에 따르면 이러한 상대적인 것의 진리와 이 진리의 생산에 있어서 비인간적인 작인들을 주장할 때, 철학적 구축론은 그토록 많은 탈근대 철학, 실제로 칸트 이후의 철학을 특징짓는 인간 중심주의 및 반실재론과는 대조되며, 궁극적으로는 실재론의 입장에 서게 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점들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구축주의가 오늘날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사변적 실재론 및 비판적 미학주의와 공유하고 있는 특징들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최근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몇 가지 이유는 위에서 샤비로가 열거한 특징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 화이트헤드, 그리고 들뢰즈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칸트 이후에 세계를 파악하는 제삼의 길을, 보다 비밀스럽고 숨겨진 길을 드러내 보여준다. 『기준 없이』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를 칸트와의 관계 속에 위치시킬 뿐 아니라, 그의 사유를 질 들뢰즈의 사유와 나란히 놓음으로써, 21세기에 화이트헤드가 주장했던 것과 오늘날의 삶과 사회를 위한 그의 주장들이 갖는 문제들 모두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탈근대적 미학 이론을 다시 사유해내고자 한다. 그는 이를 주로 화이트헤드를 들뢰즈와 비교함으로써 수행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들뢰즈는 화이트헤드에 관해서 몇몇 책에서 간략하게만 썼을 뿐이고 따라서 그가 얼마나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정통했는지, 또는 그가 어느 정도나 화이트헤드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샤비로가 보기에 화이트헤드의 작업과 들뢰즈의 작업 사이에는 상당히 중요한 친화성과 공명들이 존재한다.

샤비로는 이 책에서 두 철학자 사이 일종의 릴레이를 설정했고 그럼으로써 두 철학자 각각이 상대방의 저작에 나타나는 난점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고 고백한다.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와 들뢰즈가 공유하는 친화성은 비변증법적이고 고도로 심미화된 비판 양식을 향해 작업해 나가는 방식인 정동과 독특성에 대한 그들의 강조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관념들을 통해 작업하면서 거듭해서 칸트로 되돌아가는 것이 필수적임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칸트주의적인 사상가 내지는 “비판주의적” 사상가로 간주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같은 칸트 이전 철학자들과 더 잘 조화를 이룬다고 평가되곤 한다. 심지어 들뢰즈는 칸트를 자신의 “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샤비로는 칸트 사유의 특정한 주요 측면들(특히 『판단력비판』에서의 “미에 관한 분석론”)은 화이트헤드와 들뢰즈가 함께 포함하고 있는 철학적 구축론을 위한 길을 닦아놓았다고 주장한다.

 

샤비로, 스티븐, 2022, 『탈인지―SF로 철학하기 그리고 아무도 아니지 않은 자로 있기』,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2-10-22

원제 : Discognition

 

책 소개: 식물과 아메바는 생각하는가? 우리가 지능적인 외계인을 만난다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토머스 네이글의 유명한 질문처럼,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의식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알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여전히 이러한 의문들에 답하지 못한다. 궁지에 처한 우리에게는 SF(과학소설)가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 작용하면서 이러한 의문들을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이 책은 말한다.

『탈인지』에서 스티븐 샤비로는 인간과 외계인의 감수성에 관한 급진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SF를 살펴본다. 샤비로는 SF를 통해 과학과 심리철학에 이미 존재하는 연구 프로그램과 기술의 잠재적인 함의를 추적한다. 그는 서사들이 스스로 제시하는 것들을 의심스럽게 보거나 비판하기보다 서사를 따라가면서 외삽한다. 그는 한편으로 환원주의자와 제거주의자의 논리를 따르는 소설의 귀결을 탐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확장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범심론자의 논리를 따르는 소설의 귀결을 탐구한다. 샤비로는 다양한 정신과 자아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그것들이 각각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있는 넓은 철학적 틀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화이트헤드주의적 인과성 이론을 다듬어 나간다. 철학과 SF를 매개하며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이 책은 만약 현실로 존재한다면 극도로 위험하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리적으로 응할 수 있는 연습의 기회를 제공한다.

