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英雄)》(2002)은 국내외적으로 명망을 구축한 ‘문화 영웅’ 장이머우가 마음먹고 만든 영화다. 그는 역사적 맥락을 거두절미하고, 전쟁으로 어지러운 천하(天下)를 바로잡고 백성(百姓)을 안정시킬 수 있는 ‘영웅’은 오직 진시황뿐이라는 사실을 잔검(殘劍)이 깨닫고 그 깨달음을 무명(無名)에게 감염시킨다. 잔검의 깨달음은 천하가 어지러운 원인에 대한 성찰이 부재하다. 그러나 중국 관객은 진시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위대한 정치 ‘영웅’에 의해 중국은 혼란의 역사 시기를 종식시키고 강고한 하나의 중국으로 역사 속에 힘 있게 등장한다는 논리다.
《영웅》이 문화 내셔널리즘(cultural nationalism) 영상 재현의 전 지구화(globalization)를 표지한다면, TV 연속극 《한무대제(漢武大帝)》는 지방화(localization)에 충실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64부작 《한무대제》의 첫 장면은 사마천(司馬遷)과 한무제 유철(劉徹)의 대담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특히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근거해 개편·창작했다’는 사전 설명은 저자와 텍스트 속 인물의 만남을 연상시킨다. 그 인물이 텍스트에서 튀어나와 텍스트 속 자신에 대해 저자와 논쟁을 벌이는 꼴인데, 제작자는 철저하게 무제 편이다. 마지막 회에서도 반복되는 사마천의 등장은 불후의 명저 《사기》의 저자라 하기에 지극히 초라하다. 중서령(中書令)인 사마천이 황제를 알현하며 절하는 모습은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무제는 사마천의 저작을 독파하고 그 의도를 간파했지만, 사마천은 무제의 흉중을 헤아리지 못한 채 〈효무본기(孝武本紀)〉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대면은 무제가 《사기》를 읽은 후 이뤄지는데, 무제는 《사기》가 ‘일가지언(一家之言)’일 뿐 정사(正史)가 아니라고 규정하고 역사의 진리는 ‘하늘만이 안다’고 결론짓는다. 이 드라마는 한무제가 어렵게 황제가 되고 즉위한 후에도 수많은 난관을 거쳐 국내외의 혼란을 수습하고 한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영웅이었음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 흉노와 한족이 대우(大禹)의 후손이라는 설정 또한 지극히 ‘문화적’이다. 이는 거란족의 요(遼) 왕조, 몽골족의 원(元) 왕조와 만주족의 청(淸) 왕조 등을 ‘이민족 왕조’로 취급하다가 ‘소수민족(minor ethnic) 정권’으로 재해석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사실 중화인민공화국 이전의 역사는 한족 중심으로 기술되었고 원과 청은 이족 에스닉 정권으로 타도 대상이었다. 쑨원(孫文)의 ‘오족공화(五族共和)’ 이후 만주족 정권의 황제들에게서 타자의 고깔을 벗겨준 것은 ‘중화 네이션 대가정’이라는 ‘문화중국’의 논리다. 이 논리에서 원과 청은 더는 이민족 왕조가 아니라 소수 에스닉 정권으로 변모한다. 이런 재해석은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를 연상시킨다. 《한무대제》는 우(禹) 임금의 동일한 자손이었던 한족과 흉노족이 하(夏) 멸망 이후 갈라졌다가 장기간의 모순과 투쟁을 거쳐 통일되었다는 네이션 대융합의 이야기로, 몽골족과 만주족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앞선 흉노족도 한족과 하나의 네이션(nation)임을 밝히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중국 정부와 공산당은 영상물 재현을 통해 ‘중화 네이션 대가정’, ‘문화적 중화주의’를 선양하면서 국민의 통합을 유도하고 있다. 영상은 급속히 보급된 텔레비전, DVD,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안방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와 문화계 인사들은 이 점을 충분하게 인지해 잘 활용하고 있다. 이들 영상물의 재현에서 ‘중화 네이션 대가정’과 ‘한족 중심주의’는 두루뭉술하게 표리를 이루고 있다. 이 둘은 사실상 불일치하는 모순임에도 재현을 통해 하나인 것처럼 통합되고 있다. 진시황과 한무제는 통일 중국에 공헌이 지대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진시황의 문자 통일이 있었기에 중국은 2,000년이 넘게 수없이 분열되었다가 다시 합쳐질 수 있었고, 한무제의 강역(疆域) 통일이 있었기에 중국은 한족을 중심으로 중화 네이션을 통합(integration)할 수 있었다. 여기에 중화 네이션이 황제(黃帝)의 자손이라는 점과 공자(孔子)의 사상을 더하면 문화중국의 통합 시스템의 기본 골격이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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