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김희교의 『짱깨주의의 탄생』을 읽고

ycsj 2023. 4. 20. 10:05

짱깨주의의 탄생은 한국인의 혐중 정서를 짱깨주의라고 개념화해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한 중국() 혐오 흐름을 면밀하게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 대중의 큰 호응을 받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짱깨주인장을 뜻하는 중국어 짱궤이(掌櫃)’에서 온 말이다. 선생을 敎書的()’ 책을 가르치는 사람이라 하는 것처럼, 주인장을 掌櫃的()’ 계산대를 장악한 사람이라 하고, 줄여서 掌櫃(zhabggui)’라 한다.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장구이라고 표기하지만, 속어적 표현인 만큼 경음화를 거쳐 짱꾸이, 짱꾸에이, 짱꿰 등으로 표기되었고, 이것이 적당한 변화과정을 거쳐 짱깨라고 표기된 듯하다. 이렇게 안착한 짱깨는 중국()을 혐오하는 비칭(卑稱)이 되었다. 김희교는 여기에 주의를 덧붙여 짱깨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짱깨주의의 탄생은 많은 장점이 있고 그 가운데 두드러진 덕목은 가독성(可讀性. readability)이다. 전문적인 내용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때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 전달함으로써 가독성을 높이고 있다. 두 번째로 꼽을 덕목은 한국의 중국() 혐오 정서의 형성과정을 단계별동북공정, 사드 배치, 우한 폐렴로 밝히고 그 주체가 친일 지식인, 친미반공주의자,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보수주의 세력임을 밝힌 점이다.

인기도서 목록에 오른 만큼, 그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홍명교(2022)는 국내 언론들의 잘못된 보도와 언론 베끼기 등을 음모론적으로만 인식해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놓치고 있는 점, “‘미 제국주의보다 중국이 낫다라는 가설을 입증하겠다는 반대급부가 한쪽 눈을 가리고, 변화된 중국의 모순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라는 점, 신장위구르자치구 인권 문제에 대해, “미국의 공작에 의한 근거 없는 낭설로 손쉽게 치부하고, 위구르족과 카자흐족 시민들을 도맷금으로 분리주의자로 취급하지만, “현장 연구를 거쳐 <인 더 캠프>(In the camps)를 저술한 인류학자 대런 바일러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구금시설 300여곳에 150만명에 이르는 위구르족, 카자흐족, 후이족 사람들을 배치했다라고 하면서, 김희교의 주장이 놓친 부분을 예리하게 보완하고 있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김희교는 모든 문제를 중국 문제로 돌리는 중국이 문제라는 프레임을 비판하다 보니 중국 당국 자본주의(party-state capitalism)의 문제점을 놓치고 있다.

또한 강준만(2022)한국인의 근본적인 인식의 틀까지 바꾸려는 학문적 야심을 드러낸 최대주의보다는 확인된 사실 위주로만 툭툭 던져주는 최소주의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는 방식을 권유하고 있다. 나아가 양국의 정치 제도와 역사 해석의 차이에 대해, 일국의 제도와 해석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말고, 양국의 학계와 언론계가 협력해 사실확인센터를 만들어 공감대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하면서 특히 인권 문제를 꼬집었다.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대의제와 중국의 권위주의적 당국(黨國, party-state) 제의 정치 제도가 다른 만큼, 그리고 한국전쟁과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는 명명의 차이가 보여주듯이, 중국 최고의 흥행작 <장진호>(2021)이 한국에서 개봉하지 못한 것은 역사 해석의 차이를 극명하게 말해준다. 강준만의 사실확인센터 제안에 동의하면서 한 가지 신중히 접근해야 할 문제가 있다. 흔히 제3세계 개발도상국이 겪기 마련이라는 권위주의적 눈물의 계곡’(슬라보예 지젝)을 한국이 이미 통과했다는 이유로, 그 계곡을 건너고 있는 중국을 무조건 비난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이 권위주의적 눈물의 계곡을 건너는 데 최소한 40여 년(19451987)이 걸렸고 지금도 새로운 권위주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면 중국은 얼마나 걸릴지 기다려주는 것도 참된 이웃의 도리가 아닐까? 물론 중국의 인권 등의 문제에 눈감자는 것이 아니라 역지사지하며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김희교가 한국의 중국 담론을 보는 기본 관점은 프레임론이다. 그에 따르면, 짱깨주의는 중국()을 혐오하는 인식체계이자 이데올로기이고, 그것을 한국사회의 중국 인식을 대표하는 프레임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가 설정한 프레임은 내재적 프레임과 외재적 프레임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유사인종주의, 신식민체제, 자본의 문제를 중국의 문제로 돌리는 프레임, 신냉전체제가 있고, 후자에는 안보적 보수주의의 중국이 문제다라는 프레임과 진보적 중국연구자의 사회주의 중국프레임이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 중국프레임은 결국 중국이 문제프레임에 귀속되고 만다. 바꿔 말하면, 현재 한국의 지식 지정학적 조건, 즉 식민 시대부터 안보적 보수주의자들이 주도해 대중의 혐중 프레임을 조성해오고 심지어 진보 담론조차 그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적극적 짱깨주의자중국을 함부로 말하는 사람와 무의식적 짱깨주의자진보적 중국연구자를 비판하는 것이 김희교의 주요 목표다.