 

목차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5

머리말 12

서론 13

 

1장 철학자처럼 생각하기 30

2장 컴퓨터처럼 생각하기 63

3장 아바타처럼 생각하기 99

4장 인간 존재자처럼 생각하기 144

5장 살인마처럼 생각하기 188

6장 외계인처럼 생각하기 214

7장 점균처럼 생각하기 268

 

후기 : 자연에 관한 22개의 테제 298

 

부록

부록1 : 부연 설명 308

부록2 : 인과성과 지각, 그리고 화이트헤드 313

인용문헌과 보충 설명 343

참고문헌 351

인명 찾아보기 363

용어 찾아보기 365

 

책 속에서

감수성은 인간에서든, 동물에서든, 다른 유기체에서든, 혹은 인공적인 존재자에서든, 인지의 문제이기보다는 내가 탈인지라고 부르는 것의 문제에 가깝다. 나는 이 탈인지라는 신조어를 인지를 교란하며 인지의 제한을 초과하지만, 그러면서도 인지를 지원하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한다. 나의 작업에 담긴 가정은 허구와 우화가 감수성의 기본적 양태이며, 인지 자체는 그것들로부터 파생되어 그것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P. 11 우리가 아마도 결코 알 수 없을 많은 것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의 경계를 탐구함으로써 여전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P. 22 이 책의 이면에 있는 가설, 혹은 사변적 내기는 과학소설의 서사가 심리철학과 신경생물학 양쪽의 최근 연구에서 발견되는 과도하게 제한된 인지주의적 가정들을 넘어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서사적 소설이 거의 언제나 인지를 넘어서 확장되기 때문이다.― 서론

P. 49 우리가 데카르트보다 엄격해지기를 바란다면, 데카르트의 지나치게 지성적인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를 보다 원초적인 센티오(“나는 느낀다”)로 대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모든 ‘나는 생각한다’는 이미 “더욱더 깊은 수준에서 ‘나는 느낀다’를 전제한다”고 시사한다.― 1장 철학자처럼 생각하기

P. 66 브뤼노 라투르, 제인 베넷, 그리고 이언 보고스트 같은 최근의 사상가들은 우리와 세계를 공유하는―우리가 만든 여러 도구를 포함하지만 이에 국한되지 않는―비인간 존재자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활동적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것들은 자신만의 힘, 관심, 그리고 관점을 가진다.― 2장 컴퓨터처럼 생각하기

P. 130 과학소설, 미래주의적 사변, 분석철학 모두 강인공지능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예 부정하거나, 아니면 묵시론적 용어로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존 설은 그의 유명한 “중국어 방” 논증을 가지고 전자의 대안을 보여준다.― 3장 아바타처럼 생각하기

P. 161 정신에 대한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개념화의 역사를 고려해보라. 이는 일반적으로 특정 시대에 가능했던 최첨단 기술을 추적하며 이루어진다. 18세기의 유물론자들은 정신이 시계처럼 작동한다고 사변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프로이트는 정신이 마치 증기기관이나 거대 유압장치인 것처럼 열역학적 용어로 정신을 설계한 여러 이론가 중 한 명일 뿐이었다. 20세기 후반, 사이버네틱스와 컴퓨터의 발전과 함께 정신은 정보처리라는 관점에서 구상되었다. 뇌는 하드웨어로, 정신적 처리과정은 플랫폼에 독립적인 소프트웨어로 구상되고, 정신은 디지털 컴퓨터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4장 인간 존재자처럼 생각하기

P. 213 포스트휴먼 프로젝트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요구에 따라 “인간 본성”을 재설계하는 것을 마음속에 그린다. 이것은 신경과학의 발견들―오늘날 실제로 발견되고 있는 것과 이야기에서 외삽되는 것을 포함해서―이 본질적이거나 토대적인 것이 아니라 실용적이고 작동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5장 살인마처럼 생각하기

P. 261 의식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치품, “수익 없는 지출”(바타유) 또는 “생물학적 과잉”(배지밀)의 표현이다. 그것은 효용이 아니라 미학의 문제이다.― 6장 외계인처럼 생각하기

P. 274 황색망사점균은 그러므로 인간 존재자들이 확장된 정신이라고 불러온 것에 대한 단순한 사례를 제공한다. 확장된 정신 이론에 따르면, 인지는 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생물학적 유기체와 외적 자원의 결합”을 수반한다.― 7장 점균처럼 생각하기

P. 306 자연은 역사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의 총체성도 아니며, 자연사나 사회사의 특수한 여건도 아니다. 자연은 오히려 이 모든 특수한 사례, 이 모든 변환과 축적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무언가다. 자연은 그 모든 것을 공통 세계로 위치시키는 것이다.― 후기 : 자연에 관한 22개의 테제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지’(cognition)가 말해 주지 않는 것

