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의 역정』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면, 『화하미학』은 미학 사상의
논리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의 논리화는 역사적인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중국 미학의 역사와 더불어 자신의 논리를 구축하고 있다.
화하(華夏)미학은 유가 사상을 주체로 하는 중국의 전통 미학을 가리킨다.
유가는 오랫동안 깊고 넓은 사회적·역사적 기반을 다져 왔으며, 끊임없
이 다양한 학파의 주장을 흡수하고 동화하여 자신을 풍부하게 발전시킴
으로써 중국 문화의 주류와 기본을 이루었다(리. 쩌허우 2016, 4)
이것이 중국 전통 미학 사상을 바라보는 리쩌허우의 기본 입장이다.
유가 미학은 비(非)디오니소스적 ‘예악’ 전통을 역사적 근원으로 삼고,
‘호연지기’와 ‘천인합일’을 기본 특징으로 삼고 있다.
화하미학의 핵심인 유가 미학의 장점은 체계적 피드백 구조로 다양
한 사조와 문화, 체계를 흡수하고 동화함으로써 자신을 개혁하고 발전
시킨 점이다. 그것은 위로 ‘예악’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도가의 소요
유(逍遙遊) 정신을 수용·보완하고, 굴원(屈原)과 위진 현학(玄學)의 깊은
감정과 성찰을 받아들이며, 선종(禪宗)의 형이상학적 추구를 통해 영원
함과 묘오(妙悟), 운미(韻味)와 충담(沖淡)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나
아가 명대 중엽 이후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성령(性靈)을 각성하고 서
양 미학을 받아들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
펴보자.
『화하미학』(1994a)의 목차를 보면, ‘제1장 예악 전통’부터 ‘제6장 근
대를 향하여’까지 종적 구조를 가지면서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단순
한 시간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전구조로 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전구조란 ‘제1장 예악 전통’이 ‘제2장 공문(孔
門) 인학’에 적전되고, 다시 제1장과 제2장의 주요 내용이 ‘제3장 유가
와 도가의 상호 보완’에 적전되는 구조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공문’은
‘유가’와 차이가 있다. ‘공문’이 공자에서 시원하고 맹자와 순자가 발전
시킨 ‘원시 유가’를 가리킨다면, ‘유가’는 한대 이후 선진 제자백가 사
상과 한대 유행한 음양오행 사상이 적전된 사상 체계를 가리키는 것이
다. 이처럼 중국 미학은 선진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지속적으로 적전되
었다는 것이 리쩌허우의 판단이다.
‘예’(禮)와 ‘악’(樂)은 “원시 시대의 토템 가무와 무술 의례가 더한층
정비되고 분화”(리쩌허우 2016, 29)된 것으로, 주공(周公)이 그 중심적인
제정자이고 공자는 확고한 옹호자이며, “유가는 바로 이 역사적 전통
의 계승자이며 유지자이며 해설자다”(리쩌허우, 31). 이렇게 볼 때 공자
는 원시 시대의 토템 가무와 무술 의례를 제도화한 예악 전통을 유가
에 접목한 인물이다. 공자는 예악 전통에 인학(仁學)이라는 자각 의식
을 부여하고, 현실 인생에 집착한 실용이성을 주장함으로써, 동시대의
정치적 교화와 윤리, 인간관계의 조정, 사회질서의 구축에 직접 공헌하
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뒤를 이은 맹자와 순자의 두 흐름은 약간의
차별점이 있었다. “맹자가 선험적 도덕으로써 인간의 감성을 주재하고
통괄하여 ‘인성(사회적 이성)이 선하다’라고 주장했다면, 순자는 현실적
질서와 규범으로 인간의 감성을 개조하여 ‘인성(생물적인 자연 감성)이
악하다’라고 주장했다.”(李澤厚 1994a, 271) 그러나 맹자와 순자의 주장
이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어떻게 개인의 감성이 사회적 이성에 적
전할 것인가 하는 공문(孔門) 인학의 공통 명제로 귀결된다”(李澤厚, 272)
라는 점에서 상통하고 있다.
