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발제

한병철, 2012, 2014, 2017, 2020, 2023, 2023

ycsj 2024. 3. 28. 12:10

 

한병철, 2012,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03-05

한병철, 2014, 『투명사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03-11

한병철, 2017, 『타자의 추방』, 이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02-27

한병철, 2020, 『폭력의 위상학』, 김태환 옮김, 김영사 2020-06-10

한병철, 2023, 『정보의 지배―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전대호 옮김, 김영사.

한병철, 2023, 『서사의 위기』, 최지수 옮김, 다산초당(다산북스).

 

한병철, 2012,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03-05

 

책소개: 독일 최고 권위지〈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극찬한 책. 저자 한병철은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로, 서양 철학의 언어를 구사하며 그 속에 동양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비판가로 떠올랐다. 이 책에서 그는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피로사회|

신경성 폭력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깊은 심심함

활동적 삶Vita activa

보는 법의 교육

바틀비의 경우

피로사회

 

미주

 

|우울사회|

 

미주

역자 후기

 

 

책속에서

첫문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시대마다 그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수있다 -11쪽 - mira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것이다. " -28쪽 - mira

긍정성의 과잉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자신을 착취한다. -27쪽 - mira

다윈이래 인간은 동물에서 유래한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제는 다시 동물로 변신하려는 중일지도 모른다.-40쪽 - mira

피로사회 잉여사회 부정성 - 말리

피로사회는 자기착취의 사회이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 베로니카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 늘감사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장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차귀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29p 접기 - 쥬드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박탈 하기보다 포화 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 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오늘의 생산 관계는 완결을 가로막고 있다. 사람들은 열려 있는 방향으로 일을 해나간다.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의 형식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우울증은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이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중력도 없다. 접기 - odacova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극단적으로 덧없는 것은 인간 삶만이 아니다. 세계 자 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노동하는 동물이 어떤 유에 속하고 자신이 속한 유를 위해 노동하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동물다운 느긋함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됐다. 접기 - 몽이엉덩이

11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 서울버블티

P. 13 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 indra87

P. 28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indra87

P. 29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 indra87

P. 30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 indra87

P. 32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 indra87

P. 49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 indra87

P. 66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 indra87

P. 68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또 스스로 만질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피로.˝ 그런 피로를 통해 비로소 머물러 있는 것, 한곳에서의 체류가 가능해진다. - indra87

P. 71 한트케는 오히려 ˝우리-피로˝라고 말한다. 이때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게 아니라, 한트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 indra87

P. 71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 indra87

P. 89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은 자아 감정의 고양을 위해 의식적으로 ˝회피˝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 indra87

P. 99 개성을 확장하고 변형하고 새로 발명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 이면에서 우울증을 초래하는데, 그러한 명령의 원천은 정체성과 관련된 상품이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주 바꾸면 바꿀수록 생산은 더욱 큰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 indra87

P. 103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 indra87

P. 109 외적 지배기구의 소멸은 강제구조의 제거로 이어지지 않고, 다만 자유와 강제의 통합을 가져올 뿐이다. 성과 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욱 가속화된 발전을 위해 타자에 의한 착취에서 자기 착취로 전환한다. - indra87

P. 101 에랭베르가 우울증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탈갈등화는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와 이를 수반하는 사회의 탈이념화라는맥락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정치적 사건은 더 이상 이념들 사이의 분쟁이나 계급 간 분쟁으로 규정될 수 없다. 그런 것은 이제 거의 흘러간 옛 노래처럼 들릴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사회의 긍정화가 폭력을 철폐하는 ... 더보기 - ider427

P. 26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우울증의 이러한 측면은 에랭베르의 논의에서 빠져 있다. 그는 성과사회에 ... 더보기 - ider427

P. 19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대해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신경성 폭력 현상으로서 면역학적부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에해당되지 않는다. 접기 - gpwjd

근대의 부정적 발전으로 인한 손상을 가장 덜 입는 것이 사유 - eywhang

P. 37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이라는 책에서 사색적삶을 우위에 놓는 전통적 입장에 맞서 활동적 삶의 가치를 복구하고 그 내적 다양성을 새롭게 표현하려고 시도한다.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활동적 삶은 전통적으로 단순히 조급함,

nec-otium, a-scholia˝로 부당하게 폄하되어왔다. 그녀는활동적 삶을 행동의 우위와 연관 지으면서 새롭게 정의하고,

그러면서 스승인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영웅적 행동주의를열렬히 옹호한다. 접기 - ashram21

P. 101 에랭베르가 우울증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탈갈등화는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와 이를 수반하는 사회의 탈이념화라는맥락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정치적 사건은 더 이상 이념들 사이의 분쟁이나 계급 간 분쟁으로 규정될 수 없다. 그런 것은 이제 거의 흘러간 옛 노래처럼 들릴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사회의 긍정화가 폭력을 철폐하는 ... 더보기 - ider427

P. 26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우울증의 이러한 측면은 에랭베르의 논의에서 빠져 있다. 그는 성과사회에 ... 더보기 - ider427

P. 19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이 초래하는 긍정성의 폭력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면역학은 그러한 폭력에대해 아무런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 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 반응은 아니다. 그것은 모두 신경성 폭력... 더보기 - gpwjd

근대의 부정적 발전으로 인한 손상을 가장 덜 입는 것이 사유 - eywhang

P. 37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이라는 책에서 사색적삶을 우위에 놓는 전통적 입장에 맞서 활동적 삶의 가치를 복구하고 그 내적 다양성을 새롭게 표현하려고 시도한다.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활동적 삶은 전통적으로 단순히 조급함,

nec-otium, a-scholia˝로 부당하게 폄하되어왔다. 그녀는활동적 삶을 행동... 더보기 - ashram21

P. 11 신경성 폭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적어도 항생제의 발명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인플루엔자의 대대적 확산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무시할 수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바이러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접기 - sputnik1122

P. 13 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이미 상당한 시간동안 눈에 띄지 않게 패러다임 전환이 진행되어왔다. 냉전의 종식 역시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것이다.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 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 Andersheit과 타자성 Fremdheit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은 면역학의 근본 범주이다. 모든 면역 반응은 이질성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 이후 시대의 차이, 후기근대적 차이는 더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면역학적 차원에서 차이란 같은것das Gleiche‘이나 마찬가지다.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한다. 접기 - sputnik1122

P. 18 보편화된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과잉은 인류 전체의 저항력을 떨어뜨릴 위험으로 작용한다.˝ 같은 것이 지배하는시스템 속에서 저항력이라는 용어는 오직 비유적인 의미로만 쓰일 수 있을 뿐이다. 면역학적 저항은 언제나 강조적 의미에서 낯설다고 할 수 있는 상대, 이질적인 상대를 향해 일어난다. 같은 것은 항체의 형성을 초래하지 않는다. 같은 것에 지배되는 시스템 속에서 저항력을 강화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는 면역학적 배척과 그렇지 않은 배척을 구별해야 한다. 비면역학적 배척은 같은 것의 과다, 긍정성의 과잉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부정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또한 면역학적 내부 공간을 전제하는 배제도 아니다. 반면 면역학적 배척은 양적인 문제와 무관하게 일어난다. 그것은 타자의 부정성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내부를 지닌 면역학적 주체는 아주 적은 양이라 하더라도 이질적인 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밖으로 밀어낸다. 접기 - sputnik1122

P. 19 보드리야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네트워크와 가상세계의 폭력은 바이러스성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전염, 연쇄 반응, 모든 면역성의 제거 등과 같은 수단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바이러스적이다. 또한 전통적인 부정적 폭력과 반대로 긍정성의 과잉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끝없는 증식과 비대화, 변이를 통해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암세포처럼.

가상성virtualité과 바이러스성viralité 사이에는 은밀한 친족성이 있다. ˝ 접기 - sputnik1122

P. 22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성 질환은 바이러스성 폭력과 같이 여전히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면역학적 도식을 따르며, 시스템에 적대적인 특이한 개별자나 이질성을 전제하는 개념으로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Hyperaktivität에서 과잉hyper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접기 - sputnik1122

P. 24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접기 - sputnik1122

P. 28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schaffens- und Könnensmüdigkeit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이상 할 수 있을 수없다 Nicht-Mehr-Können-Können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접기 - sputnik1122

P. 32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 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짜지도, 잣지도 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 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편에 있는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접기 - sputnik1122

P. 39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버린다.행동이 능동적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면, 근대의 인간은 반대로 익명적 삶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유도 계산이라는 뇌의 기능으로전락한다. 제작과 행동을 아우르는 활동적 삶의 모든 형식은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근대를 보는 아렌트의 관점이다. 이 시대는 모든 인간 능력이 전례 없이 영웅적으로활성화되면서 출발했지만, 결국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귀결되고 만다 접기 - sputnik1122

P. 41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 Entnarrativisierung*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된다. 탈서사화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노동 자체... 더보기 - sputnik1122

P. 43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우울증,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나치 강제수용소의 무젤만˝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무제만은 탈진하여 완전히 무력해진 수감자들로서, 극심한 우울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무감각상태에 빠져 심지어 육체적인 추위와 감독관의 명령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우리는 후기근대에 신경 질환을안고 살아가는 노동하는 동물 역시 일종의 무제만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들은 강제수용소의 무제만과 달리 영양 상태가 좋고 몸에 지방이 과다한 경우도 드물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접기 - sputnik1122

P. 49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접기 - sputnik1122

P. 50 반면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서 중단하며 잠시 멈춰 선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짜증 Arger과 구별된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접기 - sputnik1122

P. 65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 그와중에 ˝브레인도핑˝ 처럼 부정적인 표현은

˝신경 향상 neuro-enhancement˝으로 대체된다. 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

만일 스포츠에서도 도핑이 허용된다면 경기는 약학적 경쟁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약물 금지만으로 몸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가 하나의 성과기계가 되어 원활한 작동으로 최대의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발전 경향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핑은 단지 사회적 발전 경향의 결과일 뿐이다. 생동성 Lebendigkeit이란 본래 매우 복합적인 현상이지만, 그런 사회적 변화 속에서 생명 기능과 생명 활동으로 환원되고 만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접기 - sputnik1122

P. 66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나는 그녀에게 ‘나는 너한테 지쳤어‘라고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지쳤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그렇게 외쳤다면 우리는 각자의 동굴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접기 - sputnik1122

P. 72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Zwischenzeit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접기 - sputnik1122

P. 88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한다. 이로써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유지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자와의 대립을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 나르시시즘에서는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나르시시즘적 장애를 겪는 사람은 자기 자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타자관계가 소실되고 이에 따라 안정된 자아의 이미지도 형성되지 못한다. 접기 - sputnik1122

P. 89 세네트에 따르면 완성을 통해 자아와 무관하게 존속하며 자아를 약화시킬 수 있는 어떤 객관화할수 있는 형태가 생겨나기 때문에, 나르시스적 개인은 의도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거나 뭔가 완결하기를 회피한다는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객관적으로 유효한, 최종적으로 완성된 형식이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조건이 주체를 자기자신의 나르시스적 반복으로 몰아가고 있고, 그런 까닭에 주체는 하나의 형태, 안정적인 자아상, 확고한 성격에 이르지못하는 것이다. 즉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은 자아 감정의 고양을 위해 의식적으로 ˝회피˝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접기 - sputnik1122

P. 95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성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

없이, 다시 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다. 실재가 무엇보다도 그 저항성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다면, 가상화와 디지털화의 과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러한 실재를 지워나간다. 실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시키고 저항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라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 접기 - sputnik1122

P. 109 성과주체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로우며 그것에 의해 노동을 강요당하지도, 착취의 희생자가 되지도 않는다. 성과주체는 오직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적 지배기구의 소멸은 강제구조의 제거로 이어지지 않고, 다만 자유와 강제의 통합을 가져올 뿐이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착취한다. 자기 착취는 기만적인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착취는 지배 없이 관철된다. 여기에서 자기 착취의 효율성이 생겨난다. 자본주의시스템은 더욱 가속화된 발전을 위해 타자에 의한 착취에서자기 착취로 전환한다. 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성과주체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된다. 자기 자신의 주권자, 호모 리베르를 자처하는 성과주체는 호모 사케르임이 밝혀진다.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성과사회에서도 주권자가 호모 사케르를 낳고 호모 사케르가 주권자를 낳는 역설적 논리가 성립한다. 접기 - sputnik1122

P. 114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로 죽일수 없다는 점에서 주권사회의 호모 사케르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이들의 생명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Untote의 생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 sputnik1122

P. 5 「피로사회』는 2010년 가을 독일에서 출간되었고, 출간되자마자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이 책이 시대의 뇌관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 jenny

P. 6 이러한 예상 밖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이 책이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등과 같은 정신 질환의 역사적 위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라는 문장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심리 장애를 오늘날 성과사회의 근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반적인 패러다임 전환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성과사회의 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으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이 책의 테제였다. 자기 착취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로서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올린다. 그러한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접기 - jenny

P. 11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 jenny

P. 12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 jenny

P. 12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자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jenny

P. 16 우리는치명적일 수 있는 훨씬 더 큰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약간의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jenny

P. 23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 Leistungs-gesellschaft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주체Gehorsamssubjekt˝가 아니라 ˝성과주체Leistungssubjekt˝ 라고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 jenny

P. 24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 jenny

P. 26 그러나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우울증의 이러한 측면은 에랭베르의 논의에서 빠져 있다.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접기 - jenny

P. 27 그러나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 jenny

P. 32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접기 - jenny

P. 46 그러니까 그녀는 활동적 삶의 마지막부분에 가서 자기 의도와는 달리 사색적 삶에 손을 들어주고있는 셈이다. 그녀는 바로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무엇보다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이 있으며 근대적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 jenny

P. 47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 jenny

P. 48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긍정하는 수동적인 자기 개방이 아니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접기 - jenny

P. 54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밀게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 jenny

P. 55 이 ‘월Wall가의 이야기‘가 묘사하는 것은 모든 주민이 노동하는 동물로 전락해버린 비인간적 노동 세계이다. 고층 빌딩으로 빽빽하게 둘러싸인 사무국의 음울하고 반생명적 분위기가 상세하게 그려진다. - jenny

P. 57 후기근대적 성과사회의 표징인 우울증의 증상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이 부족하다든가 열등하다는 느낌, 실패에 대한 불안은 바틀비의 감정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끝없는 자책과 자학은 그에게 낯선것이다. 그는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후기근대적 성과사회의특유한 명령에 부딪힌 적이 없다. 바틀비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해 좌절하는 것이 아니다. 접기 - jenny

P. 72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 jenny

P. 81 카프카는 대단히 난해한 단편 「프로메테우스」에서 몇 차례에 걸쳐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재해석 작업을 수행한다. 첫번게 재해석 시도에 따르면 ˝신들은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나는 또 하나의 재해석을통해 이 프로메테우스 전설을 내적 영혼의 장면으로, 즉 오늘날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며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성과주체의 심리적 기구에 관한 묘사로 파악하고자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과 함께 노동도 가져다주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묶여 있다. 접기 - jenny

P. 97 ˝멜랑콜리가 비범한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었다면 우울증은비범한 것이 대중화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에 평등을 더한 것이며, 민주적 인간의 전형적 질병이다.˝ - jenny

P. 104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 jenny

P. 111 에랭베르는 후기근대적 인간을 니체의 주권적 인간과 등치하면서, 그가 실은 주권자이자 호모 사케르라는것, 주인이자 동시에 노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니체의 입장에서 그러한 인간은 주권적 인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노예로서 스스로 착취당하는 최후의 인간일 것이다. 예랭베르의 가정과는 반대로, 니체의 주권적 인간은 실은 탈진한 성과주체에 대한 문화비판적 대항 모델로서 여유로운 인간의모습으로 등장한다. 접기 - jenny

P. 114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로 죽일수 없다는 점에서 주권사회의 호모 사케르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이들의 생명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들Untote의 생명과 비슷하다. 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것이다. - jenny

P. 127 성공학 개론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한병철은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본가이며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 jenny

P. 127 한병철은 시스템이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면, 개개인이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우울증을 이 시대의 핵심적 질병으로 지목하고, 그 배후에 성과사회의 압력이 놓여 있음을 설득력있게 논증한다. - jenny

P. 128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한병철의 예리한 시대 진단은 그러한 쉽지 않은 반성과 자각의 출발점이 될 것이며, 이 책이 고도로 발달한 성과사회의 한복판(독일)에서 얻은 호응은 그의 제안이 고독한 메아리 이상의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 jenny

P. 28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눈우

P. 29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 눈우

P. 48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 눈우

P. 54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 눈우

P. 101 즉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 눈우

P. 104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 눈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우울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대한 우아하고도 날카로운 철학적 진단!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독일 최고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2010년 10월 2일자에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의 한병철 교수의 철학적 업적을 조명하는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에서 한병철 교수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 비판의 개척자로 묘사되고 있다. 문화 비판은 니체, 프로이트, 아도르노, 벤야민 등 독일 사상의 중요한 전통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독일의 최고 권위지가 한국 출신의 철학자에게 문화 비판의 혁신자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범상하게 넘겨볼 일이 아니다.

위 기사의 필자인 마르크 지몬스는 지금까지 중국, 일본, 한국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적, 기술적으로 인상적인 업적을 보여주었을지 모르지만 서양에 대해 거의 아무런 사상적 영향도 주지 못해왔다고 지적하면서, 한병철이 이러한 사상적 침묵을 깨고 동아시아적 시각에서의 문화 비판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곧 한병철 교수가 독일의 지성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최초의 동양인 철학자임을 의미한다. 고국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여 독일의 권위 있는 출판사들에서 꾸준히 저서를 출간해온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를 통해 이제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로, 서양 철학의 언어를 구사하며 그 속에 동양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비판가로 떠올랐다.

 

『피로사회』는 출간 즉시 철학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가 되었다. 거의 모든 독일의 주요 신문과 방송 매체들이 이 책을 비중 있게 다루었고, 시대의 핵심적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 책으로서 격찬하였다.

한병철 교수는 이 책에서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냉전, 면역학, 규율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이 책에서 성과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결과로 해석된다. 더 큰 성과를 올려서 더 큰 성공을 거두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생산성을 극대화해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착취는 이렇게 해서 자발적인 착취의 양상을 띤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노동수용소를 짊어지고 있다. 범람하는 성공학 도서들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경영자입니다”라고 말할 때, 한병철은 그것을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착취자입니다”라고 읽는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피로’의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무위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한병철은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본다.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한병철은 모든 권위를 타파하고 가장 완전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한 서구 사회,(??) 부정성이 거의 완전히 제거된 듯한 긍정성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의문, 다시 말해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라는 의문에 대해 명석한 답을 제시해준다. 그것이 바로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독일에서 이 책이 그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이유일 것이다.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묘사되는 성과사회의 모습은 상당 부분 한국 사회의 현실과도 일치한다. 이 점은 긍정의 힘을 통한 성공을 설교하는 처세 관련 책들이 한국의 도서 시장에서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를 보더라도 확인된다. 한국인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아마도 능력(업적)과 성공의 일치일 것이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노래 실력 하나만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의 우승자가 된 허각에게서 사람들이 본 것도 그러한 이상이다. 하지만 능력(업적)=성공이라는 이상은 능력(업적)을 최상의 가치로 만드는 성과사회의 패러다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이상적인 사회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한병철의 책은 깨닫게 해준다. ‘존재하려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모든 개개인의 마음속에 내면화된 지상 과제가 될 때 사회는 한병철의 말대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양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접기

 

##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한병철, 2014, 『투명사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03-11

원제 : Transparenzgesellschaft (2012년)

 

책소개: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의 신작. <투명사회>는 인간을 비밀이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투명성’의 전체주의적 본질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은 2012년 독일에서 먼저 출간되었는데, ‘투명성’을 절대적인 가치로 간주해오던 독일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투명성’은 중요한 화두이다. 정치에서는 물론이고 경제에서도 투명성이 강조된다. 사람들은 투명성이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인터넷, SNS 등의 발달로 정보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공개되고 무제한적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투명한 사회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음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한병철은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통제사회라고 주장한다. 투명사회는 우리를 민주주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 상태,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몰아넣는다. 이 새로운 통제사회에서 우리들은 너무나도 자발적으로, 심지어 그것을 ‘자유’라고 오해한 채 자신의 모든 것을 전시하고 공개해버린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5

 

투 명 사 회

긍정사회 13 | 전시사회 28 | 명백사회 38 | 포르노사회 48 | 가속

사회 63 | 친밀사회 72 | 정보사회 78 | 폭로사회 87 | 통제사회 93

| 미주 103

 

무 리 속 에 서 ― 디 지 털 의 풍 경 들

서론 113 | 존경 없이 115 | 격분사회 124 | 무리 속에서 127 | 탈

매개화 136 | 영리한 한스 144 | 이미지로의 도피 152 | 손에서 손

가락으로 158 | 농부에서 사냥꾼으로 166 | 주체에서 프로젝트로

176 | 대지의 노모스 183 | 디지털 유령 188 | 정보의 피로 195 |

재현/대표의 위기 200 | 시민에서 소비자로 205 | 완전한 생의 프로

토콜 210 | 심리정치 217 | 미주 223

 

역자 해제 227

 

 

책속에서

P. 5 오늘날 ‘투명성’이란 단어는 마치 유령처럼 모든 삶의 영역을 떠돌고 있다. 정치에서는 물론이고 경제에서도 투명성이 강조된다. 투명성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투명성이 신뢰를 낳는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믿음이다. 이때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하필이면 신뢰가 급격하게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단히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접기

P. 7 투명성은 속이 들여다보이는 유리 인간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투명성의 폭력이 있다. 무제한의 자유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은 전면적 통제와 감시로 돌변한다. 소셜미디어 또한 점점 더 사회적인 삶을 감시하고 이용해먹는 디지털 파놉티콘에 가까워진다.