이 책의 제목 “탈인지”는 샤비로의 신조어이다. 샤비로는 어떤 것이 부정되거나 무효로 됨을 함의하는 접두사 “탈-”을 “인지”라는 단어 앞에 붙였다. 샤비로에 따르면 인지는 사고에 대한 어떻게(how)와는 관련되지만, 무엇(what)이나 왜(why)와는 관련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특정인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과 그를 혼동하지 않는 방식을 설명할 때 ‘인지’라는 낱말은 유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지’는 내가 왜 어떤 특정한 한 사람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왜 다른 특정한 사람은 미워하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인지과학과 인지심리철학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적자생존’을 욕망한다고 보고 생존을 위해 체득한 도구들에 주목한다. 그러나 유기체들이 추구하는 것이 ‘생존’뿐일까? 화이트헤드를 인용하면서 저자는 살아있는 존재자는 “잘 살기”를, 나아가 “더 잘 살기”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유기체들은 살아가면서 주변 환경에서 정보를 수신하고 수집한다. 그런데 그 존재자는 그 모든 정보로 무엇을 하는가? 그 존재자는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어떻게 행위하는가? 이는 인지의 범위를 벗어나는 질문들이라고 샤비로는 말한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인지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감각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 책은 강조한다. 나무가 잎사귀를 통해 햇빛을 감지하고 식량을 추출하는 것처럼, 감수성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감각하고, 경험하며, 그 영향들에 유연하게 반응하는 것을 포함한다. 샤비로는 “감수성은 인간에서든, 동물에서든, 다른 유기체에서든, 혹은 인공적인 존재자에서든, 인지의 문제이기보다는 내가 탈인지라고 부르는 것의 문제에 가깝다.”(16쪽)고 말한다.

 

SF(과학소설)와 현대사회

과학소설 혹은 SF는 현대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화두인 것처럼 보인다. SF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SF 소설들이 폭넓게 읽히고 있고, 국내 작가들의 과학소설들이 해외로 번역되고 있으며, 텔레비전과 OTT 플랫폼에서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최근 “기술 가속이 극대화되어 현실이 SF를 넘어”섰으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SF 사회”를 살고 있다는 진단(계간지 『문화/과학』, 2022년 가을호)도 제출되었다.

샤비로가 종종 인용하는 벨기에의 철학자 이사벨 스텡거는 자신의 철학자 동료들이 일축했던 이슈들에 관한 논의를 열어냈다는 점에서 과학소설 작가들의 기여가 크다고 말한다.(스티븐 샤비로의 인터뷰). 미국의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SF를 과학소설뿐 아니라 사변적 페미니즘(speculative feminism), 과학 판타지(science fantasy), 사변적 우화(speculative fabulation), 과학적 사실(science fact), 실뜨기(string figure)의 약어로 의미를 확장하면서 SF의 다채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

 

SF(과학소설) 사고실험이 할 수 있는 것

스티븐 샤비로는 철학에서의 인간중심주의와 상관주의(세계는 인간에 대하여 또한 인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본질적으로 인간중심적인 관점)를 극복하려 시도하는 ‘사변적 실재론’ 경향의 사상가이다. 스티븐 샤비로, 그레이엄 하먼, 이언 보고스트 등 많은 사변적 실재론 철학자들이 저서에서 미국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의 유명한 논문 「박쥐가 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1974)를 인용한다. 네이글의 초점 중 하나는 박쥐가 인간과 공통 세계를 공유하지만, 박쥐와 인간의 경험은 너무나 달라서 인간은 박쥐의 경험이 어떠한지 진정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난점 앞에서 과학소설의 접근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고 샤비로는 말한다. 과학소설이 종종 차용하는 방법인 외삽(extrapolation)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기술과 사회적 조건을 기반으로 하되, 그 기술과 조건이 현재 가능한 정도보다는 미래에 조금 더 확장 실현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미 우리 현실에 존재하는 인공지능이 감수성을 성취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냐와 같은 질문을 과학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서사로 체화함으로써 탐구한다. 외삽과 연루된 과학소설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거나 경고를 할 수 있다. 또 독자는 과학소설을 읽으며 사고실험에 참여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사유를 가로막는 전제들을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의식, 인지, 감각의 문제를 고민할 때도 SF적 사고실험이 유용하다고 샤비로는 본다. 우리가 감각적 존재들임은 분명하지만, 감수성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같은 질문에 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샤비로가 2장 「컴퓨터처럼 생각하기」에서 분석한 소설 「눈먼 자들의 왕국」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감수성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을 화두로 삼으며 인지, 의식, 감각을 둘러싼 흥미로운 질문들을 탐험하면서 샤비로는, 우리가 박쥐의 경험이 어떠한 것인지 진정으로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컴퓨터 프로그램의 감각적 경험을 직접 알 수 없을지는 몰라도, 컴퓨터 프로그램의 정신성은 암시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환기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미적 감수성의 환기가 사변적 과학소설의 작용이라고 본다.