‘유학 4기설’의 유학과 마찬가지로, “유가 미학은 중국 미학의 기
초이자 주류로, 심후한 전통 연원과 심층적인 철학 관념을 가지고 있
고, 그 체계론의 피드백 구조는 또한 각종 사조와 문화 그리고 체계를
흡수하고 동화하여, 자신을 혁신하고 발전시키는 데 뛰어났다”(앞의
책, 281). 『화하미학』 제3장에서 리쩌허우는 유가 미학과 도가・초사(楚
辭)・선종이 어떻게 충돌하는 가운데 융합되었는지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 리쩌허우는 우선 유가와 도가가 “비(非)디오니소스적인 원시적
전통에 근원한다”(리쩌허우 2016, 149)라는 사실을 지적한 후 양자의 관
계가 ‘대립적 보완’임을 밝힌다. “도가와 장자는 ‘인간의 자연화’라는
명제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예악’ 전통과 유가의 인학이 강조하는 ‘자
연의 인간화’와 바로 대립하면서도 보완한다”(리쩌허우, 151)라는 것이
다. 총체적으로 보면, 장자는 유가에 흡수되어 심미적 측면에서 사용되
었다. 장자는 유가의 미학이 인생과 자연과 예술에 대해 진정한 심미
적 태도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
리쩌허우는 유가와 도가의 상호 융화와 보완에는 정치적인 길과 예
술적인 길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고 설파한다. 먼저 정치적인 길은, “곽
상(郭象) 등을 대표로 삼을 수 있고, 유가 학설로 장자를 주석하고 명교
(名敎)가 바로 자연이라 인식하면서, 장자의 학설에서 소외를 반대하
는 해방 정신과 인격 이상을 제거했다”(李澤厚 1994a, 308). 다음 예술적
인 길은, “도연명(陶淵明)의 시와 산수화・화조화(花鳥畵)다. 그것은 확실
히 ‘안빈낙도’의 세속을 따르는 일면이 있지만, 주로 세속 인간관계에
대한 항의와 초월 그리고 해탈이다”(李澤厚, 308). 도가의 부정적 논단과
세속을 초월한 형상은 현실 생활과 문예・미학에서 유가의 긍정적 명
제와 독립적 인격으로 전환한다. 자연은 생활, 사상과 감정, 인격이라
는 세 방면에서 인간의 최고 이상이 되었으며, 그것들은 ‘인간의 자연
화’가 전면적으로 전개된 것으로서, 유가와 도가의 상호 보완이 구체
적으로 실현된 것이다.(앞의 책, 309)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미학 사상에서 굴원의 역할에 대한 평가다.
대표작 「이소」(離騷)를 읽어 보면 굴원이 유가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음
을 알 수 있는데, 리쩌허우는 국가 관념이 희박했던 전국시대 당시 초
나라에 연연하고 수도가 함락되자 바위를 안고 멱라수(汨羅水)에 투신
한 굴원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굴원은 죽음을 선택한 고양된 인간성과 감정적 태도, 즉 추악한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인생의 이상에 대한 동경으로써, 후대 사람을 감염(感
染)시키고 개발하고 교육했다. 굴원은 죽음을 통해, 삶과 죽음・인생과 생
활에 대한 예악 전통과 유가 인학의 철리적 태도를 전에 없던 깊이 있는
감정의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앞의 책, 328)
훗날 유가 전통의 지배 아래 굴원의 자살을 본받은 지식인은 많지
않았지만, 죽음에 대한 깊은 체득과 감정적 반성으로 실제적 죽음 행
위를 대체했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벚꽃처럼 순간적으로 왕성하게 피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화・국화・소나무・대나무처럼 오랫동안 참
아 내는 것을 이상적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리쩌허우 2016, 248). 이 지
점에서 리쩌허우는 죽고 사는 현상 분석에 그치지 않고, 굴원처럼 죽
음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죽음 앞에서 나온 심후한 ‘현존재’의 감정
그 자체를 높게 평가한다. “굴원과 같은 감정과 절조가 오히려 대대로
중국 지식인의 영혼을 배양했으며, 아울러 항상 생활과 창작의 원동력
이 되었다.”(리쩌허우, 248) 그러므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치욕을
견디면서 『사기』 저술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졌던 사마천의 인생
이나 죽림칠현의 일원이었던 혜강(嵇康)과 완적(阮籍)의 비분과 애상도
“죽음이 임박하여 비로소 최대로 표출될 수 있었던 ‘존재’의 의의를 가
장 잘 드러냈다. 그것들은 죽음에 대한 감정적 사유를 통해 발휘되는
‘존재’의 빛이다”(앞의 책, 249). 이처럼 굴원 정신의 전통은 후대 사대
