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로 여행하는 중국

글로벌 시대, 중국 도시에서 살아가기, 도시의 정체성 : 광저우-상하이-홍콩-선전-상하이

ycsj 2022. 4. 24. 13:56

1. 중국인의 ‘글로벌 이주’

 

큔(Philip A. Kuhn)은 동남아시아에서 유럽 상인들과 중국 상인들이 만난 사건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원정 직후 두 강력한 문명의 상인들이 동남아시아에서 만나 세계무역상의 제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지역의 상업에 오랫동안 참여해왔던 중국 상인들이 근대 세계시장에서 유럽인들과 손을 맞잡게 된 것이다.(밑줄-인용자)

 

그는 두 지역의 상인이 동남아시아에서 만난 것을 세계무역사의 커다란 사건으로 보고 있고, 그것을 근대 세계시장의 형성이라 평하고 있다. 물론 큔의 주장에서 서양 중심주의의 혐의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두 지역 상인들이 만난 것은 대등한 만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쪽은 본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무장 세력이었고, 다른 쪽은 국가의 핍박을 피해 도망 나온 피난민들이었다. 그러므로 양자의 만남은 애초부터 힘의 불균형에 입각해 정복-피정복의 형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동남아시아를 찾은 유럽인들은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새로운 동방 항로를 찾아 나선 세력들이었고 ‘향신료의 파라다이스’였던 동남아시아는 이들 유럽 열강들 간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유린되었다.(정한진 2006) 향신료 교역은 동서 교류 역사의 주요한 부분이었던 셈이다.

큔의 관찰에서 주목할 부분은 ‘중국인의 해외 이주는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연재해, 몽고족의 침입, 명조와 청조의 해금령 등의 국내 상황으로 인해 동남아의 여러 곳에 이주했고, 대개는 중국과 현지의 교역 중개에 종사했다. 명 영락제(永樂帝) 때 진행된 정화(鄭和)의 대항해(1405-1433)는 중국인 해외 이주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서 또 다른 관찰을 살펴보자.

 

유럽인들이 아시아의 바다로 처음 항진할 때, 그들은 정복자의 심성을 가지고 무력을 동반하여 강압적으로 교역을 할 생각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자신들이 어리석고 서투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한 거미줄처럼 엮인 중국인들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보지 못했다. 그들이 발견한, 혹은 발견했다고 생각한 것은 단지 힌두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왕국의 소규모 상인들이었다. 유럽인들은 거의 힘들이지 않고 이 왕국들을 정복한 후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유럽인들은 기항하는 항구마다 중국 상인들이 모여 사는 빈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빈민굴이 바로 저 멀리 떨어진 남중국해에 본거지를 둔 막강한 신디케이트들의 전초기지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시그레이브 2002, 169-170)(밑줄-인용자)

 