 

책의 구성 : 과학소설적 자아들

이 책은 서론과 일곱 개의 장, 후기, 두 개의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 샤비로는 감수성, 알아차림, 사고의 문제와 과학소설을 통한 탐구법의 이점을 논의한다.

1장 「철학자처럼 생각하기」에서 샤비로는 그 자체로는 과학소설 텍스트가 아니지만 심리철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사변과 논증의 초점이 되었던 반사실적 서사 “메리 이야기”에 관해 살펴본다.

2장 「컴퓨터처럼 생각하기」에서는 모린 맥휴의 단편소설 「눈먼 자들의 왕국」에 관해 논하며, 기계의 감수성 또는 인공지능의 감수성이 자발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다.

3장 「아바타처럼 생각하기」에서는 인공지능을 둘러싼 문제들을 극적으로 다룬 테드 창의 중편소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의 여러 귀결을 따라가며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에 관해 고찰한다.

4장 「인간 존재처럼 생각하기」에서는 R. 스콧 베커의 소설 『뉴로패스』에서 표현된 인간 인지에 관한 제거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견해를 좇으며, 사람들이 실제로 그러한 견해에 따라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해본다.

5장 「살인마처럼 생각하기」에서는 마이클 스완윅의 단편소설 「야생 정신」을 따라 최적화된 정신을 살펴보며, 오묘한 방식으로 포스트휴먼에 대해 인간을 옹호하고 다른 형태의 포스트휴먼적 변혁을 상상하도록 촉구한다.

6장 「외계인처럼 생각하기」에서는 피터 와츠의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를 검토하며, 진정으로 이질적인 부류의 지능과, 극단적이고 포스트휴먼적인 정신 변화를 상상하면서 의식의 본성에 관해 여러 의문을 제기한다.

7장 「점균처럼 생각하기」에서는 실제로 현존하는 유기체인 황색망사점균이라는 원형질성 점균의 여러 이상한 인지력을 고찰한다. 황색망사점균은 들뢰즈주의적 다양체로 여길 만한 기묘한 개체/개체군으로 살아가는데, 이들이 활동하는 방식은 인간이 확장된 정신이라고 불러온 것을 실현한 것처럼 보인다.

결론의 자리를 대신하는 「후기」에서 샤비로는 자연에 관한 몇몇 사변적 테제를 제시하며, 『탈인지』에 담긴 모든 논증이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있는 넓은 철학적 틀을 제공한다.

옮긴이가 작성한 「부록 1」에는 독자들을 위해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몇몇 과학소설에 관한 보충설명이 첨부되었다.

저자의 허락을 얻어 『탈인지』 한국어판에 수록한 「부록 2」에는 인과성과 지각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견해를 고찰한 샤비로의 논문을 수록하였다.

 

 

샤비로, 스티븐, 2021, 『사물들의 우주―사변적 실재론과 화이트헤드』,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1-12-06.

원제 : The Universe of Things: On Speculative Realism

 

