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130) 에드워드 양의 타이베이 초상화

ycsj 2011. 5. 10. 19:52

에드워드 양의 타이베이 초상화

 

 

내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영화로 타이베이시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나는 최근 타이베이에 변화가 발생한 방식과 이들 변화가 타이베이 시민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탐구하려 한다.(楊德昌語)

 

2007628일 타계한 에드워드 양(Edward Yang. 楊德昌)의 영화는 타이베이(臺北. Taipei)에 집중되어 있다. 1947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두 살 때 가족을 따라 타이완으로 건너왔고 유학기간을 포함 미국에서 11년간 머물다가 1981년 타이완으로 돌아와 이듬해 타이완 뉴웨이브(新浪潮)’를 주도하면서 홍콩, 도쿄, 로스앤젤레스를 오가며 유목민처럼 살다가 미국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영화에서만큼은 타이베이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논자들도 뉴웨이브를 함께 주도했던 허우샤오셴(侯孝賢)이 농촌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가 많은 것에 반해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도시인의 삶을 비판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두 사람은 함께 뉴웨이브를 선도했으면서도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위험한 사람들(恐怖份子 Terrorizers)을 집중 논의한 잉슝(應雄)은 허우샤오셴이 중국적이라면 에드워드 양은 서유럽적이고, 허우샤오셴이 전통과 농촌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면 에드워드 양은 현대화와 도시를 이성적으로 해부했으며, 카메라 기법에서 롱 테이크(long take) 미학을 추구하는 허우샤오셴의 휴머니즘에 비해 에드워드 양은 자각적 몽타주(montage) 사유를 추구하는 전위적 감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應雄 1990, 42). 국제적으로는 허우샤오셴의 지명도가 높지만 타이완 뉴웨이브를 추동한 선구자는 에드워드 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 사람의 스타일은 서로 다르지만 거리두기라는 공통점은 존재한다.

대륙의 몇몇 논자들은 에드워드 양의 작품을 유자(儒者)의 곤혹(困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喩群芳 2003; 楊曉林 2007). 비슷한 맥락에서 에드워드 양의 영화를 진지한 영화(誠意電影, sincerity movies)’로 간주하고 그 미학적 특징을 거대한 틀, 지성적인 카메라언어, 독립제작, 비판적 리얼리즘, 정교한 예술기교로 고찰한 쑨웨이촨(孫慰川 2004)은 에드워드 양의 핵심 모티프(Motif)를 다음의 세 가지로 본다. 첫째 현대 도시에 내장된 진정한 위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둘째, 현대 사회의 윤리 도덕 체계는 건전한가 아니면 취약하고 위태로운가? 셋째, 도시 속의 인간관계는 정상적인가 병태적인가? 이는 자본주의 또는 후기 자본주의 세계체계(world system) 내의 대도시가 직면한 보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에드워드 양의 영화에 재현된 타이베이와 타이베이인의 문제다.

유자의 곤혹이라는 문제설정은 독립시대의 영문제목(‘A Confucian Confusion’)을 징후적으로 독해한 것이다. 에드워드 양은 이 영화를 시작하면서 논어자로(子路)1장을 인용한다. “선생께서 위에 가시매 염유가 모셨다. 선생이 말씀하시길 풍족하도다! 염유가 말하길, 풍족한 연후에 또 무엇을 더하오리까? 선생께서 답하길, 그들을 부유하게 하라.(子適衛, 冉有僕. 子曰: 庶矣哉! 冉有曰: 旣庶矣, 又何加焉? : 富之.)” 논어원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번째 문답이 이어진다. “염유가 말하길, 부유한 연후에 또 무엇을 더하오리까? 선생께서 말하길, 그들을 가르쳐라.(: 旣富矣, 又何加焉? : 敎之.)” 그러나 에드워드 양은 이 구절을 생략한 채 “2천여 년 후 타이베이는 짧은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도시로 변했다(兩千多年後, 臺北在短短20年間, 變成世界上最有錢的都市)”라는 자막을 내보낸다. 이는 수사학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 하나는 감독이나 관객이 모두 두 번째 구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략한 것이고 이는 2천 년 전 공자의 가르침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다. 쑨웨이촨(2004)은 이런 전제 하에 에드워드 양 영화의 미학적 특징의 하나로 유가적 교화’-비판적 리얼리즘을 꼽았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자의 가르쳐라(敎之)”는 말에 대해 지금도 유효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긍정도 부정도 아닌 노코멘트(No comment)!’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중간적 입장도 이미 공자님 말씀에 적극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회의에 가깝다.

에드워드 양의 문제제기는 독립시대에서 나왔지만, 그에 대한 답변은 독립시대뿐 아니라 다른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말을 대신 토로하는 방식이 그 하나다. 독립시대의 청년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조차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마작의 훙위(紅魚)세계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 매 사람이 누군가가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기를 기다리고 그 후에야 그는 그 말에 따라 행한다고 하고, 하나 그리고 둘의 주인공 엔제이(NJ)는 혼수상태의 장모에게 나 자신이 한 말이 진심인지를 잘 모르겠어요라고 독백하며, 그 아들 양양(洋洋)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일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 줄래요라면서 다른 사람의 뒤통수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작가가 작중인물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고려한다면, 이들 작중인물의 언술은 그 표층과 심층, 담론과 실천의 층위를 총체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훙위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해온 아버지의 가르침, ‘사람은 사기꾼과 바보로 나뉜다라는 말을 법보로 삼아 바보의 길이 아닌 사기꾼의 길로 나간다. 그에게는 룬룬(綸綸)이 마지막에 선택한 또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 엔제이는 회사와 가정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혼란에 빠진다. 엔제이가 대표로 있는 회사는 기술혁신의 기로에서 정품과 짝퉁의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모두들 정품 기술을 원하지만 문제는 가격이다. 이런저런 투자선도 물색해보지만 이사들은 결국 짝퉁 쪽으로 기운다. 엔제이는 이 과정에서 정품 회사와의 협상에 나서지만, 동료들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한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회사 경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묵인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또한 부인과 첫사랑 애인 사이에서 갈등하기도 한다.

3세계 대도시 타이베이를 대상으로 삼았기에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냉혹(于麗娜 2002)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도시를 해부하고(馬軍驤 1990; 海天 1998) 비판(施立峻 2003)하고 반성(韋菁 1992; 楊曉林 2007)한다. 그 방식은 이성(蔣俊 2003)과 정관(靜觀)(孫慰川 2001) 그리고 논문식 서사(應雄 1990). 그리고 죽음(살인, 피살, 자살 등)을 빈번하게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본 영화 가운데 하나 그리고 둘을 제외하곤 모두 음울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마작의 엔딩 씬에서 룬룬이 마트를 만나 포옹하는 장면의 배경도 블루 톤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영화가 된 하나 그리고 둘에 어린이의 시선을 도입한 것은 에드워드 양의 새로운 희망 찾기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노라면 이전 영화의 주조였던 냉혹함과는 달리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엔제이의 가족들이 혼수상태인 장모/어머니/외할머니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평소 소통의 부재를 확인시켜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장모/어머니/외할머니의 쾌유를 빌면서 나누는 대화가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타자를 위한 행동이 자아에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따뜻하다.

그러나 에드워드 양은 낙관주의자는 아닌 듯싶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양양의 뒤통수 사진 찍기는 교화와 거리가 멀다. 그것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 다음에는? 그것은 결국 자신의 뒤통수를 본 사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