우리는 김희교의 중국 인식의 기본 프레임이 중국식 사회주의의 옹호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을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한 것에 빗대어, ‘중국 특색의 자본주의라는 해석도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중국 특색의 신자유주의라 하고, 앨빈 소(Alvin Y. So)는 중국이 동아시아 발전 모델에 가까운 국가 발전주의로 이행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장쥔(ZHANG Jun)의 경우, ‘얼룩덜룩한 자본주의(variegated capitalism)’라고 하여 현재의 중국이 복잡하고 혼종된 발전 유형을 가지고 있는 사회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왕샤오밍(王曉明)은 개혁개방 이래 중국 사회의 기본 성격을 당국 자본주의(party-state capitalism)’라고 규정한다. 그가 보기에 당국 자본주의당국체제(party-state system)’자본주의로 구성되는데, 첫 단계인 덩샤오핑 시기에는 양자가 합작, 심지어 융합 관계를 이루었지만, 두 번째 단계인 시진핑 시기에는 신노선을 추진하면서 당국체제의 핵심인 집권당 관료 집단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 특히 민영기업가를 일대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서 당국체제자본주의에 대한 통제의 고삐를 죄기 시작한다.” 그는 덩샤오핑 시기의 기본 노선이 서유럽과의 합작을 통한 당국 자본주의의 순항이었다면 시진핑 시기의 신노선은 정치적인 상호 대립과 경제적으로 수동적인 디커플링’, 심지어 군사적으로 잠재적인 충돌이 미중 또는 당국-서구관계의 주요 부분을 구성했다라고 진단했다. 김희교는 중국식 사회주의 옹호프레임에 갇혀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급변을 소홀히 다루고 있다. 이를테면 김희교는 토지를 사유화하지 않는 사회주의적 토대를 거론하며 중국은 여전히 강력한 사회주의 정책을 수행해 나갈 동력을 확보하고 있다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우리는 삼농(三農) 문제, 보이지 않는 농촌 중국 공화국의 문제 등 그 부작용 사례를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김희교가 동북공정이나 사드 배치에 대해 아무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을 바로잡는 것은 박수 칠 일이지만, 좌파 관점에서 볼 때 문제가 많은 중국 당국체제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옹호하는 것은 찬성하기 어렵다. 중국 당국체제는 이미 대륙형 제국주의를 내면화하여 티베트(西藏)와 신장(新疆)위구르 등에서 스스로 제국주의 정책을 펴고 있고 톈안먼 광장에서 자국 인민을 학살하기도 했으며 타이완에 대해 제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하려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짱깨주의의 탄생의 부제 누구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국의 서술 맥락은 누구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짱깨주의라 치부하고 저자가 공부해온 중국을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국으로 설정했다. 김희교가 말하는 중국을 개괄해보면, “불과 몇십 년 만에 G2로 올라선 정부이며 그만큼 효율성을 지닌 국가시스템이 작동하는 중국으로, 현재 중국 당국(黨國)은 별다른 하자 없이 14억 인구와 국토를 통치하고 있는 셈이다. 과연 그럴까? 그가 칭찬하는 정부의 국가시스템이 톈안먼 학살 사건을 주도하고 장기간 농촌과 신장 등을 내부 식민지로 삼아 중국몽과 중화 내셔널리즘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는 그런 중국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한국의 지식 지정학상황을 고려해 알고도 말하지 않는 것일까? 중국 정부의 크리스마스 행사 제재 여부를 확인하려고 베이징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던 김희교가 정작 수많은 학자가 거론했던 삼농(三農) 문제와 소수 에스닉 문제를 말하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보고도 말하지 않는 것일까?

김희교는 진보 진영이란 용어를 성찰 없이 쓰고 있다.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을 무엇으로 설정하는가에 따라 진보의 내연은 달라진다. 우리는 한국에서 진보의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수많은 진보 운동이 있었고 이합집산도 있었다. 419518을 거쳐 1987년 민주화운동과 2017년 촛불혁명을 겪은 지금 우리는 21세기에 진보의 존재 여부와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그것은 누가 추궁하고 있는가? 과연 김희교는 그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필자가 보기에, 과거 진보를 자처했던 지식인들이 한결같이 범했던 실책은 나 혼자만 옳다라는 유아독시(唯我獨是)적 태도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당신 생각은 어떠한가?’라는 개방적 태도를 가진 진보적 지식인은 찾기 어려웠다. 간혹 그런 사람이 없지 않았지만 현실 운동에서 그런 사람의 견해가 채택되기는 어려웠다. 현실 운동은 항상 흑백논리의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김희교는 2019년 조국 수호와 검찰 개혁을 외친 사람을 진보 진영으로, 검찰 수호와 탄핵 무효를 외친 사람을 보수진영으로 나눴는데, 내가 보기에는 전자를 신자유주의 좌파, 후자를 신자유주의 우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대한민국에 진보 진영이라 일컬을 만한 그룹은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김희교가 진보 진영의 중국연구자로 일컬은 이들백영서, 백승욱, 백원담, 이희옥, 박민희, 장정아, 이재현 등의 학문 경향도 하나로 묶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이들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좌파와 하나로 묶을 수는 없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이들도 지향하는 노선이 다르다. 이렇게 복잡한 스펙트럼을 가진 연구자들을 느슨한 진보라는 개념으로 묶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나는 김희교가 거론한 진보 진영의 학자를 비판적 중국연구자라고 명명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참고로 진보 진영의 중국 담론을 비판한 김희교의 주장은 실용주의적 중국 담론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