책 소개: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우리가 “동료 피조물들의 민주주의 속에”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떻게 변하게 될까? 인간중심주의를 포기하고 인간이 창조의 정점이라는 우리의 주장을 포기하는 데 동의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사물들의 우주』는 비상관주의적 사고에 대한 사변적 실재론의 일반적인 주장, 즉 인간 정신이 관계하고 이해하는 방식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사물 및 객체에 대한 주장을 탐구한다. 스티븐 샤비로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현재에 지배적인 사변적 실재론 사상을 예상했고 그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한 세기 동안의 형식화와 정화를 향한 집요한 근대주의적 시도를 거쳐, 어쩌면 애초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 시대에 화이트헤드는 마치 우리의 뇌리에 스며들듯이 돌아온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여러 가정이 우리 주변에서 경험하는 실재를 기술하거나 이해하는 데 더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짐에 따라, 세계를 파악하는 새로운 방식을 전개하려는 이 최근의 사변적 실재론 사유 흐름의 노력은 방대하다. 샤비로에 따르면 사변적 실재론은 여러 위험을 안고 있지만, 탁월한 사변 소설 작품이 그러하듯이, 외부의 것들을 바라보는 제한적인 관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주며, 미학과 아름다움을 생명의 원리로서 되찾을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다양한 현대 사상을 망라하고 현재의 논쟁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사물들의 우주』는 사변적 실재론의 진화를 보여주고 화이트헤드의 획기적인 작업을 일깨우는 귀중한 안내서이다.

 

목차

약어표 6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7

서론 : 화이트헤드와 사변적 실재론 17

 

1장 자기향유와 관심 38

2장 활화산 62

3장 사물들의 우주 92

4장 범심론 그리고/혹은 제거주의 126

5장 범심론의 귀결 159

6장 비상관주의적 사고 199

7장 아이스테시스 241

 

감사의 말 280

출처 281

옮긴이 후기 282

참고문헌 285

인명 찾아보기 293

용어 찾아보기 297

 

책 속에서

P. 8 『사물들의 우주』는 기후 위기를 단도직입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환경을 오랫동안 파괴해온 힘 중 하나에 관해 말합니다. 인간 존재가 의미와 가치의 중심에 홀로 서 있다는 가정입니다. 인간중심주의, 인간이 그 힘과 성취에 있어서 유일무이하고 전체로서의 우주에서 특별히 중요하다는 그 믿음은, 우리가 그것의 풍요로움에 의지하며 그 위에서 살아가야 하는 지구를 격하게 착취하고 고의로 파괴하는 행위를 부채질해왔습니다.―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P. 20 사물 자체를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종속시킬 수 없다면, 인식론은 그 고고한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의 밖에 있는 사물들의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발견하는 것, 내가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사물들에 대한 나의 앎을 초월하는 그 사물들이 모두 이 “공통 세계”의 주민이라는 것이다.― 서론

P. 48~49 질 들뢰즈는 화이트헤드 이전의 스토아학파나 라이프니츠와 마찬가지로, 화이트헤드가 철학에서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하여 데카르트로 이어진 본질주의에 대항하는” 일종의 양식론을 창시했다고 생각한다.― 1장 자기향유와 관심

P. 69 화이트헤드는 존재들 간의 광범위한―사실상 보편적으로 혼잡한―관계성에 대한 감각을 제시하며 상관주의에 반대한다. 그러나 하먼의 경우는 관계성 자체의 지위를 약화해서 상관주의에 반대한다. 대신 하먼은 어딘가 케케묵고 신빙성도 없어 보이는 실체에 관한 형이상학적 학설을 당당히 부활시킨다.― 2장 활화산

P. 118 화이트헤드는 “개별적 존재자”의 진실성과 “전체가 자신의 다양한 부분들을 부드럽게 보듬어온” 자연 중 어느 것도 버리려 하지 않는다. 이 이중적인 주장은 모든 존재가 매혹하는 동시에 변태하며, 터져 나오는가 하면 뒤로 빠져나가고, 그들의 절대적 특이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참조와 변형의 미궁 속으로 후퇴하는 이중적인 움직임과 상응한다.― 3장 사물들의 우주

P. 157 만일 우리가 상관주의를 거부하고 사고와 존재의 칸트적 매듭을 풀고자 한다면, 중도를 걸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먼과 그랜트 쪽에 나란히 서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권리로 최소한 어느 정도 감수성(활동성, 지향성, 생기, 그리고 힘에 사로잡힘)을 가지고 있거나, (메이야수와 브라시에 쪽에 나란히 서서) 존재가 사고로부터 극단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고 말해야 하며, 이 경우 사물 및 객체는 이른바 그것의 의인관적 성질들을 완전히 잃게 된다.―4장 범심론 그리고/혹은 제거주의

P. 198 스토아학파가 오래전에 발견했듯, 나는 내적으로 자유롭고 외적으로 구속되어 있다. 그러나 역으로 외적으로 관계를 쌓아 나가고 또 활기찬 관계를 추구할 수 있지만, 내적으로는 고립되어 있고 또 갇혀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범심론이란 이러한 사밀성과 관계성의 이중성이 단순히 인간적 고뇌가 아닌 삼라만상의 조건이라는 인식이다.―5장 범심론의 귀결