규율사회의 파놉티콘은 더 효과적인 감시를 위해 수감자들을 격리시키고 서로 대화도 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서로 열심히 소통하며 그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출한다. 그들은 이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접기

P. 24~25 투명성의 정당인 해적당Piratenpartei은 포스트정치Post-politik, 탈정치의 길을 더 밀고 나간다. 해적당은 반反정당이며 색깔이 없는 최초의 정당이다. 투명성은 색깔이 없다. 해적당에서 색깔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몰이데올로기적인 의견인 한에서만 허용된다. 의견은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의견은 이데올로기처럼 전체를 장악하고 전체를 꿰뚫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 정치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관계를 건드리지 않은 채 그 속에 틀어박혀서 그저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관리하는 역할로 위축된다. 접기

P. 26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P. 74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 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접기

P. 91~92 “지붕과 벽, 창과 문이 있는 안전한 집”은 오늘날 “물질적인 혹은 비물질적인 온갖 케이블”로 온통 구멍이 뚫려버렸다. 집은 “틈새로 커뮤니케이션의 바람이 들이치는” 폐허가 되었다. 커뮤니케이션과 정보가 일으키는 디지털 바람은 모든 것을 뚫고 들어와 투명하게 만든다. 투명사회 전체에 디지털 바람이 불고 있다.

P. 98~99 신뢰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투명성에 대한 집요한 요구가 생겨나지 않는다.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려는 사회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것, 진실성이나 정직성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점점 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도덕적 심급이 허물어지면서 그 자리를 투명성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명령이 대신한다. 접기

P. 128~129 오늘날 우리는 분명 다시 위기에 처해 있다. 또 하나의 변혁, 즉 디지털 혁명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보이는 위태로운 이행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다수의 대오가 기존의 권력 및 지배 관계를 무너뜨리는 중이다. 이 새로운 다수의 이름은 디지털 무리der digitale Schwarm다. 디지털 무리는 고전적인 다수의 대오, 즉 군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 디지털 무리는 군중과는 반대로 내적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다. 디지털 무리는 하나의 목소리로 표출되지 않는다. 접기

P. 208 쇼핑은 토론을 전제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마음에 드는 것을 사면 된다. 그는 개인적 취향을 따른다. 좋아요는 소비자의 구호다. 그는 시민이 아니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 시민을 시민으로 만든다면, 소비자에게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투표소와 시장, 폴리스polis와 경제가 하나가 되어버린 디지털 광장에서 유권자는 소비자처럼 행동한다. 인터넷이 곧 투표소를 완전히 대체할 날도 멀지 않았다. 접기

P. 212~213 감시와 통제는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적 요소에 속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독특한 점은 빅브라더와 수감자 사이의 구별이 점점 더 불분명해진다는 데 있다. 여기서는 모두가 모두를 관찰하고 감시한다. 국가의 첩보 기관만 우리를 엿보는 것이 아니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기업도 마치 첩보 기관처럼 작동한다. 이들 기업은 우리의 삶을 훤히 비추어 거기서 캐낸 정보로 수익을 올린다. 회사는 직원들을 염탐한다. 은행은 잠재적인 대출 고객들을 들여다본다. 접기

, - 여울

정신은 타자를 대면할 때 깨어난다. 타자의 부정성이 정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정신의 특별한 능력은 ˝자신의 개별적 직접성에 대한 부정을, 무한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타자의 부정성을 완전히 떨쳐버린 긍정성은 ˝죽은 존재˝로 쪼그라든다.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관계˝에서 탈출하는 정신만이 경험을 할 수 있다. 고통이 없고, 타자의 부정성이 없고, 긍정성만 과다한 경우에 경험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어디나 돌아다니지만 경험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람들은 끝없이 수를 세지만 이야기할 줄은 모른다. 사람들은 온갖 것에 대한 정보를 얻지만 어떤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 타자에 직면할 때 찾아오는 문턱의 감정, 즉 고통은 정신의 매체다. 정신은 고통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고통스러운 삶을 묘사한다. 반면 디지털의 현상학은 정신의 변증법적 고통과 무관하다. 그것은 좋아요의 현상학이다. 접기 - 철철대마왕

P. 12 12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 페터 한트케 - 베텔게우스

P. 15 15-6 투명한 언어는 형식적 언어, 즉 어떤 애매모호함도 없는 순전히 기계적이고 조작적인 언어다. 이미 훔볼트는 인간 언어의 근본적 불투명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 누구도 어떤 말 속에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작을지언정 어떤 차이가 마치 물속의 동심원처럼 언어 전체에 파동을 일으킨다. 따라서 모든 이해는 언제나 몰이해이기도 하며 생각과 감정의 모든 일치는 동시에 분열이기도 한 것이다.˝ 오직 정보로만 이루어진 세계, 정보의 원활한 유통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불리는 세계는 기계와 유사할 것이다. 긍정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더 이상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하나의 구조 속에 놓인 정보의 투명성과 외설성˝이다. 투명성에 대한 강박은 인간마저 평준화하여 시스템의 기능적 요소로 만든다. 이런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7 17-8 ‘포스트프라이버시‘의 이데올로기는 극히 단순하다. 이 이데올로기는 투명성의 이름으로 사적 영역의 완전한 포기를 요구하며, 이를 통해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 속에는 몇 가지 오류가 들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투명하지 않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무의식이 거침없이 긍정하고 갈망하는 것을 부정한다. ˝이드(id, Es)˝는 자아에게 거의 감추어져 있다. 그러니까 인간 정신은 균열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자아가 자신과의 일치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런 근원적 균열 때문에 인간은 자신에 대해 투명해질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도 틈새가 벌어진다. 그리하여 서로에 대해 투명한 인간관계는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설사 그런 관계가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타자가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관계를 살아 있게 해준다. 게오르크 짐멜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완벽하게 안다는 것, 심리를 끝까지 파헤쳤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취해 있지 않았었는데도 술에서 깬 듯 정신이 번쩍 들고, 인간관계의 활력도 사라진다. [......] 생산적인 관계의 깊이는 드러난 모든 마지막 진실 뒤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궁극의 최종적 진실이 있음을 예감하고 이를 존중하는 데서 나오며, [......] 인격 전체로 연결된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내면의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질문의 권리를 비밀의 권리로 제한하는 섬세함과 자제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40 40-1 ˝가장 가까운 일부분은 불명확하고 비가시적이어야 한다.˝ 환상은 쾌락의 경제학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전혀 가려지지 않은 대상은 환상을 차단한다. 물러난 대상, 손에서 벗어나 버린 대상만이 환상에 불을 붙인다. 실시간의 향락이 아니라 상상 속의 전희와 후희가, 시간적인 유예가 쾌락을 깊게 한다. 상상 속의 서사적 우회로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직접적인 향락은 포르노적이다. 과도하게 선명하고 뚜렷한 미디어 속의 극사실적 이미지들은 환상을 마비시키고 질식시킨다. 칸트에 따르면 상상력의 바탕은 놀이에 있다. 상상력은 확고하게 한정되지도 않고 분명한 윤곽선도 없는 놀이 공간을 전제한다. 상상력은 선명하지 않은 것, 불명확한 것을 필요로 한다. 상상력은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지 않다. 자신에 대한 투명성은 이성의 특징이다. 그래서 이성은 놀지도 않는 것이다. 이성은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일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15 115-6 존경의 독일어 Respekt는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돌아보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존경은 배려Rucksicht(‘뒤‘를 뜻하는 Ruck와 ‘봄‘ ‘시야‘를 뜻하는 Sicht의 합성어.)이다. 타인을 존경하는 사람은 함부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존경의 전제는 떨어져 있는 시선, 거리의 파토스이다. 오늘날 존경심이 사라지면서 거리를 알지 못하는 구경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은 스펙터클의 특징이다. 스펙터클의 어원인 라틴어 동사 spectare는 거리를 둔 배려와 존경respectare 없이 관음증적 태도로 쳐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거리의 유무가 respectare와 spectare를 구별한다. 존경할 줄 모르는 사회, 거리의 파토스가 없는 사회는 스캔들 사회로 전락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계산과는 반대로 사유는 자신에 대해 투명하지 않다. 사유는 예측된 경로를 따라가지 않고 미확정적인 공간으로 나아간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에는 일정한 부정성이 내재하는데,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사유는 자신을 변모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스로 달라진다는 부정적 특성은 사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측면이다. 이 점에서 사유는 언제나 동일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계산과 구별된다. 계산의 동일성은 가속화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조건이다. 경험뿐만 아니라 인식도 부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단 하나의 인식이 기존의 인식전체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보에는 이러한 부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경험 역시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경험Erfahrung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는 체험Erlebnis과 다르다.

ㅡp.65 접기 - findyoursoul

행렬은 서사적 사건이다. 행렬은 프로세서와 달리 강력한 방향성을 지닌다. 따라서 행렬은 전혀 외설적이지 않다. 프로세서와 행렬은 모두 ˝전진˝을 의미하는 라틴어 동사 procedere에서 나왔다. 행렬은 하나의 이야기 속에 편입되어 있다. 이로 인해 행렬에서는 서사적 긴장이 생겨난다. 행렬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특별한 대목을 연극적으로 재현한다. 미장센은 행렬의 본질적 요소이다. 행렬은 서사성을 지니는 까닭에 고유한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따라서행렬을 더 빠르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야기는 더하기가 아니다. 반면 프로세서의 전진procedere에서는 어떤 서사성도 찾아볼 수 없다. 프로세서의 작동에는 어떤 이미지도, 어떤 장면도 없다. 행렬과 반대로 프로세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erzählen 않는다. 프로세서는 오직 셈할zählen 뿐이다. 숫자는 적나라하다. 마찬가지로 라틴어 동사 procedere에서 유래한 프로세스 Prozess 역시 그 기능적 성격으로 인해 서사성이 부족하다. 그 점에서프로세스는 안무와 미장센을 필요로 하는 서사적 진행과 구별된다. 기능적 특성을 지닌 프로세스는 단지 조종과 관리의 대상일 뿐이다. 모든 것이 프로세스가 된 사회, 그리하여 ˝더 이상 아무런 장면도 없고 모든 것이 철저히 투명해진˝사회는 외설적이다.

ㅡp.66 접기 - findyoursoul

답한다. ˝지난 십 년 혹은 이십 년 동안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책은 홍수처럼 출간되지만정신은 정지 상태입니다. 원인은 커뮤니케이션의 위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정신의 매체는고요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고요를 파괴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소음을 만들어내는 디지털 매체의 가산적 특징은 정 신의 걸음걸이와는 거리가 멀다. 접기 - applesoda

P. 21 긍정사회는 부정적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괴로움과 고통을 대하는 법, 그러한 감정을 형식에 담는 법을 잊어버린다. - 책읽는피자

P. 54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과도한 가시성의 장에 던져넣음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를 촉진한다. - 책읽는피자

다른 사람들이 나에대해알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것으로 살아간다. - eywhang

P. 17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투명하지 않다. 프로이트에 따르면자아는 무의식이 거침없이 긍정하고 갈망하는 것을 부정한다. ˝이드(id. Es)˝는 자아에게 거의 감추어져 있다. 그러니까 인간 정신은 균열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자아가 자신과의 일치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런 근원적 균열 때문에 인간은 자신에 대해 투명해질 수 없다. 접기 - 그린로즈

P. 35 전시가치의 절대화는 가시성의 폭정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미지의 증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라는 강압에 있다. 모든 것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투명성의 명령은 가시화의 압력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적이다. - 그린로즈

P. 14 투명성을 부패와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사람은 그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투명성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장악하여 근원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 끌어들이는 시스템적 강제력이다.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고 신속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명성을 강요한다. 가속화의 압력은 부정성의 해체와 퀘를 같이한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 접기 - 후이

P. 61 만일 문화가 특별한 인물들, 표정과 몸짓, 이야기와 행위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시각의 포르노화는 탈문화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 후이

P. 74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 의식을 해제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접기 - 후이

투명사회에는 진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가상도 없다. 진리도, 가상도 투명하지 않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공허뿐이다. 이 공허를 제거하기 위해 대량의 정보가 유통된다. 하지만 이렇게 정보와 이미지의 거대한 더미로 채운다 해도 공허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만으로 세계를 밝힐 수는 없다. 투명성도 눈을 밝게 해주지는 못한다. 정보의 무더기가 진리를 낳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정보가 방출될수록 세계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둠 속에 빛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접기 - 후이

P. 6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매끈하게 다듬고 평준화하는 작용을 하며, 결국 획일화를 초래하고 이질성을 제거한다. 투명성은 순응에 대한 강압을 낳고 이로써 지배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다. - piano避我路

투명사회는 정보의 공백도 시각의 공백도 용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유도 영감도 어떤 빈자리를 필요로 한다.

 

- <긍정사회> 중에서 - ossos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대량화는 경제적 가치의 증가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부정적인 판정은 커뮤니케이션을 손상시킨다. (…) 거부에 담긴 부정성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없다.

 

- <긍정사회> 중에서 접기 - ossos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 <긍정사회> 중에서 - ossos

계산과는 반대로 사유는 자신에 대해 투명하지 않다. 사유는 예측된 경로를 따라가지 않고 미확정적인 공간으로 나아간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에는 일정한 부정성이 내재하는데,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사유는 자신을 변모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스로 달라진다는 부정적 특성은 사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측면이다. 이 점에서 사유는 언제나 동일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계산과 구별된다. 계산의 동일성은 가속화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조건이다. 경험뿐만 아니라 인식도 부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단 하나의 인식이 기존의 인식 전체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보에는 이러한 부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경험 역시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경험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는 체험과 다르다.

 

- <가속사회> 중에서 접기 - ossos

이야기는 선택 작업을 수행한다. 서사의 궤도는 좁다. 오직 특정한 사건만 서사의 궤도 속에 들어올 수 있다. 이로써 긍정적인 것의 마구잡이 증식과 대량화가 방지된다.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이 사회에서 서사성이 사라졌음을 방증한다. 기억 또한 그러한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기억은 서사적이라는 점에서 그저 덧붙이고 쌓기만 하는 저장과 구별된다. 기억의 자취는 그 역사성 때문에 늘 재정리되고 수정되는 과정 속에 놓인다. 이와 반대로 저장된 데이터는 늘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다. 오늘날 기억은 긍정화되어 쓰레기와 데이터의 더미로, “고물가게”로, 또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다량의 온갖 이미지와 닳아빠진 상징들이 완전히 뒤죽박죽 꽉 차 있는 창고”로 전락한다. 고물가게의 사물들은 차곡차곡 정돈되지 않고, 그저 나란히 널려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역사가 없다. 고물가게는 기억도 망각도 하지 못한다.

 

- <가속사회> 중에서 접기 - ossos

오늘의 시간 위기는 가속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분산과 해체에 있다.

 

- <가속사회> 중에서 - ossos

P. 5 오늘날처럼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사회에서는 신뢰에서 통제로의 시스템적 전환이 일어난다.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통제사회다. - 베텔게우스

P. 6 전면적 커뮤니케이션과 전면적 네트워크화의 흐름 속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 튀는 견해를 밝히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려워졌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은 매끈하게 다듬고 평준화하는 작용을 하여, 결국 획일화를 초래하고 이질성을 제거한다. 투명성은 순응에 대한 강압을 낳고 이로써 지배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다. - 베텔게우스

P. 15 커뮤니케이션은 같은 것끼리 반응할 때, 동일자의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최대 속도에 도달한다. 다름과 낯섦의 부정성, 타자의 저항은 매끄러운 동일자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투명성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강제로 투명사회는 곧 획일적 사회가 된다. 바로 이 점에 투명사회의 전체주의적 특성이 있다. ˝획일화를 표현하는 새 단어 : 투명성.˝ 접기 - 베텔게우스

P. 16 인간의 영혼은 분명 타자의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불투과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한다. 영혼의 내부를 훤히 비춘다면, 영혼은 불타버릴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소진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직 기계만이 투명하다. 즉흥성과 우발성, 자유처럼 삶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들은 투명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훔볼트도 언어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에는 어떤 이성으로도 그 현상 이전의 상태에서 원인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 있다. [......]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의 가능성을 언어에서 배제한다면, 이는 언어의 발생과 변화에 관한 역사적 진실에 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9 잘 알려진 대로, 정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더 좋은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직관은 주어진 정보를 초월하여 자기 고유의 논리를 따라간다. 오늘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정보의 더미 속에서 고차적인 판단 능력은 위축되어간다. 종종 더 적은 지식과 정보가 더 많은 작용을 한다. 생략과 망각의 부정성이 생산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일은 드물지 않다. 투명사회는 정보의 공백도 시각의 공백도 용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유도 영감도 어떤 빈자리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행복Gluck이란 단어는 빈틈에서 유래한 것이다. 행복은 중고지 독일어에서는 gelucke였다. 빈틈의 부정성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행복이 없는 사회이다. 시각적 빈틈이 없는 사랑은 포르노이다. 그리고 지식의 빈틈이 없다면 사유는 재산으로 전락하고 만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0 긍정사회는 변증법과 해석학에 작별을 고한다. 변증법의 바탕은 부정성에 있다. 그리하여 헤겔의 ˝정신Geist˝은 부정적인 것에 등을 돌리지 않고, 부정적인 것을 감당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보존한다. 부정성은 ˝정신의 생명˝에 양분을 준다. 자기 속의 타자는 부정의 긴장을 촉발하며, 이로써 정신의 활력을 유지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이 ˝힘˝이 되는 것은 오직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곁에 머무를 때˝뿐이다. 이러한 머무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역전시키는 마법˝이다. 반면 오직 긍정적인 것 사이에서만 뛰어다니는 자는 정신이 없다. 정신은 느리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며 그것을 소화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투명성의 시스템은 스스로를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부정성을 폐기 처분한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보다 긍정성 속에서 질주하는 것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1 긍정사회는 부정적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괴로움과 고통을 대하는 법, 그러한 감정을 형식에 담는 법을 잊어버린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 영혼의 깊이, 위대함, 강인함은 바로 부정적인 것에 머무름으로써 나온다. 인간 정신도 산고의 결과이다. ˝영혼에 강인함을 심어주는 저 불행에 빠진 영혼의 긴장, [.......] 불행을 견디고, 버티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예민함과 용기, 그리고 예로부터 비밀, 가면, 정신, 계략, 위대함으로부터 영혼에 주어져온 것ㅡ그것을 영혼은 괴로움 속에서, 엄청난 괴로움의 훈육 속에서 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긍정사회는 인간 영혼을 완전히 새로 조직화하려는 참이다. 영혼의 긍정화 흐름 속에서 사랑 역시 안락한 감정들, 복잡하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흥분들의 평면적인 배합으로 전락한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싱글 거래소 미틱Meetic의 슬로건에 주의를 환기한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하세요!˝ 또는 ˝괴로움 없이 사랑하기, 참 쉬워요!˝ 사랑은 길들여지고 긍정화되어 소비와 안락의 상투형이 된다.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아야 한다. 고뇌와 정열은 부정성의 형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부정성 없는 향락에 밀려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진, 피로, 우울과 같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생겨나는 심리적 장애에 의해 대체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3 정치는 전략적 행위이다. 이미 이 이유 때문에라도 비밀스러운 영역은 정치와 잘 어울린다. 전면적인 투명성은 정치를 마비시킨다. 카를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공개주의 원칙과 특수한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은 [......] 기밀, 즉 정치기술적 비밀이 모든 정치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관념이다. 사유재산과 경쟁에 바탕을 둔 경제활동에서 사업과 경영 상의 비밀이 필수적인 것만큼이나 정치기술적 비밀도 절대주의의 필수 요소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6 긍정사회에서 일반화된 판정의 형식은 ‘좋아요‘이다. 페이스북이 ‘싫어요‘ 버튼을 도입하는 데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긍정사회는 모든 종류의 부정성을 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부정성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는 오직 정보 교환의 양과 속도로만 측정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대량화는 경제적 가치의 증가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부정적인 판정은 커뮤니케이션을 손상시킨다.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더 빠르게 후속 커뮤니케이션을 유발하는 것이다. 거부에 담긴 부정성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용성이 없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6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제거하지 못한다. 더 많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불명료함은 오히려 더욱 첨예화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32 전시되는 사회에서는 모든 주체가 스스로를 광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것이 전시가치로 측정된다. 전시되는 사회는 포르노적 사회이다. 모든 것이 겉으로 나오고, 벗겨지고, 노출된다. 과도한 전시의 결과로 모든 것이 ˝어떤 비밀도 없이 즉각적인 소비에 내맡겨진˝ 상품으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모든 것을 전시의 강제 아래 복속시킨다. 오직 전시적 연출만이 가치를 생성한다. 사물의 고유한 형태는 폐기된다. 사물들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조명 속으로 사라진다. ˝일반적으로 볼 때, 가시적인 사물들은 어둠이나 침묵 속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가시적인 것보다 더 가시적인 것, 즉 외설적인 것 속에서 휘발되어버린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34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스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전시의 명령은 가시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절대화를 초래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전시가치, 주의를 생산하지 못하는 까닭에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이 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38 투명사회는 쾌락에 대해 적대적인 사회이다. 인간적 쾌락의 경제 내부에서 쾌락과 투명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리비도의 경제는 투명성을 알지 못한다. 비밀과 베일과 은폐와 같은 부정적 요소야말로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강화한다. 그래서 유혹자는 가면과 환상, 가상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투명성의 강제는 쾌락의 놀이 공간을 파괴한다. 명백성은 유혹 대신 절차만을 허용한다. 하지만 유혹자는 돌아가는 길, 갈라진 길, 미로처럼 꼬인 길을 걸어간다. 그는 다의적인 기호를 동원한다. ˝유혹은 흔히 다의적 약호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서양 문화에서 원형적인 유혹자들은 특정한 의미의 비도덕성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유혹자들은 다의적인 언어를 구사하는데, 이는 그들이 진지함과 대칭성의 규범에 대해 아무런 구속력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실천 양식은 투명성을 요구하고 다의성의 포기를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최대의 계약적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고, 유혹의 수사적, 감정적 후광을 무력화하려는 것이다.˝ 다의성과 양가성, 비밀과 수수께끼의 유희는 에로틱한 긴장을 고조시킨다. 투명성과 명백성은 에로스의 종언을 초래할 것이다. 즉 포르노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투명사회가 동시에 포르노사회이기도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투명성의 이름으로 무제한의 상호 폭로전을 부추기는 ‘포스트프라이버시‘의 관행 역시 쾌락에 대해서는 오직 파괴적 작용만 할 뿐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43 리비도 경제는 권력경제적 논리를 따른다. 왜 인간에게는 권력을 행사하려는 성향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푸코는 쾌락경제에 관한 언급으로 답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자유로울수록 다른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서 오는 쾌락은 그만큼 더 크다는 것이다. 이때 게임이 더 불확실해질수록, 그리고 타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게임의 방식이 더 다채로워질수록 쾌락도 그만큼 더 증대된다. 전략 게임에서 불투명성과 예측 불가능성은 대단히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권력도 하나의 전략 게임이다. 그래서 권력은 열린 공간에서 작용한다. ˝권력이란 전략 게임이다. 사람들은 권력이 악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성적 관계나 연애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사태가 정반대로 뒤집힐 수 있는 일종의 불확실한 전략 게임 속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정열과 성적 쾌락의 일부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45 계략은 정언명령에 의해 이끌린 행동보다 더 효과적이고 덜 폭력적이다. 그래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계략은 폭력보다 더 낫다.˝ 계략은 주변을 둘러보고 그때그때 상황 속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에서 더 유연하고 더 많은 융통성을 발휘한다. 계략은 정언명령보다 더 잘 본다. 반면 정언명령은 경직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다. 폭력은 계략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 그리하여 폭력은 더 큰 ‘명백성‘을 낳는다. 니체는 여기서 완벽한 조명과 통제의 사회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보다 자유로운 삶의 형식을 옹호한다. 그것은 대칭성과 동등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계약 사상이나 교환 경제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도 자유롭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46 비밀과 어둠은 드물지 않게 매혹을 발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신은 더 많은 기쁨을 생산하기 위해 은유를 동원하여 성서를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만든다. ˝이러한 것들은 비유의 외투로 덮인다. 경건한 신념으로 탐구하는 인간의 이성이 계속 훈련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들이 벗겨져 공개적으로 제시될 때 무가치하게 보이지 않도록 말이다. 다른 곳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드러내놓고 명백하게 말해진 것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워진다. 너무나 새로워져서, 그것을 숨겨진 상태에서 밖으로 끄집어낼 때 달콤한 맛이 날 정도다. 그것을 이런 방식으로 숨겨두는 것은 배움의 열의를 가진 사람들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것이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이를테면 자기한테 감추어져 있는 것을 더 뜨겁게 동경하며, 그렇게 동경하던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만큼 더 큰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비유의 외투는 말을 에로틱하게 만든다. 비유의 외투는 말을 갈망의 대상으로 고양시킨다. 말은 비유의 옷을 입었을 떄 더욱 유혹적이 된다. 감추어져 있다는 부정적 특성은 해석학을 에로티즘으로 만든다. 발견과 해독은 벗기는 쾌감을 일으킨다. 반면 정보는 적나라하다. 벌거벗은 말은 매력을 상실하고 평범해진다. 비밀의 해석학은 투명성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 폐기해야만 하는 악마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술, 다시 말해 설사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뭔가 깊이를 창출하는 문화적 기술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48 투명성은 아름다움의 매체가 아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미는 가리는 것과 가려지는 것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것은 베일도 아니고, 가려진 대상 자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베일 속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 대상은 베일이 걷히고 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초라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궁극적으로 베일을 본질로 하는 저 대상을 다르게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즉 비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ㅡ옮긴이). 오직 아름다움만이 가림과 가려짐 속에서 본질적이고, 아름다움 외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의 신적인 존재 근거는 비밀에 있다. 미는 필연적으로 베일과 가림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노출시킬 수 없는 것이다. 가려진 것은 오직 가려져 있을 때만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한다. 폭로는 가려진 것을 없애버린다. 따라서 벌거벗은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으로도 가리지 않은 채 벌거벗은 상태에서 본질적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인간의 벗은 몸 속에서 모든 미를 뛰어넘은 어떤 존재, 즉 숭고한 것이 완성되었다. 그것은 모든 형상을 뛰어넘는 어떤 작품, 즉 창조주의 작품이다.˝ 오직 어떤 형식이나 형상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 반면 숭고한 것은 형식이나 형상이 없는 벌거벗음이며, 여기에는 미를 구성하는 비밀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숭고함은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하지만 피조물로서의 벌거벗음은 전혀 포르노적이지 않다. 그것은 참으로 숭고하며 창조주의 업적을 환기한다. 칸트 역시 모든 재현,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대상에 대해 숭고하다고 말한다. 숭고함은 상상력을 초월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51 포르노적으로 자기를 전시하며 맞은편 상대를 향해 ˝교태를 부리는˝ 얼굴만큼 숭고함과 거리가 먼 것도 없다. - 베텔게우스

