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과학 2013년 여름 호 (통권74호), 2013.6, 375-386 (12 pages)
중국 근현대문학사 쓰기의 새로움과 낡음
이 재현(문화평론가)
1. 임춘성은 내게 '펑요'고 '따거'이자 '쉬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의 서평 관례를 깨뜨리고자 한다. 서평이란 이름 아래 지루하게 책을 요약하고나서는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눈꼽만큼의 비평, 즉, 이미 '빨아준' 범죄에 대한 알리바이를 어설프게 덧붙이는 식의 드립질은 하지 않으려 한다. 책 내용에 대해서는 임춘성 스스로가 책머리에 붙인 간결한 설명과 인터넷 쇼핑몰에 떠있는 출판사의 소개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먼저 자잘한 것부터 트집 잡아 보자. 임춘성은 근대, 현대, 당대라는 말 대신 셴다이, 진다이, 당다이란 말을 쓴다. 왜 그랬는지가 이 책에서 속시원하게 밝혀 있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읽었다. 아마도, 중국 대륙에서 통용되던 삼분법, 그러니까 근대는 아편전쟁 이후, 현대는 5.4운동 이후, 당대는 1949년 이후를 가리키는 바의 홍색-파쇼적 용례를 임춘성 스스로가 지향하는 바의 '동아시아 근현대'와 비판적으로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책값이 115위안이 넘으니까 독자에 대한 서비스로서는 형편없는 셈이다. 반면에 'post-socialism'은 '后社会主义'나 'hòushèhuìzhǔyì'에 상응하는 한글 표기가 아니라 '포스트사회주의'로 표기된다. 아마도, 무엇보다 '포스트'에 담긴 여러가지 뜻을 죄다 살리기 위함일 텐데 암튼 '셴다이' 등과는 대조가 된다.
이 책은 첫 글 "제1장 20세기 중국문학과 두 날개 문학"이 제일 중요하다. 원래 논문의 제목 "중국 근현대문학사 담론과 타자화의 정치학"에서 이 책 제목 <중국 근현대 문학사 담론과 타자화>가 나온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이 글은 바로 그 담론들을 아주 계몽적으로 잘 요약, 소개하고 있다. 임춘성의 입장은 뒤 부록에서 번역한 황쯔핑 등의 담론과 판보췬의 담론 등이 그 이전의 다른 중국 근현대문학사 담론들에 비해서 타자를 억압, 배제, 침묵시키는 바의 한계를 일정하게 극복했다는 것이다. 임춘성은 이런 맥락에서 '센다이' 등의 기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국족(國族)' '국족주의' 등도 너무 거슬린다. '셴다이' 식이라면 '국족'은 '궈쭈'가 되었어야 했다. '국족'이란 말은 국민국가와의 연관 때문에, 그리고 손문 이래 중국에서의 용법을 감안해서 쓰고자 하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내 생각에는 네이션, 내셔널리즘 등이 더 낫을 것 같다. 아니면, 맥락에 따라서, 국민이나 민족 등으로 나누어 쓰거나 말이다. 아무튼, 국가를 갖지 못한 네이션이 지구상에 적지 않다는 점, 그리고 네이션과 에스닉의 차이라는 것도 임춘성이 즐겨쓰는 바의 타자화라는 역사적-정치적 과정의 결과로서 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지 무엇인가 그 자체로 실체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사람 이름의 표기도 헷갈린다. 무협소설가 김용은 진융으로, 영화 감독 왕가위는 웡카와이로 표기되어 있다. 대륙의 표준 중국어 발음이 아니라 광동어 발음을(김용의 경우), 또는 더 나아가서 본인이 원하는 영어식 표기를(왕가위의 경우) 한글로 적어낸 것이라고 짐작된다. 레이 초우(周蕾)는 홍콩 출신 아시아계 미국인이어서 그런 순서인 거고, 얼마 전 서거한 렁핑콴(梁秉鈞)은 아마도 웡카와이식 표기인 듯하다. 이 점에서 임춘성의 원칙은 분명하고 일관되어 있다. 중국 사람 이름이라고 해서 모조리 대륙의 보통화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은 궈쭈적-언어적 폭력일테니까.