시그레이브(Sterling Seagrave)는 유럽 상인이 진출하기 오래 전부터 동남아시아 교역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 상인의 존재를 주목하고 있다. 근현대 들어 중국인의 해외 이주는 유럽과 신대륙으로 확산되었지만, 근현대 이전 상하이부터 홍콩까지의 남중국해 연안의 중국인들은 해금 등의 억압 때문에 해외 이주가 끊이지 않았고, 유럽인들이 동점했을 때 이미 동남아시아에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중국의 국가권력이 적대시했던 민간인이었기에 자신들의 생존 근거를 경제력에서 모색했고, 주로 본국과 현지의 교역에 종사하면서 양국의 국가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자신들의 부를 은닉하는 데 지혜를 모았다. 이런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가족을 중시하게 만들었고 조금 더 확장해서 동향 네트워크 또는 방언단체를 결성하게 했다. 그들이 동남아시아에 출현한 유럽의 무장 상인들에게 면종복배(面從腹背)한 것은 그들의 ‘공존’ 방식이었던 셈이다. 결국 유럽 상인들도 그 실체를 인정하고 중국인들을 중간관리인 또는 중개인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하마시타(濱下武志)의 ‘아시아 교역권론’은 나름의 설득력을 가진다. 이는 서양의 충격으로 ‘근현대’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서양이 아시아 교역권 시스템에 참여함으로써 이것이 확대·계승된 것으로 본 것이다(강경락 2003). 흔히 말하듯 ‘근현대’ 이후의 아시아 경제가 서양의 등장에 의해, 특히 공업화의 충격에 의해 개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 역사적 함의는 대영제국 경제의 고양기가 산업혁명 이후의 산업자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항운`금융`보험 등 이른바 ‘보이지 않는 무역(invisible trade)’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논의와도 상응하며, 아시아지역 경제권이 갖는 역사성과 현재성이 새롭게 문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하마시타 1997, 173) 그는 이에 대한 근거로 홍콩을 통해 이루어진 중국 화남권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이민과 송금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결과 홍콩을 ‘아시아의 이민`교역`송금 네트워크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싱가포르 중국학자 왕겅우(王賡武)는 ‘연해 중국인’이란 개념을 제기한다. “‘연해 중국인(沿海華人)’이란 19세기 이래 중국 연해지역에서 태어나 항구와 외부세계 사이의 활발한 무역활동을 통해 중국과 외부세계 사이에 교량작용을 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다.”(王賡武 1997, 859) ‘연해 중국인’은 원래 장난(江南)에 거주하다 북방인들이 남하함에 따라 연해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왕겅우에 의하면, 황허(黃河)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전통적 가치관’은 ‘대륙 종속적’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토지 종속적이고 농업적’이다.(왕겅우 2003, 11) 그러므로 농업-토지-대륙을 떠난 사람들은 이단시되었다. 왕겅우는 바로 이들-대륙 종속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해양으로 진출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어 중국의 역사를 전복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서양인의 동래(東來)는 ‘전통적 가치관’의 억압을 받아온 “부지런한 중국 연해의 상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1520년대에 중국 연해에 도착한 서양인들이 바로 변화에 추진력을 부여한 주인공들이었다.”(같은 책, 51) 왕겅우는 연해 중국인의 관접에서 서세동점의 긍정적 영향을 재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왕겅우의 ‘전통적 가치관’과 ‘연해 중국인’의 대립구도는 아탈리(Jacques Attali)의 ‘정착민’과 ‘유목민’의 대립구도와 불모이합(不謀而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양과 동양의 학자들은 서세동점을 일방적 흐름으로 보지 않고 상호간의 만남으로 해석했고 그 긍정적 측면이 세계사 발전에 미친 적극적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2. 근현대 중서 교류와 ‘모던 상하이’의 부침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1842년 난징(南京)조약이 체결된 다음해 상하이는 개항을 맞이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다. 1843년 개항 이전부터 상하이는 인근 도시의 기능을 흡수하고 있었고, 그보다 훨씬 이전인 1685년 청 강희제(康熙帝)가 개방했던 네 곳의 항구 가운데 하나인 강해관(江海關)이 상하이 인근인 쑹장(松江)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 정화의 대항해도 이곳에서 시작했다. 이렇듯 상하이의 지정학적 가치는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왔었고 1843년의 개항을 계기로 집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서 교역의 관점에서 아편전쟁 이전의 광둥(廣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40년 이전 광저우(廣州)는 국가의 공인을 받은 특허상인인 ‘13공행(公行)’을 대표로 하는 광둥무역체계의 중심이었다. 이들은 서양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외교업무도 관장했다. 서유럽의 중상주의와 중국의 중화주의의 동상이몽의 현장으로서 광둥무역체계를 고찰한 리궈룽(李國榮)에 의하면, 명․청에 걸친 300년의 봉쇄 이후 강희제가 4곳의 항구를 개방한 지 70여 년 만에, 방비가 통상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건륭제(乾隆帝)는 한 곳만 남기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사실은, 이때까지 서양 선박은 주로 월해관으로 입항했다는 것이다. 이는 각 항구의 역할에 차이가 있었고 광저우의 성숙한 양행(洋行) 제도와 해안 방위 등의 조건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아편전쟁 이전 월해관은 중서 해상 교통의 중요한 교차로이자, 나라의 재화와 부가 모이는 곳이었다. 또 대외무역의 전통과 해안 방어에서 특수한 지위를 가진 곳이었다. 때문에 쇄국 정책을 실시하던 때에도 매우 특별한 공간으로 취급받아, 아편전쟁 이전 중국 대륙의 유일한 개방 항구가 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광저우는 중서 무역의 중심이 될 수 있었고 그 중심에 광저우 13행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월해관 대신 세금을 징수하는 등 관청의 승인을 받은 유일한 대외무역 대리상이었다. 그들이 광주항의 모든 대외무역을 담당했으므로, 내륙의 화물들은 반드시 그들에게 수속비를 낸 뒤 그 이름을 해관에 보고해야만 수출할 수 있었다. 행상은 많은 이익을 남겼지만, 책임 또한 무거웠다.”(리궈룽 2008, 48쪽) * 일본의 개항 *