P. 56 에로틱한 암시는 지시적이지 않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에로틱한 유혹의 힘은 ˝타자 자신에게조차 영원히 비밀로 남아 있게 될 어떤 것에 관한 예감, 내가 결코 알 수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의 봉인 속에서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타자의 어떤 부분˝과의 유희 속에서 발휘된다. 포르노적인 것은 매력적이지도 않고 암시적이지도 않다. 포르노적인 것은 전염시키고 자극할 뿐이다. 여기에는 유혹을 위해 필요한 거리가 없는 것이다. 에로틱한 매력에는 박탈의 부정성이 필수적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57 바르트는 사진의 두 가지 요소를 구분한다. 첫번째 요소를 그는 ˝스투디움 studium˝이라고 부른다. 탐구해야 할 광대한 정보들의 영역과 ˝시름없는 소망, 방향 없는 관심, 일관성 없는 기호ㅡ좋다/싫다ㅡ의 영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스투디움은 ‘사랑하다‘가 아니라 ‘좋아하다‘의 범주에 들어간다. ‘좋아요/싫어요‘가 스투디움의 판단 형식이다. 스투디움에서 격렬함이나 열정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두번째 요소인 ˝푼크툼 punctum˝은 ˝스투디움˝을 깨뜨린다. 그것은 호감이 아니라 어떤 상처, 격한 감동, 당혹감을 낳는다. 단조로운 사진은 푼크툼이 없는 사진이다. 그것은 스투디움의 대상일 뿐이다. ˝보도 사진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사진에 속한다(단조로운 사진이 반드시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미지들 중에는 푼크툼이 없다. 충격은 있을지언정ㅡ평범한 것도 충격을 일으킬 수 있다ㅡ당혹감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울부짖는‘ 사진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진도 상처를 입히지는 못한다. 이와 같은 보도 사진들은 (한눈에) 분류되고 정리된다. 그 이상은 아니다.˝ 푼크툼은 연속적인 정보들의 행렬을 단시킨다. 그것은 균열, 단층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푼크툼은 극도의 강렬함과 응축의 장소이며, 그 속에는 뭔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내재한다. 푼크툼에는 스투디움에 특징적인 투명성과 명백성이 전혀 없다. ˝무엇인지 이름을 대지 못하는 무능함은 내적인 불안의 확실한 징표다. [......] 작용은 느껴지지만 작용이 나타나는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것에는 기호도 이름도 없다. 그것은 꿰뚫고 들어오지만 나의 내면 어딘가 불특정한 지대에 내려앉는다. [......]˝ 접기 - 베텔게우스

P. 72 18세기의 세계는 세계 극장이었다. 이 세계에서 공적 공간은 일종의 무대 같은 것이다. 연극적 거리가 육체와 육체, 영혼과 영혼의 직접적 접촉을 막아준다. 연극적인 것은 촉각적인 것과 대립한다. 사람들은 예식적인 형식과 기호를 통해 소통하고, 이는 영혼의 짐을 덜어준다. 근대는 점차 연극적 거리를 친밀성으로 대체해간다. 리처드 세넷은 이를 치명적인 변화로 본다. 인간은 ˝외부로 드러나는 자신의 이미지를 뜻대로 다루며 여기에 감정을 투입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형식화, 관습화, 제의화는 표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극장은 표현의 장소다. 다만 극장에서는 객관적 감정이 표현될 뿐, 내면의 심리가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전시가 아니라 재현이다. 오늘의 세계는 행위와 감정이 재현되고 읽히는 극장이 아니라 내밀함이 전시되고 판매되고 소비되는 시장이다. 극장이 재현의 장소라면, 시장은 전시의 장소다. 그리하여 오늘날 연극적 재현은 포르노적 전시에 밀려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73 친밀성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회적 관계는 개개인의 내적, 심리적 욕구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참되고 신뢰할 만하며 진정한 것이 된다. 친밀성은 심리학적으로 표현된 투명성의 공식이다. 사람들은 감정과 느낌을 드러냄으로써, 즉 영혼을 노출함으로써 영혼의 투명성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 베텔게우스

P. 74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 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 가지 표현 형식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75 개인person(라틴어 persona)의 본래 의미는 가면이다. 가면은 가면을 통과하여 울려오는 목소리에 성격, 즉 형식과 형상을 부여한다. 드러내고 노출하는 투명사회는 모든 형태의 가면, 모든 형태의 가상에 대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점진적인 사회의 탈제의화와 탈서사화 과정 역시 모든 가상의 형식을 제거하여 사회를 벌거숭이로 만들어버린다. 놀이와 제의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객관적 규칙이지 주관적 심리 상태가 아니다. 다른 이들과 게임을 하는 사람은 객관적인 게임 규칙에 복종한다. 게임의 사교성은 게임 참여자들이 서로에게 자기를 드러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서로에 대해 거리를 유지할 때 더 잘 어울리게 된다. 반면 친밀성은 사람들 사이의 교류를 불가능하게 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75 친밀사회는 제의화된 동작과 격식을 갖춘 행동을 불신한다. 그런 것들은 겉치레이고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의는 탈개인화, 탈인격화, 탈심리화를 촉진하는 외면화된 표현 형식들로 이루어진다.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표현적˝이지만, 그렇다고 자기를 전시하거나 노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친밀사회는 심리화되고 탈제의화된 사회다. 그것은 고백의 사회, 노출의 사회, 거리를 모르는 포르노의 사회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76 친밀성은 감정적, 주관적 흥분을 위해 객관적 놀이의 공간을 파괴한다. 제의와 예식의 공간에서는 객관적 기호들이 유통된다. 이러한 공간은 나르시시즘적 자아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텅 빈 부재의 공간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과의 거리 없는 친밀성, 즉 자신에 대한 거리의 부재에서 온다. 친밀사회의 거주민은 나르시시즘적 친밀성의 주체들로서, 이들에게는 연극적 거리두기의 능력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세넷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경험을 찾지 않는다. 그는 체험하고자 한다ㅡ무엇을 대면하든지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상호작용, 모든 연극적 장면을 폄하한다. [......]˝ 세넷에 따르면 오늘날 나르시시즘에서 기인하는 심적 장애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의 사회가 내적인 표현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조직화하고, 개개인의 경계 밖에서 일어나는 의미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의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친밀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제의적, 의식적 상징들을 제거한다. 경험은 타자와의 만남이다. 반면 체험 속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볼 뿐이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계를 한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현존재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런 까닭에 안정적인 자아의 이미지도 생겨나지 못한다. 나르시시즘적 주체는 자기 자신과 너무나 밀착되고 융합되어버려서, 그에게 자기 자신을 데리고 노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해진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자기와 거리를 두게 해주는 공허와 부재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0 루소는 이러한 가면과 역할의 유희에 마음과 진실의 담론을 맞세운다. 그는 제네바에 극장을 건립하려는 계획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연극은 ˝위장의 기술, 본연의 성격과 다른 성격을 취하는 기술, 진짜 자기 자신과 다른 모습을 연기하는 기술, 냉정한 상태로 흥분하는 기술,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기술˝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정말 그러하다고 믿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야 한다.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다른 사람의 처지에 집어넣음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망각해야 하는 것이다.˝ 루소는 연극이 투명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장과 가상과 유혹의 장소라고 비난한다. 표현은 포즈가 아니라, 투명한 마음의 반영이어야 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0 전면적 투명성의 도덕이 폭정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미 루소에게서 드러난다. 모든 베일을 찢어버리고,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며, 모든 어둠을 추방하려는 영웅적인 투명성의 기획은 폭력으로 귀결된다. 이미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도 발효된 바 있는 극장과 미메시스 금지령(플라톤에게 서사시와 연극은 미메시스적 예술이다.)으로 인해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따라서 루소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를 선호한다. ˝모든 개인이 언제나 공공의 감시하에 있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타인의 풍기단속관이 되며, 경찰도 어렵지 않게 모두를 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면적인 통제와 감시의 사회임이 드러난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첨예화되어 하나의 정언명령이 된다.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윤리학의 유일한 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세계가 보거나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 나 자신으로 말하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밖에서도 다 보이는 집을 짓고 싶어 했던 한 로마인이야말로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8 신뢰는 오직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타인에 대한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와 긍정적 관계를 맺게 한다. 신뢰는 무지에도 불구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신뢰란 것은 아예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투명성이란 모든 무지가 제거된 상태를 뜻한다. 투명성이 지배하는 곳에서 신뢰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투명성이 신뢰를 만듭니다‘라는 구호는 사실 ‘투명성이 신뢰를 철폐합니다‘로 바뀌어야 한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바로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 높아진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16 거리가 소멸한 결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뒤섞인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으로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경향이 강화된다. 소셜네트워크 또한 사적인 것의 전시 공간이 된다. 디지털 매체 자체가 정보의 생산을 공공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시키고, 이로써 커뮤니케이션을 사적인 과정으로 만든다. 롤랑 바르트는 사적 영역을 ˝내가 어떤 이미지도, 어떤 대상도 되지 않는 시공간의 영역˝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우리에겐 사적 영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내가 이미지가 되지 않는 영역,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은 없기 때문이다. 구글 글래스는 인간의 눈 자체를 카메라로 만든다. 눈 자체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사적 영역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이미지에 대한 포르노적 강박이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사적 영역은 완전히 철폐되고 있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18 손이나 타자기로 공들여 편지를 작성하는 사이에 즉각적인 흥분은 이미 수그러든다. 반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을 가능하게 한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그 시간적 특성만으로도 이미 아날로그적인 커뮤니케이션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 매체는 감정 매체이다. - 베텔게우스

P. 119 디지털 매체를 통한 네트워크의 확산은 대칭적 커뮤니케이션을 촉진한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참여자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능동적으로 정보를 생성하기도 한다.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명백한 위계질서는 없다. 모두가 송신자이자 수신자이고,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것이다. 그러한 대칭성은 권력에 대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권력의 커뮤니케이션은 한 방향으로, 즉 위에서 아래로 진행된다. 커뮤니케이션에서 환류가 일어나면 권력의 질서는 파괴된다. 악플은 온갖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는 일종의 환류라고 할 수 있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20 소음 또는 잡음은 권력의 붕괴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청각적 신호다. 악플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소음이다. 권력의 아우라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카리스마는 악플에 대한 최상의 방패막이다. 권력의 카리스마가 있는 곳에서는 애초에 악플 같은 것이 불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 베텔게우스

P. 120 권력이 있다면 나의 행위 선택, 나의 의지에 따른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개연성이 줄어든다.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의 권력은 거절보다 승낙의 가능성을 높이는 작용을 한다. 승낙은 거절보다 훨씬 잡음이 덜하다. 거절은 언제나 시끄럽다. 권력의 커뮤니케이션은 잡음과 소음, 즉 커뮤니케이션의 엔트로피를 현저하게 줄인다. 그리하여 권력의 말은 불어나는 소음을 일거에 제거한다. 권력의 말은 고요함을 산출하는데, 그것이 곧 행위를 위한 여유 공간을 이룬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20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의 존경심도 권력과 유사한 작용을 한다. 존경받는 사람의 견해나 행위 선택은 종종 이견이나 반론 없이 받아들여진다. 존경받는 사람은 심지어 모범으로 여겨지며 모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방이란 권력의 차원으로 표현한다면 미리 앞서 가는 복종에 해당된다. 시끄러운 악플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존경심이 사라져갈 때다. 존경받는 사람이 악플로 뒤덮이는 일은 없다. 존경심이 형성되는 것은 인격적, 도덕적 가치의 부여를 통해서다. 그래서 전반적인 가치의 붕괴는 결과적으로 존경의 문화까지 침식시킨다. 오늘날 모범이 되는 인물들은 내적인 가치와 관계가 없다. 외적 특질이 그들을 모범으로 만든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39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벨라 안드레(아마존에서 직접 E-book 형태로 로맨스 소설 시리즈를 발표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책은 빨리빨리 나와요. 내 아이디어에 대해 먼저 에이전시를 설득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난 독자가 원하는 책을 바로 쓸 수 있습니다. 나는 곧 나의 독자인 셈이죠.˝ ˝나는 곧 나의 독자˝라는 말은 ˝나는 곧 나의 유권자˝라는 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말은 진정한 정치가, 즉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면서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나름의 비전으로 유권자를 한발 앞서 가는 정치가의 소멸을 의미한다. 정치적인 시간으로서의 미래는 사라져간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41 ˝부단한 미디어의 관찰 때문에, 우리[정치가들]에게는 도발적이고 인기 없는 주제나 입장에 관해 비공개 석상에서 터놓고 토론할 자유도 없어졌어요.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반드시 누가 그걸 언론에 알릴 거라고 보면 됩니다.˝ - 베텔게우스

P. 143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정신의 매체는 고요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고요를 파괴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소음을 만들어내는 디지털 매체의 가산적 특징은 정신의 걸음걸이와는 거리가 멀다. - 베텔게우스

P. 144 20세기 초에 독일의 말 한 마리가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계산 능력이 있다는 이 말은 ˝영리한 한스˝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간단한 계산 문제에 한스는 발굽이나 머리로 정확한 답을 제시했다. ˝3 더하기 5는 몇?˝ 이라고 물으면 녀석은 발굽을 여덟 번 두드렸다. 이 신기한 사태를 해명하기 위해 과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까지 동원되었으며, 여기에는 철학자도 한 명 참여했다고 한다. 위원회는 이 말에게 계산 능력이 없음을 발견했다. 다만 녀석은 마주하고 있는 인간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에 나타나는 아주 미세한 뉘앙스를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정적인 발굽 소리 직전에 청중이 무의식적으로 긴장된 자세가 되는 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녀석은 이러한 긴장 상태의 느낌을 따라 발굽 두드리기를 멈추었고, 그런 식으로 항상 올바른 답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45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과 편리함 때문에 우리는 점차 진짜 인간과의 직접적인 접촉, 실재와의 접촉 자체를 피하게 된다. 디지털 매체로 인해 진짜 상대방을 마주하는 일은 점점 더 드물어진다. 디지털 매체는 실재를 저항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점점 몸과 얼굴을 잃어버린다. 디지털은 라캉이 말한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의 삼원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조한다. 디지털은 실재계를 해체하고 모든 것을 상상계로 만든다. 스마트폰은 유아기 이후에 거울 단계를 새롭게 재생시키는 디지털 거울로 기능한다. 스마트폰은 내가 나를 품는 나르시시즘적 공간, 상상적인 것의 영역을 열어준다. 스마트폰을 통해 말을 건네오는 것은 타자가 아니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48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시선이 결핍된 커뮤니케이션이다. 스카이프 10주년에 발표된 한 에세이의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화상 통화는 곁에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을 좀더 잘 견딜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없어지지 않으며 그 사실은 언제나 느껴진다. 어쩌면 미세한 위치의 어긋남에서 그 점은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스카이프에서는 서로 눈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모니터 속 상대의 눈을 보고 있으면 상대는 우리가 약간 아래쪽을 보고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카메라가 모니터 위쪽 가장자리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 언제나 누구에게 바라보이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는 직접 대면의 멋진 특징은 사라진다. 스카이프의 시선은 비대칭적이다. 스카이프 덕택에 우리는 하루 24시간 내내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줄곧 서로 다른 데를 쳐다보고 있는 셈이다.˝ 서로 다른 데를 보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비단 카메라의 각도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시선의 근원적인 부재, 타자의 부재에 있다. 디지털 매체는 우리에게서 점점 더 타자를 빼앗아간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49 터치스크린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타자와의 관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이 운동은 타자를 다른 존재로서 구성하는 거리를 제거한다. 우리가 그림을 직접 눌러 건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림이 이미 시선과 얼굴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타자를 손가락으로 집어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우리는 손가락으로 툭 쳐서 타자를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우리의 거울상이 나타나게 한다. 라캉이라면 아마 터치스크린이 그림과 다르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림은 나를 타자의 시선에서 막아주는 동시에 그 시선이 드러나게 하는 스크린이기 때문이다. 반면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은 투명한 스크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터치스크린은 시선이 없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53 이른바 파리 신드롬은 대체로 일본인 관광객에게 찾아오는 급성 심리 장애다. 환자는 환각, 현실감 상실, 이인증, 불안 등에 시달리며 현기증, 발한, 격렬한 심장박동과 같은 심신상관적 증세를 나타낸다. 파리 신드롬을 촉발하는 것은 일본인들이 여행 전에 파리에 대해 품은 이상적 이미지와 이 이미지에서 한참 동떨어져 있는 도시의 현실 사이의 격차다. 그렇다면 강박적으로, 거의 히스테리컬하게 사진을 찍어대는 일본인 관광객의 행태는 이미지를 통해 끔찍한 실재를 몰아내려는 무의식적인 방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사진이 보여주는 이상적 이미지가 그들을 더러운 현실에서 지켜주는 것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63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고 착취하던 산업 시대의 기계에서 해방되었지만, 디지털 기기가 낳은 새로운 강제, 새로운 노예제에 직면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한다. 이동성이 가져온 자유는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강제로 돌변한다. 기계의 시대에는 기계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미 일과 일이 아닌 것이 명백히 구분되어 있었다. 일터는 일하지 않는 공간과 확실히 떨어져 있었고, 일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일터로 가야만 했다. 오늘날 많은 분야에서 이러한 경계는 완전히 철폐되었다. 디지털 기기는 노동 자체에 이동성을 부여한다. 모두가 일터를 몸에 지고 다닌다. 이동식 노동수용소를 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64 ˝디지털˝이라는 단어는 본래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digitus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는 손가락이다. 디지털 문화는 세는 손가락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다. 역사는 세지 않는다. 셈은 포스트역사적 범주다. 트윗도 정보도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되지 않는다. 타임라인도 삶의 역사 또는 전기를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타임라인은 서사적이기보다 가산적이다. 디지털 인간은 끊임없이 세고 계산한다는 의미에서도 손가락질하는 인간이다. 디지털은 수와 셈을 절대화한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무엇보다 숫자로 세어진다. 하지만 우정은 이야기다. 디지털 시대에는 가산적인 것, 셈하기, 셀 수 있는 것이 전부가 된다. 심지어 애착과 호감도 ‘좋아요‘의 형식으로 세어진다. 서사적인 것은 급격히 의미를 상실한다. 오늘날 모든 것이 셀 수 있게 가공된다. 그래야만 성과와 효율성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셀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89 카프카의 유령들은 그 이후에도 쉬지 않고 인터넷, 이메일, 스마트폰,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글래스를 발명했다. 신세대 유령들, 즉 디지털 유령들은ㅡ카프카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ㅡ더욱 탐욕스럽고, 더 뻔뻔하며, 더 시끄럽다. 디지털 매체는 실제로 ˝인간의 힘을 벗어나˝ 있지 않은가? 디지털 매체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광적인 속도로 유령을 증식시켜가지 않겠는가? 우리는 디지털 매체로 인해 실제로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만지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접기 - 베텔게우스