P. 229 메이야수는 인간 사고야말로 “동물성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파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명백하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서양 근대의 인간중심적 편견을 벗겨내고 나면, 동물 존재와 인간 존재 사이의 파열을 주장하는 데에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6장 비상관주의적 사고

P. 272 미적 판단은,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무엇이든 상관없는 것,” 즉 “개별적이지도 일반적이지도 않고, 개인적이지도 포괄적이지도 않은” 것에 속삭인다. 적어도 원리상 아름다움의 사례는 내게 호소하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누구에게도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7장 아이스테시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실재론의 부활 :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

20세기 후반에 철학은 언어론적 전환에 기반하며 반실재론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다양한 경험적이고 개념적인 공간에 비인간 객체가 현현한 것으로 정의될 수 있는 근대성의 한계를 의식하고 생태 위기가 급박해짐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실재론이 등장했다. 이는 거칠게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븐 샤비로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듯이, 생태위기는 사회경제적, 정치적 요인들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를 단순히 ‘인간에게 있어서의 세계’로만 보면서 인간이 그 힘과 성취에 있어서 유일무이하고 전체로서의 우주에서 특별히 중요하다는 인간중심주의적 철학은 생태위기를 초래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요인들을 허용하고 그러한 요인들에 토대를 제공해왔다. 최근 등장한 다양한 형태의 실재론은 그러한 토대를 해체하거나 최소한 수정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특히 자세하게 고찰되는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젊은 철학적 조류는 퀑탱 메이야수가 “상관주의”라고 명명한 특정한 모순을 추적한다. 상관주의란 주체와의 관계를 떠나서 객체 ‘그 자체’는 파악할 수 없다는 학설이다. 샤비로는 이 책 『사물들의 우주』에서 그 모순으로부터 빠져나와 메이야수가 “거대한 외부”라고 부른 곳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반면, 샤비로는 화이트헤드가 “자연의 이분화”(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으로서의 자연과 그러한 의식의 원인으로서의 자연의 분열)라고 부른 것에 근대 사상이 기반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상관주의를 피하는 또 다른 대안을 찾고자 한다. 상관주의와 자연의 이분화는 아주 다른 필요와 관심에서 유래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무관한 것이 아닌데, 우리의 경험이 두 개로 찢겨 왔기 때문에 그 두 개를 다시 붙이기 위해 상관주의 구조가 필요했다고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칸트는 실재가 그 자체로 어떤 것임을 기술하려는 독단주의를 금지하고 자연을 의식에 나타나는 것으로 제한한 결정적인 철학자였다. 그렇게 샤비로는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프로젝트에 담긴 칸트적 배경을 주장하고 사변적 실재론이 칸트적 배경에 대해 취하는 다양한 입장을 살펴본다.

 

객체지향 존재론을 통해 화이트헤드 철학을 새롭게 읽어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거주의적 사변적 실재론으로 분류할 수 있는 메이야수와 브라시에는 현상적 경험을 환원하거나 근절시키는 입장을 취한다(사변적 유물론, 과학주의). 반면, 그레이엄 하먼과 레비 브라이언트, 이언 보고스트, 티머시 모턴의 입장을 대변하는 객체지향 존재론은 실재와 알려진 것 사이의 칸트적 간극을 인간-세계 관계에만 독점되는 것이 아닌 모든 존재에 적용되는 것으로 확장하며 상관주의의 극복을 모색한다. 샤비로는 객체지향 존재론을 통해 화이트헤드 철학을 새롭게 읽어내면서, 동시에 화이트헤드 철학을 통해 객체지향 존재론을 비판적으로 읽어낸다.

이는 이중적인데, 샤비로는 자신의 입장이 제거주의적 사변적 실재론보다는 객체지향 존재론에 더 친밀함을 인정하며 객체지향 존재론을 통해 화이트헤드를 새롭게 독해하지만, 동시에 정동 과정과 파악, 느낌 등의 화이트헤드주의적 용어를 통해서 객체지향 존재론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샤비로는 사변적 실재론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면서 화이트헤드 철학을 또 다른 대안으로서 발전시킨다.