부 지식인들에게 계승되어 유학 전통의 ‘정감-이성 구조’ 내면에 깊은
생사의 의미를 부여했다. 이렇게 “굴원과 유가・도가는 서로 스며들어
융화하여, 감정을 핵심으로 하는 위진 시대 문예-미학의 기본적 특징
을 형성했다”(앞의 책, 262). 나아가 이 세 갈래 물줄기는 위진 시대에 하
나로 합류(合流)해서 “화하 문예와 미학의 근본적인 심리 특징이자 ‘정
감-이성 기제’를 만들어 냈다”(李澤厚 1994a, 338). 이후 중국 문학사의
대부분 작가는 유가・도가・굴원의 세 요소가 융화하여 이룬 심층적인
정감과 이성의 만남이라는 ‘문화심리구조’를 기반으로 삼아 작품을 창
작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위진 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불교가 유가와 만나는 과정 또한 화하미
학 사상 형성에서 중요하다. “유학을 위주로 하는 중국의 문화 전통이
어떻게 불교에 대응하고 교류했는가의 문제는 수백 년간 이데올로기
의 주요과제가 되었고 다양하고 찬란한 양상을 야기했다. 예술에서 문
학에 이르기까지, 신앙에서 사상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배척하기도 하
고, 흡수하기도 하고, 귀의처로 삼기도 하고, 변조하기도 하고, 장자를
끌어들여 설명하기도 하고, 유교와 서로 겨루기도 했다.”(李澤厚 1994a,
359) 불교 또한 인생 경계(境界)의 추구라는 점에서 유가와 소통했고 유
가는 불교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수용해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다. 선
종(禪宗)이 전자의 예라면, 성리학은 후자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유학
전통은 장자・굴원・현학이라는 단서를 흡수하면서도 새로운 걸음을
내디딘 상황을 계승했다 할 수 있다. 특히 미학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
러하다.”(李澤厚, 359)
리쩌허우는 중국의 전통 의학인 사상(四象)으로 미학 사상을 분류한
바 있다.
유가는 강건함을 미로 여기고 그 속에 부드러움이 있으므로 ‘태양’(太陽)
에 속하고, 도가는 부드러움을 본체로 여기고 그 속에 강함이 있으므로
‘태음’(太陰)에 속하며, 굴원은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으므로 ‘소양’(少
陽)에 속하고, 선(禪)은 겉은 강하지만 속이 부드러우므로 ‘소음’(少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음’은 유가의 웅건하고 강건한 미학 전통과 확
실히 거리가 있다. 선은 본래 인도 불교가 중국 네이션의 문화심리구조에
의해 개조되고 창작된 것이다. (앞의 책, 377)
단, 중국인은 출가해서 중이 되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의식과 문화 영역에도 불교가 그리 많이 반영되지는 않았고, 선은 궁
극적으로 유가와 도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렇게 볼 때, 리쩌허우는
중국의 불교, 즉 선종이 미학 차원에서는 심리로 전환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를 대표하는 시인이 바로 소식(蘇軾)이다. 리쩌허우는 『미의 역
정』에서 소식을 이전 작가들과 대비해 아래와 같이 품평한 바 있다.
여기(소식의 문장 — 인용자)에는 굴원과 완적의 근심과 울분이 없고, 이백
과 두보의 호방함과 성실함도 없으며, 백거이의 명랑함과 다르고 유종원
의 고고함과도 다르며, 한유의 안하무인의 오만한 기세와는 더더욱 다르
다. 소식이 미학에서 추구한 것은, 질박하고 꾸미지 않으며 평담(平淡)하
고 자연스러운 정취와 운미(韻味)였고, 사회를 멀리하고 세상을 꺼리는
인생 이상이자 생활 태도였다. 그는 가식과 조작, 장식과 조탁(彫琢)에 반
대했으며, 이상의 모든 것을 철저한 깨달음의 철리적 수준으로 끌어올렸
다.(앞의 책, 157)
여기에서 리쩌허우는 소식의 작품을 ‘송명 이학이 선종을 흡수한 해
석학적 산물’(앞의 책, 385)로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송명 “이학
자가 순수철학 영역에서 선종과 불학을 경유하여 다시 유학으로 돌아
왔을 때 자신을 최대한 풍부하게 하고 심미로 종교를 대신하는 형이상
학적 본체 경계를 구축”(李澤厚 1994a, 386)한 것과 대체로 비슷하다. 여
기에 리쩌허우는 산수화의 예를 추가한다. 그에 따르면, “송명 이학의
고조기가 대체로 중국에서 산수화가 가장 성했던 시기라는 것이다”(李
澤厚, 386). 철학적 사변과 예술적 취미의 이러한 동보성(同步性)은 경제
발전과 예술발전의 불균등성과 연관해서 고찰해 볼 만한 토픽임이 틀
림없다.