P. 196 정보피로증후군(IFS: Information Fatigue Syndrome)은 정보의 과다에서 오는 심리 질환이다. 환자들은 분석적 능력의 저하, 주의산만증, 전반적인 불안감,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호소한다. 1996년에 영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이 개념을 만들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IFS는 직업상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정보를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의 질병이었다. 오늘날은 모두가 IFS의 희생자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미친 듯이 늘어나는 정보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IFS의 주요 증상은 분석적 능력의 마비다. 분석적 능력이야말로 사유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이다. 따라서 정보의 과다는 사유의 위축으로 귀결된다. 분석적 능력이란 곧 지각 자료에서 본질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걷어낼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은 결국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별하는 능력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로 인해 사물을 본질적인 부분으로 축소하는 능력에 손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다. 사유를 위해서는 구분과 선별의 부정성이 필수적이다. 사유는 언제나 배제하는 작용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98 정보피로증후군에서는 우울증에 특징적인 증상도 나타난다. 우울증은 무엇보다도 나르시시즘적인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일 정도로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태도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목소리의 반향밖에는 듣지 못한다. 그러한 주체는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에서밖에는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에게 세게는 자아가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녹초가 되어, 자기 속에서 익사하고 만다. 오늘날 사회는 점점 나르시시즘적으로 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소셜미디어는 나르시시즘적 매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00 롤랑 바르트는 사진을 ˝지시체의 발산˝으로 정의한다. 재현은 사진의 본질이다. 한때 존재했던 진짜 대상에서 빛줄기가 나와 필름에 자취를 남긴 것이 사진이다. 사진은 실재했던 지시체의 준-물질적 흔적을 보존하며, 언제나 자신의 지시체에 ˝순응한다.˝ 사진과 지시체는 동적인 세계의 한가운데서 사랑이나 죽음에 어울릴 법한 부동성의 숙명을 함께 짊어진다.˝ 사진과 지시체는 ˝팔다리가 서로 묶여 있다. 시체에 묶여 고문받는 죄수처럼, 또는 영원한 교미 속에 하나가 된 양 늘 함께 헤엄치는 한 쌍의 물고기처럼.˝ 접기 - 베텔게우스

P. 219 『와이어드』지의 수석 편집위원인 크리스 앤더슨은 「이론의 종말」이라는 대단히 주목할 만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이론적 모델을 완전히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마어마한 데이터의 시대에 성장한 구글 같은 기업들은 오늘날 잘못된 모델을 채택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어떤 모델을 채택할 필요 자체가 없다.˝ 빅데이터의 분석은 행동 패턴을 알려주며, 이로써 미래의 예측까지 가능해진다. 가설적인 이론 모델은 직접적인 데이터 비교로 대체된다.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를 밀어낸다. 왜 그런가라는 질문은 그냥 그런 것이라는 확언 앞에서 의미를 잃어버린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은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분류법, 존재론을 잊어버려라. 심리학도 잊어버려라.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대체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그냥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정밀함으로 그것을 탐지하고 측정할 수 있다. 데이터만 충분하다면 숫자가 스스로 말하기 마련이다.˝ 이론은 하나의 구성물이며, 데이터의 결핍을 보완하는 보조 수단이다. 따라서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이론은 쓸모없어진다. 빅데이터에서 대중의 행동 패턴을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디지털 심리정치는 출발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출판사 제공 책소개

투명사회는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새로운 통제사회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의 신작!

 

투명성에 대한 전복적 사유로

독일 사회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의 책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베를린 예술대학)의 신작 <투명사회>가 출간되었다. <투명사회>는 ‘투명성’에 대한 독일 사회의 주류 담론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비판적 입장을 제시하여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Transparenzgesellschaft(투명사회)>(2012)와 우리 삶에 새로운 위기를 불러온 디지털 문명에 대한 진단을 제시한 <Im Schwarm. Ansichten des Digitalen(무리 속에서.디지털의 풍경들)>(2013)을 번역하여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투명성의 전체주의적 본질에 대한 전복적인 성찰을 시도한다. 저자에 따르면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요구"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밖으로 표출시키고 정보로 전환시킨다. 반면 낯선 것, 모호한 것, 이질적인 것들은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된다. <투명사회>는 부패 근절과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결코 깨달을 수 없을 투명성의 시스템적 폭력성을 한병철 특유의 간결한 문체로 날카롭게 파헤친다.

 

투명사회는 우리를 더 많은 자유, 더 나은 민주주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 상태,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몰아넣는다

 

오늘날 ‘투명성’은 중요한 화두이다.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이제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투명성이 강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투명성이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특히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등의 발달로 정보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공개되고 무제한적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투명한 사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음이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투명사회>에서 한병철은 이렇게 긍정적인 가치로 간주되어온 투명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통제사회라고 주장한다. 투명사회는 우리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 상태,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몰아넣는다. 이 사회의 거주민들은 권력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심지어 그것을 ‘자유’라고 오해한 채 스스로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이곳에서는 빅브라더와 파놉티콘 수감자의 구분이 사라진다.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현대 통제사회의 거주민들은 네트워크화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투명성은 모든 것을 ‘정보’로 바꿔버림으로써, 우리를 모든 것이 완전히 털리고 발가벗겨진 ‘유리 인간’의 상태,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는 상태, 모두가 동일해지는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인간을 완전히 발가벗겨진 ‘유리 인간’의 상태로 만드는

투명성의 전체주의적 본질에 대한 예리한 통찰

 

한병철은 투명성이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장악하여 근원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 끌어들이는 시스템적 강제력,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고 신속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명성을 강요한다. 가속화의 압력은 부정성의 해체와 궤를 같이한다. 투명성은 낯선 것과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서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투명사회에서는 점차 타자가 소멸되고 나르시시즘의 경향이 강화된다.

또한 투명성 속에는 기존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는 부정성이 들어 있지 않다. 투명성은 시스템의 외부를 보지 못하고,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최적화할 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정치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관계를 건드리지 않은 채 그저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관리하는 역할로 축소되고 만다. 선거와 쇼핑은 비슷해지고, 통치도 마케팅에 가까워진다.

한병철은 투명성의 사유를 일상과 정치의 영역을 넘어 시각적, 인식적 차원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모든 것을 손쉽게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으로 전환해주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시각적, 인식적 부정성의 영역, 즉 가려진 것들, 비밀의 영역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직접적으로 공개되는 포르노적 사회, 모든 의미가 사라지고 보이는 것에만 가치가 부여되는 전시사회가 성립한다.

한병철은 모든 것이 겉이 되어가는 사회, 진리는 없고 정보만이 있는 사회, 낯선 타자와 직접 맞닥뜨릴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이 오직 자신에게 익숙하게 길들여진 것만 상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 나르시시즘적 사회의 모습을 섬뜩할 정도로 선명하게 느끼게 해준다.

 

어떤 부정성도 허용하지 않는

투명화의 흐름에 맞서 불투명성을 옹호하다!

 

한병철 교수의 저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일 철학계를 넘어서 광범위한 독자층의 관심을 끌어왔다. 그러나 독일의 주요 미디어들이 한병철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한 것은 <피로사회>(2010) 때부터였다. 독일 ZDF 방송에서는 한병철을 "가장 급진적인 사상가"로 소개했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그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문화 비판의 개척자로 묘사했다. 그 후 출간된 <투명사회>는 독일 사회에 다시 한 번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이라는 측면에서만 생각한다면, <투명사회>가 <피로사회>보다도 훨씬 떠들썩했다고 말할 수 있다. 투명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해온 독일 사회였기에, ‘불투명성’에 대한 한병철의 옹호는 그토록 큰 충격을 안겼던 것이다.

한병철이 그려내는 투명사회의 모습은 오늘의 한국 사회와도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아떨어진다. 물론 고위 공직자 임명 때마다 불거지는 자격 논란이나 경제 영역에서 벌어지는 비리 사건을 보면서, 한국 사회는 투명성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기에는 여전히 불투명한 사회가 아니냐 하는 의심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병철이 말하는 투명성이 정치, 경제의 영역을 넘어선, 전 영역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적 강제력임을 생각한다면, 한국 사회만큼 빠른 속도로, 별다른 사회적 숙고 과정 없이 전면적인 투명화의 흐름에 내맡겨진 경우를 찾아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책은 개인 정보 유출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왜 연말정산 기간이 되면 소비 기록을 국가에 제출해야 하는지, ‘다본다’라는 위협적인 구호가 어떻게 인기 상품의 이름이 될 수 있는지, 왜 그토록 성형에 집착하는지, 디지털 문명과 SNS 등이 왜 새로운 형태의 직접 민주주의를 낳지 못하는지, 왜 무한한 소통의 자유가 연대로 이어지지 못하는지, 이런 문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숙고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것이다.

접기

 

 

한병철, 2017, 『타자의 추방』, 이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02-27

원제 : Die Austreibung Des Anderen (2016년)

 

편집장의 선택

"같은 것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피로사회>에서 시작한 한병철의 신자유주의 비판, 이번에는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나와 너의 구분을 없애는 세계의 폭력을 고발한다. 다름으로 드러나는 인간성이 사라지고, 다름을 인정하며 공동체를 모색하던 사회는 유명무실해졌으니, 이제 서로는 서로에게 테러일 뿐이고, 세계는 그야말로 지옥이 되었다는 분석인데, 그의 일관된 시선이 다소 힘겹다가도, 낭떠러지 앞에 선 인간과 세계의 진면목을 마주하면 이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엄중한 현실 앞에서 누군들 해법이 있겠느냐마는, 일련의 저작으로 “고유한 사유 전통”을 만들어냈다고 평가 받는 그가, 마찬가지로 타자가 사라지는 시대에서 선택한 가능성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자유마저 자기착취의 근거로 작동하여 더는 저항과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진정성이란 말은 그 진정성과 무관하게 코웃음거리가 되는 관계에서, 서로를 환대할 타자를 어떻게 상상하고 체현할 수 있을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들어올릴 용기가 나지 않는 건,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 서로를 확인하며 경청할 소리를, 화음은커녕 파열음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쥐어짜내야만 할 텐데, 여전히 숨이 턱 막힌다.

 

책소개<피로사회> <투명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의 신작 <타자의 추방>이 출간되었다. 전작 <피로사회>가 ‘나는 할 수 있다’는 명령 아래 스스로를 착취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에로스의 종말>이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그런 상황을 불러온 근본 원인으로 저자가 지목했던 ‘타자의 소멸’ 현상을 본격적으로 파헤친다.

 

저자는 오늘날의 세계가 겉으로는 자유와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이 지배하는 지옥’일 뿐이라며,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세계적인 것의 폭력이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폭력이 인간을 어떻게 무력화시키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또한 ‘테러리즘’ ‘난민’ ‘환대’ ‘진정성 추구’와 같은 정치사회적 현상들이 타자의 소멸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분석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대한 예리한 고찰을 보여주는 이 작은 책은 우리의 세계가 어떠한 난관에 봉착해 있는지 뼈아프게 돌아보게 한다.

 

목차

같은 것의 테러

세계적인 것의 폭력과 테러리즘

진정성의 테러

두려움

문턱

소외

반체反體

시선

음성

타자의 언어

타자의 생각

경청하기

 

미주

옮긴이 후기

 

 

책속에서

첫문장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P. 7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비밀로서의 타자, 유혹으로서의 타자, 에로스로서의 타자, 욕망으로서의 타자, 지옥으로서의 타자,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같은 것의 창궐이 사회체社會體를 덮치는 병리학적 변화들을 낳는다. 박탈이나 금지가 아니라 과잉소통과 과잉소비가, 배제와 부정이 아니라 허용과 긍정이 사회체를 병들게 한다. 억압이 아니라 우울이 오늘날의 병적인 시대의 기호다. 접기

P. 21 세계화는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것, 비교할 수 있는 것vergleichbar으로, 따라서 같은 것으로 만드는 폭력적 힘이 있다. 전면적인 같게-만들기Ver-Gleichen는 궁극적으로 의미의 소멸을 낳는다. 의미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돈만으로부터는 의미도 정체성도 생기지 않는다.

P. 34 오늘날 진정성Authentizit?t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진정성은 신자유주의의 모든 광고들과 마찬가지로 해방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진정하다는 것은 사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외부에서 정해진 표현과 태도의 틀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말한다. 진정성은 오직 자기 자신과만 같을 것,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할 것, 자기 자신의 저자이자 원작자일 것을 강요한다. 접기

P. 43 자살테러는 자신을 느끼기 위한, 파괴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무겁게 짓누르는 공허를 폭파하거나 명중시켜 없애기 위한 도착적인 시도인가?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공허한 자아를 처리하려는 셀카와 자기상해의 심리도 테러의 심리와 비슷한 것인가? 테러리스트들은 공격성을 자신에게로 돌려 자해하는 청소년들과 똑같은 심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녀들과는 달리 소년들의 공격성은 바깥으로, 타인들에게로 행한다. 접기

P. 54 오늘날 우리는 생산성을 제고하기 위해 시간에 대해 안정적인 구조를 철거하고, 삶의 시간을 파편화하고, 연결과 결속을 허무는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신자유주의적인 시간 정책은 두려움과 불안을 낳는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홀로 고립된 자기 자신의 경영자들로 개별화한다. 탈연대화와 전면적인 경쟁이 초래하는 개별화는 두려움을 낳는다. 신자유주의의 기만적인 논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두려움이 생산성을 높인다. 접기

P. 56 오늘날 문턱이 많은 이행?bergang은 문턱이 없는 통로Durchgang에 밀려난다. 인터넷 안에서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관광객이다. 우리는 더 이상 문턱에 거주하는 호모 돌로리스homo doloris(슬픔의 인간)가 아니다. 관광객들은 변신과 고통을 수반하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상태에 머무른다. 그들은 같은 것의 지옥을 여행한다. 접기

P. 61~62 신자유주의의 지배하에서 착취는 더 이상 소외나 자기 탈현실화가 아니라 자유와 자기실현, 자기최적화로 진행된다. 여기에는 나에게 노동을 강요하고,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착취자로서의 타인이 없다. 오히려 나는 나를 실현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나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논리다. [……] 신자유주의의 지배는 망상적인 자유 뒤에 숨어 있다. 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이 체감상의 자유는 모든 저항, 모든 혁명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무엇에 맞서서 저항해야 한다는 말인가? 억압을 행사하는 타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접기

P. 107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dire”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P. 108 미래에는 경청자라는 직업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는 돈을 받고 타인의 말을 들어준다.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청자에게 간다. 오늘날 우리는 경청하는 능력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나르시스는 요정 에코의 애정이 담긴 음성에, 실로 타자의 음성이라고 해야 할 이 음성에 대답하지 않는다. 접기

P. 119 어쩌면 미래의 사회는 경청하고 귀 기울이는 자들의 사회라고 불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시간이 시작되게 하는 시간혁명이다. 타자의 시간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오늘날의 시간 위기는 자기 시간의 가속화가 아니라 전면화로 인한 것이다. 타자의 시간은 압박을 낳는, 성과와 효율성 제고의 논리를 벗어난다. 신자유주의적 시간 정책은 타자의 시간을 제거한다. 이 시간 정책에게 타자의 시간은 그저 비생산적인 시간일 뿐이다. 자기 시간의 전면화는 오늘날 모든 생활 영역을 파고들어 인간의 전면적인 착취를 낳고 있는 생산의 전면화와 동시에 진행된다. 접기

P. 16 16 디지털 무간격은 가까움과 멂의 모든 변주 형태들을 제거한다. 모든 것이 똑같이 가깝고, 똑같이 멀다. ˝흔적과 아우라. 흔적은 가까움의 현상이다. 가까움이 남겨놓은 것이 아무리 멀다고 해도. 아우라는 멂의 현상이다. 멂이 불러일으킨 것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아우라에는 타자, 낯선 자, 수수께끼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디지털 투명사회는 세계의 아우라를 없애고, 신비를 없앤다. 포르노 영상의 일반적인 기법인 과잉근접과 과잉조명은 모든 아우라적인 멂, 에로틱한 것의 핵심인 멂을 파괴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6 16-7 포르노에서는 모든 몸이 똑같다. 이 몸들은 또한 똑같은 몸의 부분들로 분열한다. 일체의 언어를 빼앗긴 몸은 성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이 성적인 것은 성별의 차이 외에는 아무런 차이를 알지 못한다. 포르노그래피적인 몸은 더 이상 ˝그 안에 꿈과 신성이 각인되는˝ 현장도, ˝호화로운 무대˝도, ˝동화와 같은 표면˝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혹하지 않는다. 포르노는 몸뿐만 아니라 소통 자체의 완전한 탈서사화, 탈언어화를 추동시킨다. 바로 이 점에서 포르노는 외설적이다. 벌거벗은 육체를 가지고 유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유희에는 가상이, 비진실이 필요하다. 벌거벗은 포르노그래피적 진실은 어떠한 유희도, 유혹도 허락하지 않는다. 성과로 간주되는 성 또한 모든 형태의 유희를 몰아낸다. 성은 완전히 기계화된다. 성과, 성적 매력, 피트니스를 명령하는 신자유주의는 궁극적으로 몸을 최적화해야 하는, 기능적 대상으로 획일화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35 35 진정성의 강제는 자아로 하여금 자신을 생산하도록 강요한다. 진정성은 궁극적으로 자아의 신자유주의적 생산 형태다. 진정성은 만인을 자기 자신의 생산자로 만든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자아는 자신을 생산하고, 자신을 실행시키고,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는다. 진정성은 판매 논리다.

오로지 자신하고만 같고자 하는 진정성의 노력은 타인들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낳는다. 같게-만들기의 논리는 다름을 같음으로 바꾼다. 그 결과 다름의 진정성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고착시킨다. 이 진정성은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을, 다시 말해 잡다함만을 허용한다. 신자유주의적 용어로서의 잡다함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다. 이런 잡다함은 어떠한 경제적 활용도 거부하는 상이성과 대립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타인들과 다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 타인과 다르고자 함 속에서 같은 것이 계속된다. 이는 보다 높은 차원의 동형성이다. 같음은 다름을 관통하여 계속 자신을 고수한다. 다름의 진정성은 오히려 억압적인 획일화보다 더 효과적으로 동형성을 관철시킨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41 41-2 알랭 에랭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 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화는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오직 두 가지의 상태만을 알고 있다. 기능하기와 실패하기다. 이 점에서 성과주체는 기계와 비슷하다. 기계 또한 갈등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오류 없이 기능하거나, 아니면 고장이 났다.