미국의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은 2001년 지난 천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50명을 선정, 발표했다. 그 가운데 미국의 록펠러와 빌 게이츠가 있었고 중국에서는 칭기스칸과 쿠빌라이 그리고 근대의 쑹쯔원(宋子文)과 함께 오병감(伍秉鑒)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반진승(潘振承)의 동문행(同文行, 1744)에 이어 이화행(怡和行, 1783)을 연 오국영(伍國營)의 아들이었다. 그는 1801년 가업을 계승한 후 1807년 광저우 총상(總商) 자리를 이어받아 행상의 지도자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같은 책, 104쪽) 그러나 광저우는 마치 양날의 검처럼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는 동시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17~18세기 중서 무역을 총괄했던 13행은 19세기 중엽 국가 위기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는 주로 아편전쟁의 배상금 부담과 5구통상으로 인한 독점적 지위의 상실로 표현되었다. 13행은 상업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행상들도 파산하거나 외국 상인들에게 매판으로 고용되는 등 저마다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일부 영리하고 모험심 강한 상인들은 새로운 개항 항구인 상하이로 가서 떠오르는 부자가 되기도 했다. 1850년대 상하이는 광저우를 대신해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 되었다. 과거 작은 어촌이던 상하이가 전국 최대의 무역항이 된 것은 광둥 상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징조약 직후 개항된 상하이에 가장 먼저 온 사람들은 서양인들과 무역에 종사했던 광둥인이었고, 뒤를 이어 오랜 도시 경영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인근의 닝보(寧波)인들이 몰려왔다. 국내 이민 가운데 전자가 상하이의 대외무역을 주도했다면 후자는 주로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모던 상하이’는 광둥 무역과 닝보 금융의 경험을 받아들인 기초 위에 ‘몸소 서양을 시험(以身試西)’해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창안했다. 1949년 이후 이들 상하이 금융인들은 마오쩌둥(毛澤東)뿐만 아니라 장제스(蔣介石)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홍콩을 선택했다. 이들은 서유럽식 금융업과 상업 실무를 습득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서양의 규칙에 따라 국제적인 금융게임에 참가했다. 그리고 금융산업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형성된 전 세계 화교들의 국경 없는 네트워크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80년대 개혁․개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중서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측 창구는 1840년 이전의 광저우, 1843년 개항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전까지의 상하이, 1950년대 이후의 홍콩,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의 광저우와 선전(深圳), 1990년대 이후 상하이가 중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크게 보면 주장(珠江) 삼각주와 창장(長江) 삼각주 사이를 오간 셈이다. 중국 근현대 장기 지속(longue durée)의 관점(임춘성`왕샤오밍 2009, 22-4)에서 볼 때, 상하이는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의 대외 창구 노릇을 했다. 외국인 조계와 국내외 이주를 통해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모던 상하이는 1930~40년대 이미 세계적인 국제도시의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1949년 공산화된 이후, 그 영광을 홍콩에게 넘겨주었다. 식민지였으면서도 20세기 자본주의 정점의 하나를 구축했던 홍콩의 발전은 상하이의 후견 아래 이루어졌던 셈이다. 1930년대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파리’ 또는 ‘모험가들의 낙원’으로 일컬어졌던 상하이가 왕년의 영광 회복을 선언하고 나선 것은 1990년대 들어와서였다. 푸둥(浦東) 지구 개발로 뒤늦게 개혁․개방을 실시한 상하이는 10여년 만에 중국 최고 수준의 발전을 이루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상하이는 중국 근현대사의 진행과정을 압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따라서 상하이와 상하이인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은 근현대 중국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3. ‘지역적(regional) 이주’와 관문의 도시, 상하이와 홍콩

 