 

자기향유와 관심 : 존재의 고유성과 관계성을 모두 정당하게 다루기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제로 삼고 있는 사실을 넘어서는 것을 참조하여야만 이해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다. 그리고 문제로 삼고 있는 사실의 직접적, 사적, 개인적, 개별적인 요소를 표현하는 요소들이 있다.” 생명은 절대적인 자기향유를 품고 있으며, 이 자기향유를 통해 생성의 계기는 스스로 그러한 현실태가 된다. 이러한 자기향유는 존재의 사밀성(privacy)을 표현하며, 존재의 고유성을 대변하고 있다. 샤비로는 이전 저작 『기준 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에서 화이트헤드와 하이데거를 비교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문제를 묻는다. 즉, ‘어째서 무(Nothing)가 아니라 유(Something)가 있는가?’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 의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대신 이렇게 묻는다. 즉, ‘어째서 언제나 새로운 것이 있는가?’ ”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사변은 새로움의 출현을 기술하는 데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으며, 거기서 생성의 계기는 자신의 주체적 정향(subjective aim)과 주체적 형식(subjective form)을 가지고 자기향유의 과정을 즐기며 자신을 실현하고, 이 자기실현은 우주에 어떤 새로운 것을 추가한다.

그러나 새로움의 출현은 관계성을 이차적인 것으로 격하시키지 않는다. “각각의 계기는 퀘이커교에서 말하는 관심(concern)의 활동”인데, 정확히 자신을 넘어서는 “우주에 관여(concern)할 때,” 계기는 가장 생생하게 “자신의 직접적 자기실현에 착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관심으로 대변되는 관계성이 새로움의 출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음을 의미한다. “무에서 세계로 떠오르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관계성은 생성을 완전히 결정하지 않는데, 주체적 정향과 주체적 형식으로 인해, 이사벨 스텡거가 말하듯 “어떤 원인도, 심지어는 원인으로서의 신 자신마저, 임의의 계기에 대해 어떠한 원인이 될지(how it will cause) 결정할 수 없”고, “그 무엇도 자신이 타자에게 있어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결정할 힘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움이란 오히려 관계성 속에서의 “긍정적인 결단 행위로부터 떠오르는 것이다.”

샤비로는 객체지향 존재론자 그레이엄 하먼을 고찰하며, 하먼이 가장 화이트헤드적인 순간에 있어서 하먼은 “두 개의 객체가 진정한 관계를 맺을 경우,” “그들의 단순한 관계를 통해 그들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창조하게 되며, 그 어떤 것은 참된 의미에서 하나”임을 인정한다고 말한다. 하먼은 그 뒤에서 이 점을 철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샤비로는 몰나르를 언급하며 이 점을 밀고 나간다. “존재론적으로는 개별자와 개별자의 성질들(행위들)을 능가하는 상위의 어떠한 것은 없지만, 인과적으로는 있다.” 하먼은 아래로-환원(undermining)과 소체론에 반대하며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계기 같은 미시적 존재를 말함이 없이 객체에서 객체로의 무한 퇴행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샤비로는 몰나르가 말하는 국소적 사실 소재를 능가한 인과적으로 상위의 것(화이트헤드의 사회와 결합체)을 말하며 거시적 존재를 미시적 존재로 환원함이 없이 양자를 모두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샤비로는 관계성이 새로움의 출현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을 맡는다고 주장하며, 존재의 고유성과 관계성을 모두 정당하게 다루고자 한다.

 