그렇지만, 소설 <장한가> 주인공 이름은 '왕치야오'인데, <천룡팔부> 주인공들의 이름은 '소봉' '단예' '허죽'으로 표기되어 있다. 소설에서 '교봉'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소봉'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런데, 왕가위/웡카와이식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 '蕭峰'의 올바른 표기는 '소봉'도 아니고 'Xiāofēng'에 상응하는 한국어도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를 계속 밀고나간다면, 이제 蕭峰은, 적어도 임춘성의 책 안에서는, 몽골어에 가깝다고 추정되고 있는 거란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해야 맞을 것이다. 진융이야 제 소설 안에서 蕭峰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의 이름의 경우, 내게, '왕안이'가 '왕안억'보다 친숙한 것은 분명하다. 왕안이라는 소리 기표가 王安憶이라는 문자 기표보다 먼저 와서 내가 그것에 내내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용의 경우는 다르다. 내게, 모택동이 마오쩌둥과 엇비슷하거나 혹은 약간 더 우세한 것과도 엄청 다르다. 임춘성의 책을 보기 전까지, 나는 진융이란 기표를 귀나 눈으로 접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어쨌거나, 임춘성은 이 점에서 나름의 분명한 원칙과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중국 문학사 담론과 관련된 임춘성의 기표적 민감성은 여전히 낯설고 껄끄럽다. 저자 스스로도 무협소설 주인공의 이름 표기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러했듯이, 고유명사나 통용되는 개념의 관례적인 표기는 그 나름대로 존중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이 문제는 따지기로 치면 밑도 끝도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2. 이 책 뒤에는 부록으로 중국 근현대문학사론 관련 논문이 두 편 번역되어 있다. 황쯔핑 등의 것과 판보췬의 것이다. 둘 다 중국 근현대문학사에 관한 이론적 성격의 글들이다. 전자(1985)는 소위 삼분법을 넘어서서 '20세기 중국문학'이라는 개념을 제출하고 있고, 후자(2007)는 "통속문학과 두 날개문학"이라는 번안된 타이틀을 달고 있다. 이 두 논문은 중국 근현대문학사에 관한, 임춘성의 주장과 입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제시된 것이다.
이제 이것들에 시비를 걸어서 2:1, 혹은 4:1로 붙어보자. 물론, 이 싸움의 책임이, 엄밀히 따져서 임춘성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황쯔핑 등의 글은 앞부분에서 '세계문학'을 언급하는 데서 짜증이 확 나버렸다. 황씨 등은 괴테와 <공산당선언>을 인용하면서 세계문학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문학이 초보적으로 형성된 시대가 20세기, 혹은 그 상한선이 19세기 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1980년대 초반 문학운동의 기억에 기대서 내뱉는 한에서, 이들의 세계문학이라는 개념은, 시인 고은 등이 최근 몇 년 동안 노벨상을 타기 위해서 나라 안팎에서 벌여온 추잡한 앵벌이짓만큼이나 아주 웃긴 것이고, 또, 왕쯔핑들 스스로 괴테와 <공산당선언>에 기대는 한, 그 시기 획정도 틀린 얘기다. 이들의 세계문학 개념도 무슨 얘기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특히 내 뚜껑이 확 열려버린 까닭은, 황씨 등이 그 시기와 관련해서, 괴테 얘기를 꺼내면서 각주에서 소위 세계문학의 개념은 "괴테가 중국 전기(傳寄)--아마도 <風月好逑傳>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읽은 후 형성된 생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317쪽) 스치듯 덧붙였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바로 이 대목에서 '짱꼴라 문발이'들의 내셔널리즘이 은근히/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소위 세계문학이라는 '장궤(掌櫃)'에서 고작 꺼내든 게 바로 괴테에 의지한 바의 자기네 고전, 그것도 고작 <풍월호구전>이라니. 그러니까, 내 말은 "<금병매>나 <홍루몽>이라면 몰라도"라는 얘기다. 이 둘은 나도 들었다가 놔 보기는 여러 번 했으니까.
에커만과 나눈 대화(1827.1.31)에서 괴테가 세계문학을 언급한 대목에서 중국 작품을 예로 든 것은 사실이고, 괴테가 일정하게 상당한 중국 취향에 빠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괴테가 소위 세계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바로 그 개념을 형성하게 된 것은 단지 '짱깨' 안에 든 것 말고도 꾸란이라든가 페르시아의 고전 시라든가 여러 비유럽 텍스트들 모두를 통해서다. 괴테가 거기서 <겐지노모노가타리>를 언급했으면 어쩔뻔 했냐, 너희들은.