갈등은 파괴적이지 않다. 갈등에는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정된 관계와 정체성이 성립된다.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 생채기를 내는 행위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갈등 처리 과정 없이, 누적된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생채기로 인한 화학 과정이 신속하게 긴장을 완화한다고 한다. 몸이 스스로 산출하는 마약이 뿌려진다는 것이다. 이 마약은 항우울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항우울제 또한 갈등 상태를 억압함으로써 우울한 성과주체가 신속하게 기능하도록 만든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06 106-7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모든 이원성이 사라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원성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융합되어버릴 것이다. 이 나르시시즘적인 핵융합은 치명적이다. 알랭 바디우도 사랑을 ˝둘의 무대˝라고 부른다.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무대에서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가 의도적으로 사육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착취하는 에고는 병적으로 비대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에는 타자의 언어로서의 저 ˝가장 근원적인 언어˝가 과잉소통의 소음에 파묻히고 있다. 접기 - 베텔게우스

셀카 중독도 자기애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셀카 중독은 고립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일 뿐이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러나 공허만 재생산된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 중독은 공허감을 강화한다. 자기애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자기관계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셀카는 텅 빈, 불안한 자아의 매끄러운 표면이다. 고통스런 공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날 면도날을 들거나 스마트폰을 쥔다. 셀카는 공허한 자아를 잠시 동안 은폐하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그러나 셀카를 뒤집으면 피가 흐르는 상처들로 가득한 뒷면을 보게 된다. 셀카의 뒷면은 상처들이다. 43p 접기 - 쥬드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 - 철철대마왕

P. 43 자살테러는 자신을 느끼기 위한, 파괴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무겁게 짓누르는 공허를 폭파하거나 명중시켜 없애기 위한 도착덕 시도인가? ... 중략 ... 테러리스트에게는 상상적인 것이 내재한다. 차별과 절망으로 구성된 현실은 더 이상 살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들에게 어떤 충족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충족을 제공해주는 상상의 기관으로서 신을 호명한다. 접기 - jooltac

P. 11 정보들을 가장 대규모로 모아놓은 빅데이터에도 지식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빅데이터는 상관성을 조사하는 데 사용된다. 상관성이란 A가 발생하면 흔히 B도 발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지 못한다. 상관성은 인과관계, 즉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가장 원시적인 지식의 형태다. 그것은 그렇다. 왜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것도 파악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식은 파악하기다. 빅데이터는 이렇게 사유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은 그렇다‘에 만족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1 세계화는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것,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따라서 같은 것으로 만드는 폭력적 힘이 있다. 전면적인 같게-만들기는 궁극적으로 의미의 소멸을 낳는다. 의미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돈만으로부터는 의미도 정체성도 생기지 않는다. 같은 것의 폭력으로서의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정보와 소통과 자본의 순환을 방해하는 타자, 단독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의 부정성을 파괴한다. 같은 것이 같은 것과 만나는 지점에서 세계적인 것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2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일반적인 교환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단독적인 것을 쓸어 없앤다. 테러리즘은 세계적인 것에 맞서는 단독적인 것의 테러다. 어떤 교환도 거부하는 죽음은 단독적인 것 그 자체다. 죽음은 테러리즘과 함께 시스템 속으로 난폭하게 침입한다. 시스템 안에서 삶은 생산과 성과로 전체화된다. 죽음은 생산의 종말이다. 테러리스트들의 죽음 예찬과 삶을 그저 삶으로서 무조건 연장하려고만 하는 오늘날의 건강 히스테리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너희는 삶을 사랑하고, 우리는 죽음을 사랑한다˝라는 알카에다의 구호는 바로 이런 체계적인 연관을 지적하고 있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4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엄청난 불의를 낳고 있다. 착취와 배제는 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신자유주의는 체제비판적인 혹은 체제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달갑지 않은 인물들로 확인하고 배제하는 ˝반옵티콘banopticon,˝ 즉 추방의 옵티콘을 구축한다. 판옵티콘은 훈육을 위해 작동하지만, 반옵티콘은 안전을 위해 작동한다. 서양의 복지 지역 안에서조차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철폐한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뤼스토우는 이미 신자유주의적 시장법칙에만 맡겨지면 사회는 반인간적으로 변하고, 사회적인 배척을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연대와 공동체의식을 산출하는 ˝생명정치˝로 신자유주의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를 이 생명정치로 교정하지 않으면 불안과 두려움에 좌우되는 대중이 생겨날 것이며, 이들은 민족주의적, 국수주의적 세력들에 쉽게 포섭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로 바뀐다. 자신에 대한 걱정은 외국인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증오로도 표현된다. 두려움의 사회와 증오의 사회는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5 돈은 정체성을 매개해주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정체성을 대체할 수는 있다. 돈은 적어도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안전하고 평안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돈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정체성도, 안전도 없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상상적인 것으로, 예컨대 신속하게 정체성을 제공해주는 국수주의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적을 발명해낸다. 그 한 예가 이슬람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의미를 제공해주는 정체성을 갖기 위해 상상적인 경로를 통해 면역성을 구축한다. 자신에 대한 걱정이 무의식적으로 적에 대한 갈망을 일깨운다. 적은 상상적인 형태 속에서도 신속하게 정체성을 제공해준다. ˝적은 우리 자신의 문제가 형태화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척도를, 나 자신의 경계를, 나 자신의 형태를 획득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 상상적인 것은 현실 속의 결핍을 보충해준다. 테러리스트들 안에도 상상적인 것이 내재한다. 세계적인 것은 현실적인 폭력을 야기하는 상상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7 보드리야르는 세계적인 것의 폭력이 악성종양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암세포˝처럼 ˝무한정한 창궐, 과잉성장, 전이를 통해 확산된다. 그는 세계적인 것을 면역 모델로 설명한다. ˝면역성, 항체, 이식, 객혈이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바이러스에 의한 폭력, 네트워크와 가상적인 것의 폭력˝이다. 가상성은 바이러스와 같다. 이렇게 네트워크화를 면역 모델로 서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면역성은 정보와 소통의 순환을 억제한다. ‘좋아요‘는 면역 반응이 아니다. 긍정성의 폭력으로서의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탈면역적이다. 보드리야르는 디지털 질서, 신자유주의 질서에 핵심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간과한다. 면역성은 지상의 질서에 속한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Protect me from what I want˝라는 제니 홀저의 구호는 긍정성의 폭력이 지닌 탈면역적인 성질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8 신자유주의는 절대 계몽주의의 종착지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이성에 의해 인도된 것이 아니다. 바로 신자유주의의 광기가 테러리즘과 민족주의의 형태로 분출되는 파괴적 긴장을 산출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을 자유로 내세우지만, 이 자유는 광고다. 세계적인 것은 오늘날 보편적 가치들까지 잠식하고 있다. 그 결과 자유 자체가 착취당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실현한다는 망상에 빠져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한다. 자유의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착취가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비열한 기본 논리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29 세계적인 것의 폭력에 맞서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에 의해 잠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따라서 단독적인 것에도 자신을 열어놓는 보편적 질서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 세계적인 것의 시스템에 폭력적으로 침입하는 단독적인 것은 대화를 허락하는 타자가 아니다. 테러리즘은 대화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악마적이다. 멂과 다름이 허용된 가까움 속에 머무르는 화해된 상태에서만 단독적인 것은 악마성을 버릴 것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31 오늘날의 난민 위기는 유럽연합이 이기적 목적을 좇는 경제적 상업연합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한다. 유럽의 자유 상업지역, 개별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부들 사이의 계약 공동체로서의 유럽연합을 칸트는 이성적 구성물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국가연맹˝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헌법공동체만이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공동체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35 진정성의 강제는 자아로 하여금 자신을 생산하도록 강요한다. 진정성은 궁극적으로 자아의 신자유주의적 생산 형태다. 진정성은 만인을 자기 자신의 생산자로 만든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의 자아는 자신을 생산하고, 자신을 실행시키고,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는다. 진정성은 판매 논리다.

오로지 자신하고만 같고자 하는 진정성의 노력은 타인들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낳는다. 같게-만들기의 논리는 다름을 같음으로 바꾼다. 그 결과 다름의 진정성은 사회적인 동형성을 고착시킨다. 이 진정성은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을, 다시 말해 잡다함만을 허용한다. 신자유주의적 용어로서의 잡다함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다. 이런 잡다함은 어떠한 경제적 활용도 거부하는 상이성과 대립한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타인들과 다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 타인과 다르고자 함 속에서 같은 것이 계속된다. 이는 보다 높은 차원의 동형성이다. 같음은 다름을 관통하여 계속 자신을 고수한다. 다름의 진정성은 오히려 억압적인 획일화보다 더 효과적으로 동형성을 관철시킨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36 애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들로부터 아토포스(atopos, 부정의 접두어 a와 ‘장소‘를 뜻하는 topos가 결합된 말이다.)라고 불렸다. 내가 욕망하는 타인은 장소가 없다. 그는 어떤 비교로부터도 벗어난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타자의 아토포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타자는 아토포스로서 말을 전율시킨다. 우리는 이 타자를 말할 수도, 이 타자에 대해서 말할 수도 없다. 모든 수식어는 잘못된 것이고, 고통스럽고,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다. [……]˝ 욕망의 대상으로서 소크라테스는 비교할 수 없고 단독적이다. 단독성은 진정성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진정성은 비교 가능성을 전제한다. 진정한 사람은 타인들과 다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아토포스, 즉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다. 그는 타인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타인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다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37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으로서 진정성은 상품화할 수 있는 차이들을 산출한다. 이를 통해 진정성은 자신을 물질화하는 상품들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개인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무엇보다 소비를 통해 표현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율적인 주권자로서의 개인을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명령은 상업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다.

진정성의 명령은 나르시시즘적인 강제를 낳는다. 나르시시즘은 병적인 것과는 무관한, 건강한 자기애가 아니다. 건강한 자기애는 타자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보지 못한다. 타자는 에고가 이 타자 안에서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계속 왜곡된다.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세계를 오로지 자신의 음영으로만 지각한다. 그 불행한 결과가 타인의 소멸이다. 자신과 타인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자신이 용해되어 불명료해진다. 자아는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에 반해 안정된 자아는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이와 달리 과도하고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연관은 공허감을 낳는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38 오늘날에는 성적 에너지가 무엇보다도 자아에 투자된다.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인 축적은 대상 리비도, 즉 대상을 점유하는 리비도의 감소를 초래한다. 대상 리비도는 대상에 대한 결속을 낳으며, 그 대가로 자아를 안정화한다.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인 누적은 병을 초래한다. 이는 두려움, 수치감, 죄의식, 공허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낳는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매우 강력한 과정이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철회할 것을 강요하는 경우는 이와 전혀 다르다. 이 경우 나르시시즘적으로 변한 리비도는 대상으로 회귀하는 길을 찾을 수 없고, 이렇게 리비도의 가동성이 방해받으면 병이 생겨난다. 나르시시즘적 리비도의 누적이 일정 정도를 넘어서게 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바뀌는 것 같다.˝ 어떤 대상도 리비도로 점유할 수 없게 되면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 결과 세상은 공허하고 무의미해진다. 대상과의 결속이 사라짐에 따라 자아는 자기 자신에게로 되던져진다. 자아는 자신과 충돌하여 파괴된다. 우울증은 자아 리비도의 나르시시즘적 누적으로 인해 생겨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41 모든 부정성의 제거가 오늘날 사회의 특징이다. 소통 또한 매끄러워져서 서로 만족감을 교환하는 행위가 된다. 슬픔처럼 부정적인 감정에는 어떤 언어도, 어떤 표현도 제공되지 않는다. 타인으로 인한 상처의 모든 형태가 회피된다. 그러나 이는 자기상해로 부활한다. 타자의 부정성을 추방하면 자기파괴의 과정이 초래된다는 일반적인 논리의 정당성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41 알랭 에랭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갈등 관계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와 최적화를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화는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오직 두 가지의 상태만을 알고 있다. 기능하기와 실패하기다. 이 점에서 성과주체는 기계와 비슷하다. 기계 또한 갈등을 알지 못한다. 기계는 오류 없이 기능하거나, 아니면 고장이 났다.

갈등은 파괴적이지 않다. 갈등에는 건설적인 측면이 있다. 갈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안정된 관계와 정체성이 성립된다. 사람은 갈등을 처리하는 작업을 하는 가운데 성장하고 성숙한다. 생채기를 내는 행위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갈등 처리 과정 없이, 누적된 파괴적 긴장을 신속하게 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유혹적이다. 생채기로 인한 화학 과정이 신속하게 긴장을 완화한다고 한다. 몸이 스스로 산출하는 마약이 뿌려진다는 것이다. 이 마약은 항우울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항우울제 또한 갈등 상태를 억압함으로써 우울한 성과주체가 신속하게 기능하도록 만든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0 디지털 소통에는 시선과 음성이 매우 부족하다. 연결과 네트워크는 시선과 음성 없이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연결과 네트워크는 음성과 시선을 필요로 하는 관계나 만남과 다르다. 실로 관계와 만남은 음성과 시선의 특별한 경험들이다. 그것들은 몸의 경험들이다.

디지털 메체는 탈육체화하는 작용을 한다. 디지털 매체는 음성으로부터 거칢을, 육체성을, 나아가 공동과 근육, 점막, 연골의 심층을 빼앗는다. 음성은 매끄러워진다. 음성은 의미를 위해 투명해지고, 완전히 기의로 변한다. 이 매끄럽고, 육체가 없고, 투명한 음성은 유혹하지 않고, 아무런 육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유혹을 낳는 것은 기의로 환원될 수 없는 기표의 과잉이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아무 정보도 전달해주지 않는 그 음성은 ˝기표들의 육욕˝을 가능하게 한다. 유혹은 기표가 기의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유통되는 공간에서 일어난다. 명료한 기의는 유혹하지 않는다. 의미 위에 펼쳐지는 피부가 육욕의 장소다. 또한 단순히 가려지고 은폐된, 덮개를 벗겨 모습을 폭로해야 할 기의가 아니라, 기의로는 풀어낼 수 없는 기표의 잉여가 비밀이다. 이 기표는 폭로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덮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3 아도르노는 ˝세상에 대한 낯섦˝을 예술의 한 계기로 본다. 세상을 낯선 것으로 지각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전혀 지각하지 않는다. 음전압, 즉 부정적 긴장은 예술에 본질적이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편안함의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낯섦은 철학의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신 자체에 내재한다. 따라서 정신은 본질적으로 비판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3 ‘좋아요‘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 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주관적 정신과 다른 것을 확정적인 네트워크로 빈틈없이 뒤덮을수록, 인간은 저 타자에 대한 경이의 습관을 버리게 되고, 익숙함의 증가와 함께 낯선 것을 잃어버린다. 예술은 미약하게, 금방 지쳐버리는 몸짓처럼, 이를 보상하려고 애쓴다. 선험적으로 예술은 인간을 경이로 이끈다. [……].˝ 오늘날 세상은 주관적 정신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로 뒤덮인다. 그 결과 낯선 것, 다른 것의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 익숙한 시각 공간이 생겨났다. 이 디지털 반향공간에서 주관적 정신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 말하자면 주관적 정신은 자신의 망막으로 세계를 뒤덮은 것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4 예술은 수수께끼의 특징을 갖고 있다. ˝예술은 수수께끼의 성질을 통해 행동 객체의 의심할 여지 없는 현존에 가장 단호하게 대립한다. 결국 예술의 고유한 수수께끼는 이 수수께끼의 성질 속에서 지속된다.˝ 행동 객체는 경이의 능력을 상실한 행동 주체의 생산물이다. ˝폭력 없는 관찰˝과 ˝거리의 가까움,˝ 나아가 멂의 가까움만이 사물들을 행동 주체의 강제로부터 해방시킨다. 아름다움은 오래 지속되는 관조적 시선에만 자신을 드러낸다. 행동 주체가 뒤로 물러날 때, 객체를 향한 주체의 맹목적인 충동이 꺾일 때, 그럴 때만 사물들은 그 다름을, 그 수수께끼의 성질을, 그 낯섦과 비밀을 돌려받는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6 예술은 자기초월을 전제한다. 예술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자신을 망각한다. 예술은 ˝나에 대한 멂˝을 만들어낸다. 자신을 망각한 채 예술은 섬뜩한 것, 낯선 것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나의 의문에 불과하지만, 문학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망각한 자아와 함께 저 섬뜩한 것, 낯선 것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지상에서 시적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안락한 디지털 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이름이 없거나 자신을 망각하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에고가 거주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는 모든 낯선 것, 모든 섬뜩한 것을 잃어버렸다. 디지털 질서는 시적이지 않다. 우리는 같은 것의 수적인 디지털 공간 속을 돌아다닌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7 오늘날의 과잉소통은 침묵과 고동의 자유 공간을 억압한다. 그러나 이 자유 공간 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실로 말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말할 수 있다. 과잉소통은 자신 안에 침묵을 본질적 요소로 지니고 있는 언어를 억압한다. 언어는 정적으로부터 생겨난다. 정적이 없으면 언어는 이미 소음이다. 첼란에 따르면 문학에는 ˝침묵을 향한 강한 성향˝이 내재한다. 소통의 소음은 경청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시적 원리로서의 자연은 경청의 근본적인 수동성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 앞에서 히페리온은 거듭 말한다. ‘내 모든 존재가 침묵하고 경청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침묵하는 존재는 실제로 ‘응시‘가 아니라 ‘경청‘과 관련된 것이라고 말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8 문학과 예술은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은 문학과 예술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첼란은 「자오선」연설에서 문학을 분명하게 타자와 연결시킨다. ˝[……] 어떤 타자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은, 더 나아가 아마도 전적인 타자를 대신하여 말하는 것은 [……] 예로부터 시의 희망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어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그 만남의 비밀 속에서, 상대를 앞에 두고서 비로소 생겨난다. ˝시는 하나의 타자에게 가고자 하고, 이 타자를 필요로 하며, 상대를 필요로 한다. 시는 타자를 찾아가고, 타자에게 말을 건다.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시에게는 모든 사물, 모든 인간이 타자의 형상이다.˝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도 상대다. 시는 어떤 사물을 호출하고, 이 사물을 그 다름 속에서 만나며, 사물과 대화하는 관계를 맺는다. 시에게는 모든 것들이 너로 나타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9 오늘날의 지각과 소통에서는 타자의 현존으로서의 상대가 점점 더 사라진다. 갈수록 상대는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전락한다. 모든 관심이 에고에 집중된다. 지각을 탈거울화시키는 것, 상대와 타인과 타자를 향해 지각을 여는 것은 분명 예술과 문학의 과제다. 현재 정치와 경제는 관심을 에고로 이끈다. 이런 관심은 자기생산에 기여한다. 그것은 점점 더 타자로부터 유리되어 에고로 흘러간다. 오늘날 우리는 관심을 둘러싸고 가차 없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서로에게 우리는 관심을 얻으려고 싸우는 쇼윈도들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99 첼란의 관심 시학은 오늘날의 관심 경제와 대립한다. 그의 관심 시학은 오로지 타자에만 집중한다. ˝여기서 카프카에 대한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에 등장하는 말브랑슈의 말을 재인용하겠습니다. ‘관심은 영혼의 자연적인 기도다.‘˝ 영혼은 언제나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영혼은 무언가를 찾고 있다. 영혼은 타자, 전적인 타자를 향해 기도하는 호출이다. 레비나스도 관심을 타자의 호출을 전제로 하는 ˝더 많은 의식˝이라고 보았다.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타자의 탁월함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관심의 경제가 관심의 시학과 관심의 윤리학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관심의 경제는 타자에 대한 배반을 추동시키고, 자아의 시간을 전면화한다. 이에 반해 관심의 시학은 타자에 고유한, 가장 고유한 시간을, 타자의 시간을 발견한다. 관심의 시학은 ˝그것, 즉 타자에 가장 고유한 것이 함께 말하게 한다. 타자의 시간 말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01 타자를 너로서 호출하는 것에는 위험이 없지 않다. 우리는 타자의 다름과 낯섦에 자신을 내맡길 각오를 해야 한다. 타자의 ˝너-계기˝에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다. 그것은 ˝우리를 잡아채 위험한 극단으로 몰아가고, 검증된 연관을 느슨하게 풀고, 만족보다는 의문을 더 많이 남겨놓으며, 안전을 뒤흔들고, 그래서 섬뜩하고, 그래서 불가결하다.˝ 오늘날의 소통은 타자로부터 너-계기를 제거하고, 타자를 ˝그것Es˝으로, 즉 같은 것으로 획일화하려고 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02 자신으로 존재함은 단순히 자유롭게 존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은 짐과 부담이기도 하다. 자신으로 존재함은 자신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자신으로 존재함의 부담스러운 성질을 이렇게 서술한다. ˝심리학적, 인간학적 서술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자아는 이미 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고, 자아의 자유는 은총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늘 무거움이며, 자아는 풀려날 길 없이 자신이다.˝ 독일어의 재귀대명사 sich(프랑스어로는 soi)는 자아가 어떤 무겁게 짓누르는 도플갱어에 묶여 있다는 것을, 자아가 어떤 무게를, 과도한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아는 실존하는 한 이 무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실존적 상태는 ˝피로˝로 나타난다. 피로의 자리는 ˝힘겹게 들어 올리는 무게를 내려놓는˝ ˝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이 무게를 포기했다고 해도 여전히 자신이 내려놓는 것에 매달려 있는 손 또한˝ 피로의 자리다. 우울증은 이런 현대적인 자아의 존재론이 병적으로 전개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알랭 에랭베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울증은 자기 존재의 피로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이 존재론적인 짐이 무한히 무거워진다. 짐의 최대화는 결국 생산성의 최대화를 목적으로 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04 할 수 있을 수 없음은 다른 종류의 피로로, 타자를 위한 피로로 나타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피로 대신 무력함이라는 말을 쓴다. ˝근원적인 무력함˝은 자아의 주도성을 완전히 벗어나는 근본적인 수동성을 말한다. 이 무력함은 타자의 시간이 시작되게 한다. 이에 반해 피로는 자아의 시간에서 비롯된다. 근원적인 무력함은 어떤 능력도, 어떤 주도성도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을 연다. 나는 타자 앞에서 허약하다. 할 수 있을 수 없음의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허약함 속에서 타자를 위한 욕망이 깨어난다. 타자는 자기-존재로서의 존재에 생기는 균열을 통해서만, 존재의 약점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설령 주체가 모든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해도, 여전히 주체는 타자를 찾는다. 욕구는 자아에게만 해당된다. 욕망의 운행 궤도는 자아 바깥에 놓여 있다. sich의 중력은 자아를 자신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끌어들인다. 욕망은 이 중력에서 벗어나 있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05 오로지 에로스만이 자아를 우울증으로부터, 자신에게 나르시시즘적으로 얽혀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타자는 구원의 공식이다. 나를 나로부터 떼어내어 타자에게 끌고 가는 에로스마이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 우울한 성과주체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타자에 대한 욕망, 나아가 타자를 향한 호출 혹은 ˝전향˝은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껍질을 깨는 형이상학적 항우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06 레비나스에 따르면 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에 의해 깨어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수수께끼 혹은 비밀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을 잃어버렸다. 타자는 이제 유용성의 목적론에, 경제적 계산과 가치평가의 목적론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타자는 투명해진다. 타자는 경제적 객체로 강등된다. 이에 반해 수수께끼로서의 타자는 전혀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다름을 전제로 한다. 타자의 다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다름도 사랑의 전제다. 사람의 이원성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리와 다른, 우리와 대립되는 방식으로 살고 활동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 말고 무엇이 사랑이겠는가? 대립하는 것들을 기쁨으로 연결하려면 사랑은 이 대립하는 것들을 제거해서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심지어 자기애도 한 사람 속에 있는, 서로 뒤섞을 수 없는 이원성(혹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모든 이원성이 사라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익사한다. 이원성이 모두 사라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융합되어버릴 것이다. 이 나르시시즘적인 핵융합은 치명적이다. 알랭 바디우도 사랑을 ˝둘의 무대˝라고 부른다. 사랑은 세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창조하고 익숙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 시작되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의 무대에서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생산관계가 의도적으로 사육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착취하는 에고는 병적으로 비대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레비나스는 ˝말하기˝로서의 언어를 다름 아닌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에는 타자의 언어로서의 저 ˝가장 근원적인 언어˝가 과잉소통의 소음에 파묻히고 있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08 미래에는 경청자라는 직업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는 돈을 받고 타인의 말을 들어준다. 타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청자에게 간다. 오늘날 우리는 경청하는 능력을 갈수록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이,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어렵게 한다. 나르시스는 요정 에코의 애정이 담긴 음성에, 실로 타자의 음성이라고 해야 할 이 음성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코의 음성은 자기 음성의 반복으로 전락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10 브로흐의 침묵은 우리를 환대하는 침묵이다. 이 침묵은 타인을 경청하는 대신 모든 것을 듣기만 하는 분석가의 침묵과는 다른 것이다. 손님을 환대하는 경청자는 자신을 비워 타인을 위한 공명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공간은 타인을 해방시켜 자신에게로 오게 한다. 경청만이 치유할 수 있다.