리쩌허우는 『화하미학』의 마지막 장인 ‘제6장 근대를 향하여’의 서
두에서 번영과 쇠락의 순환을 언급한 후, 전통 유학과 문예・미학의 상
황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새로운 뜻을 지니는 사상 경향과 예술 창작은 오히려 언제나 유학의 정통
을 등지거나 심지어 이를 위반하는 방향을 지향했다. 그러나 ‘다투어 벗
어나려는’ 어떤 의향이나 전망을 표현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지
향’일 뿐, 그 자체로 유학의 울타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성숙
하지도 철저하지도 못했다. 특히 이론면에서는 더욱 그러했다.(앞의 책,
388)
명 중엽, 유학의 정통에서 ‘다투어 벗어나려는’ 의향 또는 전망은 바
로 갑작스레 출현한 ‘인간의 욕망’[人欲]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인간
의 욕망은 우선 남녀 간의 성욕으로, 오랜 기간 예술의 주제였다. 그러
나 중국의 예악 전통과 유교적 교양의 영향 아래 “성애(性愛) 자체는 문
예와 심미에서 독자적 지위를 제대로 얻지 못했으며, 특히 개체의 감
성 존재와 서로 깊이 연관된 독립적 지위도 얻지 못했다”(앞의 책, 389).
명 중엽 이래 전에 없던 상공업의 번영과 도시의 소비 발달에 힘입어
사회 풍상(風尙)이 바뀌었고, 성애(性愛)소설이 유행했으며 전통 예속(禮
俗)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삼언’(三言)7과 ‘이박’(二
拍)8이다.
사회 조류의 커다란 변화와 관련해 리쩌허우는 철학, 심미적 취미와
기교 형식의 세 가지를 제기했다. 첫째, 철학에서 말할 때 이러한 새로
운 경향은 왕양명(王陽明) 심학(心學)의 해체 과정에 반영되었다. 이것은
감성적인 것이 인정되고 긍정되며 강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리쩌허
우 2016, 374) 둘째, 동일한 시기에, 서위(徐渭), 탕현조(湯顯祖), 원굉도(袁
宏道)와 같이 이지(李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인물이 시문과 회화
분야에서 개성과 자아를 핵심 또는 특징으로 하는 창작론과 예술론을
각각 발표했다.(리쩌허우, 379) 셋째, 그 시대에 몇몇 작가와 예술가들이
형식이나 기교를 규범화하고 고찰했던 것은 오히려 매우 자각적이라
할 수 있다. 문예-심미의 자체적 규율이나 법칙에 대한 일찍이 없었던
중시와 진지한 추구는 근대로 나아가는 표현이었다.(앞의 책, 395; 李澤厚
1994a, 400)
리쩌허우는 제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양의 이론 프레임으로 중
국 문학 이론을 형이상학론, 결정론, 표현론, 기교론, 심리론, 실용론으
로 분류한 류뤄위(劉若愚)9와, 서예 이론을 사실파, 순조형파, 감정지상
파, 윤리파, 자연파, 선의파로 나눈 슝빙밍(熊秉明)10을 비판하면서, 자신
의 초보적 구상을 아래의 표로 제시하고 있다.
도표 3• 중국 전통 미학 사상의 범주와 연변(演變)
리쩌허우는 위의 표가 인상식의 현상 묘사이자 직관적 태도일 뿐,
근대적 언어분석의 과학성이 결여되어 모범으로 삼기 부족하고 다만
출발점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겸양하지만, 우리는 이 표
를 통해 전통 미학 사상의 몇 가지 범주의 역사 흐름과 상호 구분을 이
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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