피터 찬(陳可辛, Peter Chan)의『첨밀밀(甛蜜蜜/ Comrades, Almost a Lover)』(1996)은 최근 중국인 이주의 한 전형적인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1986년부터 1995년까지 10년간의 시간과 홍콩-타이완-뉴욕의 공간을 연대기처럼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시(無錫)가 고향인 리샤오쥔(黎小軍, 黎明분)은 1986년 3월 1일 홍콩 커우룬(九龍)역에 도착하는데, 이 열차는 상하이에서 출발(또는 상하이에서 출발해 광저우에서 환승)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시간의 기차 여행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몸에 익숙지 않은 에스컬레이터의 움직임에 당황해하면서도 밝은 빛이 비추는 위로 상승한다. 연해 도시에 비해 개혁`개방의 세례가 충분치 않았을 것인 ‘우시 사람 리샤오쥔 동지’에게 홍콩의 모든 것은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고 닭 배달부터 시작해서 몸으로 홍콩을 학습하면서 우시인에서 홍콩인으로 변모한다. 우시를 떠날 때의 꿈이었던 약혼녀 샤오팅을 데려와 결혼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리차오(李翹, 張曼玉 분)임을 깨닫고 진실한 사랑을 찾아 뉴욕으로 간다.

이 영화에는 중국 근현대 글로벌 이주의 대표적인 관문인 홍콩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우리는 리샤오쥔이 우시에서 상하이로 가서 홍콩(또는 광저우)행 기차를 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리차오는 광저우에서 같은 기차를 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홍콩에서 그리고 뉴욕에서 만난다. 물론 리차오는 바오거(豹哥)와의 의리 때문에 타이베이를 거치게 된다. 송출 관문의 관점에서 보자면, 1949년 이전까지 글로벌 이주의 주요 출구는 상하이였는데, 1949년 이후 ‘죽의 장막’이 내려진 후 출구는 홍콩과 타이베이로 바뀌었고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상하이가 다시 대륙의 출구로 복귀했다 할 수 있다. 약 30년간의 빗장도시(gated city) 상태를 겪었지만, 상하이는 개혁`개방 이후 신속하게 과거의 명예를 회복했다.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에서『결혼 피로연』의 웨이웨이와『뉴욕의 중국인』의 자오훙이 상하이 여성이고 리샤오쥔은 상하이를 경유했다.

1949년 대륙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유한 피난민들은 대탈주를 감행했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타이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국민당 정부의 보호비 착취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 상당수는 잉글랜드의 식민지인 홍콩을 선택했다. 여기서 잠깐 ‘상하이 보이들’에 관한 시그레이브의 언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 의하면 1949년 홍콩으로 탈출한 상하이의 백만장자들은 중국 경제계의 두뇌이자 경영의 엘리트들로서, 그들 일가는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금융업과 여러 산업 분야에서 활약해온 노련한 금융인들이었다. 이들은 가장 민감한 대륙의 관문, 즉 양쯔 강 삼각주에서 탈출해 나왔다. 이들은 마오쩌둥뿐만 아니라 장제스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나고자 국외로 탈출했기 때문에, 타이완 대신 홍콩을 도피처로 선택했다. 이들은 서유럽식 금융업과 상업 실무를 완전히 습득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서양의 규칙에 따라 국제적인 금융게임에 참가했다. 그리고 금융산업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형성된 전세계 화교들의 국경 없는 네트워크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상하이 출신의 이 사람들이 아시아의 부흥을 선도했다고 할 수 있다.(시그레이브 2002, 340) 홍콩인들에게 금융을 가르쳐준 이가 바로 ‘상하이 보이들’이었다. 조계에서 ‘몸소 서양을 시험(以身試西)’한 경험과 국민당 정권의 시련을 가지고 있는 상하이 경제 엘리트인 이들은 1949년을 전후해서 홍콩으로 이주했는데 상하이 보이들은 광둥인들에 비해 훨씬 교양 있고 유능하며 품위가 있었고 옥스포드식 영어를 구사했다. 궁극적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홍콩의 새로운 이미지는, 산뜻한 사업가 풍모의 상하이 보이가 창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하이 보이의 선도적 역할은 개혁`개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의 급속한 부상은 홍콩과 타이완을 포함한 해외 화교 자본 및 그들이 매개한 자본 투자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인데, 이들을 돌아오게끔 만든 사람이 ‘상하이의 붉은 자본가’이자 ‘개혁·개방의 전도사’인 룽이런(榮毅仁)이었던 것이다.

