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사마천의 《사기》와 발분저서

ycsj 2010. 2. 22. 13:24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발분저서(發憤著書)

 

 

 

 

1.중국 고대문화사에서 사기의 지위

중국문화는 그 근원이 先秦시기에 형성되었고 대부분 그 기록이 남았다. 이른바 諸子百家

秦始皇의 焚書坑儒로 인해 기록이 훼손되었다.

계속 전해 내려온 경서가 한대에 부흥. 儒家獨尊

공식적으로 전해 내려온 경서(今文)와 발굴된 경서(古文)의 논쟁: 今古文論爭

분서갱유에서 그리 멀리 않은 시대에, 당시 금고문논쟁을 관찰하면서 그 장점을 반영->중국 고대문화사에서 커다란 호수와 같은 역할.

 

 

2.전서의 체제

1)「12本紀」: 綱領의 記載. 天下의 흩어진 옛 기록을 망라하여 역대왕조의 일어난 바를, 시작에 근원하고 끝을 살펴서 그 興亡盛衰를 관찰했으며, 史實에 입각해서 論考했다. 대략 三代를 推定하고 秦․漢을 기록하여 위로는 軒轅으로부터 아래로 當代에 이르기까지 12本紀를 저술하여 이미 조리를 세워 기록했다.

2)「10表」: 때가 같기도 하고 시대가 다르기도 하여 연대가 불분명하므로 10表를 지었다.

3)「8書」: 예악의 증감, 율력(律曆)의 개정, 兵權․鬼神․山川․天人關係에 대해, 그 쇠퇴함을 이어 변화에 통달하고자 8書를 지었다.

4)「30世家」: 28수(宿)는 북극성을 돌고 30개의 바퀴살은 바퀴통을 향하고 있어 그 운행이 무한하므로, 보필(輔弼)․고굉(股肱)의 신하들을 이에 비유할 수 있으니, 충신(忠信)으로 왕도를 행함으로써 주상(主上)을 받들었으므로, 30世家를 지었다.

5)「70列傳」: 義를 북돋우고 재기가 뛰어나거나, 시기를 놓치지 않고 功名을 천하에 세웠으므로 70列傳을 지었다.

*“모두 130편, 52만 6천 5백자로, 《太史公書》라고 한다.”

오늘날 전하는 《사기》는 사마천의 원본보다 증가되었으므로 그 중에는 후인에 의해 개작․증가된 부분이 있다

*「사기」란 원래 ‘사관의 기록’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였는데 훗날 사마천의 저작을 가리키는 명사로 쓰였다. 그 원명은 《태사공서》이다.

 

 

3.《사기》저술 동기

 

1)첫째, 부친의 유명(遺命)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司馬談)은 무제의 봉선례(封禪禮)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화병이 나서 곧 죽게 되었는데 이때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우리 선조는 주(周) 왕실의 태사(太史)였다. 상대(上代)로부터 일찍이 우(虞)․하(夏)에 공명이 드러났고 대관(大官)일을 맡아왔다. 후세에 중도에서 쇠퇴하더니 마침내 나에게서 끊어지려는가? 너는 다시 태사가 되어 우리 조상이 하던 일을 계속 하거라. 지금 천자께서는 천세(千歲)의 황통(皇統)을 이어 태산(泰山)에서 봉선례를 행하시는데, 나는 따라가지 못했으니, 이는 명이로구나, 명이야!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거라. 태사가 되거든 내가 논저하고자 하던 바를 잊지 말거라. 효라는 것은 부모를 모심에서 비롯하여, 그 다음에는 임금을 섬기고, 입신(立身)함에서 끝난다. 이름을 후세에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큰 효인 것이다. 무릇 천하 사람들이 주공(周公)을 칭송하는 것은 그가 능히 문왕․왕계(王季)의 덕을 논하여 노래했으며, 〈주남(周南)〉․〈소남(召南)〉의 뜻을 선양했고, 태왕(太王)․왕계(王季)의 사려에 통달하여서 공류(公劉)에 미치고 후직(后稷)을 존중한 것을 말함이다. 유왕(幽王; 전781~771)․여왕(厲王; 전878~842)이후 왕도가 결핍되고 예악(禮樂)이 쇠퇴해지자, 공자(孔子)는 옛것을 닦아 쇠퇴한 것을 일으켜《시》․《서》를 논하고 《춘추》를 지으니 학자들이 지금까지 그를 본받고 있다. 획린(獲麟) 이래 사백여년이 지나자 제후들이 서로 겸병하고 역사기록은 끊어졌다. 지금 한(漢)이 일어나 해내가 통일되고 명군․현신․충신․의로움에 죽은 선비들을 내가 태사이면서도 논하여 싣지 못하고 천하의 역사문을 폐하게 되어서, 나는 이를 심히 두려워하니, 너는 그것을 염두에 두거라.