괴테가 세계문학을 말하면서 예로 든 작품이 과연 <호구전>인지 아닌지는 현재 내 수준에서는 정확히 가려낼 수는 없다. 어쨌든 간에, 어떤 이는 그게 <화전기(花箋記)>라고 하고 어떤 이는 <옥교리(玉嬌梨)>라고 하고 있다. 아무튼, 유럽에서 <호구전>은 1766년에, <화전기>는 1824년에, <옥교리>는 1826년에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 셋 모두, 보통사람은 겪기 어려운 기묘한 애정 관계를 다룬, 명말청초의 소위 재자가인 소설이다. 아마도 이 소설들은 18세기에서 19세기 초에 광동 지역에 접근한 유럽인들(처음에 온 사람들은 아마도 상인들)에 의해서 유럽으로 전파된 듯하다.
물론 나는 이 셋 모두 읽어보지를 못해서 그것들이 <금병매>보다 문학적으로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홍루몽>보다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제재와 그 제재를 다루는 태도라는 점에서 이 재자가인 애정소설들이 <금병매>와 <홍루몽>이 이루는 커다란 서사 사이클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또한, <홍루몽>의 갑술본 초본이 간행된 것은 <호구전>이 유럽에서 간행된 1766년보다 이전이었으므로, <호구전>과 비교할 때, <홍루몽>이 유럽에 더 먼저 전해질 수 있었던 형식적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황씨 등은 '아마도'라는 부사로 한정하기는 했지만, <화전기>나 <옥교리>보다는 훨씬 앞서서 유럽에 소개된 <호구전>을 예로 들고 있다. 경박한 내 머리로는 황씨 등의 의도가 아주 금방 쉽게 이해된다. 그들은 중국문학사의 작품이 유럽에 전래되어 그것이 괴테에게 영향을 미친 시기를 가능한 한 앞당기고 싶은 것이다. 세계문학의 형성 시기를 늦추고 싶었듯이.
그러나, 괴테가 세계문학을 말할 때 정작 마음 속에서 간절히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유럽문학'이라고 나는 감 잡고 있다. 그런데, 그 유럽문학이라는 것은, 그리스나 라틴의 고전문학이나 괴테의 동시대 직전까지 프랑스문학이 지녔던 문화적 헤게모니가 주는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나서 바야흐로 독일문학을 승격, 포섭시키려고 했던 한에서의 바로 그 유럽문학인 것이고, 이 과정에서 비유럽의 여러 텍스트들은 단지 조연이나 엑스트라 수준에서 등장한 것이라는 게 내 '통박'이다.
특히, 유럽에 번역된 <화전기>에는, 설화 등에서 전래된 여러 전설적 미인들의 목각판화 카탈로그인 <백미신영(百美新詠)>이 도판 이미지는 빼고 글 부분만 번역되어 부록으로 달려 있다. 또 바로 그 뒤에는 청나라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 그리고 중앙 부서의 재정에 관한 사항이 부록으로 달려 있다. 헛, 여자와 돈이라니!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에게는 이게 오리엔탈리즘 판타지의 전부가 아니던가(http://archive.org/details/chinesecourtshi00thomgoog).
아무튼 이 중국 미인들 얘기에서 푹 빠졌던 괴테가 시 몇 편을 짓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이 얘긴 중국에서 1930년대 초에 이미 알려졌다. 임춘성 책의 독자들이라면, 이 시들이 로맨티시즘/에로티시즘과 오리엔탈리즘이 전형적으로 결합한 소산이라는 것을 굳이 사족으로 달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판보췬 얘기도 별로 어려울 건 없다. 다만, 내가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은 왜 소위 통속'문학' 작품들만이 중국 근현대문학 안에 들어가야 하는가다. 양달(楊達)이 일본어로 쓴 작품은 왜 중국 근현대문학사 안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가? 임소(林昭)의 혈서는 왜 문학 작품이 아닌가? 고준(顧准)의 일기는 왜 중국 근현대 문학의 날개가 될 수 없는가? 푼왕(Phuntsok Wangyal, 平措汪杰)의 자서전은 왜 또다른 날개가 되지 못하는가? 결국 이러한, 한국 80년대식의 프로메테우스적 물음에 제대로 답하고자 한다면 중국 근현대문학은 두 날개로 나는 새가 아니라 수십 개의 촉수를 지닌 에어리언이나 여러 개의 목을 가진 히드라로 표상되어야 한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관점이나 오리엔탈리즘의 비판이라는 입장에서 냉정하게 본다면, 결국 괴테의 세계문학 논의에서 중국문학 작품이 부차적으로 끼어들어가는 것이 정작 중국문학 입장에서는 자랑할 일은 결코 아니다. 