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장뤼] 환대와 감사의 변증법적 切合

ycsj 2012. 2. 7. 21:39

환대와 감사의 변증법적 切合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는 장뤼는 환대와 감사의 변증법적 절합을 시도하고 있다. 우선 최근작 두만강을 보자. 작년 프랑스에 이어 금년 서울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도식성또는 관념성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장뤼의 영화에서 찰나적 사실들이 일으키는 놀라운 환상의 경험들은 허다하다고 보는 정한석은 우호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탈북자의 순희 겁탈창호의 투신의 진행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필연이고자 했으나 끼어든 당위의 개입으로 인해 도식적 기호화가 작동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에 반해 남다은은 창호의 투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호가 옆으로 누워있는 첫 장면두부방 장면을 우회해야 한다면서, “두 지점에서 창호는 스스로를 죽은 사람처럼 다루거나, 혹은 그는 죽은 사람처럼 다뤄지고 있다고 평한다. 이어서 창호가 죽음의 위협에 당면한 탈북 소년들공동의 운명을 지닌 존재처럼 보인다며 창호와 정진의 관계를 되짚어간다. 사실 장뤼는 인터뷰에서 창호의 투신이 과도하고 추상적이라는 허문영의 지적에 창호와 정진이의 과정은 그 계단을 다 넘은 거예요라고 답한다. 여기서 그 계단이란 목숨을 건 약속이라는 의미다. 정진이 강을 건너온다는 건 목숨을 거는 거고, 그쪽 친구가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켰으니까 창호도 목숨을 거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밖에서 볼 때는 목숨을 안 걸어도 된다 생각하지만, 그 상황에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아주 진실하다는 것이 장뤼의 생각인 것이다. 남다은은 둘의 관계를 존엄에 기초한 교환관계로 요약한다. 둘이 처음 만날 때 촬영 방식의 분석을 통해 그들이 서로 가진 걸 부족한 것과 교환한다고 본다. “정진과 창호 사이에 쌀, 약속, 축구, 미사일 모형, 그리고 마침내 생명이 교환될 때, 여기엔 서로가 서로를 타자화하지 않으려는 부단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죽음을 중심에 두고 매번 타자의 자리로 가는 것이 영화적 활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일상적 구체성을 넘어서 감정의 물질성에 도달하려는 시도라는 평가를 내린다. 정한석보다는 남다은의 독해가 감독의 의도에 가깝다.

북쪽과 옌볜 사람들의 갈등에 초점을 맞췄다는 이 영화가 자칫 탈북 소년동포애 가득한 조선족 소년의 우정으로 전락하지 않고 세계시민적 정수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환대와 감사의 변증법적 절합이라 할 수 있다. 처음 만난 정진이 먹을 것을 요구할 때 창호는 그에 부응하고 이후 계속 먹을 것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창호에게는 동정이 없고 정진에게는 비굴함이 없다. 그렇다고 정진이 창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물적으로 감사를 표시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정진이 창호에게 감사를 표시할 수 있는 것은 몸(축구)이다. 그러기에 축구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온 것이다. 그 과정에 미사일 모형 선물은 특이하다. 남다은은 우표를 대신한 미사일을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의미장치로 독해한다. “편지의 오고 감이 아니라 한번 발사되면 돌아오지 못하고 어디선가 폭발해야만 하는 운명.이렇게 표시된 정진의 감사는 누나 사건으로 인해 증오를 가졌던 창호를 환대하고 창호는 그에 대한 감사를 생각한다. 이처럼 환대감사/환대감사의 고리는 정진의 체포와 창호의 투신으로 끝났지만 그들의 존엄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환대에 대해 감사로만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탈북 청년은 순희 할아버지가 재워주고 순희가 밥도 주고 술도 준 환대를 겁탈로 갚기도 한다. 힘들게 탈출해 나왔는데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김정일 찬양 방송을 보고 旣視感(déjà-vu)으로 인해 공황상태에 빠질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지만 그것이 꼭 겁탈로 이어져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물론 그 장면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처리한 것은 감독의 남다른 예의 표시다). 정한석은 이를 또 다른 도식이라 읽었고 남다은은 다음 단계 순희의 결단낙태, 다리 그림을 통해 고향에 대한 분열을 그리기 위한 과정이라고 읽었다.

환대와 감사의 변증법적 절합을 통한 존엄은 경계(境界. Hyazgar. Desert Dream)(2006)에서도 볼 수 있다. 탈북 모자 순희와 창호가 도착한 몽골 초원에서 항가이는 오랜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이들을 환대한다. 이에 대한 감사로 순희 모자는 항가이의 일나무 심기, 물 긷기, 말똥 줍기 등을 돕는다. ‘유사 가족을 연상케 하는 생활에서 일어난 한 사건은 장뤼의 존엄 표현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름 아닌 순희가 양을 찌르는 사건이다. 항가이의 환대에 대한 감사와 항가이의 무례에 대한 응징을 나눠 대응한 순희의 태도는 인간 존엄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장점으로 허물을 덮지 않고 그 거꾸로도 아닌 절제. 결국 순희의 절제된 태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항가이는 모자의 가는 길을 축복해주는 것(또는 그렇게 창호가 생각하는 것)으로 감사를 표시한다.

그런데 초기작 망종(芒種. Grain in Ear)(2005)에서는 환대가 거짓이다. 순희는 환대에 감사를 표시하지만 배신당하고 만다. 여기에 아들 창호까지 사고로 죽자 그녀는 복수를 감행한다. 이렇게 보면 이 글에서 보고자 하는 환대와 감사의 변증법은 볼 수 없지만, 그 궁극인 존엄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를테면 두 번의 성애 장면에서 순희의 벗은 몸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처음 환대에 대한 반응으로 조선족 김씨와의 섹스 장면에서 남성의 몸을 보여줄지언정 순희를 노출시키지 않는다. 공안원 왕씨의 성 폭행에서도 순희의 시선으로 왕씨의 벗은 몸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근데 거기서는 내 마음이 그렇게 못하겠더군요. 그렇게 어렵게 살아온 여자를 벗기기까지 하면, 내가 나쁜 놈이 된다는 생각, 하여튼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뤼에게 인간의 존엄은 궁극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