카네티에 따르면 경청자의 침묵은 ˝작게 들리는 숨소리들에 의해서만 중단된다. 이 숨소리들은 그가 나를 듣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실하게 알려 준다. 나는 내가 한 문장 한 문장 말할 때마다 어떤 집으로 들어서서 번거롭게 자리를 잡는 것처럼 느낀다.˝ 이 작은 숨소리들은 환대의 표시이며 어떤 판단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격려다. 최소한의 반응이다. 완전한 모습을 갖춘 단어와 문장은 이미 하나의 판단일 것이며, 하나의 입장 표명과도 같을 터이기 때문이다. 카네티는 판단 유보와 비슷한 ˝숨멎기˝에 대해 언급한다. 마치 모든 판단이 타자에 대한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 편견과 다름없다는 듯, 경청자는 판단을 유보한다.

경청의 기술은 호흡의 기술로 수행된다. 타자를 환대하는 영접은 들숨이다. 하지만 이 들숨은 타자를 자신에게 편입시키는 대신 그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그를 보호해준다. 경청자는 자신을 비운다. 그는 무명의 인물이 된다. 이 비어 있음이 경청자의 친절함의 핵심이다. ˝그는 지긋히 다양한 것들을 받아들여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타자에 대한 경청자의 책임감 있는 태도는 인내로 표현된다. 인내의 수동성이 경청자의 준칙이다. 경청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타자에게 내맡긴다. 내맡김은 경청자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준칙이다. 오직 이것만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을 막는다. 에고는 경청하지 못항다. 경청의 공간은 에고가 보류된 타자의 공명 공간으로서 열린다. 나르시시즘적인 에고 대신 타자에 대한 몰입, 타자에 대한 욕망이 들어선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12 경청자의 배려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배려와 반대로 타자를 향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배려는 자신에 대한 배려다. 카네티는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경청하고자 한다. 경청은 타자가 비로소 말을 시작하도록 돕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지의 사람들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그들이 말을 하도록 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그들이 말을 하도록 하는 데만 모든 행동을 집중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죽음이 시작된 것이다.˝ 이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타자의 죽음이다. 나의 말, 나의 판단, 심지어 나의 열광조차도 항상 타자의 무언가를 죽음으로 이끈다. ˝누구나 말하게 하라. 너는 말하지 말라. 너의 말은 타인으로부터 그들의 형상을 빼앗는다. 너의 열광은 그들의 윤곽을 흐린다. 네가 말하면 그들은 더 이상 그들 자신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너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13 ‘좋아요‘의 문화는 모든 형태의 상해와 전율을 거부한다. 그러나 모든 상해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자는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다. 모든 깊은 경험, 모든 깊은 인식에는 상해의 부정성이 내재한다. 단순한 ‘좋아요‘는 경험의 절대적 소멸 단계다. 엘리아스 카네티는 정신을 두 가지 종류로, 즉 ˝상처들에 자리를 잡는 정신과 집들에 자리를 잡는 정신˝으로 나눈다. 상처는 타자가 입장하는 열린 곳이다. 그것은 또한 타자를 위해 자신을 열어놓는 귀다. 자기 안에서 완전한 안락함을 느끼고 자신을 집에 가두어 놓는 사람은 아무것도 경청할 수 없다. 집은 에고를 타자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준다. 상처는 집의 내면성, 나르시시즘적인 내면성을 찢는다. 그럼으로써 상처는 타자를 위한 열린 문이 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15 페이스북에서는 우리 모두와 상관이 있고, 우리 모두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문제들이 거론되지 않는다. 여기서 전송되는 것은 무엇보다 광고들이다. 어떤 토론도 필요로 하지 않으묘 오로지 송신자를 알리는 데만 기여할 뿐인 광고들 말이다. 타인에게 걱정과 고통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좋아요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만 만난다. 여기서는 어떠한 담론도 가능하지 않다. 정치적 공간이란 그 안에서 내가 타인들을 만나고, 타인들과 이야기하고, 타인들을 경청하는 공간이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15 경청에는 정치적 차원이 있다. 경청은 타인들의 현존재에 대한, 그들의 고통에 대한 행동이자 적극적인 참여다. 경청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매개하여 비로소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듣지만, 타인들을 경청하고 그들의 언어와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은 갈수록 잃어버리고 있다. 오늘날에는 각자가 자기 자신, 자신의 고통, 자신의 두려움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혼자 남아 있다. 고통은 사유화되고 개인화된다. 그래서 고통은 자격도 없이 자아와 자아의 심리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책임을 떠넘긴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 어떠한 연결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고 만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16 오늘날의 지배 전략은 고통을 사유화하고, 그럼으로써 고통의 사회성을 은폐하여 고통의 사회화와 정치화를 가로막는 것에 주력한다. 정치화는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으로 해체된다. 공공성은 사적 공간들로 분해된다.

공적 공간과 경청자들의 공동체, 그리고 정치적 경청자 집단을 만들어내려는 정치적 의지는 근본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화는 이러한 과정을 촉진시킨다. 인터넷은 오늘날 공동의 소통 행위 공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터넷은 오히려 자아의 전시 공간으로 해체되고, 이 공간들 안에서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광고한다. 접기 - 베텔게우스

P. 117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우리는 경청의 윤리학을 읽어낼 수 있다. 모모의 우선적인 특징은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모모가 넉넉히 갖고 있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모모의 시간은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다시 말해 모모가 타인들을 경청함으로써 그들에게 주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모모의 뛰어난 경청 능력을 칭찬한다. 모모는 경청자로서 등장한다. ˝어린 모모가 누구보다도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경청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딱히 특별한 능력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독자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경청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진실로 경청할 줄 아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모모터럼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모모밖에 없었다.˝ 모모는 그저 거기에 앉아 들을 뿐이다. 그런데도 모모의 경청은 기적을 낳는다. 모모는 사람들이 혼자서는 결코 떠올릴 수 없었을 생각들을 하게 만들었다. 실로 모모의 경청은 헤르만 브로흐의 환대하는 경청, 타인을 그 자신에게로 해방시키는 경청을 연상시킨다. ˝그럴 때 모모는 그 크고 짙은 눈으로 다른 사람을 쳐다보았고, 상대는 자기 안에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경청하면 혼란에 빠지거나 어찌할 줄 모르던 사람들도 갑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사람들도 갑자기 자신이 자유롭다고, 용기가 솟는다고 느꼈다. 불행하거나 우울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자신감과 기쁨을 느꼈다. 또 자신의 삶은 완전히 실패했고 아무 의미가 없으며, 자기는 수백만의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하고,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고장 난 냄비처럼 다른 사람들로 금세 교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린 모모에게 가서 이런 모든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말하는 도중에 이미 자기가 자신을 아주 잘못 생각했고, 정확하게 자신과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이고, 그래서 자신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모모는 그렇게 경청할 줄 알았다!˝ 경청은 누구에게나 그에게 속한 것을 되돌려 준다. 모모는 순수한 경청만으로 싸움도 조정한다. 경청은 화해시키고, 치유하고, 구원한다. ˝언젠가는 어린 소년 하나가 모모에게 노래를 하지 않는 카나리아를 데리고 왔다. 모모에게는 훨씬 더 어려운 과제였다. 모모는 일주일 내내 그 새를 경청해야 했다. 그러자 결국 새는 다시 지저귀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접기 - 베텔게우스

 

 

출판사 제공 책소개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같은 것의 테러만이 작동한다.”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세계적인 것의 폭력에 대한 강력한 비판

 

 

[책 소개]

“우리는 지금 같은 것의 지옥을 살아가고 있다!”

세계화에서 테러리즘, 진정성, 환대의 문제까지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 한병철의 냉철한 사회 분석

 

『피로사회』 『투명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의 신작 『타자의 추방』이 출간되었다. 전작 『피로사회』가 ‘나는 할 수 있다’는 명령 아래 스스로를 착취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에로스의 종말』이 사랑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 책에서는 그런 상황을 불러온 근본 원인으로 저자가 지목했던 ‘타자의 소멸’ 현상을 본격적으로 파헤친다. 저자는 오늘날의 세계가 겉으로는 자유와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것이 지배하는 지옥’일 뿐이라며, 모든 것을 획일화하고 대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세계적인 것의 폭력이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폭력이 인간을 어떻게 무력화시키는지 상세하게 보여준다. 또한 ‘테러리즘’ ‘난민’ ‘환대’ ‘진정성 추구’와 같은 정치사회적 현상들이 타자의 소멸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분석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대한 예리한 고찰을 보여주는 이 작은 책은 우리의 세계가 어떠한 난관에 봉착해 있는지 뼈아프게 돌아보게 한다.

 

 

“비밀로서의 타자, 유혹으로서의 타자, 에로스로서의 타자

욕망으로서의 타자,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이 책은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라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타자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 핵심적인 의미를 꼽는다면 ‘낯선 존재,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존재,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타자는 두려움의 대상이며,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타자와의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타자는 인간의 삶에 일정한 형상과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해왔다. 한병철은 오늘날 이러한 타자가 사라졌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낯선 타자와 맞닥뜨릴 기회가 줄어들고 비슷한 것들만 창궐하는 사회, 오직 자신에게 익숙하게 길들여진 것만 상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 오늘의 나르시시즘적 사회의 모습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지만, 오늘날에는 같은 것이 지옥이다. 이 지옥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배된다. 과거에는 인간을 착취하기 위해 억압과 금지와 부정이 행사되었던 반면, 지금은 자유와 허용과 긍정이 인간을 자기착취로 이끈다. 같은 존재로 획일화된 인간은 자기 안에 갇혀 진정한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성찰 능력도 상실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생산에 최적화하려고 애쓸 뿐이다. “뒤처질 위험에 대한 상시적 불안에 지배되는 인간이 자신을 착취할수록, 자본의 이윤은 극대화된다.” 자신의 체계적 억압을 보이지 않게 하고, 자유와 성장으로 포장하는 것, 이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의 기만적인 논리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이 체감상의 자유는 모든 저항, 모든 혁명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억압을 행사하는 타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에 맞서서 저항해야 한다는 말인가?

 

 

“세계화의 광기가 테러리스트라는 광인을 만들어낸다.”

 

한병철은 오늘날의 사회를 특징짓는 테러리즘, 민족주의, 진정성의 추구, 셀카 중독과 같이 이질적으로 보이는 현상들 속에서도 같은 것의 폭력을 추적해 나간다.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것, 비교할 수 있는 것, 따라서 같은 것으로 만드는 세계적인 것의 폭력은 그에 맞서는 파괴적인 힘을 산출해낸다. 여기서 저자는 “세계화의 광기가 테러리스트라는 광인을 만들어낸다”고 한 보드리야르의 말을 인용한다. 테러 공격은 같은 것의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극단적’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절망감과 전망의 부재가 불러온 사회적 불안은 테러리즘 세력을 키우는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다시 깨어나고 있는 민족주의와 신우익 등도 세계적인 것의 지배에 대한 반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는 실제로는 적이 아니라 동일한 발생 과정을 거친 형제다.” 현재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다양한 혐오 현상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병철은 여기서 더 나아가 테러리즘을 자해와 셀카 중독 현상과 연결시킨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타자와의 대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상처가 회피되지만, 이는 자기상해로 부활한다.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타자의 시선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존재감을 상실하고, 이러한 결여가 자해의 원인이 된다. 사람들은 내면의 공허함에 직면하여 헛되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노력한다. 셀카는 텅 빈, 불안한 자아의 매끄러운 표면이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공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면도날을 들거나 스마트폰을 쥔다.” 자살테러는 자기공격과 타인공격, 자기생산과 자기파괴가 하나로 겹쳐진 역설적인 행위이자, 최후의 셀카로 상상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폭탄을 폭발시키는 단추를 누르는 것과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것은 비슷하다.”

오늘날 자주 들려오는 ‘진정성’에 대한 요구도 심판대에 올려진다. 한병철에 따르면 “진정성은 신자유주의의 모든 광고들과 마찬가지로 해방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하지만 진정성은 판매 논리일 뿐이다. 이 진정성은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만을, 다시 말해 잡다함만을 허용”한다. 신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꾸면 잡다함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타인들과 다르고자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타인과 다르고자 함 속에서 같은 것이 계속된다고 본다. 다양성과 선택 가능성은 실제로는 없는 다름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같은 것의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구원은 타자에게서 온다!

 

같은 것의 창궐, 같은 것의 테러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같은 것의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은 결국 타자로부터 온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타자만이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성찰을 가능하게 해주고, 의미를 복원하며, 우리를 고립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환대이다. 그는 “오늘날의 난민 위기는 유럽연합이 이기적 목적을 좇는 경제적 상업연합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저자는 타자를 배척하고 혐오할 것이 아니라, 환대로서 맞이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을 다시 타자로부터, 타자에 대한 관계로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에게 윤리적인 우선권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나아가 타자를 경청하고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이 책은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우리가 추방시켰던 타자에게 다시 제자리를 내주는 일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한병철의 글은 경구처럼 짧고 함축적이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도발적인 문장들을 통해 우리가 흔히 간과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 시대의 결정적인 단면들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그 근원을 파고든다. 또한 그는 논쟁적인 주장을 다양한 출처에서 끌어온 풍부한 예시와 매력적으로 결합시킨다. 찰리 카우프만, 페데리코 펠리니, 알프레드 히치콕,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과 모리스 블랑쇼, 조지 오웰, 프란츠 카프카, 파울 첼란, 알베르 카뮈, 페터 한트케, 미하엘 엔데의 문학작품들이 이 책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독일어로 발표된 한병철 교수의 책들은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그리스 등 15개국 이상에 소개된 데 이어, 최근 스페인어권 국가에서도 이례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2015년에는 그의 에세이 「무리 속에서」가 프랑스 브리스톨 데 뤼미에르 상(외국 에세이 부문)을, 2016년에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정부에서 수여하는 미래학 연구상을 수상했다. 접기

 

 

한병철, 2020, 『폭력의 위상학』, 김태환 옮김, 김영사 2020-06-10

원제 : Topologie der Gewalt (2013년)

 

책소개: 폭력의 구조, 역사, 정치, 심리, 가해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시스템의 폭력까지,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폭력에 관한 분석을 담은 책이다. 주권사회에서 근대의 규율사회로, 다시 오늘날의 성과사회로, 사회의 변천과 더불어 그 양상을 달리하고 있는 폭력의 위상학적 변화 과정을 살피고, 점점 내부화, 심리화하고 있는 이 시대의 폭력을 예리한 시선으로 읽어낸다.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자유가 어떻게 폭력으로 전도되는지, 긍정의 폭력이 어떻게 우울증과 탈진을 낳는지, 나르시시즘이 어떻게 공동체의 파괴로 이어지는지 등을 보여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폭력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목차

서론

 

1부_ 폭력의 거시물리학

1. 폭력의 위상학

2. 폭력의 고고학

3. 폭력의 심리

4. 폭력의 정치

5. 폭력의 거시논리

 

2부_ 폭력의 미시물리학

1. 시스템의 폭력

2. 권력의 미시물리학

3. 긍정성의 폭력

4. 투명성의 폭력

5. 미디어는 매스-에이지다

6. 리좀적 폭력

7. 지구화의 폭력

8. 호모 리베르

 

역자 후기

 

 

책속에서

첫문장: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폭력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P. 19 심리적 내부화는 근대에 일어난 폭력의 위상학적 변화에서 중심적인 문제에 속한다. 폭력은 영혼의 내적 갈등이라는 형태로 일어난다. 파괴적 긴장은 바깥을 향해 방출되기보다 내적으로 해결된다. 전선은 자아의 바깥이 아니라 내부에 형성된다. ... 양심은 폭력의 전도가 일어나는 장소이다. ... 타인을 향한 공격성은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성으로 방향을 돌린다. 인간이 타인을 향한 공격성을 참는 데 비례하여 양심은 더욱 엄격해지고 더 큰 강제력을 발휘하게 된다. 접기

P. 36~37 삶이 한 조각 주화처럼 벌거벗겨지고 모든 서사적 내용을 상실할 때 광적인 건강 숭배가 일어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공동체적인 것이 침식됨에 따라 남은 것은 오직 나의 몸뿐이기에, 이 몸만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상적 가치가 사라진 자리에는 주목받기를 갈망하는 자아의 전시가치와 건강가치밖에는 남아 있지 않다. 벌거벗은 삶은 무엇 때문에 건강해야 하는지를 답해줄 모든 목적론, 모든 ‘위하여’를 파괴해버린다. 건강은 자족적인 가치가 되며 모든 내용을 상실한 채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공허에 빠진다. 접기

P. 47 보상구조가 교란된 탓에 성과주체는 점점 더 많은 성과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타자와의 연결 상실은 보상 위기의 가능성을 낳은 초월적 조건이다. 보상 위기의 또 하나의 원인은 오늘의 생산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다 해낸, 완결지은 일의 결과로서 최종적 작품Werk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생산관계는 바로 완결을 방해한다. 인간은 열려 있는 쪽을 향해 일한다. 시작과 끝을 가진 완결의 형식은 사라져간다. 접기

P. 61~62 초자아의 부정성은 자아의 자유를 제한한다. 반면 이상자아를 향한 자기 기획은 자유의 행위로 해석된다. 그러나 도달 불가능한 이상자아 앞에서 자아는 자기 자신을 결함이 많은 존재로, 낙오자로 인식하며 스스로에게 자책을 퍼붓는다. 현실의 자아와 이상자아 사이의 간극에서 자기공격성이 발생한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인다. 스스로 모든 타자의 강제에서 해방된 것으로 믿는 긍정성의 사회는 파괴적인 자기강제 속에 엮여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21세기의 주요 질병으로 떠오른 소진증후군 (burnout syndrome)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은 모두 자기공격적 특성을 나타낸다. 자아는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있었던 자리에 스스로 생성시킨 폭력이 들어선다. 이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까닭에 타자의 폭력보다 치명적이다. 접기

P. 78 즉, 타자를 다르게 구성하는 작업, 파괴적인 면역저항을 촉발하지 않도록 타자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타자의 다름을, 타자의 그러함 So-Sein을 그대로 용인하고 긍정하는 그런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함에 대한 긍정을 다른 말로 하면 우의Freundlichkeit다. 우의는 타자를 그저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관여의 태도로 타자의 그러함과 관계 맺는 것을 의미한다. 우의의 감정은 오직 타자, 낯선 자를 만났을 때만 깨어난다. ... 우의의 정치는 관용의 정치보다 더 개방적이다. 접기

P. 83 민주주의는 그 본질적 핵심에서 의사소통적이다. 소수파도 말을 함으로써 의사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독재Diktatur는 말을 금지한다. 독재는 받아 적게diktieren 할 뿐이다.

P. 95 우정은 어떤 면에서 정치적인 것의 징표이다. 공동체 자체가 “뭔가 우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매우 근본적인, 실존적인 차원의 문제로 이해한다. 우정은 “함께 살겠다는 자유로운 결정”으로서, 그런 점에서 국가의 기반, 국가가 성립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강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은 지배 권력을 행사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함께 살겠다는 결단이다. 인간의 삶은 목숨을 좌우하는 무조건적 권력에 내맡겨짐으로써 정치화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살겠다는 결정이 인간 존재를 정치화한다. 권력과 폭력에는 진정으로 정치적인 공동체의 이념, 즉 함께 살겠다는 결단의 정신이 빠져 있다. 권력은 공동체를 전제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아의 현상이다. 즉, 자기중심적이다. 함께는 권력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접기

P. 100 오늘날은 정치 자체가 긍정화되어 주권적 행위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Arbeit로 전락한다. 일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힘과 강제에 결코 의문을 제기할 수 없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도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일의 긍정성은 정상상태를 영속화한다. 일이 되어버린 정치에는 단순히 가능한 것을 뛰어넘는 어떤 초월적 지평도 찾아볼 수 없다. 자본이 어느새 모든 초월성, 모든 외부를 흡수해버린 뒤에 정치 역시 자본의 내재적 공간 속에서 조용히 머무를 뿐이다. 정치가 긍정화됨에 따라 정당과 이데올로기 역시 나날이 중요성을 잃어간다. 정치의 공허는 미디어가 연출하는 스펙터클로 채워진다. 정치인 역시 탈정치화된 스펙터클의 공간 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들의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그들의 인간됨이 미디어를 통한 연출의 대상이 된다. 접기

P. 105 권력은 타자를 스스로 굽힐 때까지 구부린다. 반면 폭력은 타자를 구부려서 결국 부러지게 만든다.

P. 111 권력이 폭력 위에 세워진다는 생각은 틀렸다. 폭력은 권력과는 다른 지향성을 보인다. 따라서 권력의 과정과는 전혀 무관한 폭력 사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증오로 인한 살인은 타자의 존재를 제거하는 것 이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폭력이다. 여기에 타자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고자 하는 의도는 개입되지 않는다. 폭력을 오직 권력의 관점에서만 고찰하면 폭력의 본질은 드러나지 않는다. 접기

P. 112 권력은 자아와 타자를 서로 묶어주는 관계다. 권력은 상징적symbolisch으로 작용한다. 즉, 관계를 만들고 함께 모으는sym-ballein 작용을 한다. 물론 권력은 악마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악마화된 권력은 억압적이고 파괴적이며 분열시키고 배제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권력을 오직 그 악마성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생산적인 작용을 하는 권력의 상징성을 간과하게 된다. 권력과 반대로 폭력은 상징적 매체가 아니다. 폭력은 본질적으로 악마적diabolische이다. 즉, 폭력은 분열적이다dia-ballein. 권력은 상징적 차원을 지니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상징을 산출하며 그러한 상징을 이용하는 까닭에 달변이 된다. 반면 폭력은 그 악마성으로 인해 상징성의 빈곤, 언어의 빈곤을 나타낸다. 접기

P. 113 그는 자신이 지배하는 공간, 즉 스스로 점령한 공간과 동일한 외연을 가진다. 이러한 권력의 위상학은 왜 권력의 완전한 상실이 공간의 완전한 상실로 느껴지는지를 설명해준다.

P. 117~118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오직 면역학적 시대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이질성은 점점 더 면역반응을 촉발하지 않는 소비 가능한 차이로 대체되어간다. 이러한 차이에는 격렬한 면역저항을 일으키는 낯선 가시가 없다. 이방인도 이국적 타자로 긍정화되어 면역학적 타자와는 반대로 면역반응을 유발하지 못하게 된다. 폭력의 거시논리와 반대로 폭력의 미시논리는 면역학적 모델을 따르지 않는다. 폭력의 미시논리는 같은 것의 논리다. 접기

P. 128 시스템적 폭력은 어떤 적대관계나 지배관계 없이 행사된다. 폭력의 주체는 권력을 쥔 개인도, 지배 계급도 아니다. 시스템 자체가 폭력의 주체다. 억압이나 착취에 대해 책임을 지울 행위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P. 129 여기서도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차이는 사라진다. 약자뿐만 아니라 강자도 소진증후군에 시달린다. 희생자는 동시에 시스템의 공모자다. 희생자는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가해자와 구별되지 않는다. 폭력은 자기 착취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일치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자기관계적인 성격을 띤다.

