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장뤼의 영화미학

ycsj 2012. 1. 22. 17:10

 

장뤼의 특이함은 그의 독특한 영화문법에서 드러난다. 대담자와 인터뷰어들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들은 난해한 영화문법과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평론가나 관객이 장뤼 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특히 최근 영화 두만강(豆滿江. Dooman River)(2010)의 경우 옌볜(延邊) 지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학습이 선행되지 않으면 영화를 따라가는 데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장뤼의 미학적 태도다. 자신은 미학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찍는 데 미학이 없을 수 없다. 그의 기본적인 미학은 왜곡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감정을 따라가 진실한 모습을 찍는 것이다. 장뤼는 이렇게 표현한다.

 

영화는 어차피 감정을 따라가도 그 감정에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거리를 두면 크게 왜곡되지 않아요. 그런데 감정만 따라가면 왜곡될 위험이 제일 커요. 그래서 내 감정을 따라가다가 그래도 내가 바보가 돼버리면 안되잖아요. 그걸 지키는가, 못 지키는가 하는 게 중요해요.

 

감정을 따라가되 냉정하게 거리두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감독의 감정선은 카메라의 시선 및 인물의 동선만큼이나 중요하다. 특히 장뤼는 이 감정선을 가장 중시한다. 그의 영화의 모든 출발점은 바로 이 감정선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성일에 따르면 그의 시나리오는 간결하다. 나머지는 촬영 당일 대본을 주거나 현장에서 지시한다. 아니면 기본 콘셉트만 알려주고 연기자에게 맡기기도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감정을 왜곡하지 않는 진실함이다. 그러기에 그는 세트를 쓰지 않고 자신의 감정선을 따라 인물의 진실성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다닌다.

 

내 진실한 감정을 찾는데 내 마음에 맞는 공간을 찾았을 때를 보면, 아 이게 진짜 생활이다, 하는 공간이어야 돼요. 이게 지금 우리 사는 모습이다, 하는 걸 본능적으로 찾아요. 내 마음에 드는 공간이 썰렁하더라도 거기 인물이 진실하면 거기서 찍어요.

 

할리우드 영화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장뤼의 영화는 쉽지 않다. 현실을 뛰어넘어 가상의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관객들에게 장뤼의 영화는 현실의 삶을 뛰어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감독의 미학을 연기자가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기에 그는 출연자들에게 과장을 경계하는 통제된 연기를 요구한다.

 

내 스타일은 세월이 지난다 해도 이것이 진실과 관계가 되는가, 되지 않는가 하는 거지요. 그래서 나는 배우들에게도 연기를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고, 거기에 아직도 집착해요. 세월이 지나서 연기들이 탄로날 적에 그 영화의 이야기들이 많이 손상돼요.

 

시간의 고험(考驗)을 견디지 못하는 탄로날 연기가 이야기에 손상을 준다는 것이다. 장뤼의 연기에 대한 태도는 히치콕(Hitchcock, Alfred)을 연상시킨다. “배우는 가장 단순하게 행동해야 하고 때로 극히 중성적이어야 하며 카메라가 나머지를 알아서 해야 한다는 그(히치콕-인용자)의 엄격함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이 나머지가 바로 본질 혹은 정신적 관계항이다.” 배우의 인위적 연기보다 카메라를 통해 진짜 관계항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장뤼는 세트에서 찍지 않고 감정에 맞는 공간을 찾아다닌다. 사실 장뤼의 배우에 대한 요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들뢰즈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 연계했던 -전문직 배우와 함께 전문적인 비-배우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행동하기보다는 바라보고 또 바라볼 수 있게 할 줄 아는 배우들, 대화에 응하거나 따르기보다는 때로 침묵 속에 머물 수 있고, 또 때로는 끝없이 의미 없는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배우들, 매개체로서의 배우라 부를 수 있는 배우들이 그것이다.

진실한 감정을 따라가되 냉정하게 거리두기, 과장을 경계하는 통제된 연기, 그리고 마음에 드는 공간 찾기 등은 장뤼 영화미학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다. 그러므로 장뤼의 영화미학은 상투성(cliche)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상투성은 들뢰즈 철학의 출발점이다. 들뢰즈에게 상투성은 총체성이나 연쇄성이 부재하는 이 세계 내의 집합을 이루는 것들이다. 박성수는 상투성을 키워드로 삼아 들뢰즈의 시네마의 기획 의도를 다음과 같이 독해했다. 새로운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과 이론이 출현하지 않은 세계는 도처에서 상투성이 지배하게 된다. 우리의 내적 세계도 예외는 아니다. 이는 대안적인 이념이나 새로운 사유가 부재하는 전면적인 이데올로기적 상황으로, 들뢰즈의 표현을 빌면 질식할 것 같은 상황이다. 상투성을 벗어나려는 모든 노력이 또 하나의 상투적인 이야기 또는 내러티브가 되어버리는 상태가 바로 들뢰즈가 묘사하는 고전적 사유와 영화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투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기호 또는 이미지의 새로운 배치에서 찾으려는 것이 들뢰즈 시네마의 기획이다. 장뤼가 들뢰즈의 영화철학을 공부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상투성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와 연계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장뤼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