상하이와 홍콩은 조계지와 할양지로 근현대를 시작했고 그로 인해 동서 융합의 기회를 가지게 됨으로써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다. 동서의 문화가 혼융되고 중국 각지의 문화가 혼합됨으로써 상하이와 홍콩은 중국의 근현대를 견인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민은 두 도시를 구성하는 핵심이었다. 상하이와 홍콩은 중국 각지에서 꿈을 안고 모이는 곳인 동시에, 새로운 꿈을 찾아 떠나는 곳이기도 했다.

 

4. 이민도시 상하이와 상하이인의 정체성

 

역사적으로 볼 때 상하이인의 정체성 형성에 몇 가지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이를테면 1853-5년의 소도회(小刀會) 사건과 1870년의 쓰밍공소(四明公所) 사건 등은 상하이인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주민의 도시 상하이에서 그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신중국’ 건설 이후 시행된 ‘호적관리제도’였다. 근현대도시 상하이 발전의 기본 동력이랄 수 있는 이주민의 전입을 근본적으로 봉쇄한 이 제도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상하이다움(new Shanghai-ness)’의 수혈을 저해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주가 금지되었던 약 30년의 시간에 그동안 형성된 상하이다움을 돌아보고 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주의 각도에서 볼 때 이 30년의 공백은 그 전과 후를 나눌 수 있는 분기점이 되었고, 이전의 상하이와 상하이인의 정체성을 돌아보고 다듬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흔히 이 공백기 전의 상하이와 상하이인을 ‘라오상하이(老上海)’와 ‘라오상하이인(老上海人)’이라 하고, 개혁·개방 이후의 상하이에 이주한 사람을 ‘신상하이인(新上海人)’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신상하이’란 ‘신상하이인’만의 상하이가 아니라 그들이 ‘라오상하이인’과 함께 만들어가는 상하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양자 사이의 역학 관계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라오상하이인’과 ‘신상하이인’이라는 역사적 개념을 전제하되, 양자를 불변하는 고정된 개념으로 설정하지 않고, 양자가 끊임없이 섞이고 호동(互動)함으로써 ‘상하이인’이라는 문화적 개념을 생성하는 것으로 본다.

한 가지 문화전통이 다른 문화전통에 의해 억압되어, 표면적으로는 소멸되었지만 ‘은형구조’(hidden structure)의 형식으로 심층에 숨어 있다가, 새로운 환경에서 회복 내지 부활하는 현상을 ‘근현대 전통의 부활’(the revival of the modern tradition)이라 명명할 수 있다(林春城 2005, 341-2). 1920-30년대의 상하이의 자본주의와 도시문화는 사회주의 중국 시기 은형구조로 억압되었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부활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전역에 상하이 노스탤지어(鄕愁) 붐이 일어나는데, 이는 사회주의 이전의 상하이, 특히 1920-30년대 상하이를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다.