아무튼, 그 이전까지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 자국 문학을 소위 세계문학 안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괴테가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황씨 등은 중국문학에 대해서 하려고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서 임춘성 책의 미덕이 드러나는 셈인데, 임춘성은 바로 황씨 등의 이러한 프로젝트에서 타자화되고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비판적으로 다루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3. 차 여러 잔 마실 시간이 지났으므로, 이제 임춘성과의 보스전을 치뤄야 한다. 사실, 이건 자신 없는 분야다. 내가 익힌 무공이래봤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은 능파미보(凌波微步)와 동귀어진뿐이기 때문이다. 동귀어진은 엄밀히 말해서 무공이랄순 없는 일종의 전술인 거고, 능파미보도 구결로만 알고 있는데다가 얼마 전에 생긴 오른쪽 아킬레스 건 염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저자와 독자가 겨룰 때 결국에는 독자가 유리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냐면, 어느 책이든 독자는 읽어나가면서 그 전에는 전혀 몰랐던 외공들을 두루 익힐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 독자야말로 흡성대법(吸星大法)의 대가인데, 바로 그 흡성대법으로 저자 평생의 내공을 죄다 빨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서는 저작이나 집필보다 즐겁고 쾌락적이다. 읽기가 쓰기보다 더 좋고 낫다.
임춘성이 잘 쓰는 비평적 용어로 '두꺼운 텍스트'라는 게 있다. 그는 김용 소설들과 왕안이의 <장한가>의 분석에서 이 개념을 쓰고 있다. 그는 미국 인류학자 기어츠로부터 이 개념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임춘성이 밝히는 사문 내력에 의하면, 임춘성의 사조, 그러니까 기어츠의 사부는 철학자 길버트 라일이라는 것이다. 기어츠는 '두꺼운 기술(thick description)'이란 개념을 라일로부터 빌어 왔고, 임춘성 자신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의미구조를 가진 텍스트를 '두꺼운 텍스트'로 상정하고, 그런 텍스트가 가지는 문화적 함의를 '문화적 두꺼움'으로 명명하고자 한다"는 것이다(253쪽). "그렇다면" 하고나서, 나는 속으로 외친다. "쫄지마, 별 거 아냐"
'두꺼운 기술'이란 개념은 영미의 1960년대 분석철학이나 1970년대의 인류학과 같이, 그 전까지는 아주 팍팍하고 삭막한 행동주의적-실증주의적 동네, 그러니까 산해관 바깥에서야 그럴듯하게 통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복합적인 의미연관 혹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맥락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수백년 전부터 '구라파'(임춘성이 싫어하는 바 동방불패류의 바늘이닷!)에 있었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철학 분야에서는 해석학, 그리고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이해의 사회학'쪽에서 많이 했던 얘기다. 또 외국문학 연구 쪽에서는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되, 중원의 문학(비평)판에서는 아주 흔하게 떠돌던 식상한 얘기다. 이런 당연하고도 초보적인 무공을 상대가 여러 번 되풀이해서 자주 쓸수록 초식 대결은 더 편하다. 뒷짐 지고도 다 막아낼 수 있으니까.
물론 임춘성의 사부가 기어츠 하나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강호 무림과 서역 등의 변방 에서 임춘성은 온갖 기연을 겪고 기인을 만났다. 그 중에는 포모파의 고수들, 포콜파의 고수들, 그리고 동아시아 담론파의 고수들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굳이 사제지간의 법도와 예 없이도 춘성에게 무공을 전수했다. 춘성은 '타자화' 비판이라는 무공을 포모파의 복가(米歇尔·福柯) 선사에게 배웠다. 중국 근현대사상사파(개방파?)의 개조 이택후는 실용이성이라는 무공을 동파육 한 접시와 바꿔서 춘성에게 가르쳤다. 실용이성은 남을 쉽게 이기기도 힘들지만 남들에게 쉽게 지지도 않는 그런 무공이다. 예컨대 오늘날 중국 바둑 기사들의 공통된 기풍처럼 말이다.