 

사마담은 유언을 통해 아들 사마천이 조상의 세업(世業)을 이어받고 공자의 《춘추》를 본받아 자신의 논저하려고 했던 것을 계속하여 주기를 간절히 당부했다. 사마천은 갑작스러운 부친의 임종을 당하여 간절한 유언을 받았으므로 깊은 감동을 받고는 머리 숙여 말하기를, “소자가 불민하오나 아버님께서 정리하여 놓으신 옛 기록들을 모두 논술하여 감히 빠뜨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여, 부친의 뜻에 따를 것을 엄숙히 맹세했다. 이와 같이 부친의 유명은 사마천에게 《사기》찬작(撰作)이라는 거대한 사명감을 고취시켰던 것이다.

 

2)둘째, 춘추정신의 계승

부친의 유언에서도 공자의 정신을 계승하라고 했을 뿐 아니라, 사마천 자신도 공자를 극히 존숭했으므로, 자신의 저서가 제2의《춘추》가 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했다. 그는 상대부(上大夫) 호수(壼遂)와의 대화를 통해 공자가 《춘추》를 지은 동기와 그 대의 및 효용에 대해 차례로 설명하고, 이어서 자신의 《사기》를《춘추》와 은근히 비교했다. 먼저, 공자가 《춘추》를 지은 동기에 대해 말하기를,

 

내 듣건대 동중서(董仲敍) 선생이 말하기를, “주나라의 도가 쇠퇴했을 때 공자는 노(魯)의 사구(司寇)가 되었다. 제후들은 그를 싫어하고 대부들은 그를 막았다. 공자는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신의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알고, 노나라 242년간의 사적의 옳고 그름을 따져 천하의 의표를 삼았으니, 천자의 잘못을 깎아내리고 무도한 제후를 물리치며 참월(僭越)한 대부를 성토(聲討)함으로써 왕도(王道)정치를 실현하려 했을 뿐이다”라고 했고, 또 공자는 “나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춘추》에 기록하고 싶지만, 그것은 실제 사건의 기록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하고 명료하게 드러내느니만 못하다”라고 했다.

 

이를 살펴보건대, 주나라의 정치․사회․문화 질서가 쇠퇴했을 때, 공자는 왕도를 실현하기 위해 《춘추》를 지었던 것인데, 그 방법은 실제의 사건기록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를 확실하고 명료하게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고 했다. 사마천은 《춘추》를 “왕도의 큰 것(王道之大者)”, “예의의 대종(禮儀之大宗)”이라고 극찬했으니, 과연 공자가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마《춘추》에서 일 것이다”라고 한 것은 사마천과 같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공자가 《춘추》를 지은 의도와 《춘추》의 의의․효용에 대해 정확하고 깊은 이해를 가진 사마천은 자신도, 공자 이후 각 제후가 군대를 강화하여 다른 나라를 병합하는데 힘쓰고, 계책과 속임수가 난무했으며, 제후의 가신들이 정권을 잡고 진시황에 이르러 천하의 《시》․《서》를 불태우는 등, 혼란해진 정치․사회․문화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사기》를 저술하려 했던 것이다.

 

3)셋째, 成一家之言

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대략을 서술함에,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글을 거두어 모으고, 육경의 빠진 곳을 보충함으로써 일가의 저작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육경의 여러 주해를 합하고 백가의 잡다한 말을 정제(整齊)했으니…. (<자서>)

 

자신의 《사기》가 육경의 여러 가지 주해를 합하고 백가의 잡다한 말을 정리하여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다고 했으니, 과연 사마천의 《사기》는 최초로 중국 역사학을 창립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4)넷째, 발분저서:

 

 

4.발분저서

발분저서는 창작의 심리적 동기를 분석한 것으로,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7?)이 이릉(李陵) 사건에 연루되어 궁형(宮刑)을 받은 후 자신의 곤궁을 역대인물에 조명하여 얻어낸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이릉 사건은 사마천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사기》〈이장군 열전(李將軍列傳)〉과 《한서(漢書)》〈이광`소건전(李廣蘇建傳)〉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릉은 이광(李廣)의 손자로, 당시 이사장군(貳師將軍)인 이광리(李廣利)의 유격부대가 되어 보병 오천 명을 거느리고 진군하던 중, 흉노(匈奴)의 주력부대를 만나 선전했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8일간의 사투 끝에 흉노에게 항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武帝)가 몹시 진노하자 궁중의 신하들은 다투어 이릉의 나쁜 점을 말했다. 이때 사마천은 무제의 하문에 답하여, 이릉이 항복한 것은 불충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고, 전사하지 않은 것은 훗날 국가에 보답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제는 그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고 이광리를 깎아 내린다고 여기어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 이듬해(기원전 98年), 이릉이 흉노군을 교련한다는 오보가 전해지자 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키고 사마천을 궁형에 처했다. 이처럼 자신의 객관적 판단에 의해 이릉에 대해 이야기했으나 무제에게 오해를 받아 궁형까지 당한 사마천은 이때의 심정을 친구인 임안(任安)에게 보낸 〈보임안서(報任安書: 임안에게 답하는 글)〉에서 잘 나타내었다.