상하이 노스탤지어는 1990년대 이래 중국 전역을 풍미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현상 중의 하나이다. 천쓰허(陳思和)는 이런 문화현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전개과정을 세 단계로 나눈 바 있다. 첫 단계는 재미 화가이자 영화감독인 천이페이(陳逸飛)의 회화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1984년 장쑤(江蘇)성 저우주앙(周庄)의 쌍교(雙橋)를 제재로 삼아 그린「고향의 추억(故鄕的回憶)」과 상하이 여성을 그린「해상구몽(海上舊夢)」및「심양유운(潯陽遺韻)」등은 서양세계의 애매한 동방 환상을 환기시킴으로써 상하이 및 인근 지역의 관광 붐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둘째 단계는 올드 상하이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다. 천이페이의『인약황혼(人約黃昏)』(1995), 장이머우(張藝謀)의『상하이 트라이어드(搖啊搖, 搖到外婆橋)』(1995), 천카이거(陳凱歌)의『풍월(風月)』(1996)은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대중적 확산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들 영화에서 재현된 상하이 형상은 순수하고 소박한 올드 상하이가 아니라 동방 상하이에 대한 서양 문화시장의 식민 상상에 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단계는 1980년대 장아이링(張愛玲) 붐과 1995년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장아이링 읽기 붐이 일어난다.(陳思和 2003, 380) ‘서양 문화시장의 식민 상상’에 영합하지 않는 ‘순수하고 소박한 올드 상하이’라는 문제의식은 천쓰허의 글쓰기 목적, 즉 왕안이(王安憶)의『장한가(長恨歌)』(1995)의 ‘도시민간 서사’의 의미에 부합된다. 물론 대중문화가 범람하는 상업시장에서 문학예술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천쓰허의 기본 입장에서 비롯된, 문학예술과 대중문화를 변별하려는 그의 이분법적 태도와도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올드 상하이 노스탤지어 현상을 전지구화와 지역성의 문제, 현상과 담론이라는 문제의식으로 고찰한 박자영(2004)의 논의는 주목을 요한다. 그는 올드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전국적 유행의 중요 발단을 1990년대 중반 영화와 문학에 재현된 올드 상하이 형상에서 찾는다. 그리고 전지구적 현상으로서의 노스탤지어에 대한 담론들을 점검한 후, 상하이 노스탤지어에 관한 중국계 미국학자 레오 어우판 리(李歐梵)와 쉬둥 장(張旭東)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올드 상하이는 부르주아 공간을 안전하게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박자영 2004, 99)과 결합되어 1990년대 상하이 거주민들이 겪어보지 못했던,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상상된 노스탤지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상상된 노스탤지어’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가 제기한 개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심신이 아픈 상태’란 뜻의 ‘노스탤지어’의 본래적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주로 대중 광고에서 활용하는 전략인데, “결코 일어난 적이 없는 상실의 경험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광고들은 ‘상상된 향수 imagined nostalgia’라고 불릴 만한 것, 다시 말해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향수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이 상상된 향수는 판타지의 시간적 논리(주체에게 일어날 수 있거나 일어날 법한 것을 상상하라고 가르치는)를 뒤집고, 단순한 선망이나 모방, 욕심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보다 한층 더 깊은 소망들을 창조하는 것이다.”(아파두라이 2004, 140)

노스탤지어의 상기는 상하이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도시민의 소비욕망을 겨냥한 상업전략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사와 기억을 소비 상품으로 유통시킨다. 그래서 수많은 중국인들은 부자의 꿈을 안은 채 공부를 하고 주식을 하며 부동산을 하며 살아간다. 이는 또한 사회주의 이전의 자본주의 착취에 대한 ‘기억이 배제된 노스탤지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상하이 노스탤지어 현상은 탈 역사적이고 탈 영토적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스탤지어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소수자(minority) 또는 타자화(othernization)에 대한 ‘역사들’과 ‘또 다른 기억’이다. 그것은 노스탤지어의 주체들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들이고 ‘망각하고 싶은 기억’이다.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의 구호에 가려진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실험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동방의 빠리’라는 기표에 가려진 소외된 계층의 존재는 후자의 주요한 측면이다. 조계와 이민의 도시 상하이에서, 외국인은 중국인을 타자화시켰고 똑같은 이민이면서 먼저 온 사람은 후에 온 사람을 주변화시켰으며 중상층은 하층을 소외시켰고 자유연애와 모던 신여성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여전히 여성을 억압했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후 시장은 혁명을 포섭했고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통합했다. 어쩌면 19-20세기 중국의 근현대 경험 가운데에서 “경험이라면 진저리가 날 정도인 생존자들의 현실 과거에서 경험이 배제된 순수 과거가 생기게”(아스만 2003, 15)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문혁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역사와 기억을 배제하다보니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설사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이외의 역사,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역사는 아름답고 순수한 기억일까? 이런 문제설정(problematic)은 ‘순수 과거’의 밖에 존재하는 ‘현실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을 요구하게 된다. 그 작업은 때로는 기억을 위한 투쟁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기억의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거대서사에 대한 미시서사의 탐구, 정치사에 대한 생활사의 복원, 전통과 근현대의 중층성에 대한 고찰, 근현대성의 양면성에 대한 성찰, 탈 식민주의적 접근 등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억 또는 망각의 과정에서 “현재는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지휘하듯 과거를 지휘한다”(이탈로 스베보의 말, 아스만 2003, 19)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로 하자. 역사와 기억의 고통에서 자유로운 ‘현재’는 도래 가능한 것일까? 어떤 한 가지 역사와 기억을 복원하게 되면 그로 인해 새롭게 고통 받는 개인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을까?