두꺼운 기술이라는 무공이 별 거 아님에도 불구하고 춘성이 크게 다치지 않고 강호를 떠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실전에서 여러 고수에게서 배운 다른 무공들을 섞어 썼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춘성의 기골이 장대한 데다가(그의 장딴지 굵기를 보라!), 십 몇 년 전에 김용 소설들을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임독 양맥이 트인 뒤로는 누구와 대련하더라도 싸우면서 바로 그 사람의 무공을 조금씩 훔쳐배워서 두루 쓰는 바의 재주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임춘성이 사귄 고수들 중에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은 문파인 포사파에 속한 이들이 있다. 포사의 정식 명칭은 포스트사회주의다. 포사파는 문화대혁명이 종료되고 중국 대륙이 대놓고 자본주의로 회귀, 전환하면서 생겨난 문파인데, 원래 이 문파는 '신시기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신시기 문학이란 말이 굉장히 엉성하고 애매하기 때문에 문파 이름을 바꾼 것이고 그 뒤로 크게 문파의 세를 떨친 것이다. 포사파의 무공은 '독고구검' 같은 것이어서 본디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고 자본주의로 회귀, 전환해버린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정해진 초식 없이 모든 유형의 초식을 이기는 것이다. 임춘성은 포사파의 무공 심결을 바탕으로 해서 포모파, 포콜파, 동아시아 담론파, 중국 근현대문학 연구파의 무공을 종합해서는 중국 근현대문학사 새로 쓰기를 평정하려고 하는 바의 원대한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 평정의 한 시도가 바로 이 책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중국 근현대문학사 연구라는 정파와 문화연구라는 사파를 아우르면서 개최한 무림대회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무림대회에 독자-구경꾼으로서 참석한 셈이다. 나로서는 각주나 참고문헌의 무림첩에 나와 있는 이름들과 비급 목록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게 많았다. 인명 색인에 나와 있는, 초청된 무림 인물들 숫자만 해도 300명이 넘는다. 총 13과장으로 이루어진 이번 무림대회에서 매번 임춘성은 위명이 쟁쟁한 무협들과 각 문파의 장문인급 고수들로 하여금 서로 초식 대결을 시키고난 다음에야 자기 무공을 슬쩍 펼쳐보인다.
무림대회의 회주답게 임춘성은 초청된 세계적인 무협들을 독자들에게 잘 소개해준다. 무협들의 이름과 그들의 무림비급, 그리고 무협들의 주요 내력과 은원관계와 무공의 핵심 비결을 간결하게 잘 정리해주고 있다. 이번 무림대회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도 많다. 예컨대, 황씨 등이 '20세기 중국문학' 개념을 내세우면서 그 기점을 1898년(무술!변법)으로 내세웠다는 것, 또 판씨가 "고대문학의 노선에서 근현대문학의 노선을 환승하는 지점"이 바로 <해상화열전>(1892)라고 주장한다는 것 등이다.
정파 쪽에서는 무명소졸이지만 녹림 쪽에서는 좀 놀던 나로서는 의심스러운 게 하나 있다. 과연 회주 임춘성은 과연 과두문자로 된 비급 <해상화열전>을 읽어보기는 했는지. 미리견합중국(美利堅合眾國)에서 사망한 여협 장애령이 일찍이 이 비급을 중원의 만다린어로 번역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번역된 비급을 읽는 것은 우리는 읽은 거로 쳐주지 않는다. 일찍이 '협객행'을 해본/읽어본 우리로서는 과두문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몸으로 읽어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과연 그 비급을 직접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졸립고 지루한 건지가 매우 궁금하다는 건데, 아무튼 책 뒤 부록의 판보췬의 글은 사실 내 입장에서는 영화 <해상화열전>보다 훨씬 더 지루했다.