사마천이 처음 감옥에 갇혔을 때 “집이 가난하여 재물로 스스로를 속죄할 수도 없었고, 친구들도 구해주지 않았으며, 좌우에 친근한 사람들도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다.” 또한 “이릉은 이미 살아 항복하여 가문의 명예를 무너뜨리고 사마천 자신은 잠실(蠶室)에 들어가 궁형을 받아 다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자” 극도의 정신적 타격을 받는다. 평소에 공자(孔子)와 같은 ‘청운지사(靑雲之士)’가 되고자 했던 사마천이기에 치욕적인 형벌을 받고는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죽음을 결심하기 앞서 냉정하게 주위 상황 및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고는 “가령 자신이 법에 매여 죽음을 당한다면 마치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한 오라기를 잃는 것(九牛一毛)과 같아 개미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또 “세상에서는 자기를, 절개를 위하여 죽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지혜가 다하고 죄가 커서 스스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마침내 죽었다”라고 평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여기에 생각이 미친 사마천은 “사람은 다 한 번씩 죽지만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泰山)보다 무겁고 어떤 사람은 기러기 깃(鴻毛)보다 가볍기도 하니, 이것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자신의 객관적 상황을 냉철히 분석한 사마천은 자신이 집필해 온 역사기록에서 저명인물의 경우를 살펴보게 되는데, 그 결과 역대 성현(聖賢)들도 대개는 역경에 처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그 고난을 이겨냈다는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옛날 서백(西伯) 문왕(文王)은 유리(囿里)에 갇혀 《주역(周易)》을 연역(演繹)했고, 공자는 진(陳)과 채(蔡) 사이에서 위험을 당하여 《춘추(春秋)》를 지었으며, 굴원(屈原)은 추방되어 《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실명하여 《국어(國語)》가 있었으며, 손자(孫子)는 다리를 잘리고 병법을 논했으며, 여불위(呂不韋)는 촉(蜀)땅으로 옮겨져 세상에 《여람(呂覽)》을 전했으며, 한비(韓非)는 진(秦)에 갇혀 〈세난(說難)〉․〈고분(孤憤)〉을 지었고, 《시(詩)》3백 편은 대개 성현들이 울분을 나타내어 지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마음속에 울결(鬱結)한 바가 있어 자신의 뜻을 소통할 수 없었으므로 지난 일을 저술하여 후세 사람을 생각했다.(<태사공자서>)

 

문왕․공자․굴원․좌구명․손빈(孫臏)․여불위․한비자․《시경》의 저자들이 매우 힘든 역경을 당하여 마음속에 맺힌 바가 있고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는 상황에서 절실한 감정을 책에 나타내어 후세 사람을 계시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사실 사마천이 발분저서의 예로 든 인물 중 공자의 경우는 진과 채 사이에서 위험을 당한 일과 《춘추》저작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으며 여불위․한비자의 경우에도 곤궁을 당한 것과 발분저서의 시기가 도치되어 있고, 《시경》의 경우도 발분하여 지은 작품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대개가 발분하여 지어졌다는 것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중심사상인 “마음속에 울결한 바가 있어 자신의 뜻을 펼 수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저술하여 후세 사람들을 생각했다”라는 것이므로, 예를 잘못 든 것은 중심사상의 성립에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서〉에서 발분저서설을 피력한 사마천은 〈보임안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뿐만 아니라, 《사기》내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러나 우경(虞卿)이 곤궁하여 근심하지 않았더라면, 역시 책을 지어 스스로 후세에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굴원이 《이소》를 지은 것은 대개 원망으로부터 생겨났다.

 

이와 같은 발분저서설은 사마천의 직접체험에서 우러나온 절실한 것으로, 그가 궁형을 당한 후 “창자가 하루에도 아홉 번씩 굽이치며, 집에 있으면 홀연히 무엇을 잊어버린 듯하고, 나가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이러한 부끄러움을 생각할 때마다 등에 땀이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을 때가 없다”는 치욕을 감수하면서 마침내 《사기》를 완성했으니, 《사기》는 그가 발분저서한 결과로 이룩된 산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마천의 발분저서설은 창작의 심리적 동기를 표출해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만하며, 후대의 문인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니, 동한(東漢) 환담(桓譚; ?~AD 25년?)의 ‘賈誼不左遷失志則文彩不發’, 당(唐) 한유(韓愈; 678~824)의 ‘불평즉명(不平則鳴)’, 송(宋) 구양수(歐陽修; 1007~1072)의 ‘궁이후공(窮而後工)’ 등은 사마천의 발분저서와 맥락을 같이하는 문학이론들이라 할 수 있다.

 

사기 원문: http://chinese.dsturgeon.net/text.pl?node=47092&if=gb

한글 번역문 http://giant.x-y.net/sagi/sa_letter1.htm 참조.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EC%82%AC%EA%B8%B0_(%EC%97%AD%EC%82%AC%EC%84%9C)