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75)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출로

ycsj 2010. 5. 10. 22:38

  현재 중국의 변화를 ‘이행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케빈 레이섬(Latham, Kevin)은 “이행이 현 중국 담론의 핵심 개념”(Latham 2002)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캐서린 베르더리(Verdery, Katherine)에 기대어 이행학의 목적론, 특히 포스트사회주의에 대한 접근이 서양식 시장 자본주의로의 가정된 이행(assumed transition)(Latham 2002)을 전제하는 것을 경계한다. 레이섬이 볼 때, 어떤 연구자들에게 중국은 소비자 혁명을 통해 시장 경제로 이행하고 있고(Chao and Myers 1998),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생 시민사회와 함께 그것은 개방적 정부와 자유민주로 가는 길에 있다(Davis 1995; 2000a) 그리고 아리프 덜릭처럼 사회주의에 대한 낙관적 전망도 존재하고 있다. 레이섬은 다양한 버전의 이행의 공통점을 “중국과 중국인들은 무엇인가로 이행중”(Latham 2002)이라고 요약했다.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민주로의 이행을 희망하고 언론인들은 언론의 자유와 더 큰 민주로의 이행을 원하며 많은 중국인들에게 이행은 단지 더 커다란 재화와 삶의 더 나은 기준으로의 이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레이섬은 이를 ‘이행의 수사학(rhetorics of transition)’이라 명명했다. 미셀 푸코의 ‘담론 공동체’를 연상시키는 레이섬의 ‘이행의 수사학’은 중국이 이행하고 있는 사실만 지시할 뿐 그 방향과 출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양의 중국 인식을 대변하고 있다.

  이에 반해 마틴 자크가 이론적으로 기대고 있는 조반니 아리기(Arrighi, Giovanni)는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Adam Smith in Beijing)』에서 “현재 진행 중인 세계 정치경제의 중심지가 북아메리카에서 동아시아로 이동하는 현상을 애덤 스미스의 경제 발전론의 관점에서 해석”(아리기 2009, 7. 이하 쪽수만 표시)하고자 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동아시아의 중심은 중국이다. 그는 부상하는 중국과 기울어가는 미국의 관계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기존 헤게모니 강국(영국)과 그 시대에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신흥 강국(미국) 사이의 관계와 비교”(432)하면서 양국 관계가 “심한 상호 적대에서 점차 긴밀한 협조로 전개되기 시작”(432)한 것에 주목한다. 이것이 “‘새로운 미국의 세기 프로젝트’의 실패와 중국의 성공적인 경제 발전이 결합된 결과, 세계 문명들 사이의 더 큰 평등성에 기초한 스미스 식 세계-시장 사회가 『국부론』 출판 이래 250여 년간 어느 때보다도 실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23) 진단을 내리는 주요 근거이다. 그러나 경제력과 군사력의 불균형으로 인해 “미국과 그 유럽 동맹국들은 군사적 우위를 이용하여 새롭게 출현한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중심들로부터 ‘보호비’를 징수하려 시도할” 수도 있고 “그 시도가 성공한다면,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세계 제국(global empire)이 나타나게 될 것”(21)이라는 우려도 접지 않는다. 이후 세계가 ‘세계 제국’의 길로 갈 것인지 ‘세계-시장 사회(a world-market society)’의 길로 나아갈 것인지는 쉽게 예견할 수 없다. “서양 중심의 세계 제국 혹은 동아시아 중심의 세계-시장 사회라는 지하 감옥(혹은 낙원)에서 인류가 숨이 막히기(혹은 행복을 만끽하기) 전에, ‘냉전적 세계 질서의 청산과 함께 찾아온 늘어나는 폭력의 공포(혹은 영광) 속에서 다 타버릴지도 모른다.’”(21-2) 그러므로 아리기가 제시하는 “신(新)아시아 시대”(the new Asian age)는 아시아와 유럽을 적대 관계로 설정하지 않고 “두 유산이 근원에서부터 교배하여 맺은 열매일 것”이라는 낙관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크리스 한(2002) 등의 유라시아 시야(Eurasian perspective)와도 상통하는 개념이다.

  국내에서도 중국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전망이 제시되고 있다. 중국 사회주의가 제국주의와 투쟁한 저항적 경험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김희교), 친사회주의적 연구를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희옥), 중국을 바라보는 반성적 시각으로서 ‘글로벌 차이나’(이종민),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야(perspective)’(백승욱),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황희경),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신영복) 등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자본주의를 소화하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양한 새로운 구성 원리를 준비하고 있는 현장”(신영복 2004)이라는 진단은 제3의 가능성을 전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수용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사회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제3의 가능성은 무엇인지? 아리프 덜릭의 도저한 낙관론과 중국의 새로운 주류이데올로기에 대한 왕샤오밍 등의 결연한 비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양자를 초월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를 칼 마르크스(Marx, Karl)의 용어로 표현하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변증법적 통일’이 될 것이고, 레이먼드 윌리엄스(Williams, Raymond)식으로 유비하자면 ‘지배적인 자본주의’와 ‘잔여하는 사회주의’ 사이에서 새로이 ‘대두하는 제3의 길’이 될 것이다. 이를 크리스 한은 ‘유라시안 시야’라 했고 조반니 아리기는 ‘아시아와 유럽 유산의 근원적 교배’라 했다. 이는 또한 ‘예술과 학문과 사회 간의 수평적 통섭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인류 앞에 ‘통제사회와 문화사회의 갈림길’이 놓여 있다는 심광현(2009)의 용법을 빌자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수평적 통섭’의 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