P. 144 오늘의 전쟁은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다. 적대관계라는 부정성이 사라진 까닭에 전쟁은 자기관계적으로 된다. 파괴하는 자가 파괴된다. 때리는 자가 맞는다. 승리하는 자가 동시에 패배한다. 이 전쟁은 평화를 가장하는 까닭에 전혀 보이지 않고 분명하지도 않다. 그것은 그 누구도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전쟁이다. 일방의 승리가 아니라, 전체의 붕괴, 전체의 소진만이 적이 없는 전쟁을 끝낼 것이다. 시스템 전체는 과열로 인해 파열된다. 여기서 작용하는 것은 파열적 폭력이다. 파열적implosiv 폭력은 제국주의적 폭력이나 고전적 전쟁 폭력처럼 팽창하며 새로운 공간을 정복하는 폭발적explosiv 폭력과 구별된다. 폭발적 폭력은 외부를 향해 압력을 가한다. 반면 파열적 폭력에서는 외부가 없는 까닭에 압력은 안으로 가해진다. 파열적 폭력은 내부에서 파괴적 긴장과 강박을 만들어내고, 이는 시스템 전체의 경색으로 이어진다. 기후와 환경 재앙 역시 시스템의 과열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소진 상태에 이른 성과주체는 임박한 시스템의 파열을 알리는 병적 전조다. 접기

P. 147 타자의 테러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것은 같은 자의 테러, 내재성의 테러다. 부정성이 없는 이러한 테러에는 효과적인 방어 수단도 있을 수 없다.

P. 153~154 투명성에 대한 줄기찬 요구의 바탕에는 어떤 형태의 부정성도 없어진 세계, 또는 그런 인간의 이념이 깔려 있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기계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이란 인간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기계의 커뮤니케이션일 것이다. 전면적 투명성의 강박은 인간 자신을 시스템의 한 기능적 요소로 획일화한다. 여기에 투명성의 폭력이 있다. 한 인간의 전체적 인격 역시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없고 침투할 수 없는 면을 포함한다. 인간을 완전히 들추어내고 그에게 과도한 조명을 비추는 것은 폭력일 것이다. 페터 한트케는 이렇게 쓴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는 살아간다.” 접기

P. 181 잘 알려진 대로 컴퓨터는 머뭇거릴 줄 모른다. 컴퓨터는 타자의 차원이 결여된 까닭에 자폐적인 계산기가 되고 만다. 사유 역시 그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부정성과 결부되어 있다. 부정성이 없다면 사유는 계산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P. 81 법은 폭력의 기반 위에 세워진다. 폭력은 법의 본질이다. - reveur.dragonja

P. 77 성과주체는 궁극적으로 자기와 경쟁하며 자신을 뛰어넘으려고 시도한다. 이로써 치명적인 경주가 시작된다. 언젠가 실신할 때까지 자기 주위를 끝없이 맴도는 경주 - 렐리스

P. 111 진정 막강한 권력을 쥔 지배자는 폭력을 휘두르겠다는 협박이나 반복하면서 권력을 유지하지 않는다. 물론 폭력을 동원하여 억지로 권력을 획득할 수는 있겠지만, 폭력의 강제를 통해 얻어낸 권력은 견고하지 못하다 - 렐리스

P. 160 한 인간이 인터넷에 제공하는 데이터만 분석하더라도 그가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투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인터넷은 그 무엇도 잊어버리지 않고 그 무엇도 기억에서 밀어내지 않는다 - 렐리스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폭력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폭력에 대한 혐오가 근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는 없다. 폭력은 그저 변화무쌍할 뿐이다. 사회적 구도가 변화함에 따라 폭력의 양상도 달라진다. 오늘날 폭력은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정면 대결성에서 바이러스성으로,

노골성에서 매개성으로, 실재성에서 잠재성으로, 육체성에서 심리성으로, 부정성에서 긍정성으로 이동하며, 그리하여 피하皮下로, 커뮤니케이션의 뒤편으로, 모세관과 신경계의 공간으로 물러난다. 그리하여 폭력이 사라진다는잘못된 인상이 생겨난다. 폭력은 자신의 반대 형상인 자유와 합치를 이루는 순간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다. 군사적 폭력은 오늘날 익명화된, 탈주체화된 시스템적 폭력에 자리를 내준다. 이러한 폭력은 폭력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사회와 하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접기 - gaudium

<<폭력의 위상학》은 우선 부정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 즉 자아와 타자, 내부와 외부, 친구와 적 사이의 이원적긴장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거시물리적 현상으로서의 폭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폭력은 보통 표현적으로, 폭발적으로, 육중하게, 공격적으로 표출된다. 태고 시대의희생과 피의 폭력, 질투와 복수심에 불타는 신들의 신화적 폭력, 처형을 명하는 주권자의 폭력, 고문의 폭력, 가스실의 무혈 폭력, 테러리즘의 바이러스성 폭력이 모두여기에 속한다. 거시물리적 폭력은 좀 더 섬세한 형태로,

이를테면 언어폭력으로 구현될 수도 있다. 상처를 주는언어의 폭력은 물리적 폭력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부정성의 원리를 기초로 한다. 그것은 명예를 훼손하고 신뢰를깎아내리며, 위신을 떨어뜨리고, 존중을 거부한다. 언어폭력은 부정성의 폭력이라는 점에서 언어의 스팸화, 과잉 커뮤니케이션과 과잉 정보, 언어와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거대한 더미에서 오는 긍정성의 폭력과 구별된다. 접기 - gaudium

폭력은 피하皮下로, 커뮤니케이션의 뒤편으로, 모세관과 내면적 영혼의 공간으로 물러난다. 폭력은가시적인 것에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직접적인 것에서은밀한 것으로, 육체적인 것에서 심리적인 것으로, 호전적인 것에서 매개적인 것으로, 정면대결적인 것에서 바이러스적인 것으로 변화해간다. 대결 대신 오염, 공개적인 공격 대신 부지불식간의 전염이 이제 폭력의 작동 양식이 된다. 이러한 폭력의 구조적 변화가 오늘날 점점 더강력하게 폭력 사건의 성격을 규정한다. 테러리즘도 파괴적 힘을 한데 모아 정면 공격을 꾀하기보다 비가시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바이러스적으로 분산시킨다. 21세기의 전쟁 양식인 사이버 전쟁도 바이러스적으로 작전을 펼친다. 바이러스적 방식은 폭력을 보이지 않게 숨기고, 불명확하게 만든다. 범인도 자기를 가린다. 공격하기보다 전염시키는 디지털 바이러스는 범인을명확히 가리키는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바이러스적 폭력도 여전히 부정성의 폭력임은 분명하다. 그것의 본질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선과 악, 친구와적의 이원성이 새겨져 있다. 접기 - gaudium

그러나 ˝모방적 경쟁 mimetischen Rivalitat˝이라는 지라르의 개념은 폭력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한다. 어원적으로라이벌 Rivale은 수로 rivus의 이용과 관련된다. 라이벌은 다른 사람들이 물을 갈망하기 때문에 자기도 물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적 행동은 모방적 욕망으로 인해 가치 있게 되는 대상보다는 그 자체로 본질적 가치를 지닌대상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원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이다. 지라르의 모방 이론은돈도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남들도 원하기 때문에 돈을원하는 것이 아니다. 모방적 욕망에서 돈의 가치가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돈은 특별한 대상이다. 돈은 그자체가 바로 가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방이 중요한 인간의 행동 양식에 속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모방이 없다면 사회화 과정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접기 - gaudium

자본 경제는 피 대신 돈을 흘린다. 피와 돈 사이에는 본질적 근친 관계가 있다. 자본은그 행태에 있어 근대화된 마나라고 부를 만하다. 인간은돈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강해지고, 더 안전해지고, 더죽음에서 멀어질 거라고 상상한다. 돈 Geld은 어원적으로도 이미 희생 및 예배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돈은 본래희생 제물이 되는 동물을 구하는 데 사용된 교환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많은 희생 제물을 가질 수 있다. 즉, 그만큼 많은 동물을 죽여 제단에 바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맹수 같은 커다란 살해 폭력의 소유자가 된다. 접기 - gaudium

삶을 유지하려면 죽음을 준비하라

Si vis vitam, para mortem.

그러니까 삶이 죽지 않은 삶으로 굳어버리지 않게 하려면 삶 속에서 죽음에 더 많은 자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우리의 생각 속에 죽음에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주고 우리가 지금까지 그토록 세심하게 억눌러온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 태도를 좀 더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접기 - gaudium

P. 106 드 속도, 불로 가는 길성, 고스기계출하는 크기 가스를 부력조는 거다.

 

 

폭력도 권력도, 불편한 타자의 이질성, 고집스럽게 저항하는 타자의 자유를 무력화하는 전략이다. - :Dora

P. 21 생산의 수준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자기 착취가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과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불타버릴 때까지 (번아웃)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때 발생하는 자기공격성은 드물지 않게 자살의 폭력으로까지 치닫는다. 이로써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신에게겨냥하는 탄환 Projektil임이 드러난다. 접기 - jooltac

P. 28 원시적 세계에서는 모든 죽음이 외부적 폭력의 작용으로 해석된다. 인간은 외부에서 덮쳐오는 이 치명적 폭력에 대항 폭력을 맞세움으로써 저항을 시도한다.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폭력에서 스스로를 지키고자하는 것이다.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살해한다. 죽임이 죽음을 막아준다. 더 강한 폭력을 휘두를수록, 더 많이 죽일수록, 그만큼 더불사의 존재에 가까워진 듯이 느끼게 된다. 폭력은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에 직면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죽음의 기술이다. 접기 - jooltac

P. 80 폭력, 또는 부정적인 징벌의 위협만으로 법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은 그 무엇도 함께 붙들어두지못한다. 폭력은 어떤 안정적인 받침대도 제공하지 못한다. 폭력이 엄청나게 행사되는 상황은 오히려 내적인 불안정성의 징후다. 오직 폭력에 의해서만 지탱되는 법질서는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직 법질서에 대한 동의만이 안정적인 받침대가 될 수 있다. 폭력의 본모습은 ˝붙들어주는 것˝이 법질서에서 완전히사라지는 순간에 비로소 드러난다. 접기 - jooltac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혼자서는 결핍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정치적 공동체의 발생 원인은 결핍의 감정이지 권력과 지배 의지가 아니다. 사람들은 결핍의 감정을극복하기 위해 타인과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정치는 삶, 생존 때문에 생겨났지만, 정치를 진정한 의미의정치로 만드는 것은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이후다. 접기 - jooltac

 

 

출판사 제공 책소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폭력에 관한 날카로운 분석

《피로사회》에 전개된 사유 아래에 깔린 폭력의 논리가 담긴 책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2010년 원서 출간, 2012년 한국어판 출간)가 출간된 지 10년이 되어간다. <피로사회>는 20세기 후반의 고도산업사회를 성과사회로, 이 세계의 사람들을 ‘성과주체’로 명명하며 이들이 겪고 있는 병리적 현실을 예리하게 파헤쳤고, 전 유럽과 한국 사회에서 신드롬이라 할 만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한병철 신드롬은 지금도 에스파냐어권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이어지고 있는 까닭에 그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살아 있는 독일 철학자”로 불린다. 이번에 출간된 <폭력의 위상학>(2013년 독일어판 출간)은 <피로사회>에 전개된 사유 아래에 깔린 폭력의 논리를 담은 책이다. <피로사회>의 마지막 장에서 제시된 ‘피로는 폭력이다’라는 테제를 이어받아 세밀하게 파헤쳤다.

주권사회에서 근대의 규율사회로, 다시 오늘날의 성과사회로, 사회의 변천과 더불어 그 양상을 달리하고 있는 폭력의 위상학적 변화 과정을 살피고, 오늘의 폭력이 점점 내부화, 심리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자유가 어떻게 폭력으로 전도되는지, 긍정의 폭력이 어떻게 우울증과 탈진을 낳는지, 나르시시즘이 어떻게 공동체의 파괴로 이어지는지 등을 보여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폭력을 날카롭게 분석했다.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해방시켜 하나의 프로젝트Projekt로 만든다. 그러나 주체에서 프로젝트로의 변신이 폭력을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타자에 의한 외적 강제의 자리에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가 들어선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생산의 수준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자기 착취가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과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불타버릴 때까지(번아웃) 스스로를 착취한다. 이때 발생하는 자기공격성은 드물지 않게 자살의 폭력으로까지 치닫는다. 이로써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신에게 겨냥하는 탄환Projektil임이 드러난다. _20-21쪽

 

 

폭력의 구조, 역사, 정치, 심리, 가해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시스템의 폭력까지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폭력에 관한 성찰

그는 먼저 폭력의 위상학적 변천을 소개한다. 사회적 구도가 변화함에 따라 폭력의 양상도 달라졌다. 태고의 희생 제의에서 발견되는 피의 폭력, 질투하고 복수하는 신화 속 신들의 폭력에서 참수를 명하는 주권자의 폭력, 무자비한 고문의 폭력으로, 다시 가스실의 무혈 폭력, 테러리즘의 바이러스 폭력, 감정을 상하게 하는 언어폭력으로. 노골적이고 유혈이 낭자하던 폭력은 점차 정당성을 상실하고 되도록 감추어야 할 것이 된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여전히 이 모든 폭력이 자아와 타자, 내부와 외부, 친구와 적 사이의 긴장에서 커져가는 ‘부정성의 폭력’이다. 1부 ‘폭력의 거시물리학’에서 주로 다루는 것이 바로 이 부정성의 폭력이다. 프로이트, 벤야민, 카를 슈미트, 리처드 세넷, 르네 지라르, 아감벤, 들뢰즈와 가타리, 푸코, 부르디외, 하이데거 등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자신의 폭력 개념에 접근해간다.

그리하여 2부 ‘폭력의 미시물리학’에서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폭력을 다각도로 살펴본다. 주체는 시스템의 요구를 내면화하여 그에 전적으로 순응한다. 이상자아에 도달하려는 노력과 함께 과잉 생산, 과잉 커뮤니케이션, 과잉 주의, 과잉 활동의 대열에 합류한다. 생존의 필요와 효율성의 추구에 몰려 우리는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가 되어, 자기 착취, 경계의 해체, 우울증, 소진의 덫에 걸리고 만다. 이 같은 긍정성의 폭력이 부정성의 폭력보다 치명적인 것은, 거기에는 경고도 없고 뚜렷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시스템의 파열, 전소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소진 상태에 이른 성과주체는 임박한 시스템의 파열을 알리는 병적 전조”다.

 

폭력은 외부에서 가해오는 작용으로서 나를 덮치고 제압하고 내게서 자유를 빼앗아간다. 폭력은 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나의 내부로 파고들어온다. 그러나 외부에서 오는 모든 타자의 작용이 폭력은 아니다. 내가 그 작용을 승인하고 나의 행동과 연관시키는 순간, 즉 그 작용과 나 사이에 일정한 관계를 수립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폭력의 성격을 지니지 않게 된다. 나는 그 작용과의 관계에서 자유롭게 행동한다. 나는 그것을 나 자신의 내용으로 긍정한다. _103쪽

 

 

우리는 폭력의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가 되어 자기착취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어떻게 이 치명적인 마비 상태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은폐되었던 폭력이 드러나고 폭력에 대한 고발이 줄 잇는 시대, 폭력 논의의 마중물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으로 전 세계가 비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이 시절, 특정인을 향한 조리돌림이 언론과 SNS를 달구고, 약자에 대한 물리적 폭력과 혐오 범죄가 빈번하며, ‘플로이드 사건’으로 미국 전역이 들끓는 이 시절은 (저자의 도식을 따르자면) ‘부정성의 폭력’이 여전히 지배하는 세계인 듯 보인다. 상대적으로 ‘긍정성의 폭력’은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감염병의 시대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미시물리적 폭력은 과연 줄어들었는가? 긍정성의 폭력은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더 심한 자기착취에 뛰어들고 있지 아니한가? 또한, 어쩌면 부정성의 폭력으로 보이는 사태들도 뜯어보면 긍정성의 폭력의 층위가 얼마간 중첩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온갖 과잉 커뮤니케이션, 과잉 활동, 과잉 생산들이 결국은 타자를 향한 부정성의 폭력으로 이어진다면? 그리고 이 감염병 확산이 어느 정도 진정된 뒤, 포스트코로나 사회는 과연 이전과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이쪽 끝과 저쪽 끝을 오가는 시계추처럼, 지금의 마이너스 성장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성과사회의 주체들은 다시 저 자본주의의 극단으로 서둘러 복귀하고 자기착취를 이어가지 않을까? 어쩌면 이 비상한 시국에 많은 이들이 꿈꾸는 ‘정상성’이란 바로 그것 아닐까?

낙관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계몽된 이 세계에도 폭력이 줄지 않고 있다면, 폭력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폭력에서 출구를 찾으려는 노력이 마땅하다면, 폭력의 거시적 미시적 구조를 파헤친 이 책은 지금 시급하게 읽어야 할 텍스트다. 은폐되었던 폭력이 드러나고 폭력에 대한 고발이 줄 잇는 시대, 폭력에 대한 비범한 성찰을 담은 이 책이 생산적인 토론의 마중물이 되길 기대한다. 접기

한병철, 2023, 『정보의 지배―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전대호 옮김, 김영사. 2023-02-27

 

책소개: 디지털화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현상과 언어에 대한 세밀한 관찰로 그려낸 정보사회의 초상. 종족주의와 정체성 정치를 강화하는 음모론, 정보 전쟁이 된 선거전, 거대서사 없는 빅데이터, 선동과 증오를 퍼트리는 소셜 봇과 댓글 부대, 바이러스적인 특성을 보이는 밈… 거침없이 진행 중인 디지털화는 어느새 정치의 영역마저 집어삼키고 민주주의적 과정에 거대한 균열을 내고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를 서술한 이 책에서, 한병철은 그 위기를 공론장의 디지털 구조변동에서 찾는다. 그는 이 위기를 ‘인포크라시’라고 부르면서, 새로운 지배형태인 정보체제와 관련지어 분석한다.

 

목차

정보체제

인포크라시

소통행위의 종말

디지털 합리성

진실의 위기

 

 

 

책속에서

P. 15 “정말로 자유로운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정보들이다. 정보사회의 역설은 사람들이 정보 안에 갇힌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소통하고 정보를 생산함으로써 자기를 사슬로 묶는다. 디지털 감옥은 투명하다. ”

P. 23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은 정보체제가 의식의 문턱보다 낮은 수준에서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정보체제는 의식적 행위에 선행하는 선반성적, 충동적, 감정적 행동 층들을 장악한다. 데이터에 의해 추진되는 정보체제의 심리정치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행동에 개입한다.”

P. 35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미 인지 수준에서 시작된다. 정보는 현재성을 띠는 기간이 아주 짧다. 정보는 시간적 안정성이 없다. 왜냐하면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적 불안정성 때문에 정보는 지각을 파편화한다. 정보는 실재를 ‘영원한 현재성의 현기증’ 속으로 처넣는다. 정보 곁에 하염없이 머무르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보는 인지 시스템을 동요시킨다. 정보에 내재하는 가속 강박은 앎, 경험, 깨달음 같은 시간집약적 인지 실행들을 몰아낸다.” 접기

P. 43~44 “밈 전쟁은 디지털 소통이 시각적인 것을 텍스트적인 것보다 더 선호하는 정도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주지하다시피 그림은 텍스트보다 더 빠르다. 담론과 진실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소통의 시각화가 강화되는 것도 민주주의적 담론을 방해한다. 왜냐화면 그림은 논증하거나 정당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느리고, 호흡이 길고, 지루하다. 따라서 정보의 바이러스적 확산 곧 인포데믹은 민주주의적 과정을 심하게 훼손한다. 논증과 정당화를, 바이러스와 맞먹는 속도로 확산하고 증식하는 트윗이나 밈에 집어넣을 길은 없다.” 접기

P. 58 “디지털 종족들의 탈사실적 우주에서 발언은 더이상 사실 관련성을 아예 띠지 않는다. 따라서 발언은 어떤 합리성도 없다. 발언은 비판 가능하지도 않고 반드시 정당화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발언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소속감을 얻는다. 요컨대 담론은 믿음과 고백으로 대체된다. 이제 각각의 종족 구역 바깥에는 단지 적들만, 무찔러야 할 타인들만 존재한다.” 접기

P. 65 “인공지능은 정당화하지 않고 계산한다. 논증의 자리에 알고리즘이 들어선다. 논증은 담론 과정에서 개선된다. 반면에 알고리즘은 기계적 과정에서 계속 최적화된다. 이를 통해 알고리즘은 스스로 자신의 오류들을 수정할 수 있다. 디지털 합리성은 담론적 배움을 기계학습으로 대체한다. 그렇게 알고리즘이 논증을 흉내 낸다.”