범심론, 삼라만상의 고뇌

샤비로에 따르면, 자연의 이분화를 극복하려는 시도 속에서 우리는 제거주의와 범심론(혹은 범경험주의) 사이의 날카로운 기로에 서게 된다. 샤비로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자연의 이분화를 극복하고, 가치 경험을 경험 속에 다시 배치하기 위해 설득력 있게 범심론을 제시한다. 물론 여기서 범심론은 모든 존재가 의식적임을 뜻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존재가 사밀적 양상과 공개적 양상을 모두 갖추고 있음을 뜻한다. 저자는 토머스 네이글의 논문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를 고찰하며 존재의 사밀성을 논한다. “어떤 유기체가 의식적인 경험을 조금이라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유기체로 있기라는 어떠한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빨을 지각하는 것과 달리 치통은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특정할 수 없기에 박쥐가 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도 특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치통이 없는 것도, 박쥐가 되는 것이 무효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비트켄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적 감각은 “어떤 것(Something)인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은 아니다!” 오히려 사밀성의 양태에 있어서 존재는 어떤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사이에 있는 어떠한 것(like something)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논의를 모든 개별 존재로 확장한다면 정신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언어와 의식은 특권을 부여받지 말아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의식이 경험을 전제하는 것이지, 경험이 의식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화이트헤드에게 언어는 사고의 본질이 아니다. 그렇다면 범심론의 문제는 마음이 애초에 언어와 의식에 의존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다. 사밀성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듯, 우리는 박쥐의 생각에 접근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인간을 모델로 박쥐의 경험을 의인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박쥐의 경험이 비인간적이고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박쥐가 전혀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이중 구속은 저자로 하여금 우리가 실제로 알 수는 없더라도, 우리 자신과는 아주 다른 존재들의 생활세계와 관점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과학소설의 조건에 관한 탐구로 이끌게 된다. 범심론이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사밀성과 공개성의 이중성에 대한 인식인 한, 내적 자유와 외적 구속, 내적 고립과 활기찬 관계 사이의 고뇌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삼라만상의 것이다.

 

책의 구성

이 책은 서론과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 샤비로는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와 목표를 서술하고 각 장의 내용을 짧게 요약한다. 1장 「자기향유와 관심」에서는 미학과 윤리학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입장을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입장과 비교하고, 각각 존재의 고유성과 관계성을 대변하는 자기향유와 관심에 관해 고찰한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자기향유와 관심이 사실은 별개의 과정이 아님이 밝혀질 것이다. 2장 「활화산」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을 비교하며, 한편으로 객체지향 존재론을 통해 화이트헤드를 새롭게 독해하고, 다른 한편으로 화이트헤드 철학을 통해 객체지향 존재론을 비판적으로 독해한다. 3장 「사물들의 우주」에서는 하먼의 하이데거 독해와 영국의 낭만주의에 관한 화이트헤드의 독해를 통해 객체와 과정, 사물과 경험을 고찰하며 사고를 위한 유혹으로 기능할 수 있는 몇 가지 명제를 제시한다. 4장 「범심론 그리고/혹은 제거주의」에서는 상관주의에 대한 칸트적 배경을 논하고, 우리가 일단 상관주의를 거부하면 우리는 노골적인 제거주의(존재는 근본적으로 사고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와 일반화된 범심론(모든 곳에 사고가 내재하여 있음을 선포하는 것) 사이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5장 「범심론의 귀결」에서는 정신성이 물질의 기본 속성이라는 테제를 개관하고, 화이트헤드 철학의 범심론적 발상을 반환원주의적 자연주의라는 형태로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6장 「비상관주의적 사고」는 현존하는 사변적 실재론자들이 사고를 설명하는 방식에 담겨 있는 여러 문제점을 고찰하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저자는 비지향적이고 비반성적이며, 대체로 의식적이지 않은 “자폐적인” 사고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7장 「아이스테시스」에서는 6장에서 논한 사고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인간 판단에 국한되지 않는, 특히 인간의 주체성에 중심을 두지 않는 미학을 제시한다.

 

주재형, 2023, 「샤비로의 범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철학논집』 vol.74, pp. 61-95. DOI : 10.17325/sgjp.2023.74..61

A Critique of Shaviro’s Panpsychist Metaphysics

 

초록: 이 논문은 스티븐 샤비로가 자신의 저작 『사물들의 우주』에서 전개한 범심론 정당화 논변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샤비로의 논의는 사변적 실재론과 신유물론의 몇몇 입장에 대한 형이상학적 정당화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 샤비로는 범심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샤비로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형이상학,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감각 논증, 게일런 스트로슨의 범심론 논증을 동원한다. 우리는 이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우선,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형이상학에 관한 검토는, 화이트헤드가 인간중심주의적인 상관주의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샤비로의 관점과 다를 뿐만 아니라, 샤비로 스스로가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드러낼 것이다. 다음으로, 샤비로가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감각 논증을 활용할 때 그는 수행적 모순을 범한다는 점이 지적될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샤비로의 다른 저작 『탈인지』의 4장을 검토해볼 것이다. 끝으로, 스트로슨의 논증은 문제적인 창발 개념에 기초하기 때문에 범심론을 유일하게 합리적인 물리주의적 입장으로 논증하려는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다. 이상의 비판적 검토를 통해서 우리는 샤비로의 범심론은 정당화될 수 없는 과도한 형이상학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