호니그(2004)의 연구는 바로 이 지점에 착안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상하이에서 원적(原籍)은 에쓰닉(ethnic)의 함의를 가지게 된다. 고향에서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상하이에 와서 다른 지역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단순한 지역의 차이가 아니라, 우리와 타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뉴욕 이민 초기에 요커와 아이리쉬, 백인과 유색인종의 구별이 있었듯이, 상하이에도 크게 볼 때 장난인(江南人)과 쑤베이인(蘇北人)의 차별이 있었던 것이다. 뉴욕에서 초기에 요커가 원주민을 자처하면서 아이리쉬를 주변화시킨 것처럼, 상하이에서는 장난인이 쑤베이인을 타자화시키면서 그 내용을 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난인이 보기에 쑤베이는 우선적으로 북방에서 온 가난한 난민을 하나로 묶은 용어이고, 그로써 그들 자신과 이 계층 사이의 구별을 두드러지게 하려 했다. 실제로 장난인은 자신들의 우월감을 수호하기 위해 언어·개성·문화 내지 지리상의 구별을 과장했을 것이다.”(Honig 2004, 112)

1930년대 쑤베이인의 붕호구(棚戶區; 빈민가)는 외국조계를 둘러싸면서 형성되어 거의 완벽한 원을 형성할 정도로 넓은 공간에 많은 인구가 집중되었다. 그러나 상하이를 지배한 것은 장난인의 문화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상하이 방언은 장난의 우위(吳語)에서 내원했는데, 그것은 쑤베이의 방언과 달랐고 쑤베이 방언을 배척했다. 훗날 상하이 지방희로 확정된 극종(劇種)은 장난 전통을 기초로 삼았고 이는 북방의 화이쥐(淮劇)와 큰 차이가 났다. 전형적인 상하이 요리도 장난의 정통 풍미에서 비롯되었다. 상하이인이 되는 것은 장난 ‘엘리뜨’처럼 문아(文雅)하고 정명(精明)함을 닮는 것이고, 거친 쑤베이인과 선명한 차별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쑤베이는 상하이 모던을 정의하는 대립면이 되었다.

 

5. 홍콩영화와 홍콩인의 정체성

 

홍콩영화는 1997년 회귀를 전후한 시공간의 ‘홍콩과 홍콩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훌륭한 경로다. 흔히 ‘문화의 사막’으로 일컬어졌던 홍콩에서 영화만큼은 예외라 할 만큼 활발한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물론 홍콩영화의 주류가 오락영화인 것은 부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1970년대 말 60명이 넘는 신인감독이 데뷔하면서 뉴웨이브(New Wave, 新浪潮) 영화를 통해 작가영화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었다. 앤 후이(Ann Hui: 許鞍華)의 ‘베트남 삼부작’은 1975년 베트남이 패망한 뒤 베트남을 탈출한 화교들의 비극적인 삶을 그리고 있다. 앤 후이 영화의 강점은 베트남을 진지하게 영상에 담으면서 이를 1997년 홍콩에 대한 알레고리로 연결시키고 있는 점일 것이다. 1990년대에는 뉴웨이브 2세대 감독이랄 수 있는 웡카와이(Wong, Kar-wai: 王家衛) 붐이『2046』(2004)까지 이어지는 한편, 1990년대 말에는 프룻 찬(Fruit Chan; 陳果)의 ‘97 삼부곡’과 ‘기녀 삼부곡’ 등 홍콩 민족지적(ethnographic) 작품이 뒤를 잇고 있다.

오락영화 장르인 코미디영화와 괴기영화 그리고 영웅영화 등도 1980~90년대의 사회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코미디영화는 1980년대의 홍콩인들의 사회적 심리변화를 적절히 반영했으며 괴기영화도 홍콩인들의 위기의식과 불안한 심리상태나 정서를 은연중에 반영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또한 무협영화의 현대판이랄 수 있는 영웅영화는 홍콩인들을 ‘폭력의 낭만적 표현’에 열광케 했다. 그들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의리와 폭력의 미묘한 결합에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이다.