P. 93 “포스트모던이 선도하는 장대한 이야기(grand narrative, 거대서사)의 종말은 정보사회에서 완성된다. 이야기는 정보들로 파열한다. 정보는 이야기의 맞수다. 빅데이터는 장대한 이야기와 대립한다. 빅데이터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디지털은 프랑스어로 ‘numerique’(‘수적인numerisch’이란 뜻도 있음—옮긴이)이다. 수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 셀 수 있는 것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질서에 속한다.” 접기

P. 94 “감염병 대유행 위기에서 ‘사건번호’나 ‘발병률’ 같은 순수한 수들은 근본 불안을 고조시킨다. 왜냐하면 순수한 수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낱 숫자 세기는 이야기를 향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감염병 대유행 위기는 음모론의 온상이다. 음모론은 총체적 설명 혹은 총체적 거짓말로 견디기 힘든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단번에 제거한다.” 접기

P. 13 규율적 파놉티콘의 효과는 수감자들이 항상 관찰당한다고 느끼는 것에 있다. 그들은 감시를 내면화한다. 규율 권력에게는 ˝의식적이며 영속적인 가시 상태를 창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 마늘빵

P. 14 디지털 정보 기술은 소통을 감시로 돌변시킨다. 우리가 더 많은 데이터를 산출할수록, 더 강렬하게 소통할수록, 감시는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 휴대전화는 감시장치이자 예속장치로서 자유와 소통을 착취한다. 더 나아가 정보체제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감시당하고 있지 않으며 자유롭다고 느낀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자유의 느낌이 지배를 확고히 한다. 이런 점에서 정보체제는 규율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유와 감시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지배는 완성된다. 접기 - 마늘빵

P. 17 정보 체제의 지배는 일상과 완전히 융합함으로써 자신을 은폐한다. 그 지배는 소셜미디어의 유쾌함과 검색엔진의 편리함, 음성 지원 장치의 편안한 목소리, 스마트앱들의 눈치 빠른 친절함 뒤에 숨는다. 스마트폰은 알고 보면 효과적인 정보원이다. - 마늘빵

P. 52 담론은 자신의 견해와 자신의 정체성을 분리하는 것을 전제한다. 이 담론적 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투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고수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정체성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그들은 그들 고유의 신념으로부터 떼어내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누구의 말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도무지 경청하지 않는다. 그러나 담론은 경청의 실행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일차적으로 경청의 위기다. 접기 - 마늘빵

[1]

“(올더스) 헉슬리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통제한다. 요컨대 오웰은 우리가 몹시 싫어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몹시 좋아하는 것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 (한병철, 《정보의 지배》, 33면에서 재인용) 접기 - 초란공

[2]

“멋진 신세계는 진통사회다. 거기에서 고통은 기피된다. 강렬한 감정들도 억압된다. 모든 바람, 모든 욕구는 곧바로 충족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재미, 소비, 즐거움에 휩싸여 몽롱해진다. 행복을 향한 강박이 삶을 지배한다. 국가는 주민들의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 ‘소마soma‘라는 약을 나눠준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는 텔레스크린 대신에 ’감각영화관‘이 있다. 그 영화관은 ‘향기 오르간’ 등을 써서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마비시킨다.”(같은 책, 33면) 접기 - 초란공

P. 19 그렇게 팔로워는 디지털 성찬식에 참여한다. 소셜미디어는 교회와 같다. 좋아요는 아멘이다.

공유는 성찬식이다. 소비는 구원이다. 인플루언서들의 드라마 작법인 반복은 따분함과 루틴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은 전체에 예배의 성격을 부여한다. 동시에 인플루언서들은 소비상품을 자기실현의 도구로 느껴지게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도록 실현하면서 죽도록 소비한다. 소비와 정체성이 하나로 합쳐진다.

정체성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된다. 접기 - 자도

P. 35 인포크라시에 대한 정보체제하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다루는 현상학이 반드시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미 인지수준에서 시작된다. 정보는 현재성을 띠는 기간이 아주짧다. 정보는 시간적 안정성이 없다. 왜냐하면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적 불안정성 때문에 정보는 지각을 파편화한다. 정보는실재를 ˝영원한 현재성의 현기증 ˝속으로 처넣는다. 정보 곁에 하염없이 머무르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보는인지 시스템을 동요시킨다. 정보에 내재하는 가속 강박은 앎, 경험, 깨달음 같은 시간 집약적 인지 실행들을 몰아낸다. 접기 - 자도

P. 70 따라서 루소는 정당과 정치단체의 구성도 금지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차이들을 자신에게 이롭도록 제거하기 때문이다. 모든 각자는 담론에 참여하는 대신 자신의 고유한 확신을, 개인적 견해를 고수해야한다. ˝차이들은 개수가 줄어들며 덜 일반적인 결과를 초 - 자도

P. 71 래한다. 결국 이 통일된 차이들 중 하나가 너무 커서 다른 모든 차이보다 우월하면, 결과는 더 이상 작은 차이들의 합이 아니고 대신에 단 하나의 차이가 된다. 이 경우에 일반의지는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승리하는 견해는단지 개별 견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의지가 명확히 표명되게 하려면, 국가 안에 특수한 집단들이 되도록 존재하지 않고 모든 각각의 시민이 단지 자신의 고유한 확신만 옹호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루소의 주장을 데이터주의자들의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다양한 데이터가 더 많이 확보되어 있을수록,

알아낸 일반의지는 더 진실하다. 반면에 담론은 결과를왜곡한다. 이처럼 루소는 최초의 데이터주의자다. 담론과소통을 완전히 포기하는 루소의 산술적 합리성은 디지털합리성과 유사하다. 루소가 말한 통계학자들은 정보체제에서 정보학자들로 대체된다. 빅데이터를 입력하면 인공지능은 일반의지를, 곧 사회의 ˝일반적 최선˝을 계산해내야 한다. 접기 - 자도

P. 72 행동주의자로서 데이터주의자는 개인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전지는 개인의 자유를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만든다. ˝자율적인간의 폐기는 오래전부터 진작 했어야 할 일이었다. ‘자율적 인간‘은 우리가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설명할때 이용하는 수단이다. - 자도

P. 80 진실은 다양한 타당성 주장들이 모두에 맞선 모두의 전쟁으로, 사회의 전면적 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다. - 자도

P. 94 따라서 서사의 위기는 뜻의 공허, 정체성 위기, 방향 상실로 이어진다. 이때 음모론이 미세서사 micronarrative로서 보상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정체성과 뜻의 자원으로 음모론을움켜쥔다. 이런 연유로 음모론은 특히 우파 진영에서 확산된다. 우파 진영은 정체성 욕구가 특히 강하기 때문이다. - 자도

P. 100 우리는 오늘날 디지털동굴안에 갇혔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디지털 화면에 사슬로 매여있다. 플라톤의 동굴에 갇힌 수인들은신화적 서사적 그림들에 도취한다. 반면에 디지털 동굴은우리를 정보 안에 가둬놓는다. 진실의 빛은 완전히 꺼졌다.

정보 동굴의 바깥은 아예 없다. 강렬한 정보 도취가 존재의윤곽을 흐릿하게 만든다. 진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접기 – 자도

 

 

 

한병철, 2023, 『서사의 위기』, 최지수 옮김, 다산초당(다산북스). 2023-09-15

 

목차

역자 서문

 

이야기에서 정보로

경험의 빈곤

설명되는 삶

벌거벗은 삶

세계의 탈신비화

충격에서 ‘좋아요’로

이야기로서의 이론

치유의 스토리텔링

이야기 공동체

스토리셀링

 

 

 

책 속에서

P. 7 스토리는 서사가 아니다. 스토리, 즉 정보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반면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다. 나의 저 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띤다. 곧 사라져 버릴 정보에 휩쓸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다._역자 서문

P. 13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를 창간한 이폴리트 드 빌메상(Hippolyte de Villemessant)은 정보의 본질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우리 독자들은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혁명보다 파리 라틴 숙소에서 일어난 지붕 화재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를 더욱 구체화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멀리서 오는 지식이 아닌,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의 단서를 제공하는 정보만이 공감을 얻는다.” 신문 독자들의 관심은 코앞에 놓인 것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호기심거리로 축소된다. 근대의 신문 독자들은 시선을 멀리 두고 머무르는 대신, 하나의 뉴스거리에서 다른 뉴스거리로 관심을 이동시킬 뿐이다._「이야기에서 정보로」

P. 46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플랫폼의 ‘스토리’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어떠한 서사적 길이도 보이지 않는다. 일련의 순간 포착일 뿐이며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들은 빠르게 사라지는 시각적 정보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의 광고 슬로건은 이렇다. “일상의 소중한 순간을 스토리로 올려보세요. 스토리는 보통 재미있고 가벼운 내용을 담고 있으며 24시간 동안만 지속됩니다.” 시간제한은 특별한 심리적 효과를 일으킨다. 수시로 변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해 더 많은 소통을 향한 미묘한 강박을 만든다._「설명되는 삶」 # 인스타그램의 광고 슬로건의 정의가 ‘이야기/스토리’의 내연을 규정할 수 없다.

P. 64~65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음,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한다. 소통 소음과 정보 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위기는 ‘사느냐, 이야기하느냐’가 아닌 ‘사느냐, 게시하느냐’가 된 데 있다. 셀카 중독마저도 나르시시즘 때문이 아니다.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에게는 안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의미 제공이 결여되어 있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한 ‘나’는 스스로를 영구히 생산해 낸다. 셀카는 텅 빈 자기의 복제다._「벌거벗은 삶」

65: 정보사회와 투명사회에서 벌거벗음은 외설로 확대된다. 그러나 우리는 억압된 것, 금지된 것 또는 은폐된 것의 뜨거운 외설이 아닌 투명성, 정보, 소통의 차가운 외설을 논해야 한다. … 포르노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동안 포르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P. 114 프로이트도 고통을 개인의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막힘을 드러내는 증상으로 이해했다. 막힘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다. 심리적 장애는 막혀버린 이야기의 표출이다. 치유는 환자들을 이야기의 막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환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치유된다._「치유의 스토리텔링」

P. 126 이야기는 사회적 응집성을 만든다. 이야기는 의미를 제공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치를 전달한다. 이들은 체제를 만드는 서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초가 되는 서사는 공동체 형성 자체를 방해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 서사는 모든 사람을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게 한다. 모두가 다른 사람과의 경쟁 속에 존재한다. 성과 서사는 사회적 응집성, 즉 우리를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연대뿐 아니라 공감까지 해체한다. 자기 최적화, 자기실현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서사 또는 진정성은 사람들을 고립시킴으로써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에 대한 숭배를 좋아하고 스스로가 지도자인 곳, 모두가 스스로를 생산하고 스스로를 공연하는 곳에는 안정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_「이야기 공동체」

P. 136~137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animal narrans)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텔링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_「스토리셀링」

P. 59 이야기한다면 삶을 순전한 현사실성 위로, 즉 적나라한 상태 너머로 고양시킬 수 있다. 이야기는 시간에 유의미한 과정, 즉 시작과 끝을 부여함으로써 형성된다._ 벌거벗은 삶 중 - mailbird

P. 64 오늘날의 위기는 ‘사느냐, 이야기하느냐’가 아닌 ‘사느냐, 게시하느냐’가 된 데 있다. 셀카 중독마저도 나르시시즘 때문이 아니다.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에게는 안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의미 제공이 결여되어 있다._ 벌거벗은 삶 중 - mailbird

P. 79 발터 벤야민에게 어린이는 신비로운 세계의 마지막 시민이다. 어린이에게는 단지 눈앞에 존재하기만 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의미심장하고 매우 의미 있다. 마법적인 친밀성이 이들을 세계와 연결해 준다._ 세계의 탈신비화 중 - mailbird

P. 80 “무지의 기억으로부터 나오는 이미지의 특징이 아우라를 가진다고 볼 때 사진은 ‘아우라의 쇠락’ 현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_ 세계의 탈신비화 중 - mailbird

P. 85 이야기는 빛과 그림자,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가까운 것과 먼 것의 유희다. 투명성은 모든 이야기에 근거하는 이러한 변증법적 긴장을 없애버린다. 세계의 디지털적 탈신비화는 기존 막스 베버MaxWeber가 과학을 통한 이성화로 일으킨 과학적 탈신비화를 훨씬 넘어선다. 지금의 탈신비화는 세계의 정보화로 인한 것이다. 투명성이 오늘날의 탈신비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공식이다. 투명성은 세계를 데이터와 정보로 해체함으로써 탈신비화한다._ 세계의 탈신비화 중 접기 - mailbird

P. 98 보들레르처럼,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예술가형은 오늘날엔 시대에 뒤처질 뿐 아니라 거의 그로테스크하다고 여겨진다. 제프 쿤스Jeff Koons는 현대에 알맞은 예술가형이다. 그는 스마트한 예술가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들은 충격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매끄러운 소비 세계를 반영한다. 그가 관찰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와우‘다._ 충격에서 ‘좋아요’로 중 접기 - mailbird

P. 108 니체가 말한 모든 가치에 대한 가치전도는 모험과 향연으로서의 이야기, 즉 탐험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미래를 열어준다._ 이야기로서의 이론 중 - mailbird

P. 118 경청에서 중요한 것은 전달되는 내용이 아니라사람, 즉 타자가 누구인가다. 모모는 자신의 깊고 다정한 시선을 통해 타자를 그 사람의 타자성 안에 그대로 둔다. 이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닌 능동적인 행위다. 경청은 상대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이야기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소중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 사랑받는다고까지 느끼는 공명의 공간을 연다._ 치유의 스토리텔링 중 - mailbird

P. 121 실제로는 자기 묘사에 다름이 없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스토리‘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고립시키고 있다.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공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 주목을 두고벌이는 경쟁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 시대에 이야기와 광고는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서사의 위기다._ 치유늬 스토리텔링 중 - mailbird

P. 125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과도하게 소통한다. 우리는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건다. 집단적 의식 내용을 허용하던 이전의 ‘의례적인 관조‘는 소통과 정보의 도취에 자리를 내주었다. 소통 소음은 마을 주민들이 하나의 이야기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뭉치게 해준 ‘노래‘를 완전히 침묵하게 만들었다. 이 소통 없는 공동체는 공동체 없는 소통에 길을 내준다._ 이야기 공동체 중 - mailbird

P. 126 자기 바신에 대한 숭배를 좋아하고 스스로가 지도자인 곳, 모두가 스스로를 생산하고 스스로를 공연하는 곳에는 안정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_ 이야기 공동체 중 - mailbird

P. 134 스토리를 판다는 것은 결국 감정을 판다는 말과 같다. 감정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신체의 본능 층위에서 행동을 제어하는 대뇌변연계에 그 시스템을 두고 있다. 감정은 이성을 거치지 않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_ 스토리셀링 중 - mailbird

이야기에는 경이롭고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있다. 이들은 은밀한 것에 반대되는 정보와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설명과 이야기는 상호 배타적이다.

˝매일 아침이 세상 만물의 새로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부족하다. 왜일까? 설명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일은 더이상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이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 파랑을꿈꾸며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는 ‘모든 걸 내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 힘을 내면에 모은 채 보전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정보는 완전히 다른 시간성을 보인다.

정보는 좁은 최신성의 폭 때문에 매우 빠르게 소진된다. 정보는 오로지 찰나의 순간에만 작동한다. 영구한 발아력을 지닌 씨앗이 아닌, 티끌이나 다름없다. 정보에는 발아력이 결여되어 있다. 한번 인식되고 나면, 이미 확인을 마친 부재중 메시지처럼 무의미성 속으로 침잠한다. - 파랑을꿈꾸며

이야기를 할 때는 이완의 상태가 필요하다. 벤야민은 정신적 이완의 절정을 위해 지루함을 강화한다. 이 지루함은 ‘경험의 알을 부화시키는 꿈의 새‘

로 ‘꿈꿀 때 몸을 휘감는, 안쪽은 작열하듯 화려한 비단 안감이 둘러쳐진 따뜻한 회색의 천‘이다.˝ 그러나 신문이라는 종이의 숲에서 나는 바스락대는 정보소 Informationslarm은 꿈의 새를 쫓아낸다. 이 숲에서는 ‘더 이상 이야기의 짜임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정보만이 자극의 형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 - 파랑을꿈꾸며

스토리텔링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탈진한 후기 근대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가 강조된 ‘초심자의 기분‘이 낯설다. 후기 근대인은 어떤 것도 ‘신봉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히 편히 쉴 곳만 찾는다. 어떠한 서사도 필요로 하지 않는 편리함 또는 좋아요에 예속된다. 후기 근대에는 어떠한 갈망도, 비전도, 먼 것도 빠져 있다. 따라서 후기 근대는 아우라가 없는 상태, 즉 미래가 없는 상태다. - 파랑을꿈꾸며

포노 사피엔스는 ‘연속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 실제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순간에 예속된다. 포노 사피엔스에게는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삶의 폭을 감싸고 자기의 역설로 그 폭을 채우는 ‘전체존재의 신장성‘이 낯설다. 포노 사피엔스는 이야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의 셀카는 죽음의 부재를 드러낸다. 관 옆에서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는다. 죽음마저도 ‘좋아요‘를 유도한다. 포노사피엔스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호모 사피엔스를 뒤에 버려둔 채 앞으로 나아간다. - 파랑을꿈꾸며

「당신의 모든 순간The Entire History of You」은 드라마 <블랙 미러〉 시리즈의 첫 번째 시즌, 세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이다. 여기 나오는 투명사회에서 모든사람은 귀 뒤에 그 사람이 보고 체험한 모든 것을 그대로, 그리고 빠짐없이 저장하는 이식 장치를 장착하고 있다. 이렇게 경험한 모든 것과 인식한 모든 것이 눈과 외부 모니터로 빠짐없이 재생된다. 공항 보안 검색대에서는 특정 시간대에 일어난 사건을 재생해서 보여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더 이상 비밀은 없다. 범죄자들은 자신의 범죄 행위를 숨길 수 없다.

인간은 기록 안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다. 경험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재생할 수 있다면 엄밀히 말해 더이상 기억은 불가능하다. - 파랑을꿈꾸며

정보사회와 투명사회에서 벌거벗음은 외설로 확대된다. 그러나 우리는 억압된 것, 금지된 것 또는 은폐된 것의 뜨거운 외설이 아닌 투명성, 정보, 소통의 차가운 외설을 논해야 한다. ˝더 이상 비밀이 아닌 것, 완전히 정보와 소통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의 외설을 말하는 것이다.˝4˝ 정보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이다. 사물을 감싸는 껍질, 베일만이 설득적이고 서사적이다. 껍질 벗기기나 베일로 감싸기는 본질적으로 이야기에 필수적이다. 포르노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동안 포르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 파랑을꿈꾸며

시간은 갈수록 원자화된다. 반대로 이야기는 연결을 의미한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이야기하는 사람은 삶에 몰입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사건들을 잇는 새로운 실을 뽑아낸다. 그럼으로써 고립되지 않은 관계들로 이루어진 조밀한 망을 형성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유의미해 보인다. 이 서사 덕분에 우리는 삶의 우연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 파랑을꿈꾸며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를 창간한 이폴리트드 빌메상Hippolyte de Villemessant은 정보의 본질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우리 독자들은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혁명보다 파리 라틴 숙소에서 일어난 지붕 화재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를 더욱 구체화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멀리서 오는 지식이 아닌,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의 단서를 제공하는 정보만이 공감을 얻는다.˝ 신문 독자들의 관심은 코앞에 놓인 것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호기심거리로 축소된다. 근대의 신문 독자들은 시선을 멀리 두고 머무르는 대신, 하나의 뉴스거리에서 다른 뉴스거리로 관심을 이동시킬 뿐이다. 길고 느리게 머무르는 시선은 - gaudium

정보는 인식의 순간 이후 더는 살아 있지 못한다. ˝정보는 그것이 새로운 동안에만 가치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만 살아 있다. 오로지 순간의 시점에 사로잡히며 정보 그 자체에 대해 설명할 시간은 없다. - gaudium

정보와 달리 지식은 그 순간을 넘어서 앞으로 다가올 것과도 연결되는 시간적 폭이 있다. 그래서 지식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지식 안에는 서사적 진폭이 내재해 있다.

정보는 새로운 것을 찾아 세상을 샅샅이 뒤지는 리포터의 매체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반대의 일을 한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정보를 전달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이야기하기의 예술은 정보를 내주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설명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 이미 이야기하기 예술의 절반을 완성한다.˝ 내주지 않는 정보, 즉 빠져 있는 설명이 서사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 gaudium

이야기에는 경이롭고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있다. 이들은 은밀한 것에 반대되는 정보와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설명과 이야기는 상호 배타적이다.

˝매일 아침이 세상 만물의 새로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기억할 만한 이야기가 부족하다. 왜일까? 설명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일은 더이상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이 이야기가 아니라 정보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 gaudium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는 ‘모든 걸 내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 힘을 내면에 모은 채 보전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정보는 완전히 다른 시간성을 보인다.

정보는 좁은 최신성의 폭 때문에 매우 빠르게 소진된다. 정보는 오로지 찰나의 순간에만 작동한다. 영구한 발아력을 지닌 씨앗이 아닌, 티끌이나 다름없다. 정보에는 발아력이 결여되어 있다. 한번 인식되고 나면, 이미 확인을 마친 부재중 메시지처럼 무의미성 속으로 침잠한다. - gaudium

전체 삶의 기록화에서 아무것도 탈락되어서는 안 된다. 이때는 아무것도 이야기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그저 측정될 뿐이다.

센서와 앱은 언어적 표현과 서사적 성찰 없이 자동으로 데이터를 전송한다. 수집된 데이터는 그래픽과 다이어그램으로 보기 좋게 요약된다. 그러나 이들은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자기는 양이 아닌 질이기 때문이다. ‘숫자를 통한 자기 이해‘는 신화 속 키마이라와 같다. 이야기만이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나 자신이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숫자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수치적서사‘라는 표현은 모순이다. 삶은 정량화가 가능한 사건들로는 이야기될 수 없다. - gaudium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animal narrans 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 gaudium

P. 16 근대의 서사적 위기는 세상이 정보로 과포화되는 데 원인이 있다. - 눈우

P. 137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 눈우

P. 136 이제 정치인들도 이야기가 팔린다는 걸 알고 있다. 주의를 끌기 위한 싸움에서 서사가 주장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렇게 서사는 정치적으로 도구화된다. 지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한다. 스토리텔링은 정치적 소통의 효과적인 기술로서, 미래까지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에게 의미와 방향성을 보여주는 예의 정치적 비전이 결코 아니다. 정치적 이야기는 사물의 새로운 질서를 약속하고 가능한 세계의모습을 상세히 묘사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희망을 만드는 미래 서사가 부족하다. 우리는 줄타기를 하며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넘어간다. 정치의 역할은 문제 해결사로 축소된다. 이야기만이 미래를 연다. – 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