4. 다시 '두꺼운 텍스트'로 돌아가서 말한다면, 텍스트 자체에 두껍고 얇은 게 있는 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두꺼운 기술이라는 개념에서 두꺼운 텍스트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고 쓰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고 권장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두껍든 얇든, 기름지든 퍽퍽 하든, 복합적이든 단순하든 간에, 어떤 대립적이고 이원적인 규정을 통해서라고 할지라도, 텍스트 자체에 귀천이 있다는 식의 접근은 본디 '문화연구'의 정신이랄까 태도에는 반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근대국가를 단위로 한, 그것도 근현대의 문학사의 서술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소위 정전 개념 자체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정전 개념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까탈스런 입장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할지라도 말이다. 문학사 서술에서 대표적인 작품을 예시적으로 열거하거나 설명하는 행위 자체가, 더 무언가 정전에 속하는 듯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임춘성이 '두꺼운 텍스트' 개념을 만들어 내고 이 개념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한 것은, 한편으로는 문학사 서술에서 불가피한 바로 그 정전 개념의 난점을 우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컨대, 문화연구 분야에서 잘 알려진 바르트 식의 텍스트 이분법(lisible vs. scriptible)의 엘리트주의적 성향도 일정하게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핵심은 임춘성이 두꺼운 텍스트로 분류한 작품들이 과연 어떠한가가 문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이 책에서 임춘성이 공들여 다룬, 김용의 소설들, 가오싱젠의 소설, 왕안이의 소설이 중국 근현대문학사 연구 및 포사 문화연구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임춘성 자신의 연구나 비평이 두껍게 이루어진 결과로서 획득된 것이지, 그것들 자체가 두꺼운 텍스트였기 때문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오싱젠과 왕안이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 적어도 왕안이의 작품은 기회가 닿으면 꼭 읽어보고 싶다는 느낌을 이번 기회에 가지게 되었다. 왕안이 작품에 대한 임춘성의 연구-비평적 디스크립션은 두텁게 성공한 것이다. 한편, 나는 가오싱젠의 작품에는 끌리지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바로 임춘성의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원래 이런 류의 서사물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가오싱젠은 그 자체로 매우 지겹고도 싫다. 노벨상을 탔다고는 하지만 내게는 그다지 노벨스럽지 않다.
임춘성의 경우, 전반적으로 각 글들의 많은 분량이 해당 분야, 그러니까 여러 '문파'들의 선행 이론이나 연구나 비평의 소개에 할애된 것은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다 갖는다. 대학 상급생이나 대학원의 연구 입문자에게는 필수적인 배경 지식을 선별, 요약해서 알려준다는 점에서 아주 긍정적일 것이다. 아무래도, 중국문학 연구자들에 대한 과거의 내 선입견 내지는 편견에 의하면 특히 그렇다. 문화연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중국문학 연구자들이 무식 내지는 무지하다는 게 과거의 내 견해였다. 물론, 최근 몇 년 사이에 내가 읽어본, 중국 문학연구 분야의 글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기는 하다.
나쁜 점은 선행 이론이나 연구나 비평에 대한 상당 분량의 요약이나 설명, 혹은 더 나아가서 이런 것들끼리 서로 토론시키는 바의 소위 다성적 접근은 그것 자체로 힘이 부치고 지면을 많이 잡아먹는 법이라서 그런지, 정작 임춘성 자신이 자기의 목소리로 논해야 할 대목에서는 싱겁게 끝나버린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특히, 타이완과 홍콩에 관한 글이 심했고, 제일 실속이 없는 글은 중국 근현대문학 연구 성과를 개괄한 제13장이었다.
다른 이들의 견해에 대한 소개 및 요약이나 설명 등이 많다는 것은, 달리 이해하자면, 그 만큼 중국 근현대문학사 연구에 임할 때 문화연구에 아주 친화적이라는 임춘성의 입장이나 관점 자체가, 한국에서 이뤄지는 중국 근현대 문학사 연구 및 서술의 장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타자화되어 있다고 임춘성이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곰곰이 따지고 본다면, 문학 분야에서든 그 밖의 다른 분야에서든 '근현대'의 형성이라는 것은 담론적으로 보아서 소위 타자화의 메카니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것은 어느 국민국가에서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이런 소개 등에서 힘을 빼버려서 정작 제 이야기는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랑은 이번의 이 책으로 충분한 듯싶다. 앞으로는 두텁든, 깊든, 꼼꼼하듯, 섬세하든 간에 임춘성 나름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
타자로 배제되었거나 억압된 작품들을 문학사에서 발굴해내는 일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배제되었거나 억압된 작품들을 중심에 놓고 말한다면, 문학사라는 것은, 정전을 중심으로 한 영광스러운 만신전이 아니라 결국 일종의 버려진 낡은 묘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버려져서 터만이 남은 옛 묘지에서 묘비명도 없이 묻힌 작품들을 찾아내서 그것을 조심스레 이장하거나 안장하는 행위는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다. 문학사적 유골 파편을 정밀 감식하는 일은 연구자 자신의 개성적인, 동시에, 임춘성 자신의 표현을 빌면, 두꺼운 비평적 실천의 목소리에 의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비평적 실천은 결국 일종의 굿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무당-연구자의 목소리와 죽은 저자-텍스트의 목소리를 동시에 듣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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