1997년 홍콩 회귀와 관련된 홍콩인의 정체성을 고찰하기 위해 1990년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두 명의 감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웡카와이와 프룻 찬이 그들이다. 하나는 ‘뿌리없음(rootlessness)’으로 다른 하나는 ‘풀뿌리 성격(grassrootness, 草根性)’으로 홍콩을 재현했다. 웡카와이는 홍콩 영화산업의 장점을 한껏 활용하고 일급배우들을 캐스팅하면서 각 배우의 또 다른 개성을 발굴해내는 반면, 프룻 찬은 저예산과 연기 경험이 없는 신인배우 캐스팅의 독립영화식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웡카와이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삼아 1990년대 홍콩의 아우라를 영화에 구현했다. 그는 회귀를 앞둔 홍콩인들의 불안한 심리에 초점을 맞추면서 ‘홍콩인다움(HongKong-ness)이란 무엇인가’, ‘홍콩의 앞날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그는 ‘홍콩인다움’을 광둥어의 사용, 문화적 슈퍼마켓,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선택이 주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는 홍콩과 홍콩인의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프룻 찬은 자신 영화의 생명을 홍콩 뒷골목에 거주하는 기층 인물의 전기(傳記)에 두고 있다. 그의 카메라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고층 빌딩을 마다하고 더럽고 붐비고 어둡고 타락한 홍콩의 모습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를 통해 프룻 찬은 관중에게 시각적 신선함과 충격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문제 청소년, 불법체류자, 기녀, 외국인 등이 영화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홍콩의 뒷골목의 역사를 민족지(ethnography)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엽기적 상상력은 그가 더럽고 붐비고 어둡고 타락한 홍콩의 뒷골목과 문제 청소년, 불법체류자, 기녀, 외국인 등의 주변 홍콩인을 다루면서 자연스레 체득한 극복과 해학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홍콩영화에 동남아와 동남아인이 자주 등장하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콩과 동남아의 역사적 관계를 배경으로 이해한다면 홍콩영화 속의 동남아와 동남아인은 새롭게 조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홍콩영화에 등장하는 동남아는 ‘홍콩에 이주한 동남아인’과 ‘동남아에 거주하는 화인’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홍콩에 이주한 동남아인들은 주변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들이 홍콩의 재생산 구조에 일정 정도 역할을 하면서도 응분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홍콩영화 속에서도 ‘슬쩍슬쩍’ 비춰질 뿐이다. 이는 동남아인들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축소하려는 홍콩인들의 의식 또는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주변성과 식민성에 대한 홍콩인들의 반성이 결여될 때 홍콩의 동남아인들은 대륙 이민 및 베트남 난민과 함께 통제와 차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필리핀 가정부에 대한 연구는 이미 그것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또한 동남아 화인을 다루고 있는 영화에서도 배경인 동남아와 동남아인은 철저히 타자화되어 있다. 그리고 동남아 화인의 정체성도 현지민족적인 것보다는 중국민족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있다. 어디에 가든 중국인이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쓰(也斯), 레이 초우(Rey Chow) 등 홍콩 및 홍콩 출신의 탈식민주의 논자들의 견해와는 모순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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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家衛(2000),『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澤東製作有限公司.

王家衛(2004),『2046』, 澤東製作有限公司.

劉偉强·麥兆輝(2003),『무간도 2(無間道Ⅱ)』

張藝謀(1995),『Shanghai Triad』

陳凱歌(1996),『風月』

陳果(1993),『마지막 혈투(大閙廣昌隆 Finale in Blood)』

陳果(1997),『메이드 인 홍콩(香港製造 Made in Hong Kong)』

陳果(1998),『유난히 불꽃이 많았던 작년(去年煙花特別多 The Longest Summer)』

陳果(1999),『리틀 청(細路祥 a Little Cheng)』

陳果(2000),『두리안(榴蓮飄飄 Durian Durian)』

陳果(2001),『공중화장실(人民共厠 Public Toilet WC)』

陳果(2002),『홍콩의 헐리웃(香港有個荷里活 Hollywood Hong Kong)』

陳果(2004),『인육만두(餃子-三更2之一 Dumplings Three…Extremes)』

許鞍華(1981),『우 비엣 이야기(胡越的故事 The Story of Woo Vi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